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령관은 울화통이 터지고 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어쩌면 자신의 자리가 위험해질 때까지 계속 터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는 막사를 나와서 멀리에 그 원인을 바라봤다. 가파른 산 중턱에 거대한 요새가 자리하고 있다. 어스름밤이 되어 불빛이 드문드문 보이는 요새에는 작은 그림자가 오가는 것이 보였다. 원래 사령관은 이 주둔지의 막사가 아니라 저 요새의 사령관실에 있어야 했다. 야만족. 사령관은 인간보다 작고 힘이 약한, 심지어 마법조차 갖지 못한 야만족에게 어이없이 저 요새를 빼앗겼지만, 벌써 한 달 가까이 요새를 되찾지 못하고 있다.
열린 막사 입구 너머에는 전령의 임무를 받고 다녀온 두 명의 병사가 각자 자신이 들고 있는 편지를 붙잡고 사령관의 눈치를 보며 자기들끼리 쑥덕이고 있다. 사령관은 그들이 가져온 내용을 곱씹어보았다.
첫번째는 요새로부터 온 것이다. 그 삐뚤빼뚤하게 갈겨쓴 듯한 글을 보면, 요새를 차지하고 있는 야만족들은 확실히 인간의 문자와 언어를 이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상의 지능을 갖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요새를 돌려받기 위한 조건이 너무 터무니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인간끼리 치르고 있는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는 요새가 필요하다. 하지만 야만족들이 원하는 조건을 치르고 나면 전쟁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힘들어질 것이다. 양보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다. 힘으로 되찾을 수 밖에.
하지만 두번째 편지는 그에 대한 희망적이지 않은 소식이다. 애초에 저 요새가 요새로서 가치가 있는 이유는 병사와 말과 수레로 떨어뜨릴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마법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마법사는 이번에도 기다려달라는 답변을 보내온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두더지 같은 놈들.”
야만족은 땅굴을 이용했다. 인간이 흉내낼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땅굴을 쉽게 뚫을 수 있는 토양도 아니다. 실제로 인간과 두더지를 섞어놓은 것 같이 생긴 그 야만족은 자신의 몸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구멍 수십 개를 산 아래에서부터 뚫고는 머릿수를 믿었는지 창 하나씩 들고 들이닥쳤다. 내부에서부터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수비대는 요새를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인간끼리의 전쟁에만 가치가 있는 요새라는 것 때문에 이런 경우를 예상하지 못한 사령관을 탓할 수는 없었는지, 왕은 그에게 요새를 되찾을 한 달의 유예를 주었다. 그리고 하나를 덧붙였다. 되찾을 수 없다면 적도 요새를 쓸 수 없게 만들어라. 한 달 내에 조치를 취하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 야만족이 요새에 적을 들여보낼 수도 있다.
“여우 같은 놈.”
사령관은 첫 한 주의 공성으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힘으로는 요새를 되찾을 수 없다. 그래서 부대의 마법사에게 그 후로 계속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땅굴을 뚫어 요새 벽을 무너뜨린다거나, 요새에 독이나 저주를 풀어 아군도 야만족도 적도 쓸 수 없도록 오염시킨다거나하는 방법을 말이다. 하지만 마법사는 사령관이 제안하는 방법이든 자신이 떠올린 방법이든 마법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요새에 가까이 가야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위험한 짓은 하고 싶지 않다고. 사령관은 마법사가 군에 속해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랐지만, 마법사는 한 명 한 명이 왕의 직할 부대이기 때문에 사령관이 자신에게 명령할 수 없다는 것만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났을 때 마법사는 방법이 있을 것 같다며 시간을 좀 달라고 했다. 그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도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고 할 뿐이었다. 다만 기다려달라고, 그 이야기를 할 때 마법사의 눈이 반짝인 것을 사령관은 놓치지 않았다. 마법사란 족속은 군인과, 아니 보통 인간과 다른 것에 가치를 두는 정신나간 괴짜들 뿐이라는 생각을 새삼 떠올렸다.
이제 사령관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야만족은 설득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마법사는 자신이 군에 속해있다는 개념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사령관은 지끈거리를 머리를 붙잡고 전령들을 복귀시켰다. 밤은 점점 깊어지고 사령관의 고민 역시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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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님!”
동틀 무렵, 거대한 회색 유령이 아침 회의 중인 막사로 뛰어들었다. 아니, 회색 후드 케이프를 뒤집어 쓴 장신의 남자가 막사로 뛰어들었다. 주둔지에 어울리지 않는 불편해 보이는 복장을 하고 돌아다닐 부류는 딱 하나 뿐이다.
“스승님께서 빨리 거처로 와달라고 하십니다.”
마법사의 제자는 재빨리 자기 말을 마치고 나가 자기 말을 타고 달려가버렸다. 그의 눈이 보름 전의 마법사처럼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령관은 회의 중이던 부하들을 이끌고 주둔지 외곽의 마법사 구역으로 이동했다.
마법사의 막사 앞에는 알 수 없는 도형이 그려진 공터가 있었고, 도형 위 여기저기에는 알 수 없는 물건이 흩어져 있었다. 그나마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도형의 제일 바깥이 원형의 테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알아볼 수 없는 글씨와 그림이 그려진 거대한 세 개의 흑판, 좁은 탁자 두 개 위에 각각 하나씩 펼쳐진 큰 책 정도이다. 늙은 마법사는 공터의 한가운데에 서서 눈을 감은채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법사의 다른 제자들은 흑판에 정신없이 무언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눈을 반짝이는 제자는 그런 그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곧 시작될 겁니다.”
“뭐가 말인가?”
사령관은 다른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마법사와 그의 제자들이 하는 행동과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답답했다. 마법사의 제자는 정신이 든 듯한 표정을 하고 사령관을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제가 흥분했나 보네요. 지난 보름동안 스승님이 준비하신 마법이 이제 요새를 파괴할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