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령 씨의 위대한 하루

  • 장르: 판타지, SF | 태그: #타임루프 #타임리프 #집밥 #코로나시대의낙석동 #시간판타지 #김아직작가 #금요일에갇히다 #연작소설 #코로나 #온클
  • 평점×84 | 분량: 69매 | 성향:
  • 소개: 연작 <코로나 시대의 낙석동> 제3화 [오가령 씨의 위대한 하루]. (( 1화의 주인공 김문조 씨 찬조출연 확정)) 온라인 클래스 시대, 아이들 세 끼 밥을 차려주다가 ... 더보기

오가령 씨의 위대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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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아이는 하얀 도화지에 알약 세 개를 큼지막하게 그리고는 크레파스를 내려놓았다.
“이게…… 다니?”
담임의 당혹스런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이가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미래식량이에요. 이것만 먹으면 종일 배가 불러요. 빨간색은 돼지두루치기 맛이고 노란색은 소시지 맛, 초록색은 설탕꽈배기 맛이 나요. 선생님은 뭐 고를래요?”
과학창의력 미술경진대회 날의 일이었고, 그게 벌써 35년 전이었다.

그 사이 세상은 그리 달라진 게 없었다.
세 끼 밥을 대체할 알약 같은 건 나오지도 않았다. 외려 팬데믹으로 인한 대규모 온클(온라인 클래스) 사태에 직면하여 마흔네 살의 오가령 씨는 고등학생, 중학생 두 딸을 집에서 끼고 살아야 하는 집밥 대재앙의 시대로 접어들고 말았다.
“알약은 무슨! 한심해 빠진 과학자놈들!”
오가령 씨는 저녁식탁을 치우다 말고 머그잔 가득 냉수를 들이켰다.
딱히 과학자들을 욕할 사안이 아닌데도 누군가에게는 분풀이를 해야겠고, 하필 오가령 씨의 뇌리에 어릴 적 미술경진대회 날의 상황이 복기된 것이었다.

큰아이와 작은아이의 점심시간이 다르고, 학원시간도 들쑥날쑥한 데다 남편의 출퇴근 시간도 널을 뛰는 바람에 오늘만 해도 아침 두 번, 점심 두 번, 저녁 두 번 도합 여섯 번의 밥상을 차리고 치운 터였다. 늦게 학원에 가는 작은아이의 저녁을 먹였으니 하루가 끝난 듯 보이지만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곧 남편이 들이닥칠 것이고 아이들이 학원에서 차례로 돌아와 야식을 찾을 터였다.

오가령 씨는 장바구니 두 개를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엊그제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운 것 같은데 벌써 계란을 비롯해 간당간당한 식재료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밀키트를 쌓아두는 김치냉장고 위 칸도 텅 비었다. 오가령 씨는 최근 들어 낙석동에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무인 밀키트 전문점부터 순회했다. 에코쉐프에서 식구들이 호불호 없이 좋아하는 부대찌개를 사고, 낭만쿠킹에서는 큰애가 좋아하는 백순대볶음, 세끼뚝딱에선 작은애가 없어서 못 먹는 매운찜닭, 바른국물에선 식구들 야식으로 적당한 닭순살 짜장떡볶이를 샀다.

그 다음으로 낙석슈퍼에 들러 계란과 파, 감자, 냉동만두, 미역줄기, 자반고등어, 콩나물, 두부를 쇼핑카트에 착착 담았다. 마지막으로 다시국물용 디포리만 사면 끝이었다. 하지만 디포리팩이 놓여 있던 냉장칸이 오늘따라 텅 비어 있는 것이었다.
“디포리가 오늘 품절됐네요. 아니면 오늘 채소국물팩 세일인데 그건 어떠세요?”
“내일 들르죠, 뭐.”
남편은 디포리 육수가 아니면 국이든 찌개든 입에 대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전생에 디포리한테 잡아먹힌 하찮은 플랑크톤이었던 게 분명하다고 짜증을 내면서도 웬만하면 식구들 취향을 존중해 주는 오가령 씨였다.

배달이 밀려 있다는 얘기에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를 나섰더니 어느새 작은애 영어학원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인 작은아이는 부계 유전자의 영향으로 유독 잠이 많아서, 등짝을 두드려 깨우지 않으면 학원을 빼먹기 일쑤였다.
빵빵해진 장바구니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오는데 새로 생긴 와플전문점이 눈에 띄었다. 오가령 씨네 집에는 와플에 환장하는 인간들이 셋이나 살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발치에 내려놓고 애들이 좋아하는 초코바나나 와플 두 개와 딸기생크림 와플 하나를 주문했다. 남편은 디포리만큼이나 딸기에도 집착하는 인간이었다.

장바구니 두 개와 와플봉투를 들고 사거리 쪽으로 내려가는데 오늘따라 찹쌀꽈배기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사실 오가령 씨는 밥보다 꽈배기를 좋아했다.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이 아카시 이파리로 사랑 점을 치던 날.

아무개가 날 좋아한다, 아니다, 좋아한다, 아니다, 좋아한다, 아니다…….

오가령 씨는 저만치 혼자 떨어져 꽈배기 점을 치던 아이였다.

오늘 엄마가 설탕꽈배기를 사온다, 아니다, 사온다, 아니다, 사온다…….

낙석찹쌀꽈배기 사장이 뜰채를 한껏 치켜들었다.
새롭고 고귀한 것을 세상에 내 보일 때 나온다는 그 자세, 일찍이 <라이온킹>에서 원숭이 라피키가 절벽에서 심바를 들어보이던 그 몸짓 그대로였다. 갓 튀겨낸 꽈배기들이 노릇노릇하고 뭉글뭉글한 자태를 드러냈다. 사장은 기름을 뺀 꽈배기를 너른 쟁반에 쏟았다.

오가령 씨는 장바구니를 걸친 팔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안 돼, 안 돼, 치지 마. 뿌리지 마.”

하지만 사장은 오가령 씨를 고문하기로 작정한 것마냥 설탕을 사정없이 흩뿌리기 시작했다. 오가령 씨는 군침이 돌다 못해 눈물이 찔끔 났다. 돌이켜보니 아침나절에 사과 한 개, 큰애가 남긴 흰자와 작은애가 남긴 노른자를 조합한 계란 후라이 하나로 아침 겸 점심을 때운 뒤로 고형식은 먹은 게 없었다. 밥공기 하나 수저 한 벌이라도 설거지를 줄이자 싶어서 출출할 때면 머그잔에 믹스커피나 즉석스프를 타 먹고 말았다.

찹쌀꽈배기 두어 개만 먹었으면 싶었지만 장바구니의 무게는 이미 오가령 씨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고, 일기예보에서 저녁부터 천둥 번개와 돌풍을 동반한 강한 비가 내릴 거라더니 하늘빛도 심상치 않았다. 거기에 설탕꽈배기를 그다지 즐기지 않는 식구들 식성까지, 오가령 씨에겐 찹쌀꽈배기 집을 그냥 지나쳐야 하는 이유가 차고 넘쳤다.

아쉬운 걸음을 돌려 사거리에 도착했을 즈음, 횡단보도 옆 그늘막 밑에서 웬 남자가 몸을 배배 꼬고 있는 게 보였다. 등이 가려운데 손이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개나리색의 손목보호대 같은 걸로 손등을 두툼하게 감아놓아서 손의 움직임이 더 둔해진 듯했다. 남자는 한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는지 머리는 떡이 져 있고 마스크 위로 드러난 콧잔등과 이마도 눅진한 개기름에 절어 있었다. 오가령 씨는 그늘막에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졌다.

비 냄새를 풍기는 바람이 불었고, 사거리 대각선 쪽 상가단지 샌드위치 가게의 입간판이 바람에 뒤집혔고, 새삼스레 몸을 비틀어 대던 남자는 초록불이 켜지기 무섭게 횡단보도로 내려섰다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우회전을 하던 검정색 SUV차량이 그대로 남자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분 뒤, 오가령 씨는 작은애의 학원배낭에 물병을 꽂아 주고 있었다.
“늦겠다. 빨리 빨리 마스크 올리고 신발 신어.”
학원 시작 시간이 5분밖에 안 남았는데도 녀석은 한 손에 와플을 든 채로 운동화를 신었다가 슬리퍼를 신었다가 하며 뭉그적대고 있었다.

“바지랑 뭐가 더 어울려? 삼선이 나은가? 깔끔한 맛은 좀 덜하지?”
“대충 그냥 가. 학원에서 누가 본다고 이래?”
오가령 씨가 재촉했지만 작은애는 기어이 신발장 안에 있던 언니의 캔버스화를 훔쳐 신고서야 집을 나섰다. 겨우 작은애를 보내고 돌아섰더니 이번에는 남편이 한 사흘 굶은 얼굴로 거실에 앉아 있었다.

“와플이라도 먹지 그랬어?”
“당신이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지.”
“내가 언제 와플 먹는 거 봤어? 이 집 식구들은 뭘 사다 줘도…… 아니다, 말자.”
오가령 씨는 급히 말을 끊고 찬물을 들이켰다. 교통사고 장면을 눈앞에서 보고서도 작은애 핑계로 그냥 집으로 왔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오가령, 사는 게 왜 이리 구차하고 넝마쪼가리 같으냐…… .

하지만 평일 저녁의 센티멘탈은 사치였다. 학원에 있어야 할 큰애의 전화에 오가령은 금세 일상으로 복귀했다.
“엄마, 내 책상에 가서 국어학원 워크북 사진 좀 찍어 줘.”
또 깜빡하고 과제를 안 챙겨 간 모양이었다. 오가령 씨는 부계에서 유래한 게 분명한 큰애의 건망증 유전자를 저주하며 워크북 사진을 찍었다. 그런 다음엔 와플 하나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간다는 얼굴로 앉아 있는 남편에게 저녁을 차려주고, 빨래를 널고, 개고, 아이들 옷장과 양말장을 정리했다.

애들 머리카락과 먼지뭉치가 꽉 들어찬 청소기 먼지통을 비우고, 배를 긁고 누워 있는 남편을 두들겨서 재활용품을 내보내고 믹스커피를 한 잔 타먹고 나니 큰애가 돌아왔다. 큰애에게 와플을 먹이고 나서야 한숨 돌릴 틈이 생겼다.
요양원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저녁은 드셨어요? ……진작 먹고 한숨 주무시는 거 깨웠다고? ……내일 갈 건데,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어요? ……이모님들 것도 넉넉히 사 갈게. ……주사? 우린 여름 지나야 맞을 것 같아요. ……마스크 잘 쓰고 다니니까 걱정 말고. ……응, 내일 갈게.”

전화를 끊은 뒤 오가령 씨는 ‘흠’ 하고 날숨을 뱉어냈다.
기분이 괜찮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오늘까지만, 밤 12시까지만 고생하면 그 다음부터는 오가령 씨의 시간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밀린 외주 편집일을 마무리하고, 2주 만에 엄마 얼굴도 보고 올 계획이었다. 주중과 주말의 완벽한 분업체계는 둘째가 태어난 뒤 남편과 오가령 씨가 신혼살림을 다 깨부수고 난 뒤에 극적으로 이뤄낸 평화협정이었다. 주중에는 프리랜서인 오가령 씨가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고, 주말에는 남편이 그 일을 도맡아 했다. 물론 사람의 일이다 보니 그 경계란 게 아주 또렷하진 않았다. 오가령 씨도 주중에 남편에게 청소기나 재활용품 바구니를 쥐어주었고, 남편도 민감한 재질의 옷들을 건조기에 돌려버리는 등 주로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방식으로 오가령 씨를 주말 가사노동으로 끌어들이곤 했다. 그래도 주말은 주말이었고 이제 두 시간만 버티면 되었다.

물론 토요일 0시는 호락호락하게 오지 않았다.
작은아이의 귀가에 맞춰 한바탕 전쟁이 났다. 녀석은 비를 쫄딱 맞고 돌아왔는데 문제는 큰애의 캔버스화도 흠뻑 젖었다는 사실이었다. 저희끼리 목청을 높이는가 싶더니 으레 그렇듯 마지막엔 오가령 씨에게 불똥이 튀었다. 엄마는 뭐 하러 저런 걸 낳아서 날 미치게 만드느냐, 왜 언니만 캔버스화를 사 줬냐, 이번 사태의 기저에는 엄마 아빠의 뿌리 깊은 차별이 있다…….

“차별 같은 소리하네. 캔버스화는 네 언니가 친구한테 선물받은 거야. 나도 너희들 같은 거 나올 줄 알았으면 배 아파가며 애 안 낳았을 거야!”
오가령 씨가 복식호흡과 화병으로 다져진 사자후를 토해내고 나서야 자매의 전쟁은 끝이 났다.
캔버스화를 급히 빨아서 말리고, 시무룩해진 작은아이에게 냉동 치킨을 튀겨 주고 났더니 11시 10분이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

0시! 금요일과 토요일의 거룩한 날짜 경계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마, 이걸로 배 안 차면 뭐 좀 더 만들어 줄 수 있어?”
둘째가 치킨을 먹다 말고 물었다. 오가령 씨는 혀를 끌끌 차고 싶은 걸 참고 일단 웃어 주었다. 금요일 밤의 심적 여유였다.
그로부터 20분 뒤 오가령 씨는 국수를 삶았다. 둘째가 배가 고파 잠이 안 온다며 방에서 튀어나온 것이었다. 남은 디포리를 탈탈 털어서 육수를 만들고 김치를 썰어서 3인분의 잔치국수를 차리고 나니 11시 55분이었다. 설거지는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곧 자정이었고 그 후의 일들은 남편의 몫이었다. 오가령 씨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골랐다.

그때였다.
큰애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것이었다.
“아, 엄마! 왜 안 깨웠어! 8시에 줌으로 신문반 회의 있다고 했잖아. 어떡해? 언제 씻고 언제 화장하냐고!”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다 먹었으면 빨리 양치하고 자!”
그 순간 오가령 씨의 눈길이 텅 빈 식탁을 거쳐 부엌 벽면의 전자시계에 닿았다.

Fri AM 07:47

식탁 위의 국수 그릇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후루룩거리며 국수를 먹던 식구들은?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