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애가

  • 장르: 판타지 | 태그: #눈마새 #팬픽
  • 평점×130 | 분량: 216매
  • 소개: 케이건과 여름, 극연왕과 오라비의 이야기를 다루는 『눈물을 마시는 새』 팬픽션입니다. 원작과 비슷한 수준의 고어/유혈 묘사를 포함합니다. 더보기

숲의 애가

미리보기

흑사자의 노호가 광야를 진동하고
맹진하는 거목이 보답할 증오를 약속하는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고대의 전설이 살아 춤추는 시대에

한 남자가 숲속을 걷고 있었다.

1

오라비가 찾아왔다. 돌아온 지 이틀 만이다. 들어서자마자 대뜸 절을 올리기에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뭘 하는 겁니까?’
‘신은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폐하. 부디 강녕하십시오.’
‘떠나다니요. 난데없이 무슨 말입니까?’
오라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 그 말뜻을 깨달았다. 헛웃음이 났다.
이것이 오라비의 답인가. 왕족의 의무를 저버린 채 적의 입장을 대변하고, 전사의 본분을 망각한 채 화친을 부르짖고, 아무도 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자 모든 도리와 책임을 외면하며 도망치는 것이 오라비가 내린 선택이란 말인가.
나약하고 비겁한 자. 이런 자를 오라비랍시며 따랐던 내 유년조차 경멸스럽다.
‘그래, 가.’
그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떠나. 우리의 어머니가 물려준 나라를, 영웅왕이 세우고 선조들이 갈고 닦은 나라를, 우리의 백성이 피를 흘리며 지킨 나라를, 겁난다고 동생인 내게 떠맡긴 이 나라를! 나 혼자 아등바등 붙들게 내버려두고 마음대로 가. 도망쳐서 세상일에 눈감고 귀 막고 평화롭게 살아. 그 대신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왕으로서 내가 오라버니에게 무슨 명령을 내릴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오라비는 끝내 말없이 물러갔다. 영민한 전사 하나가 그를 따라가 감시하오리까 물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답했다.
―전란 중에 소실되어 현전하지 않는, 현대어로 번역된 극연왕의 436년 기록 中

하늘을 까맣게 뒤덮은 먹구름이 북쪽으로 올라와 숲의 머리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구름은, 그러나 보다 남쪽에서 그러했듯이 세찬 빗줄기를 쏟아 붓지는 않았다. 숲의 두꺼운 지붕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풍성한 수관에 떨어진 빗방울 중 오직 일부만이 다시 굵은 물방울을 이루어 나뭇잎 틈새를 뚫고 지상으로 도달하는 길을 찾아냈다. 톡, 토독, 톡, 톡. 풀과 바위, 흙과 나무뿌리를 퉁기는 빗방울 소리는 무규칙성에 담긴 거대한 규칙을 노래하는 가야금 연주 같다.
빗방울은 사냥꾼의 콧잔등과 어깨, 손등 위로도 떨어졌다. 사냥꾼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한 비였기 때문이다. 숲의 지붕이 얼마나 튼튼한지 익히 아는 사냥꾼은 이 정도 양의 비는 자신의 행로를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고, 따라서 성긴 빗방울이 콧잔등과 어깨, 손등을 적시도록 내버려둔 채 숲속의 한 지점을 주시했다. 숲은 설익은 밤에 잠겨 있었지만 사냥꾼의 밝은 눈은 어둠 속에서도 희끄무레하게 움직이는 인영을 알아보았다. 사냥꾼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는 어떤 인간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 깊은 숲은 인적이 드문 편이다. 길이 험준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없으며, 맹수의 출몰이 잦은 탓에 나무꾼들도 들어오기를 꺼린다. 간혹 타지에서 사냥꾼이 흘러들어오는 일은 있지만 남자의 행색은 어떻게 보아도 사냥꾼의 그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냥꾼도 활이나 창 대신 일 미터가 족히 넘는 대검을 땅에 끌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검사라도 그러지는 않는다. 날붙이 무기를 그런 식으로 다뤘다가는 얼마 안 가 새 무기를 구해야 할 테니까. 하지만 남자는 칼날이 상하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올바른 무기 관리법 같은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남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먼발치에서 남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 사냥꾼은 여행자가 길을 잃고 숲속으로 잘못 들어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여행자가 강도를 만난 후 길을 잃은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남자는 커다란 칼 외에 여행에 필요한 소지품이라고는 일체 지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이 근방에는 강도가 없으므로 남자가 강도를 당했다면 꽤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치고 느린 걸음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멈추거나 두리번거리는 법 없이 꾸준히 숲 안쪽으로 들어왔고, 깊고 어두운 숲속을 혼자 헤맨다는 사실에 겁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사냥꾼은 남자가 좀 더 겁내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머잖아 진짜 밤이 찾아오면 칠흑 같은 어둠이 숲을 뒤덮을 것이다. 한밤중에 홀로 맹수를 맞닥뜨리면 노련한 사냥꾼이라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 검을 제대로 들 힘도 없는 남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냥꾼은 망설였다. 다른 사람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은 사냥꾼과 거리가 멀었고, 사냥꾼의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남자를 그대로 두고 떠나기에는 사냥꾼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결국 사냥꾼은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사냥꾼은 남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여긴 외지인이 혼자 다닐 만한 곳이 아닌데.”
사냥꾼은 남자가 칼자루를 움켜쥐며 칼을 끌어당기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사냥꾼의 차림새를 살핀 남자는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얼마간 안심한 듯했다.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그 음성은 비교적 차분했다.
“당신은 아마도 키탈저 사냥꾼이겠군요.”
사냥꾼은 눈썹을 치켰다.
“기다렸다는 투로 들리는군.”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우리를 왜?”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칼자루를 쥔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지만 공격 의사의 표현이 아니라 망설임의 표현인 것 같았다.
상대가 침묵하는 동안 가까이에서 그를 관찰한 사냥꾼은 남자가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었다는 것, 그러나 의복의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볼썽사나운 몰골을 하고 있다는 것,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 곳곳에 핏자국이 배어 있다는 것 등을 알아볼 수 있었다. 희미하게 나던 피 냄새가 착각이 아님을 알게 된 사냥꾼은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아마도 남자는 숲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한바탕 비를 맞은 듯했다. 피 냄새를 멀리까지 풍기던 것 또한 습기 때문일 것이다.
한참을 주저하던 남자가 어렵게 말문을 떼었다.
“당신들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남자는 눈을 들어 사냥꾼을 보았다.
“방법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냥꾼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우린 사교적인 사람들은 아닌데.”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온 겁니다.”
남자가 고개를 조금 떨어뜨렸다. 남자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냥꾼은 그 미소가 자조보다는 체념에 가깝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가 꺼져 가는 잿불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달리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사냥꾼이 한 손을 펴 보였다.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남자가 어리둥절해하자 사냥꾼이 설명했다.
“미안하지만 무기를 든 사람을 등 뒤에 매달고 마을에 갈 수는 없어. 당신도 이해하겠지.”
“무슨…… 날 당신들의 마을로 데려간다는 말입니까?”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니까.”
남자는 이해했다. 하지만 사냥꾼의 말대로 검을 넘기지는 않았다. 남자가 주저하는 모습을 본 사냥꾼은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돌려준다고 약속하겠어. 상대의 신뢰를 얻으려면 먼저 신뢰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짧지 않은 시간을 지체한 후 남자는 사냥꾼에게 다가가 칼자루 방향으로 칼을 내밀었다. 어쨌든 남자는 어려운 부탁을 하는 입장이었고 사냥꾼의 요구는 정당했다. 쌍신검은 크기만큼이나 무게도 상당했지만, 사냥꾼은 어렵잖게 칼을 받아 갈무리하고는 남자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엔 남자도 무슨 뜻인지 곧바로 이해했다.
능숙하게 숲을 타는 사냥꾼의 뒤를 따르며 남자는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사냥꾼은 남자에게 이름이나 신원을 묻지 않았다. 남자는 물으려던 말 대신에 다른 질문을 꺼냈다.
“나는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사냥꾼은 뒤돌아보지 않은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여름.”

키탈저 사냥꾼 마을은 키탈저 숲에 위치한다. 그 사실은 키탈저 사냥꾼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널리 알려져 있지만, 외지인이 그들의 마을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 숲이 넓고 험한 데다가 마을은 숲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찾아가려고 해도 길을 잃기 십상이다. 외지인을 살갑게 맞이하는 마을이 아닌 까닭에 찾아가려는 이가 많지도 않다. 키탈저 사냥꾼이 바깥사람과 접촉할 때는 주로 사냥꾼들이 외부의 마을이나 도시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랜 세월 숲속에서 살아온 키탈저 사냥꾼들은 상당 수준의 자립적인 생활을 영위했지만 그들도 외부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해다 쓰는 일은 있었고, 이 때문에 사냥꾼들은 종종 고기나 가죽, 질 좋은 수렵 도구를 팔러 나가곤 했다. 때로는 사냥이라는 용역 자체도.
키탈저 사냥꾼 여름이 남자를 데려간 곳은 바로 그 마을이었다. 남자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것이 분명한 몰골을 하고 있었으므로 사냥꾼들은 남자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모닥불에 몸을 말리며, 남자는 이따금 우울한 눈을 들어 마을 중앙에 둘러 모인 사냥꾼들을 보았다. 거리가 떨어져 있었기에 남자는 사냥꾼들이 나누는 대화를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남자에게 검을 돌려준 여름 또한 회의석에 함께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좀 찜찜합니다.”
젊은 남자 사냥꾼이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 자가 진실을 말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왕자를 죽이고 검을 빼앗은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강도가 저런 옷을 입는다고?”
“이를 테면 그렇다는 거지요. 어쩌면 저 검이 위조품인지도 모르고요. 제 말은, 거짓을 말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이야기가 너무 황당하잖아요.”
“거짓은 아닐 거야.”
남자를 데려온 경위를 설명한 이후로 줄곧 침묵을 지키던 여름이 말했다.
“속일 작정을 했다면 오히려 그럴싸한, 우리의 호감과 신뢰를 얻기 쉬운 이야기를 들려주었겠지. 영웅왕의 검을 훔쳐 나가들에게 바치려고 했다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젊은 남자 사냥꾼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참석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여름을 향해 말했다.
“여름. 너는 저 자의 요청을 듣고 이곳으로 데려왔지. 그건 네가 저 자를 받아들이는 것에 찬성한다는 뜻이겠지?”
“물론 그래요.”
“삼가 이유를 듣고 싶군.”
여름은 무표정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선, 정황으로 볼 때 저 자의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왕궁에서 젊은 왕자가 사라졌다는 소문이 있었고, 나이로 보나 차림새로 보나 저 남자는 조건과 일치하죠. 영웅왕의 검이 함께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지만, 그야 왕궁에서 함구했을 겁니다. 저잣거리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
회의석에 앉아 있던 사냥꾼 몇 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이 이어서 말했다.
“만약 왕자가 아닌 자가 우연히 바라기를 손에 넣었다면, 바라기의 잘 만들어진 위조품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인데, 장물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팔아넘기는 겁니다. 구매 희망자를 찾기는 어렵지 않지요. 도난품을 되찾고 싶은 왕궁도, 좋은 물건을 취급하고 싶은 장물아비도, 왕국의 콧대를 눌러주고 싶은 나가들도 영웅왕의 검을 원할 테죠. 팔지 않을 거라면 바라기의 효용 가치는 많이 낮아져요. 기껏해야 벽에 걸어 자랑하거나 영웅왕의 검을 앞세워 기로틴 이후로 없었다는 반란 세력을 일으키는 것 정도인데, 숲속을 헤매거나 키탈저 사냥꾼이 되는 것은 그런 목적 달성에 도움이 되지 않죠. 따라서 우리가 판단해야 하는 것은 저 자가 도망친 왕자가 맞는지가 아니라, 도망친 왕자를 우리가 받아들일지의 여부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되더군요.”
“그게 뭐지?”
“우리가 저 자를 받아들인다면, 역사상 최초로 드라카와 케이건이 손잡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죠.”
좌중이 침묵했다. 참석자들 중 드라카와 케이건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미심쩍은 투로 말했다.
“달아난 흑사자를 흑사자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흑사자가 아니라면 얘기는 더 간단해요. 갈 곳 없는 사람을 거두고 사냥꾼 하나를 얻는 거니까. 아라짓 왕족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라면 제법 쓸 만한 사냥꾼으로 만들 수도 있겠죠.”
“만일 불순한 의도로 우리에게 접근한 거라면?”
“그것도 두고 보면 알겠지만, 그땐 우리 방식으로 처결하면 돼. 도망자 신세인 왕자가 우리에게 어떤 해를 가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글쎄. 왕자라면 왕궁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네 말대로, 검과 사람 모두 찾고 있을 텐데.”
“저도 그 생각을 해봤죠.”
여름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언가를 내주고 싶지는 않더군요.”
여름의 의도가 분명해졌다. 여름은 왕가와의 화합 가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사냥꾼의 오만한 긍지를 지킬 것을 말하고 있었다.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모순은 그들이 숭상하는 힘이기도 하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회의석을 둘러보았다.
“여름의 의견에 이견이 있는 사람이 있나?”
참석자들은 공감하거나 생각하는 표정, 또는 회의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우두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정되었군.”
모닥불을 쬐던 남자는 시야가 가리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여름과 다른 사냥꾼 하나가 그의 앞에 다가와 있었다. 회의를 주재했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였다. 여름은 당신이 하라는 표정으로 우두머리를 쳐다보았다. 우두머리 사냥꾼이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젤키버다. 수장을 맡고 있지.”
자신을 소개한 아젤키버는 남자에게 간결한 어조로 말했다.
“용의 자손이 된 것을 환영하네.”

2

여전히 바라기를 찾지 못했다. 오라비 또한. 수색대를 지휘한 전사는 송구스러워하며, 왕자가 변복을 하여 숨어 지내리라고 짐작된다는 보고를 해 왔다. 그야 그럴 것이다. 오라비는 순진하지만 우둔하지는 않으니까. 지상 유일의 왕이요, 저 용맹한 전사들을 거느리고도 사람 하나를 찾아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우습게도 느껴진다.
수색이 난항을 겪는 데엔 수색 대상을 공공연히 밝힐 수 없다는 까닭도 있다. 조신들 사이에서는 영웅왕의 검을 훔쳐 달아난 왕자에게 반역죄를 물어 널리 수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왕자가 나라를 배반했다는 추문이 퍼진다면 왕실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이요, 전사들의 사기가 크게 꺾이고 민심이 동요할 것이다. 어느 틈에 적이 침공해 올지 모르는 이때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전날 전사의 말대로 그를 감시했어야 했으리라. 일찍이 사도의 간언대로 그를 유폐시켰어야 옳았으리라. 모두 뒤늦은 후회다.
일몰 무렵 전령이 달려와 전선의 위급함을 알렸다. 적이 근래에 보지 못했던 대군을 이끌고 올라와 남쪽의 도시 세 곳을 위협한다고 했다. 어리석은 오라비도 오라비거니와, 저 비늘 덮인 괴물들이 아니었다면 이같은 일은 애당초 벌어지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니 새삼스레 괘씸하게 생각되었다. 장수들을 불러 모아 영을 내렸다.
‘상장군은 선발군을 이끌고 가 다급한 곳을 도우라. 짐은 대장군과 함께 친정하겠다.’
어마마마도, 아바마마도, 하나뿐인 형제마저 나를 떠나간 지금, 내게 남은 것은 나와 함께 싸우는 전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할 적뿐이다. 영웅왕의 검은 내게 없으나 나와 생사를 같이 해온 전사들은 나를 따르리라.
‘목표는 구원이 아니라 말살이다.’
―전란 중에 소실되어 현전하지 않는, 현대어로 번역된 극연왕의 436년 기록 中

왕자는 토끼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자가 토끼를 처음 본 것은 아니다. 지난 며칠간 왕자는 왕국의 제일가는 사냥꾼들에게서 사냥하는 방법을 배웠고, 연습 대상 중에는 토끼도 있었다.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고 상식에 의거해 왕자는 토끼를 사냥하려면 지금이 알맞은 때라는 것을 알았다. 토끼는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왕자를 발견하지 못한 채 식사에 매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자는 두 팔로 무릎을 감싼 자세로 산비탈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사냥이 아니라 감상 같군요.”
왕자는 놀라지 않았다. 사냥꾼들의 조용한 발소리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소리를 듣고 두 사람을 발견한 토끼가 놀라 풀숲으로 달아났지만 왕자는 원망하는 기색 없이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여름?”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