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라는 정해진 말로 대부분의 동화는 시작하지만
이 이야기엔 머리를 둥글게 말아 올려 묶은
요정은 등장하지 않아
네 김빠진 피를 게걸스레 빨아 마실 고블린도
해질녘 다가와 너를 깜짝 놀라게 만들 유령도.
오직,
오직
(스포트라이트. 무대 위에 있는 것은)
잭 오랜턴이라는 이름의,
지난 할로윈을 축하하고 남겨진 찌꺼기에 불과한
쭈글쭈글하고 작은 호박이 하나
자신의 미친 여주인을 절망적으로 사랑하는―
잭: 꼭 제가 이걸 진짜 해야 돼요?
(거의 동시에, 들려오는 노랫소리)
잭 오랜턴
잭 오랜턴
호박등에 지나지 않는 잭 오랜턴
마녀인 여주인을 사랑하여
그의 마음은 언제나 괴롭다네.
그녀의 안색은 밀랍처럼 누렇고
볼은 깊이 팬데다 입도 텅 비어 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한 쌍의 은빛 달처럼 빛난다네
그녀의 남편이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잭: 그래요. 전 마녀님의 퍼밀리어입니다. 마녀님이 저를 만들었죠.
잭 오랜턴
잭 오랜턴
호박등에 지나지 않는 잭 오랜턴은
마녀를 위해선 뭐든지 한다네
그녀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그는 거미의 알을 세고
박쥐의 날개를 분류하지
고양이의 발톱을 수확하고
마녀가 잠들었을 땐,
들끓는 가마솥의 독기를 살핀다네.
잭: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제가 마녀님을 사랑한다는 뜻은 되지 않아요.
전 아예 그럴 처지가 못 되니까.
게다가… (그는 뒤쪽으로 곁눈질을 한다)
작가님과 제 사이에서만 하는 말이지만요, 우리 주인님은 좀… 미쳤거든요.
제 말은, 도대체 무슨 인간이―
알아요, 알아. 제 주인님에 대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요. 하지만…….
질: (목소리) 내 님은 돌아오실까?
잭: 오래 전 주인님은 스스로를 불사의 리치로 만들었어요.
언젠가 남편이 살아 돌아오면 함께 하기 위해서 말이죠.
질:(목소리)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잭: (머리를 흔들며) 참으로 안 된 일이죠.
갑작스럽지만 부드러운 빛에 커다란 액자 속 마녀의 모습이 드러난다. 무대 중앙 뒤쪽 돋움무대 위 액자 속 그녀는 오랜 세월 버려진 정원을 내다보며 문가에 서 있다 (물론 관객들은 정원을 볼 수 없다). 마녀의 실루엣은 오래된 사진처럼 누르스름한 회색빛으로 빛난다.
질: 내 님이 돌아오시기만 한다면-
(노래하듯, 약간 어긋난 음정으로)
그 누구도 실제로는 죽지 않는다고 그는 말하곤 했지 그저
죽을 때 몸을 떨어뜨리고
짧은 잠에서 깨어날 때
다른 몸을 집어 드는 것이라고
그럴 듯 한 이야기라며 나는 웃곤 했지 하지만
그가 죽은 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절실해져 미치도록 바라게 돼
그가 부활하기를 원하고 희망해 나 스스로를 고문하면서…….
잭: 봤죠?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에요.(잠시 망설이다가)
글쎄요, 작가양반. 솔직히 전 이걸 하고 싶지 않아요.
제 말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냐는 거죠.
그렇게 해 봤자 주인님께 좋은 일도 아니고,
제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아요.
옛날 옛적
높은 높고 높은 산속에
마녀와 연금술사가 살았지
마녀는 연금술사를 사랑했고
연금술사는 마녀를 사랑했어
서로 쓰는 말은 달랐어도
그들은 사이가 좋았어. 아주 잘 지냈지.
어느 날 연금술사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들끓는 수은 속으로 몸을 던졌을 때까지는.
잭 : (투덜대며) 작가님은 전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군요.
그리하여 시작된
열망과 그리움과 증오의 나날들
어느 순간 그녀는 그토록 난폭한 방식으로 자신을
삶에서 제외해 버린 것에 대해 그를 욕했고,
바로 다음 순간엔 끝없는 후회로 스스로를 고문했네
이 모든 광기를 통과하는 동안 그녀는 단 한순간도
그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란 적은 없어
돌아와
나에게 돌아와
돌아와
제발
질: 제발.
잭: 아, 제발.
질은 문설주에 기대에 문밖을 내다본다. 벚꽃이 거센 바람에 부서져 내린다. 부드러운 꽃잎이 방안으로 소용돌이쳐 들어오고, 꽃잎 하나가 내 머릿속 빈 곳으로 들어온다. 내 양손으로 내 머리를 움켜쥐며 잭은 꼭 추위 때문만은 아닌 이유로 잠시 몸을 부르르 떤다.
잭: (머리를 손으로 움켜쥐며, 얼굴을 찌푸린다) 방금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었어요, 작가님. 다시는 하지 말아주시겠어요?
질: 난 아직 우리의 마지막 밤을 기억해요
커다란 벚나무 아래
밤의 미풍이 우리의 벗은 몸을 말렸고,
꽃잎은 비처럼 쏟아졌죠, 우리의 몸 위로 미끄러지며
우리를 간질였어요. 우리는
충분히 배가 부른 아기들처럼 만족했죠
처음으로, 당신은 행복하다고 말했어요
여기 있게 되어서,
나와 함께 있어서
그리고 당신은 사라져버렸죠.
잭: 작가님,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요.
(자리를 떠나려던 그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왜 당신은 들끓는 수은 속으로
몸을 던져야만 했나요?
어떻게 그토록 끔찍한 방식으로 나를 배신할 수 있었지요?
단 한순간이라도 내 생각은 했나요,
의식의 마지막 깜박임이
무시무시한 스틱스강으로 지글대며 빨려 들어가는 동안에?
가끔 목 멘 소리가 섞여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높고 분명하다
잭: (정신이 나간 듯) 저에게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의 왼쪽 팔이 갑자기 공중으로 들려올라간다.
누군가가 천장에서 잡아당기는 것 같다.
잭: 이것 봐요, 작가양반. 날 놔 줘요!
그녀는 거기에 서 있다. 바람과 세월에 삭아 내린 동상처럼. 나에게도 몸이 있어, 그녀 곁에 설 수만 있다면. 아니면 최소한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을 손이라도 있다면……. 질, 내 사랑. 정말 미안해요.
잭: (숨 막힌 소리로) 질, 내 사랑. 정말 미안해요.
질: 이것은 텅 빈 나무구멍 속으로 부는 폭풍우 소리인가?
잭: (그의 얼굴은 고뇌로 잔뜩 찌푸려들었다. 그의 입이 그를 배신한다) 질, 나 여기에 있어. 내가 돌아왔어.
질: 아니면 벽 속에 둥지를 튼 송장벌레의 바스락거림일까?
잭: 내 사랑, 내 목소리가 들려?
질: 팔십 년, 팔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잭: 질, 제발 나를 봐요. 나는 여기에 있어요!
(점점 고조되는 바람소리)
굽이치는 길을 따라 오래도록 길을 걸었지
별도 없는 수많은 하늘 아래로
당신을 보려고, 오직 당신을 만나기 위해.
그러나 당신은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어. 종이 한 장 너머,
수만 수천의 말로 이루어진
반투명한 벽 너머에 갇혀…….
그리고 난 혼자서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폭풍 소리는 이제 거의 백색소음으로 들린다)
그러니, 부탁건대, 잭,
나의 꼭두각시이자 또 다른 나여,
나를 위해 연기해 다오!
그때껏 잔뜩 긴장한 채 보이지 않는 힘과 싸우다 막 포기를 하려던 잭의 몸이 기묘한 방향으로 꺾이고, 잭은 바닥으로 무너진다.
일곱 박자. 사이
천천히, 하나씩 뼈를 주워들 듯 몸을 일으킨 그는 마침내 완전히 제 발로 일어서지만, 그의 팔다리는 공중에 끈으로 매달린 듯 어색하다.
내 얼굴은 질에게로 향한다.
나는 내 얼굴에 영원히 매달린 히죽 웃음을 띤 채 그녀를 바라본다.
내 시선을 느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우리는 시선을 마주친다.
처음으로―
질: 내 사랑, 당신이야?
(밖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
잭 오랜턴
잭 오랜턴
그저 호박등에 지나지 않는 잭 오랜턴
폭풍이 멈춘다. 달이 구름 뒤에서 빛난다. 가장자리를 은빛으로 물들이며.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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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한국어의 과정을 거친 거라서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2. 이번에도, 영문버전에 관심이 있으시면 ^^
3. 로맨스로 분류해서 죄송합니다…. 만, 살짝 광기어린 로맨스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