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손님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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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님은 오늘도 길목을 막아선다. 아무리 기척을 죽이고 쥐걸음으로 나가려 해도 이내 들통이 나니 환장할 노릇이도다.

“모연이 어데 가니?”

하고 은근한 목소리가 들릴라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볼일이 있어 잠깐 다녀와요.”

“그러지 말고 선생님 들어오시는 거 보고 나가라.”

“쫌. 오늘은 폭죽놀이 한다고 분주한데.”

그런다고 어디 사정을 봐줄 위인이던가. 도리어 소매를 더욱 팽팽히 당긴다.

“야, 선생님 저녁상 들일 사람이 없잖니.”

“입때껏 안 들어왔으면 먹고 오거나 거르겠다는 얘기지. 거 누님도 개의치 마요.”

“어찌 그래?”

“그럼 이번만 눈 딱 감고 누님이 상 들고 나가구려. 요새 세상에 내외합니까?”

하고 쏘아붙이니 대꾸하는 대신 누님은 어깨만 새근새근 들썩인다. 더 골려주고 싶지만 그랬다간 금세 눈가가 그렁그렁해질 테지. 그런 건 사절이다.

흥이 식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신을 벗어 차고서 방에 들어와 드러누웠다.

“제길, 그 선생은 수업을 마쳤으면 재까닥 올 것이지 끼니때마다 어델 그리 쏘다닌대.”

중학생이 되어 거처를 따로 옮겼을 때만 해도 내 생활은 퍽 풍요로웠다. 아주 홀로서기를 한 것은 아니고 바로 옆집인 누님 댁 사랑방에서 잔심부름하며 지내는 조건이 붙었지만 그것만도 어디냐. 비록 누님이나 어머니나 잔소리는 매일반이고 조카딸까지 가세해 이것저것 눈치 볼 일은 많을지언정 내 단연히 행복했노라.

그런데 금년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저 남준의라는 자가 내 영역을 침범한 탓이다.

남 선생은 오랜 유학생활을 접고 이번에 우리 동리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단다. 선생을 처음 소개받았을 때에는 형님의 벗이라기에 조금쯤 우러르는 태도 같은 것이 내게 있었다. 그러나 굳이 나를 불러다 인사를 시킨 내막이 드러나매 나는 대번 그에게 앙심을 품게 됐겠지.

“당분간 여기 사랑에서 지내게 됐으니 모연이 네가 성의껏 챙겨드려라.”

“네… 네?”

말인즉 내가 지내는 사랑방을 절반으로 갈라 윗방에 선생을 모시고 나더러는 아랫방에서 지내라는 것이다. 결벽이 유난한 선생께서 차마 더러운 하숙에서는 기거할 엄두가 안 난다나. 물론 나는 즉각 항의했으나 형님의 표정을 살피니 더 까불었다간 본가로 도로 내쫓길 공산이 있어 보이므로 적당한 선에서 꼬리를 말았더랬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쫓겨나 본전도 못 찾는 한이 있을지언정 주장을 끝까지 관철했어야 했다. 그때 비굴하게 타협한 결과 지금껏 부조리에 시달리고 있으니.

펑! 펑!

들릴 리 없는 폭죽 소리가 귓전에 어룽댄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쯤 저들끼리 시작했으려나. 오늘 저녁엔 태화도 나온다고 했는데…. 태화의 발그레한 뺨이며 콧등의 점이며 둥근 어깨를 떠올리다가 불현듯 벌떡 일어섰다.

“뭐라도 조치를 해야지, 원.”

나는 장지문을 열어젖히고 선생의 방으로 돌진했다. 등을 밝히니 가지런히 개켜진 침구와 정돈된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는 과자도 몇 봉지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옥희에게 주려는 것일 테지.

내 그저 염탐질이나 할 요량으로 주인 없는 방에 들어온 건 아니고 따로 목적이 있다.

‘우리 모연 군이 용무가 다망해 언제까지고 붙들어 두기 딱하오니 선생님께서 끼니때가 지나도 귀가치 않으시면 밖에서 식사를 하고 오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누님의 필체를 흉내 내어 쪽지를 남기면 선생의 방자한 태도도 다소 누그러지리라고 꾀를 낸 것이었다.

하여 선생의 책상 앞에 앉을 때까지도 순조로웠으나 그만 선생의 결벽 병증을 미처 고려하지 못했으니…. 책상 위에는 쪽지 구실을 할 종이는커녕 한 점 티끌도 남아있지 않았다. 책 귀퉁이라도 찢어 조달하자니 책상 모서리에 세워진 것들이란 원래 이 방에 있던 책들뿐이다. 매형 손을 탄 물건은 내가 감히 훼손할 수 없다.

사정이 여의찮으니 내 방에서 종이를 가져와야겠다. 이런 사태가 아니었어도 애초에 쪽지를 미리 작성해오는 편이 현명했겠지만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런 묘책이 있는 줄도 몰랐다. 일어나려다 말고 나는-나중 생각해보니 비범한 예지력을 발휘하여-잠시 정돈을 한답시고 비뚜름히 흐트러진 책들을 바로 세웠는데 마침 책과 책의 작은 틈새에서 수상쩍은 수첩을 발견한 것이다. 검정색의 얇은 수첩이 그림자처럼 숨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선생의 물건임을 직감했다. 옳지, 그렇잖아도 굼닐기 번거롭던 차에 잘됐군.

보려고 본 것은 아니고 적당한 쪽을 찢고자 대강 훑다보니 불가피하게 눈에 들어온 것인데 어쨌든 그것은 일기장인 모양이었다. 첫 장에 약속 장소에서 탈 없이 형님을 만났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동리에 와서 일기를 새로이 쓰는 듯했다. 나는 수첩을 조금 더 뒤적거릴지 원래 목적에 충실할지를 고민하다가 수첩을 마저 읽기로 했다. 혹여 나를 평가한 대목이 있다면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내 짐작에 선생은 본디 일기를 쓰던 사람이 아니었을 게다. 대저 일기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할진대 선생의 수첩에는 온통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고 무엇을 보고 들었다는 이야기뿐인 까닭이다. 이래서야 우리 꼬맹이가 삐뚤빼뚤 쓴 것보다 나은 점을 찾지 못하겠다. 더욱이 선생과 일절 관계없는 소문들까지 두서없이 적어놓기도 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작태인지.

그런데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빠르게 훑던 눈이 문득 멈추었다.

‘일주일 뒤. 실수 없이. 정신 똑바로 차릴 것.’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대목이었다. 작성된 날짜는 9일. 오늘이 14일이니 닷새 전에 쓴 것이다. 전후 맥락에 무관하게 툭 튀어나온 구절이라 그 의미는 도통 짐작 가는 바가 없지만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이틀 뒤잖아? 무슨 꿍꿍이야?

밖에서 옥희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필시 방 주인이 돌아온 것이다. 선생이 마당에서 옥희에게 바짓가랑이를 붙들려 시달리는 틈을 타 나는 수첩을 제자리에 꽂아두고 부랴부랴 방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모르는 척 저녁상을 가져다주니 선생도 나를 이상히 여기지 않았다.

이후 이틀간 나는 선생을 보다 면밀히 관찰했다. 표면적으로 선생은 여느 때처럼 시시풍덩한 모습이었다. 아침에는 일찌감치 집을 나섰고 저녁에는 밥때가 지나 슬금슬금 돌아왔으며 밤에는 옥희를 방에 불러 이것저것 묻고 답하며 아기자기한 시간을 보냈다. 자정 무렵까지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하다가 소등하고 자리에 누운 듯했다. 도무지 정신을 똑바로 차린 사람의 일상이라 보기 어렵다. 그래도 나까지 해이해져선 안 될 일이다.

뜬눈으로 사흘째 아침을 맞았을 때 비로소 나는 안도했다. 우려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의 뭔지 모를 계획이 무위에 그친 것이다. 어쨌든 선생도 누님도 꼬맹이도 무사태평하게 각자 자리에 있는 걸 확인했으니 홀가분하게 등교할 수 있겠다.

그런데 교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묘하게 어수선한 게 아마 무슨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얘기 들었어?”

묻기도 전에 뒷자리의 현호 녀석이 먼저 아는 체했다.

“어저께 석정명이 죽었대. 누가 칼로 찔렀다나봐.”

“석정명?”

“그 왜, 내지인 앞잡이 말이야. 대저택에 사는.”

“어저께 몇 시에?”

“글쎄, 귀갓길에 변을 당했다니까 저녁쯤이겠지 뭐.”

“누… 누가 그랬대?”

“모르지. 아직 안 잡혔을걸.”

내 생각이 틀렸다. 선생은 실수하지 않았다. 계획을 성공시킨 것이다. 내가 예상한 것과는 다른 계획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