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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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을 받고 급히 나가보니 민규 형은 영락없는 노숙자 행색을 하고 있었다. 게 눈 감추듯 맥주 한 잔을 들이켜고 나서 묘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지?”

“놀라다 뿐이에요? 이게 대체 무슨 꼴이에요? 지금 형 모습을 보면……”

나는 차마 말을 맺지 못했다.

“미친놈 같지? 아니, 노숙자가 더 어울리나. 실제로 얼마 전까지 노숙자 생활을 했어.”

“예?”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가만히 아래를 보다가 이내 실성한 사람처럼 낄낄 웃기 시작했다. 가게에 손님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형!”

“아, 미안, 미안. 갑자기 웃음이 나와서 나도 모르게……. 큭큭큭.”

그는 목이 마른 듯 다시 한 잔을 더 시켰다. 술이라도 마셔야 사정 얘기를 들을 것 같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 그동안 연락 안 한 지 꽤 됐지?”

“좀 됐죠……. 한 3년인가.”

그러나 그가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민규 형은 잘 나가는 개업의였다. 젊은 나이에 번듯한 병원이 있고 누구든지 부러워하는 결혼도 했다. 연락이 뜸해진 것도 그가 개원 후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동안 소원했다고는 하지만 지금 그의 모습은 내 눈을 믿기 어렵게 만들었다.

“와이프가 바람을 피웠어.”

뜬금없이 툭 내뱉은 말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두 사람은 캠퍼스 커플로, 학교 후배인 나와도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형수는 학교 홍보 모델로 뽑힐 정도로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 그래서 이렇게…….”

그 상대가 누구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민규 형은 씩 웃었다.

“아, 이건 그 일 때문은 아냐.”

“네?”

나는 다시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걔가 바람피운 거 알았을 때는 물론 화도 나고 미쳐버릴 것 같았지. 하지만 그 일은 잘 해결됐어. 병원에만 매달리느라 소홀했던 내 잘못도 있었으니까. 서연이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무엇보다 난 아내를 잃고 싶지 않았거든. 아무튼 지난 일은 실수로 치고 눈감아 줬고, 그 일은 무사히 마무리됐어. 그 후로 우리는 별 문제 없이 지냈지.”

“그럼 뭐가 문제였어요?”

“보자…… 그게 한 일 년 전쯤인가. 이혼하네 마네 했던 일도 거의 잊혀질 때쯤 우리 집으로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어.”

“소포요?”

“이만한 거.”

그는 테이블 위에 커다란 네모를 그려 보였다.

“수취인이 ‘정민규, 김서연 부부 앞’이라고 되어 있더군. 속에는……. 큰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고.”

“상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상자야. 왜 그런 거 있잖아. 뚜껑을 열면 안에서 피에로 인형 같은 게 팍 하고 튀어나오는 그런 상자. 하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어.”

“그런 걸 누가 보내요?”

“누군지 몰라. 택배 회사의 라벨 같은 것도 붙어 있지 않았어. 그러니 반송하려야 할 수도 없지. 수신인의 이름이 우리 부부 두 사람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좀 찜찜하긴 했지만, 난 그냥 뭔가 어디서 착오가 생겨서 우리에게 오게 된 거라고 생각했어. 워낙 큰 물건이라 둘 데도 없고, 버리자고 마음먹었지. 가구가 아니니까 중고 가구점에서도 안 받아 주잖아. 사람 하나가 몸을 웅크리면 들어갈 만큼 큰 상자라서 버리려면 부숴야 할 판이었지.”

나는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지금 상황을 설명하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민규 형은 정말 심각해 보였다.

“그런데 막상 상자를 부수려고 보니까, 이 상자가 꽤 잘 만들어진 거야. 자세히 보니 수공예품인 것 같더라고. 문양도 꽤 공이 들어간 것 같았어. 어떤 이름 있는 장인이 습작품으로 만들고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그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어. 소인(小人)들이 손을 잡고 모닥불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것 같은 연속적인 문양들이 상자 둘레를 가득 메우고 있는데 눈으로 봐서는 똑같은 게 하나도 없어. 하나하나가 모두 독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거야. 마치 진짜로 살아있는 것처럼 각자가 개성을 지니고 있었단 말이야.”

“형! 그 상자 얘긴 도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 있어요?”

“잠자코 듣기나 해!”

그의 눈에 광기가 번뜩였다.

그것은 사실 상자에 관해 설명할 때부터 비쳐 나오기 시작한 광기였다. 내가 말을 끊었던 것은 두려워서였는지도 모른다.

“상자는…” 하고 그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끝내 부수지 못했어. 너무 아까웠거든. 이런 걸 부순다는 건 바보짓이지 싶었어. 아내는 당장 갖다 버리라고 화를 냈지만, 나는 더 이상 그러고 싶지가 않았어. 아내는 인테리어에도 꽤 감각이 있는 여잔데 어째서 이런 물건을 못 알아보는지 이상했지. 물어보니까, 이유도 없이 상자가 불길하게 느껴진다는 거야.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내가 조금 둔한 면이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상자에서 어떤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결국 난 상자를 버리지 않고 안 쓰는 물건을 넣어두는 다용도실에다가 그것을 갖다 놨어. 언젠가 쓸 일이 있겠지 하면서 말이야.”

*

아내가 민규에게 갑자기 화를 낸 것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당신은 어쩌면 사람이 그래?”

“갑자기 왜?”

“몰라서 물어?”

“뭘 말이야?”

“저거 왜 다시 갖다 놓은 거야? 내가 분명히 낮에 버렸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갖다 버리다니, 뭘?”

“끝까지 시치미 뗄래? 저 괴상한 상자 말이잖아. 상자!”

“상자? 난 손도 안 댔는걸?”

“그럼 상자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거야, 지금?”

아내는 화를 내며 민규를 닦달했다. 그러나 민규는 아내가 상자를 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난 맹세코 상자에 손을 댄 적도 없지만, 당신 대체 왜 자꾸 저 상자를 버리려고 하는 건지 난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어. 그냥 놔두면 안 돼?”

“싫어! 지금이라도 당장 갖다 버려. 다시는 가지고 들어오지 마. 알았지?”

아내는 정말 화를 내며 물러설 기미가 없었다. 민규는 하는 수 없이 아내가 보는 앞에서 상자를 가지고 나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재활용 쓰레기 수거함 옆에다 버려두었다. 혹시 누군가 가져다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민규는 아내의 날카로운 외침 소리에 깜짝 놀랐다.

“뭐야, 무슨 일이야!”

달려가 보니 아내는 전에 상자를 놔뒀던 다용도실 앞에 서 있었다.

“왜 그래?”

“저…… 저기”

놀랍게도 거기에 어제 저녁 갖다 버렸던 그 상자가 버젓이 원래 있던 자리를 차지하고 놓여 있었다.

“분명 갖다 버렸는데? 당신도 봤잖아!”

“갖다 버린 상자가 어떻게 다시 여기 와 있어?”

아내는 무슨 끔찍한 괴물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민규도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됐어, 내가 다시 내놓을게. 버리면 되지.”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민규는 몇 번이나 상자를 버렸지만 그때마다 상자는 어느 샌가 원래 자리로 돌아와 있곤 했다. 누군가 장난을 치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지만 누가 이 따위 의미도 없는 유치한 장난을 친단 말인가? 더군다나 문단속을 한 집 안을 드나들면서……. 아내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불안해했다. 결국 민규는 처음에 생각했던 대로 상자를 부수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는 미련이 남아 있었지만, 이제는 버려야 할 때였다. 완전히 박살내 버리면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구의 장난이든 아니면 상자에 실제로 발이 달렸든 간에, 산산조각 난 것이 무슨 수로 다시 돌아오겠는가.

민규는 상자를 차에 싣고 멀찍이 떨어진 한적한 공터로 가서 준비해 온 해머로 상자를 때려 부쉈다. 나무 판 하나까지 꺾고 쪼개서 완전히 조각조각이 날 때까지 집요하게 해머를 휘둘렀다.

상자를 부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이런 좋은 물건을 부순다는 게 너무나 아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이 상자 때문에 지금 아내는 완전히 히스테릭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산산이 부순 나무 조각들은 빈 페인트 통에다 집어넣고 불을 질렀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모두 태우고 재가 다 탈 때까지 지켜본 후 민규는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여전히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상자와 마주쳤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확 끼쳤다.

분명히 조각을 내고 태워버렸는데도 상자는 원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혹시 종류만 똑같은 다른 것은 아닐까 하고 가까이 가서 확인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쩌면 상자를 버릴 방법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드는 순간 묘한 감정이 끼어들었다. 상자를 버리고 싶지 않다는.

민규는 정말 이 상자를 버리고 싶지 않았다.

“태워 버려도 다시 와 있는 걸 날보고 어떡하란 말이야?”

민규는 상자를 그냥 두고 상관하지 말자고 했다. 물론 아내는 펄쩍 뛰었다. 하지만 민규는 상자가 딱히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러냐며 오히려 그녀를 몰아붙였다.

알 수 없는 분노가 그를 휘감았다. 분노가 어디서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묻혀 있던 분노인지, 아니면 상자에서 나온 것인지…….
서연은 상자를 처음 봤을 때부터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상자가 배달된 이후 민규는 날이 갈수록 냉정해졌다. 이제는 그녀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저 상자는 남편의 짓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바람피운 것에 대한 복수를 하는 걸까?

민규가 병원에 나가고 오후 내내 집안에 혼자 틀어박혀 있으려면, 신경이 거슬려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이 큰 집안에 저 불길한 물건과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미칠 듯한 공포와 외로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날들이 되풀이되자 서연은 집을 포기하더라도 상자로부터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애걸하다시피 졸랐다.

“여보, 제발 부탁이야. 이 집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자. 꼭 이렇게 좋은 집이 아니더라도 상관없어. 그냥 이 집만 아니면 어디든지 상관없으니까. 여보, 우리 제발 이사 가. 응?”

그러나 민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 집을 사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당신도 잘 알잖아. 그런데 그깟 상자 하나 때문에 집을 팔자고? 당신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난 저 상자한테서 도망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하고 이혼이라도 하겠어.”

“이혼?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만약 당신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렇게라도 할 거야. 저 상자…… 이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 당신도 마찬가지고.”

“좋아,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지.”

뜻밖에 선선히 대답하는 남편을 보고 서연은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외도를 했을 때조차도 이혼할 수 없다고 버티던 남자였다. 서연은 의심스런 음성으로 다시 확인했다.

“정말이야?”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어.”

그녀는 흥분으로 들뜨는 음성을 간신히 억눌렀다.

“뭐지?”

“나와 이혼하고 싶다면, 위자료를 반드시 청구할 것”

“그게 무슨 뜻이야 대체?”

“무슨 뜻이라니. 말 그대로 나한테 위자료를 요구하란 뜻이야. 난 순순히 위자료를 지불할 테니까.”

“그게 조건이라는 거야?”

“응.”

서연은 영문을 몰랐지만 딱히 거부할 이유도 없었다. 민규에 대한 사랑은 식은 지 오래였고, 이혼하게 되면 당장 돈이 급할 판국이었다.

결국 그녀는 서로 합의한 대로 절차를 진행시켰다. 민규가 자기 입으로 위자료를 내놓겠다고 조건을 건 만큼 일은 신속하게 마무리됐다.

*

서연이 민규를 찾아온 건 이혼 직후였다. 그녀는 민규를 보자마자 숄더백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다.

“이 나쁜 자식! 다 이유가 있었어!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뭘 말이야?”

“어떻게 해서 그 상자가 나한테 온 거냐고!”

악을 쓰는 서연을 향해 민규는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아, 그거. 당신이 그 정도는 해 줘야 하는 거 아냐? 외도한 것도 눈감아줘, 거기다 이혼해서 위자료까지 듬뿍 줬는데 날 위해 그깟 상자 하나 정도는 처리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냔 말이야.”

“뭐?”

“왜 내가 위자료 청구를 이혼 조건으로 내걸었을 것 같아, 이 돌대가리야? 그 상자를 너한테 주기 위해서였어. 넌 그때 재산 분할 목록을 꼼꼼히 읽어 봤어야 했어. 맨 아래 그 상자의 소유권도 양도하겠다고 쓴 내용을 봤어야 했다고. 하지만 콧대 높은 네가 그런 걸 일일이 읽었을 턱이 없지. 변호사도 뭔지는 몰라도 공짜로 준다는데 문제 삼을 리도 없고 말이야. 난 법적으로 정당하게 너에게 그 상자를 양도한 거야. 알겠어?”

“당신…… 그 상자에 대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아니,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그런 요상한 물건을. 하지만 확실하게 말할 순 있지……. 그게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닌 것 같다는 거. 부수고 태워도 다시 돌아온 것을 보고 난 확신할 수 있었어. 이 상자는 상식 따위는 통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야.”

“당신…… 내가 저 상자 때문에 미쳐 가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가만히 있었던 거야?”

“그래! 그러면 결국 네가 먼저 이혼해 달라고 사정할 거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넌 어떻게 해서든 저 상자한테서 도망치려고 했으니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어. 저 상자가 계속해서 우릴 쫓아다니는 이유는, 결국 우리 것이기 때문이야. 우리 두 사람의 공동 소유란 말이야. 생각해 봐. 소포가 왔을 때 수취인이 어떻게 돼 있었는지를.”

“……정민규, 김서연 부부 앞이라고…….”

“그래, 처음부터 우리 두 사람 거였어. 그리고 난 너와 이혼하면서 그 소유권을 너에게 모두 양도한 거지. 즉, 상자는 이제 너만의 것이 되어버린 거야. 이제 알겠니? 넌 평생 그 상자하고 함께 살아가게 될 거야. 죽을 때까지 외로움과 공포 속에 떨면서 말이야!”

“이 나쁜 자식!”

서연은 이성을 잃고 민규를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민규는 가볍게 그녀의 손과 머리채를 움켜잡아 꼼짝 못하게 제압해 버렸다.

“이 개자식!”

“어디 더 지껄여 봐. 이 창녀야.”

서연은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인 채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곧 그녀의 표정은 표독스럽게 바뀌었다. 그러더니 다시 피식거리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민규를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한 웃음이었다.

그의 손에 잡힌 채 서연이 묘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내가 한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 줄까?”

“뭐?”

“나…… 임신했어!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 아이와 함께 영원히 상자의 저주를 받아 줄게.”

민규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뭐? 이게 정말! 당장 지워!”

“산부인과 의사가 그런 소리를 해도 되는 거야?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는데. 우린 이미 남남이란 걸 잊었어?”

“이 나쁜 년!”

순간 강렬한 뭔가가 그를 사로잡았다. 엄청나게 뜨겁고 고통스러운 그것이 의식으로 밀고 들어와 마구 찢고 할퀴고 사납게 요동을 쳤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 민규는 자신의 손이 서연의 목을 움켜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화들짝 손을 떼었을 때 서연은 나무토막처럼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축 늘어졌다.

처음엔 당혹스러움이, 다음엔 두려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기적인 본능이 찾아들었다.

시체를 처리해야 한다.

그는 한때 아내였던 여자의,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몸을 노려보다가 그런 결론을 내렸다.

시체를 처리하려면 역시 잘게 토막을 내는 것이 가장 좋을 듯했다. 토막을 낸 다음엔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파묻어 버리는 거다.

의사라는 직업은 그 일에 꽤 도움이 될 터였다.

그는 공구 통에서 고정 틀에 부착된 쇠톱을 하나 꺼냈다. 거의 사용을 안 해서 날은 무척 깨끗했다. 다음으로 싱크대 서랍 안에서 3리터짜리 음식물 쓰레기봉투 한 묶음을 꺼냈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비닐봉지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위생 비닐장갑도 같이 꺼냈다.

준비가 되자 민규는 서연을 질질 끌고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겨 욕실문 밖에 던져 놓고 알몸이 된 시신을 그대로 욕조 안에다 눕혔다. 그는 자신도 팬티만 빼고 옷을 모두 벗어 버렸다.

눈부시게 희고 깨끗한 그녀의 피부를 보자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한때 그녀의 육신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민규는 한때 아내였던 여자의 몸을 톱질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자른 건 목이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야 그나마 작업하기가 수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는 양팔을, 그 다음은 양다리.

어깨를 자른 다음 팔꿈치와 손목을 잘라 세 토막으로 나누고, 다리도 무릎과 발목을 잘라 셋으로 나누었다. 자주자주 톱을 물로 씻어 주어야 했다. 살점들이 촘촘한 톱날에 들러붙어 톱질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몸은 이제 열네 토막으로 나누어졌다. 김서연이라는 여자는 머리와 몸통, 팔, 다리가 잘려나간 채 욕조에 담겨 있었다. 욕조 바닥의 배수구 속으로 핏물이 쉴 새 없이 흘러 내려갔다.

아직 가장 어려운 몸통 부분이 남아 있었다.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민규는 톱을 한 번 더 물로 씻은 후에 몸통을 자르기 시작했다.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음식물 쓰레기봉투 안에는 내장이 가득 들어찼다. 한쪽엔 위를, 또 한쪽엔 간을, 허파를, 심장을…… 이렇게 각각 따로 담았다. 긴 내장은 따로 부엌칼로 잘라 나눠야만 했다.

작업을 모두 끝마친 민규는 토막 낸 사지를 욕조 속에 그대로 둔 채 비닐장갑을 벗어던지고 밖으로 나와 비로소 숨을 크게 들이켰다. 피비린내로 머리가 마비될 것만 같았다. 이제 피가 완전히 빠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팬티 바람으로 소파에 몸을 기대자 놀랍게도 스르르 잠이 쏟아졌다.
얼마나 잤을까.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민규는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강렬한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욕조 안에는 피가 엉겨 붙은 서연의 토막 시체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민규는 한동안 멍청히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찬물로 세수를 하고, 시체를 담을 박스를 찾으러 베란다로 향했다. 이삿짐을 싸가지고 올 때 사용한 박스들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섀시 문을 열고 베란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접혀 있는 종이 박스들 대신 상자를 발견했다.

그가 아내에게 떠넘긴 바로 그 상자였다. 그것이 돌아와 있었다.

“이런 씨발…….”

민규는 오한이 일었다. 상자는 마치 자기를 써 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입을 딱 벌리고 베란다 한가운데 버티고 있었다.

“그래, 써 주지. 정 원한다면 써 주겠어.”

그는 상자를 욕실로 옮겼다. 그리고 욕조에 들어있는 아내의 토막 시체를 모조리 그 안에다 집어넣었다. 음식물 쓰레기 봉지에 담은 그녀의 장기들도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잘린 머리를 맨 위에다 올려놓았다. 마치 완성된 요리 위에 꽃으로 데코레이션을 하는 기분이었다.

상자는 기가 막히게 딱 들어맞았다. 처음부터 이런 용도로 쓰이기 위해 그에게 온 것 같았다. 그는 상자를 들어서 자기 방에다 갖다 놓았다.

이제는 인적이 드물어지는 시각을 기다리면 된다. 모든 일을 끝내자 긴장이 풀린 탓인지 또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잠이었다. 그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잠에 빠져들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 온몸이 뻐근했다. 어제 톱질이라는 중노동을 한 탓에 어깨가 말할 수 없이 쑤시고 아팠다. 소파에서 막 몸을 일으키는데 부엌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그릇들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민규는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움직여 부엌 쪽을 쳐다보았다.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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