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들

  • 장르: 로맨스, 역사 | 태그: #신분차이 #혁명 #대필 #필사 #손가락 #백정 #노오력
  • 평점×49 | 분량: 95매
  • 소개: 귀족의 아들인 ‘나’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혁명을 하려다가 누군가의 밀고로 체포당한다. 내가 결혼하려 했던 백정의 딸도 그 무렵 죽었다. 나는 감옥에서 그녀... 더보기

혁명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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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실패했다. 아니, 실패도 하지 못 했다. 혁명을 하기도 전에 조직이 와해당했다. 누군가 우리를, 아니 나를 밀고했다. 세상은 우리의 혁명을 ‘철없는 귀족 자제들의 허황된 내란음모 사건’이라고 했다. 재판도 없이 나는 수감되었다. 아무도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간수가 나를 끌고 가서 심문실의 의자에 팔다리를 묶을 때까지.

 

 

 

심문실로 들어오는 자를 보고서야 누가 밀고자인지 알았다. 그에게 침을 뱉었다. 침은 바닥에 떨어졌다. 놈은 신발로 침을 쓱쓱 문지르더니 그 신발을 벗어 들고 내 뺨을 후려쳤다. 아파서인지 수치스러워서인지 서러워서인지 눈물이 핑 돌았다. 놈은 아무 표정 없이 신발을 도로 신었다. 눈물을 감추려 소리를 질렀다.

 

“인간백정놈! 네 놈이 밀고했지!”

 

놈이 신발을 다시 벗으려 했다.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놈이 웃었다.

 

“내 덕분에 내란소요죄가 되기 전에 내란음모에서 발각되어 형량이 줄었는데 왜 배은망덕하게 구나. 참전 경험이 있는 노비가 아니라 책만 읽던 도련님들이 무장혁명을 하시겠다길래 이게 실패하리란 걸 직감했지.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있는 세상을 만들겠단 자들이 노비를 모시고 혁명을 하기는 싫다고?”

 

“그걸 어떻게 알았지? 혹시…”

 

“누이가 고했다.”

 

“아니야…설마…네 누이는 나를 연모했는데…”

 

“연모했다고…그럼 왜 자결했을까…”

 

“오라비가 혼인을 반대했다고 했었지. 친오라버니도 아니면서!”

 

“왜 반대하는지는 말을 안 했는가. 연모했다면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결했다.

 

“강간이었나.”

 

“누이가 그랬나…아니야…”

 

“지체 높으신 도련님이 몸을 취하시겠다는데 천한 백정의 딸이 어찌 거부할 수 있었을까.”

 

“우리는, 혼인할 사이였어…그런데 오라버니가 반대한다고 해서, 그 오라버니란 작자와 사람들이 의심하는 그런 관계냐고 했는데…”

 

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분명히 세간의 소문을 들었을 텐데도.

 

“그 소문대로였다면 내가 양부의 사위가 되었겠지.”

 

 

 

내 앞에 있는 이 놈은 근본을 모르는 놈이었다. 어느날 도축장에 나타나 소의 가죽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고 뼈를 동강내는 광경을 지켜보더니 일을 배우고 싶어했다. 백정이 기초만 알려뒀는데도 금방 소 한 마리를 깔끔하게 해체했다. 뼈에는 남은 살점이 없고 내장과 부산물도 완별하게 분리되었다. 경탄하는 백정에게 그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라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내없이 딸과 둘이 살던 늙은 백정은 그에게 딸과 혼인하여 같이 살며 가업을 잇기를 권했다. 놈은 찾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혼인은 못 하겠고 대신 백정을 아비로 모시며 그 딸에게 오라비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찾는다는 사람이 원수인지 가족인지 정인인지 묻자 그저 아득히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릴 뿐 말이 없었다고 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 놈이 싫었다. 말수가 적은 것은 음흉해 보였고 과거를 밝히지 않는 것은 수상했고 글을 아는 것은 의심스러웠다. 지아비가 아니라 오라비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하는 누이에게 놈은 도련님이 왜 글을 가르치지 않았냐고 따져 물었다. 아무말도 못 하는 애한테 직접 한 글자씩 가르치며 나와의 혼인을 반대했다. 놈이 쓴 글자는 수려하고 문장은 유려했다. 멸문한 집안의 후손인가 했는데 그러기엔 어렸을 때부터 일한 사람처럼 손마디가 굵고 손톱이 뭉뚝했다.

 

“소자는 저 백정놈이 꺼림칙합니다.”

 

“뭐 어떠냐. 백정일 뿐인데.”

 

아버지는 이 놈이 우리 집안 고기를 다루는 백정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내 말을 무시하셨다. 그 때 놈을 내쳤다면 나도 지금 여기 있지 않았을까.

 

“날 잡으려고 누이를 이용한 저열한 놈,”

 

놈은 내 말을 끊었다.

 

“난 네 놈이 내 누이를 이용해먹는 걸 막은 거다. 네놈들에게 천한 것과의 혼인이 어떤 의미였나.”

 

“난 그 혼인을 위해 부자지간의 연도 끊으려고,”

 

“네놈의 무리, 자칭 혁명가들 중에 귀족 집안 따님들도 있었지. 네가 그 혼인을 했다면 네 놈의 아내와 그, 귀족 따님의 관계는 어떻게 되려나?”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순수하고 무지한 천민의 딸과 혼인하고 이 결합을 반대하는 구시대 부모와 절연하고 새 시대를 연다…가 우리의 ‘혼인강령’ 이었다. 부모들은 당연히 반대하는 혼인이었다. 부모들은 파혼할 때까지 재정지원을 끊었다. 무능하고 허황된 아비와 순종적이고 희생적으로 혁명가와 집안을 돌보는 어미와 어미의 신분은 싫고 아비의 집안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출생신고조차 되지 못 하는 사생아나 다름없는 자식들이 이런 혼인의 실체였다. 지아비는 아내가 무식하여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했고 아내는 생계를 꾸리다가 지쳐서 서로 외로워졌다. 지아비들은 아내 대신 ‘사상을 공유하는’ 혁명동지들과 토론을 했고 뒷풀이는 술자리로 이어졌고 귀가하는 길에 혁명동지 사이에 불륜이 일어나기도 했다. 동지들은 결혼상대는 아니었다. 뒷담화의 대상이었다. 누구랑 누구랑 갈 데까지 갔다더라…사내들은 서로 자기가 더 깊은 단계까지 갔다고 허세를 부렸고 소문을 부풀렸고 그 상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란하고 난잡한 탕녀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동지들과는 달랐다. 나는 정말로 놈의 누이와 혼인하려 했다. 왜 그랬을까. 그게 ‘혁명’이라서? 왜 그랬을까. 놈의 누이가 날 ‘존경’해서? 왜 나였을까. 내가 아랫것들에게 친절해서?

 

“네 놈이 혁명과 변혁을 논하는 것에 반했다지. 너는 달랐다고. 아랫것들 멸시하지 않고 인간으로 대해 줬다고. 그런 애한테 글자도 안 가르쳤나. 천민은 혁명의 주체가 되지 못 하는 게 그게 무슨 평등이라고. 네놈들의 사상은 다 허상이고 허영이었다.”

 

“난 노비문서를 불태웠어!”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먹여주고 재워주던 노비를 무작정 ‘해방’시키면 걸인이 될 수 있는 자유를 준 건가. 네 아비는 좋으시겠군. 아들의 치기 덕분에 집도 밥도 안 주고 노비를 헐값에 부릴 수 있게 되었으니.”

 

“하지만 예전에는 노비의 자식은 잘나도 노비이지만 원하면 뭐든지 될 수 있는 세상이…”

 

“원하기만 하면 되나?”

 

“공부하면, 노력하면…”

 

“당장 다음 끼니 걱정하는 처지에 글자가 눈에 들어올까. 그리고 노력하면 되는 세상은 이미 열렸지.”

 

놈은 내 무릎을 밟고 내 턱을 잡아 올렸다. 내 얼굴에 놈의 숨결이 느껴졌다. 역겨웠다. 고개를 돌리려 하자 놈이 무릎을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내가 그 새로운 세상의 증거다. 백정이 관리가 되었다고.”

 

“기회주의자!”

 

“네놈도 기회를 잡고 싶어하지 않았나. 왜 시대 탓을 하고 윗분들을 욕하나. 노력은 하지 않고.”

 

백정에서 말단관리면 대단한 출세긴 하다. 예전 같으면 꿈만 꿔도 불경하다고 쳐죽였을 일이다.

 

“이 자리에 만족해? 이민족대신 손을 더럽히는 것 따위…”

 

“내게 안정된 현재와 보장된 미래를 준다면 그 나랏님이 누구든 상관없지 않나. 그러니 너희들도 이민족을 몰아내자 가 아니라 괜히 혁명을 하자고 하는 거지.”

 

귀족들이 서로를 역적으로 몰아 죽이던 세상에서 노비들과 소작농들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다. 파종할 때와 추수할 때의 지주가 달랐던 시절에 그들은 묵묵히 땅을 갈고 소작료를 떼고 세금을 냈다. 땅주인이 바뀐다고 흉작이 풍작되는 거 아니고 콩 심은 데서 팥 나는 거 아니라고들 했다. 인품 훌륭한 어르신보다 소작료 덜 걷는 어르신이 낫다고들 했다. 그런 무지렁이들이 나라의 주인이 바뀌었다고 슬퍼하거나 분노할 리 없었다. 그들은 효의 세계에 살았고 우리는 충의 세계에 살았다. 아니, 그건 충도 아니었다.

 

 

 

궁이 불타고 후사 없는 왕이 사라지고 얼마 되지 않아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상을 내릴 왕이 없어진 지방관리들은 순순히 곳간을 열고 기녀들을 내 주었다. 침략군은 약탈도 강간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평화롭게 수도로 행진했다. 지방관아마다 들러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궁에 다다랐을 때 불탄 궁궐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내 아버지를 비롯한 대소신료들은 ‘국토와 백성의 안녕을 위해’ 공손히 이민족의 왕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아들들은 아버지들을 비난했다. 싸워 보지도 못 하는 비겁한…아버지들은 아들들에게 물었다.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느냐. 왕을 위해? 왕조는 멸문했다. 백성을 위해? 민의는 왕이 누구건 상관하지 않는다. 아들들은 답을 찾아냈다. 나를 위해. 내 출세길을 위해. 이민족의 왕이 내려줄 벼슬과 재물을 기대해 보려고. 그러나 이민족의 왕은 적국의 왕에게 궐문을 열어 준 자들에게 국가의 요직을 맡기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네 나라에서 자기네 귀족들을 데려왔다. 그들의 고관대작들은 관직의 끄트머리를 평민과 천인 출신들에게 선심 쓰듯 내려주었다. 그 끝자락을 잡은 자들은 지난날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신분이 강등된 자들이었다. 대대손손 노비 집안의 아이들은 그런 사정도 모르고 그저 관비의 아들이 관직에 올랐다는 성공신화만 입에서 입으로 옮겼다. 그 자리가 몇 석 되지 않는다는 것, 그나마 더 위로 올라갈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은 못 본 척 했다. 귀족의 자제들이 이전처럼 음서로 관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면 우리가 혁명을 했을까.

 

 

 

“도련님, 혁명이 뭐예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거란다.”

 

“더 나은 곳은 어떤 곳일까요?’

 

“모두가 평등한 곳이지. 누구나 시험에 통과하면 벼슬을 할 수 있는 세상.”

 

“도련님이 저 같은 것과 혼인할 수도 있는 세상인가요?”

 

내가 바라던 ‘평등한 세상’이 정말로 왔다면 그녀 대신 평등한 여인과 혼인했을 것이다. 젊은 관리가 된 나와 늙은 대신의 딸이 동등하게 혼인했겠지.

 

“우월하신 귀족 자제들이 대체 왜 평등을 논하는 건가?”

 

아마 동지들 중 단연 돋보였던 여인과 혼인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놓고 남장을 하고 다니던, 붉은 비단으로 장정한 서책을 끼고 다니던, 평소엔 과묵하지만 때가 되면 해박한 지식과 냉철한 현실인식으로 토론에서 지는 법이 없던 동지였다. 그 매력 덕분에 어느 집안 자제인지도 모르는 채로 우리의 혁명에 받아들였다. 그 여인은 동지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우리가 외치는 평등은 이민족의 귀족과 평등해져서 그들의 벼슬을 받는 것일 뿐, 아랫것들과 동등해질 평등도 아랫것들에게 우리와 같은 관직을 줄 평등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평등’이라고만 하고 그 의미는 정직하게 말하지 않는 건 기만이라고 했다. 절대다수인 아랫것들을 속여서 ‘혁명’에 성공하면 그 다음엔? 그들이 기대했던 과실을 나눠줄 수 있겠냐고. 그러지 못 하면 그들이 우리가 했던대로 ‘혁명’을 할 거라고.

 

 

 

그 말이 옳았다. 그걸 인정하면 무리에서 바보가 될까 봐 졸렬한 사내들은 모른 척 했다. 끝내 이렇게 실패할 때까지…

 

 

 

문득 따뜻하고 뭉근한 밥 냄새가 났다. 날 심문하던 놈이 국밥을 퍼 먹었다. 눈을 감고 코 대신 입으로 숨을 쉬었다. 그 놈이 반 남은 국밥에 침을 뱉고 내 코에 들이댈 때까지. 냄새가 코 속으로 훅 들어와 목구멍을 지나 내려갔다. 꿀꺽. 목울대가 움직였다. 그 놈은 내 머리를 그릇에 처박았다. 입술에 잔반이 닿고 입이 열리고 굶주렸던 혀가 정신 없이 잔반을 핥았다.

 

“개새끼.”

 

그래. 나는 개새끼였다. 별 거 아니었다.

 

“누이가 지금 네 꼴을 봤어야 했는데.”

 

그 잘난 도련님 따위. 비천하게 평등했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놈이 제 누이에게 글을 가르칠 때 사내옷을 입은 여인은 그 애의 귀에 속삭였다. 도련님을 끌어내리거나 네가 아씨가 되라고. 이 놈은 다른 쪽 귀에 속삭였다. 절대 얕보이지 말라고. 그가 너를 내려다 보지 못 하게 하라고. 놈의 누이는 왼쪽 귀에서 들리는 말을 오른 쪽 귀에 전하고 오른쪽 귀에 들리는 말을 왼쪽 귀에 전했다. 양쪽 목소리는 그 애의 입을 통해 서로를 탐색했다. 왜 그 애는 그 목소리들을 내게는 들려주지 않았을까. 그들이 붉은 비단에 써서 주고받았던 연서인지 밀서인지를 왜 내게는 보여주지 않았을까.

 

“네놈에게 보여주려 했지만 보려고 하지 않았잖나.”

 

나는 왜 그 애와 혼인하려 했을까. 예쁘고 귀엽고 날 우러러보고 그러니 혼인하면 내게 순종하고 내 자식에게 헌신적일 것 같아서. 절대 명석함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내 미래의 아내가 글공부를 할 때 소가 밭일을 해야지 경을 읽어 무엇 하겠느냐고 비웃기만 했다. 붉은 천에 글을 받아 따라 쓰고 그 천을 빨아 다시 글을 받던 일을 그저 종이를 아끼려고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게 증거인멸인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그 애도 글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다. 좋은 지아비를 만나 그를 닮은 자식을 낳고 사는 삶을 꿈꾸는 평범한 계집애였다. 그런 애를 가르치지 않은 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

 

“네놈에게 경고하려 했지만 들으려 하지 않았지.”

 

그 애는 자주 “우리 오라버니가 그러는데요”라며 말을 붙이려 했다. “도련님 혁명이 뭐예요”하며 나를 올려다 볼 때의 그 눈빛이었다. 남장여인이 “네 오래비에게 전해 다오”하며 그 애에게 글을 주던 무렵이었다.

 

“그래, 너랑 동침한다는 네 오래비가 뭐라고 하더냐.”

 

입이 걸은 아낙네들에게 대놓고 오래비와의 소문을 추궁당하던 때도 헛소문이라며 되받아 버럭대던 애가 모욕 받은 낯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문이 진실이었던 걸까. 그 후로 나도 그 애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그 애는 죽었다. 정말 자살일까. 누가 죽였을까. 그 때 의심했더라면 죽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 때는 그 여인을 곁눈질하느라 그 애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사내란 한번에 두 가지를 못 하는 족속이다. 반반하고 도도한 미지의 여인. 내 것으로 만들어 부러움을 사리라. 남장여인의 환심을 사려 혁명을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다른 동지들이 혁명을 논할 때면 냉소적으로 비판하던 여인은, 내 의견엔 토를 달지 않았다. 다만 그 애와 그 애의 소문과 소문 속의 오라비에 대해 물었다. 그 때는 내가 그 애에게 미련이 남은 건지 떠보는 거라 넘겨 짚었다. 우리의 혁명이 와해당하기 전에 그 여인은 사라졌다.

 

 

 

“저 소리 들리나. 꼭 돼지 멱 따는 소리 같군.”

 

옆방에서 신음과 비명 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울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네 덕에 체포된 동지들이 널 지옥으로 보내는 소리인데, 잘 들리나?”

 

볏을 부풀리는 수탉처럼 그 여인 앞에서 과도하게 큰 소리로 과격하게 혁명을 논했던 게 떠올랐다. 동지들이 조서에 내 이름을 썼을 것이다. 이 놈이 동지들을 고문하고 있다. 내가 주모자라고. 그렇게 허위자백하면 고통이 짧아질 거라고.

 

“나 하나 잡겠다고 누이도 죽이고 양부는 화병에 걸려 죽게 하고 정인은 배신자로 만들고…날 얼마나 증오하길래…”

 

놈이 내 머리를 툭툭 치고 턱 밑에 손을 넣어 어르고 귀를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리면 사정없이 몽둥이가 명치며 배를 찔렀다.

 

“말하는 개는 주인에게 존댓말을 해야지.”

 

이런 게 모멸감이라는 감정일까.

 

“아까 했던 말 공손하게 다시 해 볼까.”

 

“저 하나 잡으시겠다고…그 분도 돌아가시게 하고…춘부장은 화병에 별세케 하시고 정인은 배신자로 만드시고…절 얼마나 증오하시길래…”

 

“네놈은 날 얼마나 증오하길래 아내가 될 내 누이를 죽이고 부모와 연을 끊고 사모했던 여인을 실종되게 했지?”

 

 

 

부모님은 내 면회를 거부하셨다. 연좌제로 엮이고 싶지 않으니 날 호적에서 파라는 친척들의 성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친척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부모님이 먼저 고개를 돌리셨을 지도 모르겠다. 어디서 헛소리를 듣고 다니며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철부지 아들을 못마땅해 하시던 분들이셨다. 약혼녀는 죽었고 그 여인은 사라졌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처음부터 존재하긴 했을까. 이럴 줄 알았으면 고백이라도 해 볼 걸. 그 여인이 허상이고 이 모든 게 꿈이라면 그럴걸.

 

 

 

나는 재판 없이 지하감옥에 수감되었다. 먹고 자고 싸고 아주 가끔 씻고. 차라리 심문받던 때가 나았다. 처음엔 불안했고 나중엔 무료했고 지금은 미칠 것 같다. 햇빛도 바람도 없는 좁은 곳에서 맹물에 만 밥만 먹고 살자니 촉각 빼고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다. 할 일이 없어서 생각만 늘었다. 처음엔 후회했다. 자책했다. 혁명 따위. 그깟 위선. 어차피 안 될 거였다. 포기할걸. 출세 그깟 것. 집안의 재산으로 한량처럼 살걸. 원망했다. 왜 부모님은 내게 기대를 걸었을까. 왜 그 잘난 부모님들은 나라를 망치고 이민족에게 문을 열어주어서 자식들의 출세길을 막았나. 국새를 바치기 전에 자식들의 관직을 보장받았어야지. 조상신들은 제삿밥만 챙겨먹고 이럴 때 뭐하고 계시나. 회상했다. 우리의 이념은 숭고했다. 만인은 평등하다. 그러므로 이 나라의 귀족들과 이민족의 귀족들은 평등하게 권력과 부를 나눈다. 노비와 귀족은 평등하다. 다같이 시험에 응시해서 합격하는 자가 관리가 된다. 시험공부는 각자 노력한다. 노비와 농민과 상인은 평등하다. 그들이 귀족만큼 교양 있거나 계몽되어 있지 않기에 능력을 넘어서는 보상을 줄 수 없을 뿐이다.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다. 신분과 관계없이 혼인한다. 노비출신 지어미와 귀족출신 지아비의 결합을 허용한다. 그 반대는 불허한다. 어딘가 잘못되었다. 그 여인은 그걸 알았다. 그 여인은 누구길래 알 수 있었을까. 동지들이 맹목과 치기와 열정에 매몰되어 있던 그 때에. 아니다.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거울을 볼 용기가 없었을 뿐.

 

“왜 네 동지들은 면회 한 번 오지 않지? 동지 이름을 대고 풀려난 게 수치스러워서?”

 

그 놈이 감옥에 찾아와 이죽댔다. 그들이 날 배신했다. 고문을 견디기 힘들었겠지.

 

“동지들은 양지에서 잘 사는데 혼자 지하에 있으려니 무료하지 않나. 필사라도 하면서 시간 좀 죽여보지 그러나. 기왕이면 필체까지 똑같이.”

 

놈이 등불과 종이를 놓아두고 돌아갔다. 종이를 들고 있는 내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노력하면 뭐든 될 수 있으니 꿈을 크게 가지라 해 놓고 실패하면 노력이 부족했다는 세상에서 꿈을 이룰 수 있는 자리는 턱없이 적은데 하면 된다는 헛바람만 허파에 들어차니 노력하는 자는 많아지고 노력은 경쟁이 되어 노력을 직업으로 하는 학생백수만 늘어나는구나. 이 얼마나 낭비인가. 소는 소의 일이 있고 사냥개는 사냥개의 일이 있거늘 소가 투박한 발굽으로 사냥에 힘쓸 뿐 논밭을 버려두면 그 소는 백정의 칼 아래 놓이고 농사는 흉작이 될 뿐이다. 빈한한 집의 온 식구가 우매한 아들의 성공을 빌며 희생하여 끝내 실패를 맞이하여 낙담하여 더러는 투신하고 더러는 화병에 걸려 폐인이 되니 이는 일생일대의 불효로다. 재능이 없는 자가 공부를 하는 것은 계집이 사내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하며 이치에 맞지 않다. 각자에겐 각자에 맞는 재능이 있으니 공부에 능하고 그것을 뒷바라지할 집안이 있는 자만이 공부를 하고 칼이 익숙한 자는 소를 잡고 장사꾼의 기질이 맞는 자는 장사를 함이 자신과 세상에 이롭다.

 

“요새 이런 글을 쓰는 자들을 ‘논객’이라 칭한다나. 머리 좋고 글 잘 쓰는 백수들이 선동질하기 좋지. 꽤 유명해져서 저자에 책이 널렸더군.”

 

떨리는 손으로 논객의 이름을 확인했다. 굳이 백정과 사내옷 입은 계집을 끌어들인 글. 나를 아는 사람이다. 사내옷 입은 여인을 두고 나와 연적 사이였던 동지였다. 그가 우리의 혁명을 교묘하게 부정해 버렸다. 공부는 귀족이 할 테니 백성들은 자기 신분에서 벗어나지 마라는 함의로 쓴 글. 우리의 이념에 한계가 있긴 했지만 그게 지향은 아니었다. 이건 우리의 치부를 드러낸 짓이었다. 이게 나를 배신하고 풀려나서 할 짓인가. 분노가 치밀었다. 분노에 이어서 알 수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