어렴풋이 정신이 들어 눈을 뜨자 천장의 뿌연 형광등 불빛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온몸이 꼼짝 못하도록 결박되어 침대에 눕혀져 있다는 걸 깨닫는 데에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워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방 안 전체를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일단 보이는 범위 안의 방은 극단적으로 단순한 구조였다. 온통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의 한가운데 나와 내가 누워 있는 침대가 방 안에 있는 사물의 전부였다. 이 극단적인 단순함은 까닭 모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아직도 이물감이 느껴지는 뻑뻑한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올리고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한동안 머릿속이 하얀 백지인 양 어떤 것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대신 머리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뒤로 젖히듯이 최대한 밀어 올리며 눈을 치켜뜨자 하얀 붕대가 간신히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에 붕대가 감겨 있었던 것이다.
왜 머리에 붕대가 감겨 있을까. 나는 움직여 보려고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하지만 압박 붕대가 팔과 다리, 심지어 머리와 손가락까지 단단히 조이고 있어 거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대체 여긴 어디고, 나는 왜 이렇게 묶여 있을까. 나는 한 번 더 몸을 꼼지락거리며 끙끙대다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신체 중 오직 입만은 자유로웠던 것이다.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거기 누구 없어요? 이봐…….”
크게 고함을 치던 나는 갑자기 다리 아래쪽에서 낯선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자 무언가에 입이 틀어 막힌 것처럼 급작스럽게 소리를 삼켰다. 방 안에는 나를 제외하고 한 사람이 더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많은 사람이 내 시야 밖에 있는지도 몰랐다. 어쨌건 내 다리 아래쪽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까.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사내가 무표정하게 물었다.
“대체 여긴 어딥니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예. 나는……”
“말씀하시죠.”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아요. 왜…… 그렇죠?”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 물었다. 사내가 말없이 날 응시하더니 팔을 들어올렸다. 뜻밖에도 그의 손에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치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그가 말했다.
“환자가…… 깼습니다.”
흰 가운을 입은 사내가 내 동공을 뒤집어 조그만 손전등으로 살폈다. 그의 가슴에는 ‘신경정신과 전문의 김명철’이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예.”
사내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내가 말했다. 그는 최소한 의사는 아니었다. 옷차림도 그렇지만 분위기로 보아 그런 직업을 가질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인상이 거칠었고 의사와 달리 몹시 초조해 보였다.
“사진을 보여 주면 어떨까요?”
“글쎄요. 자칫 정신적 충격이라도 받게 되면…….”
“보여 주십시오! 무슨 사진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은 갑작스런 내 말에 놀라는 기색이었다.
“보여 주십시오. 나도 내가 왜 여기에 이렇게 있어야 하는지 몹시 궁금하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정신적 충격을 받건 말건 나는 일단 내가 누군지, 왜 여기에 누워 있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으니까. 가장 두려운 건 머리의 상처로 인해 기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두 사람이 날 혼자 두고 다리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둘이 뭔가 상의하는 듯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린 후 다시 옆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위치가 바뀌었다. 사내가 아까 의사가 앉았던 내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사진 몇 장을 꺼내 들고 말했다.
“지금부터 사진을 한 장씩 보여 줄 테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해요.”
그러면서 그는 첫 번째 사진을 보여 주었다. 사진은 어느 집 거실을 찍은 것이었다. 그 사진 한 장으로 모든 것이 떠올랐다. 나는 비로소 잠에서 깬 사람처럼 분명한 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 거실이군요.”
사내가 물었다.
“확실합니까?”
“예.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진은 굳이 보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고 몸서리를 쳤다. 비로소 모든 기억이 또렷이 떠올라 진홍색 물감처럼 머릿속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재차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나는 여전히 그들이 왜 나를 이런 식으로 침대에 묶어 놓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물론 그가 들고 있는 사진이 어떤 것인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사내는 형사다. 내가 이렇게 누워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기억은 의식의 아주 얕은 지점에 있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은 것 같다. 두 사람은 내 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게 기억나십니까?”
“예. 확실하게.”
“그럼, 좀 들려주시겠습니까?”
“어디서부터요?”
“기왕이면 저희가 알아듣기 쉽게, 또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그러죠.”
나는 담담하게 대답하고 천천히 의식의 시간을 되돌렸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래. 그날이 좋을 것 같다. 아내가 늦게 들어온 바로 그날.
*
아내가 화장대 앞에 앉은 지도 벌써 30분이 넘어가고 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 코, 입술, 어느 곳 하나 허술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공을 들이는 중이다. 그렇게 봐서인지 화장은 날로 세련되고 짙어지는 느낌이 든다.
석 달 전 보험 설계사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아내는 결혼 전이나 결혼을 하고 난 지난 10년 동안이나 단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여자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아내와 난 대학을 졸업하기가 무섭게 결혼식부터 올렸다. 당시 학교에서 퀸카로 통하던 아내를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던 내 조급증의 결과였다.
미인은 용감한 자가 차지한다고 했다. 그런데 내겐 어딜 봐도 그런 용기는 없었다. 그런데도 아내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건 대단히 운이 좋았거나 그녀가 뭘 몰랐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아내가 날보고 첫눈에 반했거나 하는 따위의 감정을 가졌던 건 더 더욱 아니다. 그냥 대학 4년을 붙어 다니다 보니 편해서였다는 게 유일한 결혼의 이유였다. 일면 이해는 가면서도 내겐 왠지 허전하고 부족함이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어쨌건 누가 봐도 아내는 내게 과분해 보이는 여자였다. 남자는 능력이고 여자는 외모라는 오래된 금언을 들추어 본다면 말이다.
“늦지 않아?”
“이제 나가야지.”
아내는 한숨과 함께 얼굴에 파운데이션을 몇 번 더 토닥거리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늦어?”
“응. 저녁에 강습이 있어.”
“강습?”
“현주라고 작년에 보험왕 먹은 아줌만데, 오늘 우리 지점에 잠깐 들러서 노하우 강의한대. 들어 봐야지. 그 여자는 어떻게 그렇게 실적을 많이 올렸는지.”
“얼마나 늦는데? 저녁 먹고 오나?”
“글쎄. 가 봐야지. 이따 전화할게.”
화장을 끝낸 아내는 옷장에서 옷 몇 벌을 꺼내 이것저것 대보다가 비교적 짧은 길이의 치마 정장을 골랐다. 아내가 입고 있던 바지를 벗은 뒤에 검정색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으로 발끝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스타킹을 올려 신고 다시 그 위에 정장을 입는 모습을 나는 침대 이불 속에 누운 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타이트한 정장으로 감싸인 아내의 몸매는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싱싱한 탄력이 느껴졌다. 동네 할인 마트에라도 함께 가면 나는 어김없이 아내의 몸을 더듬는 수컷들의 끈끈한 시선과 마주친다. 그들은 재빠른 곁눈질로 아내의 몸을 훔쳐보거나 아내에게서 마치 페로몬 향이라도 나는 것처럼 코를 벌름거린다.
나는 그들이 아내를 보며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이미지를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때로는 대놓고 노골적으로 입맛을 다시는 놈들도 있다. 그들은 남편인 나의 존재조차 무시하고 아내에게 음란하고도 집요한 눈길을 보낸다.
물론 그래 봐야 놈들이 할 수 있는 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더럽고 저급한 상상을 만들어 내는 정도가 전부일 테지만, 나는 아내에 대한 그런 정신적 겁탈조차 쉽게 용납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어떻게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고통받는 건 나 자신이다. 나는 저급하고 더러운 그들의 불쾌한 욕망 때문에 고통받는다. 그건 아마도 결혼 전 아내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나의 강박관념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옷을 모두 입은 아내가 거울 앞에 서서 두 손으로 엉덩이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정장이 피부에 밀착되며 그 아래로 속옷 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순간 나는 그런 아내를 침대에 쓰러뜨리고 육감적인 다리 선을 더듬어 스커트 속으로 파고들고픈 맹렬한 충동이 솟구쳤다. 아내는 내 것이니까 정말 하고 싶다면 회사에 좀 늦는 것 따위는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속옷 안에서 빠르게 부풀어 오르는 남성을 주물럭거리며 마치 남의 여자를 탐하듯, 아내를 보며 다른 수컷들이 했던 것처럼 욕정에 사로잡혀 숨을 헐떡였다. 아내는 타이트한 정장을 입은 탓에 움직일 때마다 몸매가 육감적으로 도드라졌다.
“진희야!”
보통 남편들이 아내에게 누구누구 엄마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나는 아직도 아내의 호칭을 이름으로 불렀다. 거울 앞에서 마지막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아내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왜?”
정말 아내를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있을까. 나는 마치 스스로의 자존심에 내기를 거는 것처럼 맹렬한 갈등에 휩싸였다.
‘저 여자는…… 내 거야. 누가 뭐래도 나만 소유할 수 있는 내 여자야!’
“좀…… 야하지 않아?”
“뭐?”
내 질문이 좀 뜻밖이었는지 아내가 되물어왔다.
“스커트가 짧은 데다 몸에 너무 달라붙는 것 같아서.”
정장은 얼마 전 아내가 새로 구입한 옷이다. 당시 옷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데 또 옷을 산다기에 한소리 하려던 나는 갑자기 잊고 있던 서늘한 현실을 떠올렸다.
아내는 더 이상 내가 번 돈으로 옷을 사지 않았다. 아내는 내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냉소적으로 피식 하고 웃음을 흘리더니 다른 얘기를 끄집어냈다.
“오늘도 하루종일 집에 있을 거야?”
“아니, 이따가 학교 후배 만나기로 했어. 신종 자판기 사업을 하는데 전망이 괜찮나 봐. 학교 때 날 무척 따르던 놈이었는데 나하고 같이 했으면 하더라고. 만나 보고 자금이 그렇게 많이 들지만 않으면…….”
아내가 불편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말허리를 잘랐다.
“그럼, 준수는 또 정해한테 부탁해야 돼?”
준수는 일곱 살 난 아들 녀석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니던 은행이 구조조정을 하면서 명예퇴직을 당하고 나온 지난 6개월 동안, 사업을 두 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아슬아슬하던 아내와의 관계도 그 일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직장을 나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사실 반대할 상황도 아니었다. 퇴직하며 받은 돈도 사업실패로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죽어도 아내를 밖으로 내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 일이 날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는 아마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아내는 회사에 나가더라도 준수를 밤늦게까지 유치원에 맡기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내는 이제 사정이 바뀌었으니 내가 아이를 맡아야 하지 않느냐고 했다.
난 그럴 수 없었다. 언제든 다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든 아내를 다시 집으로 들어앉혀야 하니까. 그게 언제가 될지, 또 가능한 일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지만.
결국 아내는 준수를 근처에 사는 처제에게 맡겼다. 그러던 중 나는 얼마 전 우연히 아내가 처제에게 조심스럽게 이혼 문제를 상의하는 걸 듣게 되었다.
그 대화의 당사자가 나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처제는 아니었다. 동서가 의사라는 번듯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 부부는 나무랄 데 없이 금슬이 좋았으니까.
만약 그게 아내의 진심이라면 나는 절대로 아내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리고 더 이상 아내 눈치를 보며 내 감정을 숨기지도 않을 작정이다. 지난 세월 동안 나는 정말로 최선을 다했는데 아내가 그걸 몰라주자 끔찍한 배신감이 찾아들었다.
‘만약 정말로 이혼을 요구한다면 진짜 남편 잘못 만나는 게 어떤 것인지 보여 주지. 내가 당신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겠어!’
아내가 다녀오겠다는 말도 없이 현관문을 나서자 나는 그제야 침대에서 빠져나와 베란다로 나갔다. 그러곤 밖으로 나온 아내가 빨간 승용차에 올라타고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모습을 늘 그렇듯 착잡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오늘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널 건드릴 거다. 그리고 왜 요즘 날 피하는지 이유를 물어볼 거다. 반드시! 이젠 더 이상 네 눈치 보며 살지 않을 거야.’
아내의 몸에 손끝 하나 대보지 못한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운동복 차림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아이와 씨름하는 아내에게 지금과 같은 맹렬한 성욕을 느낀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요즘 정말로 아내의 몸을 탐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어쩌면 곱게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은 아내의 모습에서 다른 여자를 느낀 것인지도 모르고 아내의 처녀 시절을 떠올린 것인지도 몰랐다.
신혼 첫날밤, 나는 밤이 새도록 진희와 섹스를 했다. 결혼 전 번번이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트는 바람에 늘 헛물만 켜고 집으로 돌아와 자위로 격정을 풀어야 했던 내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얼마나 가지고 싶었던지 집요하고 광적으로 진희의 몸을 탐했다. 나는 연애 시절 진희를 만나면 어떻게든 그녀를 가질 생각에만 골몰했던 것 같다. 그만큼 아내는 남자의 마음을 흔드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아내가, 진희가, 나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곱게 화장을 하고 집을 나갔다. 어쩌면 그 두려운 진실이 나의 욕정을 불러일으킨 진짜 이유인지도 몰랐다. 아내를 둘러싸고 있을 발정 난 수컷들만 떠올리면 광기 같은 분노와 욕정이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직장에 나간 처음 한 달 동안 아내는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힘들고 지쳐 보였다. 하지만 두 달째 접어들며 그녀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불과 두 달째인데 실적도 많이 올랐다며 들뜨기까지 했다. 그리고 실제로 꽤 많은 월급을 타 왔다.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대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사회생활이라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아내가 그토록 쉽게 일에 적응하고 오히려 남보다 앞서 가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아내처럼 내성적이고 심약한 여자가 두 달 만에 그토록 많은 실적을 올리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뭔가 잘못된 거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발정 난 수컷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품고 겉으로는 번지르르한 개기름을 흘리며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그들의 더러운 호의가 없었다면 그런 일은 불가능한 것이다. 처음 그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을 때 나는 두려움과 초조함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초인종이 울린 건 밤 10시경이었다. 나는 아내인 줄 알고 부리나케 달려 나갔지만 정작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준수를 업고 있는 처제였다.
“언니 아직도 안 왔어요?”
처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응.”
나는 짧게 대답하고 처제에게서 준수를 받아 안았다.
“전화도 없이?”
“그래.”
“지금이 몇 신데? 그럼 형부가 핸드폰이라도 해보지 그랬어요.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그러면서 처제는 오히려 내게 힐난의 눈길을 보냈다.
“해봤어. 전화기가…… 꺼져 있더라구.”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는 나도 모르게 응어리진 것처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제야 처제가 얼른 내 눈치를 보며 말투를 바꾸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 모양이죠. 참, 준수는 혼자 동화책 보다가 잠들었어요.”
“그래? 하여간 고마워.”
하지만 말과 달리 내 목소리에는 고마워하는 감정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곧 들어오겠죠. 저도 핸드폰으로 전화해 볼게요.”
“걱정 안 해. 잘 가.”
나는 간신히 말하고 문을 닫았다. 준수를 눕히고 다시 거실에 앉아 텔레비전을 틀었지만 아무런 내용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불길한 상상이 더러운 오물처럼 서로 뒤엉켜 속을 바싹바싹 태우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집요하게 날 괴롭힌 한 가지 상상은 보험을 미끼로 술집에서 비릿한 숨결을 아내의 귓가에 뿜어대며 계속 술잔을 들이미는 욕정에 찬 수컷의 눈길이었다.
나는 결혼 전 학교 축제 때 겪었던 잊을 수 없는 불쾌한 기억을 한 가지 가지고 있다. 그날은 마침 아내와 내가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나서 서로 거리를 두고 있을 때였다.
축제임에도 기분이 좋지 않아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데 친구 녀석이 날 찾아왔다. 과 선배가 아내를 데리고 학교 앞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아내가 많이 취해 보였다는 얘기였다.
난 순간 눈이 휙 도는 것 같았다. 그 선배란 작자가 평소에도 노골적으로 아내에게 집적대던 놈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서관을 뛰쳐나가 주점으로 달려갔고, 공교롭게도 아내를 부축해 막 주점을 나오는 놈과 마주쳤다.
놈은 아내의 한쪽 팔을 들어 자신의 목에 두르게 하고 나머지 한 손은 아내의 가슴 바로 아래 겨드랑이를 끼고 있었다. 선배임에도 놈은 날 보자마자 대뜸 얼굴색을 바꿔 변명부터 해댔다. 아내를 택시에 태워주려 했다는 것이다.
택시에 태워 곱게 보낼 놈이 여자한테, 그것도 학과 후배한테 그렇게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먹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순간 난 놈의 입을 찢어 버리고 싶은 섬뜩한 충동을 느꼈다. 놈에게서 아내를 떼어내 부축하고 근처 모텔 침대에 눕힐 때까지도 아내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내는 흐트러진 옷매무새 그대로 몸을 맡기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아내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이 일었다.
하지만 곧 다른 끔찍한 생각이 끼어들었다. 아까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개자식이 지금의 나처럼 아내를 마음껏 유린했을 것이란 악몽 같은 상상.
순간 난 처음으로 아내가 처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품었다. 그리고 그 섬뜩한 의혹 앞에 맹렬한 갈등을 느꼈다. 만약 처녀가 아니라고 해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텔레비전에서 11시 뉴스가 나왔다. 나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텔레비전을 끄고 베란다로 나갔다. 서늘한 밤공기가 사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현관문을 잠근 뒤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큰길이 있는 아파트 입구에서 아내를 기다렸다. 아내의 핸드폰은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와 함께 여전히 불통이었다.
아내가 나타난 건 그러고도 한 시간이나 더 지나서였다. 처음에 나는 낯선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여자가 아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허벅지까지 드러난 허연 다리가 먼저 차문 밖으로 나왔다. 아내였다.
차에서 내린 아내가 차 안에 대고 말했다.
“고마웠어요. 태워 줘서.”
차안에서 기름기가 도는 굵은 남자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뭘, 덕분에 나도 즐거웠어. 들어가.”
나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아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내가 사내의 얼굴을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차는 문을 닫고 재빠르게 달아났다. 차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던 아내가 돌아서다 말고 깜짝 놀랐다.
“어머, 당신!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
역한 술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당황한 듯한 아내는 재빠르게 승용차가 사라진 쪽을 돌아보고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나와 있어? 준수는 어떡하고?”
나는 피가 거꾸로 도는 전율을 느끼며 간신히 대답했다.
“집에.”
“애 혼자 집에 두고 나왔단 말야?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런 줄 알면서 이제야 기어들어 와?”
“무슨 말이 그래?”
가증스럽게도 아내는 미안해하거나 죄의식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반문해 왔다. 하긴 아내에겐 본래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당돌한 면이 숨어 있었다. 신혼 첫날밤에 교태 섞인 신음을 흘리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내가 첫 남자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몰라서 물어? 지금이 몇 시야?”
“아침에 늦는다고 했잖아.”
“그런 소리 한 적 없어.”
“참 나, 아니 분명히…… 오늘 회식 있으니까 늦는다고 하지 않았어?”
“회식?”
“…….”
‘너의 가장 큰 문제는 똑똑하지도 않은 주제에 뻔뻔하다는 거야.’
나는 속이 쓰릴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참아가며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당신이 오늘 아침에 뭐라고 했는지 내가 그대로 말해 줄 테니까 똑똑히 들어! 오늘 당신네 지점에 김현주라는 보험왕 아줌마가 와서 강습한다고 했고 내가 저녁 먹고 오느냐, 늦느냐고 하니까 따로 전화 주겠다고 했어. 어때, 이제 제대로 기억이 나나?”
그러자 아내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난 지금 당신이 무슨 소릴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좋아. 집에 가서 얘기해!”
나는 아내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고 확 잡아끌었다. 그런데 아내는 내 손을 뿌리쳤다.
“아파! 대체 왜 이래?”
나는 아내를 노려보다 한 발 앞장 서서 걸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거렸다. 집안으로 들어선 나는 아내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현관문부터 닫아 걸었다. 그러고는 잡아먹을 것처럼 아내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잘 들어. 너, 아까 아침에 늦는다고 나한테 말했다고 그랬지? 근데 그런 말 한 적 없었지? 그리고 분명 강습 받는다고 해 놓고는 방금 뭐라고 했어? 회식 했다고 거짓말 했지? 또! 늦으면 전화한다고 해 놓고 전화는커녕 핸드폰까지 꺼 놓았어.
자, 이래도 몰라? 아니면 아주 끝까지 잡아뗄래? 아까 너 태워다 준 개새끼, 그 새끼 누구야? 대체 지금 몇 시야? 가정주부가 이 시간에 허옇게 허벅지 드러내놓고 술 냄새 풍기며 잘 알지도 못하는 개자식의 차에, 그것도 옆자리에 아무 생각 없이 냉큼 올라탔다고는 절대로 말 못 하겠지?
그 개새끼 누구야? 지금 그 개자식하고 여태껏 무슨 개지랄을 떨다 들어왔느냐고 묻는 거야, 못 알아듣겠어? 이래도 못 알아듣겠냐고!”
그러면서 나는 힘껏 아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아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며 허옇게 변했다.
“아프단 말야!”
아내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어깨를 주무르며 소파에 주저앉았다.
“좋아. 당신이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전화하겠다고 해 놓고 하지 않은 건 미안해. 깜빡했어.”
“내가 전화 안 한 것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왜 핸드폰을 꺼 놓았느냔 말야!”
“강습 받느라고 그랬어. 강습 받는데 당연히 핸드폰을 꺼야지. 그러곤 다시 켜는 걸 깜빡한 거야.”
“강습은 무슨 강습이야! 아까는 분명히 회식 했다고 했잖아!”
“강습 끝나고 회식 한 거야. 그 보험왕 아줌마가 한턱 쏜다고 해서. 우리 지점에 보험 설계사들 전부 참석하는데 나만 빠져? 게다가 강습 시간보다 그런 자리에서 얻을 정보가 더 많은데? 다 같이 저녁 먹고 호프집에서 한잔하고 노래방 갔다가 들어온 게 다란 말야.”
“말이라는 게 정말 편리하군. 살짝살짝 토씨만 바꿔도 거짓을 진실처럼 만들 수도 있으니 말이야. 하긴 그게 네 특기지. 좋아. 그럼 그 개자식은 누구야?”
“말투가 왜 그래? 우리 지점 팀장이야.”
“팀장? 팀장이면 다야? 그 새끼는 사내새끼 아닌가? 이 늦은 시간에 술까지 처먹고 그런 새끼가 차에 타란다고 덥석 올라타?”
“그럼, 택시 타고 와? 그 사람 유부남이야. 좋은 사람이고. 택시보다는 그 차가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했어.”
“닥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따귀를 올려쳤다. 손바닥이 얼얼할 정도로 세게 때린 탓에 소파에 앉아 있던 아내는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너 끝까지 이렇게 순진한 척할래? 유부남이고 좋은 사람이면 계집 보고 안 꼴린다던? 야, 성진희! 너 지금 니가 무슨 열여덟 소녀라고 착각하는 거야? 뻔히 알 거 다 알면서 이거 왜 이래?
왜, 그 개새끼하고 노래방에서 서로 아랫배 문지르며 블루스라도 췄냐? 불룩한 그 새끼 물건이 살살 문질러 주니까 아랫도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아니지, 핸드폰이 꺼져 있던 시간을 보면 모텔 방에서 알몸으로 뒤엉켜 개지랄 떨기에도 충분하지. 이 개 같은 연놈들을!”
나는 거의 눈이 뒤집혀 주위에 뭐든 손에 잡히는 걸 찾았다. 그러자 아내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제발 그만! 그만하란 말야! 당신 또 왜 이래? 병이 다시 도진거야? 대체 내가 뭘 잘못 했다고 이러는 거야!”
“뭐?”
그리고 거의 동시에 준수가 울면서 방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