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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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원은 두 손을 들어 피곤한 눈두덩 주위를 문질렀다. 오래된 서류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팔렸더니 어느새 붉은빛 노을이 사무실 안을 잠식하고 있었다. 전산작업으로 하면 수월할 일이었지만,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그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류철과 사투를 벌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수치가 적힌 종이를 잡고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다음 장을 집어들 때의 그 느낌들이 좋았다. 버튼 하나에 그런 재미를 포기하라는 건 말도 안 된다. 종이 냄새가 이렇게 좋건만! 그는 부러 코를 킁킁대며 그 냄새를 더 맡았다. 그런 것에 남들보다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것뿐이지 그는 일에 냉철하리만큼 신속 정확했다. 확고한 신념으로 모든 것에 완벽을 기했다. 일이면 일, 가정이면 가정. 여느 가장들처럼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을 지키려 아등바등 일을 능숙하게 처리했고, 남들보다 능력이 좋아 탄탄대로를 걸으며 가족이 호의호식할 수 있었다.

그는 오른손에 찬 금빛 롤렉스시계를 보고 아차 싶은 탄식을 뱉어냈다. 오늘은 매일 야간근무를 마다하지 않은 그가 일주일에 한 번은 가족과 꼭 저녁을 같이 하는 날이었다. 서류를 탁탁 각이 맞게 정리한 뒤 걷어 올렸던 소매를 내려 단추를 채웠다. 한겨울이 무색할 정도로 푹푹 찌는 실내 온도는 실외로 나가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산업의 발달, 인구 증가, 지속적으로 늘어가는 독소의 배설물들은 결국 팽창할 대로 팽창한 대기권을 어그러뜨렸고 그 때문에 식물들이 말라 죽기 시작했다. 망할 환경오염. 기온은 급상승했으며 바람은 급속히 잦아들었다. 겨울이라는 계절도 계절이거니와 이런 환경오염 때문에 걱정스럽게도 주변에서 푸른 식물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천대받던 잡초도 이제 귀한 이런 세상이 흉흉해지는 건 당연했다. 푹한 날씨에도 그는 휴고 보스의 검은 양복 상의를 걸쳤다. 사무실을 나서자 문밖 바로 옆에 자리한 김양의 짙은 화장이 눈에 띄었다. 덕지덕지 펴 바른 화장이 답답했지만, 그에 반해 상큼한 꽃무늬 원피스가 싱그러웠다. 이렇게 더운데도 땀 한 방울 묻어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채 웃어주었다.

“퇴근이 늦는군. 매번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아, 김양. 오늘은 이만 퇴근 하지.”

종원의 말에 그녀의 굳은 얼굴에서 해방감이 보였다. 일찍 끝난다는 만족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종원은 손을 흔들어 주고는 건물 밖을 향해 걸었다. 그는 가방에서 해묵은 미니카세트를 꺼냈다. 역시 아날로그인(人), 종원씨다. 검은빛을 머금은 투박한 사각형의 미니카세트는 거의 이십 년이 다 돼가는 고물이었다. 그러나 숙련된 손질로 웬만한 오디오보다 잔고장 한 번 없이 짱짱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아바의 노래가 흘렀다. I have a dream. 정말 명곡이다. 그는 길을 걸으며 노래를 따라 흥얼댔다.

거리는 한산했다. 기온이 올라갈 데로 가니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좀처럼 밖을 나오려 하지 않았다. 종종 보이는 사람들이라곤 필요에 의해서 이렇게 종원처럼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 일하는 사람들, 열혈 사교육에 불타는 우리 학생들, 사랑에 목마른 연인들, 종종 도를 믿어달라는 지독한 끈기의 사람들.

“if you see the wonder of a fairy tale (만약 당신이 동화 속에서만 나오는 기적을 보게 된다면)”

한산한 거리엔 종원의 굵지만, 맑은 음색의 목소리가 울렸다.

“you can take the future even if you fail(당신이 실패하더라도 미래를 가질 수 있어요)”

정말 명곡이다.

집 앞에 도착한 종원은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잠깐 맑은 음색이 들리더니 곧 적막이 흘렀다. 검지를 바짓단 위에 퉁기던 그는 밝은 화색을 내비쳤다. 화랑을 운영하는 그의 아내는 입고정리 때문에 새벽에 들어왔다. 아직 피곤이 풀리지 않아 낮잠을 자는가 싶어 열쇠를 꺼내 열쇠 구멍에 집어넣었다.

“응?”

문이 잠겨 있지 않다. 작은 의문을 가지며 그는 문을 열었다. 습관적으로 문을 잠그고 신발을 벗으면서 적막한 집 안에서 아내를 불렀다. 진한 붉은 노을빛은 어둠에 자리를 뺏겨 거실의 한구석에서 몸을 한껏 옹송그렸다. 거실 불을 밝히기 위해 스위치를 누르자 스위치는 딸깍 이는 되바라진 소리만 낼 뿐 들여오라는 전기는 나 몰라라 했다. 빌어먹을 환경오염. 종원은 옥죄었던 넥타이를 풀면서 안방으로 향했다. 거실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분침이 30분으로 이동하자 묵직한 종소리가 집안에 울렸다. 딸각. 조심스레 방문을 열자 어둑한 방 안 침대 위에 아내가 누워 있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아직 낮잠이라. 지금까지 자면 정작 밤에 잠 못 들까 싶어 괜스레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곤히 자는 아내를 깨우고 싶지 않아 옷을 갈아입고 슬며시 방을 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부엌으로 향하는데 딸의 방에서 쇼팽의 녹턴이 들렸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건전지를 아끼라! 해도 아이는 공부할 때 음악을 들어야 더 잘된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윤서는 누구를 닮았는지 곧잘 공부를 잘해 반에서 일등을 놓친 적이 없는 아이다. 욕심이 많아 남들이 배우는 거라면 자신도 꼭 배워야 했다. 그래서 학원이란 학원은 다 다니고 싶어 했고, 시간이 여의치 않자 제일 배우고 싶은 것만 배웠다. 오늘이 바이올린 학원에 가는 날이었는데, 웬일로 일찍 집에 있다. 똑똑, 방문을 두드리고 조심스레 문을 열자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딸아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공주님, 오늘은 일찍 왔네! 학원이 일찍 끝났어?”

“응.”

“숙제해?”

“응.”

“배고프지?”

“응.”

“아빠가 금방 저녁 차려 줄게. 조금만 기다려.”

“응.”

평소엔 조잘조잘 말도 많고 애교도 곧잘 부리는 아이였다. 그러나 윤서가 한 번 딴 일에 집중하면 서로의 대화는 종원이 주도하고 아이는 단답형의 대꾸로 짧게 끝이 난다. 조금 섭섭해도 그만큼 웃어주니 이래서 많은 부모가 자식 때문에 사나 보다. 딸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쇼팽의 녹턴을 흥얼대며 부엌으로 가 익숙하게 쌀을 씻고 반찬을 만들었다.

식기들이 부딪치는 덜그렁거리는 소리, 쇼팽의 음악, 괘종시계의 반복되는 시계추. 밤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