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포한 입

흉포한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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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에게서 FHMP의 명함을 받았을 때, 나는 그곳이 건강보조식품을 파는 회사 정도이리라 생각했다. 오랜만에 나간 동창회 자리에서 미영을 만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남편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가게 됐다.

보통 때라면 남편 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겠지만 술을 몇 잔 마신 것이 영향을 주었다. 거기에 미영이 먼저 최근 받은 성형 수술 이야기 같은, 다소 비밀스러운 화제를 꺼내 놓아 경계심을 줄여 놓았기 때문에 나도 의외로 쉽게 입을 열고 말았다.

“음, 굉장히 무기력하다, 이런 얘기지?”

“그것보단 뭐랄까, 의욕이 별로 없는 것 같아. 뭘 해도 시큰둥하고. 우울증 같은 거 아닐까?”

“밤일도 잘 안 하고?”

미영은 농담을 하고 씩 웃으며 와인을 마셨다.

“원래 남자들 불혹 넘기면 다 그렇잖아. 갱년기 아니냐. 거기다 네 남편은 의사 선생님이니까. 그 일이 좀 피곤해?”

“그래도, 좀 너무한 거 같아……. 가끔 울기도 하고.”

“울어?”

“며칠 전에도 그랬어. 서재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거야. 한밤중에 내가 얼마나 놀랐겠니? 왜 그러냐고, 병원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봐도 대답을 안 해. 그러더니 아무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가고.”

미영은 정면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골몰했다. 성형수술을 한 덕에 눈가에 잔주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병원에 전화해서 물어봤는데, 아무 일도 없다고 하고. 답답해 죽겠어.”

“너, 오늘 자리 파하기 전에 잠깐만 나 좀 보고 가.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미영은 누구 험담이라도 하는지 큰 소리로 떠들며 웃고 있는 다른 무리에 섞였다.

동창회는 호텔에서 끝나지 않고 2차로 이어질 것 같았다. 나는 술을 더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곧장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막 가까운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리는데 미영이 나를 불러 세웠다.

“꼭 좀 보고 가라고 했잖아.”

미영은 눈웃음을 치며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한 장의 명함이었다. ‘FHMP. Inc’라고 적혀 있었고 전화번호가 있었다.

“이게 뭔데?”

“아까 네 남편 얘기 듣고 생각한 건데, 그쪽에 전화 걸어 봐. 도움이 될 거야.”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영은 더 물어볼 기회를 주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사라졌다. 차 안에서 명함을 뒤집어 보았는데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활력 넘치는 삶을 원하십니까? 주저 말고 전화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며칠 후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미영이었다.

“그래, 전화해 봤어?”

미영은 대뜸 그렇게 물었다.

“전화? 아, 그 명함 말이구나. 아니. 그 사람은 약 먹는 거 싫어해.”

“약?”

미영은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듯 크게 웃었다.

“약이라니. 거기 약 파는 데 아니야. 아무렴 내가 그런 걸 너한테 소개했겠니? 걱정 말고 전화해 봐. 나도 그 회사 덕분에 한 시름 던 적 있거든. 나 믿지?”

믿고 안 믿고를 따질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왠지 미영의 말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성격이 모질지 못해서, 나는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의 말은 대부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아니었다면 나는 FHMP에 전화를 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 남편은 12시가 넘어서야 여느 때처럼 피곤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러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 바로 잠자리에 드는 모습이었다.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남편의 곁에서 선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깨어났다.

남편이 곁에 없었다.

나는 거실로 나갔다. 어두컴컴한 거실은 비어 있었다. 한기를 느끼고 어깨를 쓰다듬으며 서재 문을 열었다. 그곳에도 빈 의자뿐,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불안이 가슴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의 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문을 밀었다. 검은 그림자가 침대 곁에 서 있었다. 남편이었다. 남편은 민정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내 말에도 남편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민정이의 얼굴을 보기만 했다. 나는 남편에게 다가가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섬뜩한 기운이 손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쓸어내렸다. 남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세고 있어. 방해하지 마.”

“뭐라고요?”

“방해하지 마.”

남편은 내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아픔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이 표백된 듯 하얗게 변했다. 남편은 민정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더 가깝게 가져다댔다. 그 행동이 평범한 아빠가 딸의 자는 모습을 보는 광경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나는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만해요!”

남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오른손을 천천히 민정이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 검지로 민정이의 입술을 매만졌다. 나는 남편의 기묘한 행동에 넋을 잃고, 일어서서 그를 제지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몇 초인지, 아니면 몇 분쯤인지 가늠할 수도 없는 시간이 흘렀다.

남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계속해서 나직이 중얼거리더니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민정이의 입술에서 손을 떼고 딱딱 끊기는 동작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 방을 나갔다.

남편의 왼손에는 치과에서 사용하는 것이 분명한, 이름 모를 도구가 들려 있었다.
FHMP의 여직원은 상당히 친절했다. 나는 아는 사람에게 소개를 받아서 전화를 걸게 되었고 솔직히 그쪽이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잘 모르겠으니 설명을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여직원은 상큼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로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무엇이든 하지요. 고객을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다면, 저희 회사는 못 할 게 없답니다. 자세한 사항은 나오셔서 상담을 한 후에 결정하시면 됩니다.”

거실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전국의 지도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도시에 황사 현상이 있으리라는 예보를 들으며 이왕 전화까지 건 김에 한 번 방문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여직원은 마지막까지 친절한 음성으로 자세한 위치를 가르쳐 준 후 정중하게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남편은 어떤 심리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고, 남편에게 필요한 것은 병원이나 일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잠시의 휴식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결국 외출 준비를 하고 여직원이 가르쳐 준 곳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남편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고 말할 수도, 휴식을 권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두고만 보기에는, 남편이 점차 위험한 사람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차가 심하게 막혀 집을 나선 지 두 시간 만에야 여직원이 가르쳐 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청 옆에 있는 20층 정도의 빌딩이었다.

FHMP는 8층의 넓고 한적한 복도 끝에 있는 두터운 유리문 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복도에는 창이 하나도 없었고 대신 2미터 정도의 간격을 두고 조명이 벽에 붙어서 은은하게 빛을 뿜고 있었다. 복도 끝의 유리문에 선명하게 ‘Fitter Happier More Productive’라고 적혀 있었다. 묘한 회사명이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들어가기를 망설이며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와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남편은, 그러니까 요새 들어 매사에 우울하고 의욕이 없고……. 또 밤에 몰래 딸의 방에 들어가서 자는 아이의 입술을 만져요. 이건 정신병 같은 건가요?’ 정신병이라니?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정신병에 걸릴 이유 따위는 주변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잘못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편은 늘 내게 사람이 왜 그렇게 생각이 없느냐고 타박을 줬는데 이번에도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불편해진 나는 돌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몸을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누군가 다가와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유리잔의 표면을 연상시키는 외모에 검은 정장을 걸친 삼십대 남자가 나를 보며 살짝 웃고 말했다. 건조한 웃음이었다.

“오늘 상담 때문에 오신 분이십니까?”

“아, 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남자는 미끄러지듯 움직여 옆을 스치더니 회사의 유리문을 살짝 열었다.

“망설이고 계셨나 보군요. 걱정 마십시오. 저희 회사는 고객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니까요. 자, 들어오세요.”

그 말은 ‘열려라 참깨’ 같은 마술의 주문처럼 들렸다. 다음 순간 나는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듯 스스럼없이 남자의 뒤를 따라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처럼 꾸며진 곳. 전면에 텔레비전이 있고 그 주위에 활 모양의 푹신해 보이는 의자가 네 개 있었다. 세 개는 비었고 하나에만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깨끗한 암회색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이나 풍겨 나오는 분위기로 보아 오십 대 중반 정도인 것 같았다. 남자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코미디 채널이었는데, 코미디언들이 나와서 무엇인가를 연기함에도 소리가 나오지 않아 마치 마임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만 저쪽에 앉아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안내한 남자는 웃음을 흘리고는 오른쪽에 나 있는 복도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가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회사 안은 너무나 조용했다. 어딘가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 들려왔다.

나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텔레비전에 잠깐 눈을 맞췄다. 상대 코미디언이 어떤 코미디언의 머리를 쟁반으로 세게 두들겼다. 큭큭, 목에 뭔가가 걸린 사람이 그것을 뱉어내려는 듯한 소리.

텔레비전 앞에 앉은 남자에게서 나오는 소리였다. 남자의 시선이 뒤로 돌아가며 얼굴이 나타났다. 신나는 놀이기구에 탄 꼬마의 웃음이 그 얼굴에 매달려 있었다. 그 기묘한 부조화가 나를 얼어붙게 했다.

“보셨어요? 보셨죠?”

들뜬 목소리가 날아왔다.

“정말 재밌죠? 예? 안 그래요?”

나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실망한 듯, 웃음을 거두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재미없습니까?”

나는 무슨 말인가 해야 한다고 느꼈지만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남자는 잠깐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미간을 구기더니 고개를 돌렸다.
“단정적으로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만, 제 생각에 부군께선 저희가 RRS라고 부르는 질병에 걸리신 것 같습니다.”

남자는 앞에 놓인 종이 위에 뭔가를 적어가던 펜을 놓고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R, R, S…… 질병?

“병이라뇨? 정신병이란 말씀이세요?”

“정신병이 아닙니다. 이건 육체에 직접 작용하는 질병이죠. 저흰 이 병을 제2종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치해 두면 상당히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병원에서 쓰는 용어가 대부분 그렇듯이 남자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좀 쉽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되겠어요?”

“자세하게 말씀드릴 수 없는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다소 전문적인 분야라서……. 어쨌든 이 병은 CD, 즉 전염병의 일종입니다.”

남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방에 들어서며 본 광경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는 창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일기예보에서 말한 것처럼 황사가 도시에 몰려와 하늘을 탁하게 물들여 놓고 있었다.

“전염병이라고 하셨나요?”

“예, 그렇습니다.”

남자는 시선을 고치지 않고 중얼거렸다.

“아십니까? 황사가 날아온 날엔 도시의 사망률이 급격히 올라갑니다. 저 모래바람 속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이 잔뜩 도사리고 있는 셈이죠.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이 병은 저희에게도 아직 미지의 존재입니다. 체계적인 역학조사가 힘들어서 대체 어떤 경로로 전염되는지 아직도 알아내지 못한 상태랍니다.”

겁을 주려는 것일까? 감기를 폐렴으로 부풀리는 식으로? 나는 남자의 의도대로 불안해져서 오른손으로 왼손을 쓰다듬었다.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아주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흰 확실한 치료법을 알고 있으니까요. 이를테면, 저흰 인터페론은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정확한 패서진의 종류는 아직 알지 못합니다만, 심프터메틱 트리트먼트가 아니라 병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거죠. 그 점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낯선 단어를 제외하면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안심함과 동시에 남편을 완전히 병자로 취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뭔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어디쯤에선가 이 남자의 말에 말려들어 버린 것이다.

전염병…… 끔찍한 말이었다. 그대로 두면 내게로, 그리고 딸에게로 병원균이 옮겨간다는 뜻이었다. 민정이를 떠올리자 갑자기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부인께서 계약서에 서명하시면 즉시 치료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다시 안경을 쓰고 펜을 든 다음 종이를 보며 말했다.

“그 사람은 치료 같은 걸 받으려고 하지 않을 텐데요. 여기 온 것도 제 마음대로였고.”

“그 점도 역시 저흴 믿으시면 됩니다. 환자 설득에서부터 치료까지 모든 걸 일임하시는 거지요. 그럼 저희가 말끔하게 해결해드립니다.”

“글쎄요, 어떻게 해야 할지…….”

“내키시지 않으면 그냥 돌아가셔도 괜찮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잠시 웃다가 나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 눈이 부담스러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이런 식으로라도 남편의 이상한 행동을 설명하고 또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는 남자가 미덥긴 했다. 남자는 뭔가 알고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계약하겠어요. 그럼 비용은 얼마나?“

“계약서를 읽어보시죠.”

나는 건성으로 읽고, 한 장을 넘겨 뒤의 공란에 이름을 쓴 뒤 서명을 했다. 남자는 계약서를 돌려받고 남편의 병원 위치를 물었다. 대답을 들은 후 남자는 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주었다. ‘C. A. 이연우’라고 씌어 있었다.

“혹시 연락하실 일이 생기면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남자는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얌전하게 놓은 뒤 말했다.

“혹시 치료 과정을 모니터하길 원하십니까? 원하시면 그렇게 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모니터한다고요?“

“예. 일주일에 한 번씩 시디를 보내드립니다. 치료 과정을 담아서요. 그러길 원하십니까?”

나는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그렇게 한다면 남편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명함을 핸드백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자는 사무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삼 개월 후엔 반드시 지금보다 행복해지실 겁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낯선 내 목소리가 사무실에 낮게 드리워졌다.
그 남자가 자신한 대로, 곧 남편에게 뚜렷한 변화가 찾아왔다.

일단 얼굴이 훨씬 밝아진 데다 자주 웃었고, 치료가 시작된 지 한 달 반 후에는 그렇게 싫어하던 운동을 시작하기까지 했다. 식욕도 왕성해져서 전에 먹던 양보다 두 배 정도 식사를 더 했고, 잠도 잘 자는 것 같았다. 우울한 표정도 울음도 더 이상은 없었다.

애초에 남편에게 그런 것이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밤마다 불면에 뒤척이며 남편이 다시 딸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는지 살폈지만, 더 이상 그런 일은 없었다. FHMP 측에서 어떤 식으로 일을 처리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다행이라고 여겼다.

약속대로 시디가 꼬박꼬박 배달되어 왔지만 서랍에 넣어두고 망설이다, 보고 싶지 않다는 쪽의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약속한 삼 개월이 지난 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싶었다. 그리고 이 사소한 해프닝을 기억하지 않으려면 시디를 열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FHMP에 다녀온 지 두 달째 되는 일요일이었다. 남편은 7년 동안 단 한 번도 일요일에 출근한 적이 없었는데, 아침 일찍, 희색이 만연한 얼굴로 분주하게 옷을 차려입고 병원에 가겠다며 집을 나섰다.

나는 남편의 얼굴이 낯설지만 한편으로 기묘하게도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남편의 얼굴이 얼마전 FHMP에서 만난 오십 대 남자의 얼굴과 닮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전염병입니다. 전염병…… 분명히 그 직원은 그렇게 말했다.

오전과 오후 내내 마음속에서 불안이 부풀어 올랐다. 남편의 핸드폰으로 몇 번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병원 전화도 마찬가지였다. 부재중으로 되어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민정이에게 저녁을 차려 준 후 집을 나섰다.

병원 문은 열려 있었다. 이유 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대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데스크를 지나 오른쪽에 있는 남편의 방으로 향했다. 막 문을 열려는데, 말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멈칫했다.

“진짜 좆 같네요, 그쵸? 완전 피범벅인데요?”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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