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장한가(長恨歌)

  • 장르: 역사, 일반 | 태그: #사자개 #양귀비 #시스맨스 #당나라 #여성 #황제 #역사
  • 평점×123 | 분량: 183매
  • 소개: 당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어간 희대의 경국지색 양귀비, 그리고 태상황의 자리에 오른 사자개를 모신 한씨의 이야기. 더보기

다시 쓰는 장한가(長恨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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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황색 용포가 나부꼈다. 검붉은 하늘에 노란 구름이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지고 다시 피어올랐다.

“태상황께서 붕어하셨다.”

날카롭게 쉰 목소리가 침묵을 가르자 꺽꺽거리는 통곡 소리는 곧 물에 떨어진 핏방울처럼 황궁 전체로 퍼져갔다.

**

“태상황께 인사를 올립니다.”

이마에 붉은 점을 찍은 궁녀 두 명이 미색 옷자락을 펄럭이며 바닥에 꿇어앉았다. 그 앞에는 사자개 한 마리가 있었다. 적황색 갈기가 땅에 닿았다가 다시 허공으로 솟아오르는구나. 사자개의 끄덕임에 궁녀 두 명은 고개를 숙인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자개는 다시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정처 없는 길이었다. 여관(女官) 한(韓) 씨와 환관 서 씨 그리고 궁녀 대여섯 명이 그 뒤를 뒤따랐다.

사자개와 이를 따르는 무리가 다섯 보쯤 멀어지자, 궁녀 한 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서 있던 궁녀가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었다.

“조심해, 폐하 앞에서 무서운 기색을 보였다가는 목덜미를 물릴 수도 있다고.”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던 궁녀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등롱을 들고 있던 궁녀의 손길은 하염없이 떨렸고 등롱 안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던 촛불도 흔들림에 점멸을 반복했다.

귀가 밝은 한 씨가 궁녀의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궁녀가 조심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맹수 앞에 놓인 먹이가 몸을 사린다고 하여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먹이는 선택권이 없는 법이거늘.

사자개는 용모(龍毛)를 휘날리며 뛰어갔다. 뒤따르던 이들은 모두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앞장서 뛰어가는 저 개는, 황제의 색을 뿜어내는 저 개는 함량전(含涼殿)의 주인이자 대명궁(大明宮)의 궁주였다. 붕어한 예종(睿宗)의 뒤를 이어 태상황의 자리에 오른 개였다.

태상황이었던 예종은 황제의 어미가 아닌 황제가 되고자 한 어미의 자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살얼음판 위에서 살아온 이었다. 황제가 된 것도 어미의 뜻에 의해서였으며 황제의 자리에서 내쫓긴 것도 어미의 뜻에 의해서였다. 결국에는 누이인 태평공주와 아들인 임치왕의 손을 빌려 다시 황좌에 올랐다. 자신의 손으로 일궈낸 성과가 아니기에 예종은 황권이 없었다. 신료들과 정치를 논하는 함원전(含元殿)은 황제의 것이 아니었다. 태평공주와 임치왕의 무대였다.

권력 싸움은 끝이 없었다. 누이와 아들은 황제의 손에서 벗어난 황권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다. 황제는 자신에게 보위를 안겨준 아들에게 양위해 태상황이 되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為)’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아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허나 그것이 과연 자의였는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태상황의 뒤를 이어 태상황이 된 개라.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하나 황제는 교지를 내렸고, 교지는 곧 천명이었다. 천명을 어길 자가 누가 있을까. 천명은 모두가 따라야 하는 지엄한 법도이자 의구심을 품어서는 안 되는 자연의 법칙이었다. 교지를 내린 황제 또한 자신의 말을 번복할 수가 없어 그 명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적황색 털을 지니고 태어난 사자개는 황제가 내린 천명에 따라 황제의 아비인 태상황이 되었다.

가을바람이 불어와 코를 간지럽혔다. 사자개는 바람에 밴 향기를 맡은 뒤 오른쪽 길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은 대명궁과 흥경궁(興慶宮)을 잇는 협성(夾城)으로 이어지는 곳. 당금의 황제가 머무는 거처인 흥경궁으로 통하는 유일한 내부 통로였다.

황제가 허한 태상황의 처소는 대명궁이었지 흥경궁이 아니었다. 황제는 사자개의 출입을 허하지 않았다. 사자개를 뒤따르던 한 씨는 차오르는 숨을 고르며 큰 목소리로 고했다.

“이제 함량전으로 돌아가시지요. 약차를 드시고 주무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한 씨의 말에 사자개가 멈춰 섰다. 한 씨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갯짓을 하자 사자개는 낑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돌렸다. 한 씨가 앞장서고 개가 뒤를 따랐다. 사자개가 한 씨를 따라가면서도 뒤를 기웃거렸다.

협성이 저곳에 있었다. 일직선으로 뻗어있는 저곳은 초원을 닮은 곳이었다. 질주하고픈 자신의 본능을 일깨우는 곳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있는 네모반듯한 황궁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자개가 자신의 어미에서 어미로, 그 어미에서 어미로부터 이어받은, 자신의 몸속에 새겨진 초원의 기억을 떠올리는 유일한 곳이었다.

꼬리가 축 늘어진 태상황이 간 곳은 자신의 처소인 함량전(含涼殿)이었다. 사시사철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곳. 사자개는 눈이 쌓인 산 아래에 넓게 펼쳐진 초원에서 사는 견종이었다. 그곳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할 지경으로 바람이 쉴 새 없이 불어왔다. 적황색 갈기를 지닌 사자개가 태어나자 황제는 개의 용체를 염려해 자신의 피서 장소를 내어주었다. 어찌 되었든 자신의 아비였기에, 자식의 도리를 다할 수밖에 없었다.

사자개는 탑(榻) 위에 누워 코를 킁킁거렸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여관 한 씨는 탕완에 담긴 약차를 숟가락으로 한술 떠 후후 불었다.

“폐하. 드시지요. 약차를 드시고 주무셔야 용체가 강녕하시옵니다.”

한 씨가 숟가락을 주둥이 근처로 들이대자 사자개는 혀를 내밀어 약차를 핥았다. 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개를 휙 돌리고선 킁킁거렸다.

“감초를 이미 많이 넣었습니다. 더 넣어서 달이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되오니 그냥 드시지요.”

한 씨의 거듭된 청에도 태상황은 묵묵부답이었다. 애초에 말을 할 수 없는 몸이 아니던가. 한 씨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탕완에 도로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주무십시오. 노비는 물러가겠습니다.”

한 씨는 뒷걸음질하며 함량전 정전(正殿) 안을 밝히는 석등을 차례차례 불어 껐다. 어둠이 바람처럼 몰려와 정전을 뒤덮었다. 궁녀들은 한 씨가 나올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었고, 한씨는 정전을 나오고 나서야 허리를 펼 수 있었다.

함량전 환관이 한 씨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하였다.

“장생전의 고공공(高公公)이 드셨습니다.”

고력사를 칭하는 말이었다. 고력사가 왔다는 이야기에 한 씨는 깜짝 놀랐으나 아무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서두르는 발걸음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한 씨는 한달음에 함량전 밖으로 나갔다. 지체하였다가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

함량전의 화려한 두공 밑에 머리카락이 희끗한 고력사가 서 있었다.

“고공공께 인사드립니다.”

한 씨가 고개 숙여 인사하자 고력사는 한 씨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자신을 기다리게 해 불만을 품은 건 아닐까. 한 씨는 고개를 숙인 채 마른침을 삼켰다.

고력사가 누구인가, 황제의 최측근이자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양 씨 집안의 협력자가 아닌가. 천재라 칭송받던 세간의 기인(奇人) 이백마저도 취기에 고력사에게 자신의 신발을 벗기게 하였다가 관직 길이 막히지 않았던가. 옛말에 ‘성주신보다 조왕신’이라 하였으니. 황제보다 더 무서운 이가 황제를 보필하는 환관인 고력사였다.

한 씨는 한참 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래도 좋다는 윤허가 없었기에. 한 씨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고력사의 목소리를 기다렸고, 고력사는 그런 한 씨를 훑어보며 콧방귀를 내뀌었다. 모시는 주인이 함량전의 그분이라 그러할까. 그 모습이 주인의 명 없이는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개와 같구나. 자신에게 순종하는 한 씨의 모습을 본 고력사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고개를 들게나.”

한 씨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며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고개를 들었다.

“어찌 이 멀리까지 찾아오셨나이까.”

“황상께서 찾으시네. 속히 흥경궁으로 가지.”

한 씨는 고공공 뒤를 따라 함량전을, 대명궁을 나섰다.

**

한 씨의 아비는 언관(言官)이었다. 그는 황제가 자신의 며느리인 양 씨를 궁으로 데려와 도사로 삼자 제일 먼저 목소리를 내세웠다. 당나라에서 여도사가 어떠한 신분인가. 혼인을 피해 자유롭게 방중술을 연마하는 자들이 아니던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제의 며느리였다. 무혜비(武惠妃)를 잃고 슬픔에 젖은 황제가 그 슬픔을 잊고자 무혜비 소생인 수왕(壽王)의 비를 뺏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씨의 아비는 주문이휼간(主文而譎諫, 수식을 통해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을 할 줄 몰랐다. 죽어도 아니 된다는 아비의 목소리가 흥경궁에 울려 퍼졌다. 성군이었던 황제는 아비의 직간을 중히 여겼지만, 혼군이 된 황제는 아비의 직간에 노여워했다. 아비는 참수되었다. 아비의 피는 황제의 마음이 아닌 황제의 땅을 붉게 물들였다.

가문의 남자들은 관노(官奴)가 되었고 여자들은 궁비(宮婢)가 되었다. 한 씨는 침선방으로 배정받았다. 계절이 바뀌면 녹색 혼례복을 입고 혼례를 치를 예정이었던 한 씨는 자신의 혼례복에 원앙을 수놓던 손으로 비단옷에 모란꽃을 수놓았다. 아비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족을 노비로 만든 태진 도사가 입을 옷이었다. 한 땀 한 땀 수놓은 붉은 모란꽃은 한 씨의 울분과 아비의 피를 먹고 만개한 흡혈화였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계절이 네 번 윤회했을 때, 황제가 한씨를 찾았다. 일개 궁비인 자신을 찾은 것이다. 장생전(長生殿)에 들라는 황제의 명에 한 씨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입전하였다.

황제는 용좌에 앉아있었고 그 옆에는 양 씨가 서 있었다. 양 씨는 이제 태진 도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일품 부인(夫人) 중 으뜸인 귀비에 봉해졌다. 양 씨가 입은 비단옷 자락에 한 씨가 수놓은 모란꽃이 펄럭였다. 한 씨는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입전을 고하였다.

“노비 한 씨 황상의 명을 받고 인사를 올립니다.”

황제는 낮고 중후한 목소리로 명했다.

“일어나라.”

자리에서 일어난 한 씨는 시선을 바닥에 못 박았다. 다시 황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글을 안 다지?”

한 씨 놀라 황망하게 대답했다.

“예.”

“어렸을 때 사자개를 키운 적이 있다던데 사실인가?”

사자개는 중원에서 흔한 개가 아니었다. 황제의 물음에 한 씨는 허리를 납작 숙이며 고했다.

“예. 서역을 오가며 장사를 하던 외숙부가 우연히 얻은 새끼 한 마리를 노비에게 준 적이 있사옵니다.”

한 씨가 키웠던 사자개는 복슬복슬한 하얀 털이 귀여운 개였다. 바람이 불면 갈기를 하얀 눈처럼 휘날려 이름을 풍설이라고 지어주었다. 풍설은 관병이 들이닥친 날 죽임을 당하였다. 다 자란 사자개는 송아지만큼 컸다. 커다란 덩치를 보고 위협을 느낀 관병 몇 명이 풍설을 둘러싸자 맹견인 풍설은 곧장 공격을 가했다. 늑대나 곰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개는 오직 사자개뿐이었다. 관병 세네 명이 명을 달리하자 놀란 관병들은 우르르 몰려들어 창으로 풍설을 찔렀다. 풍설의 목숨은 바람에 흩날리는 눈발처럼 사라졌다.

황제가 무언가를 대청 바닥에 던지며 말하였다.

“가져가서 읽도록 해라.”

귀비의 발 옆에 떨어진 물건은 사관(史官)이 글을 기록한 기록서였다. 한 씨는 황급히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황제가 던진 서책을 집어 들었다. 몸을 일으키자 자신을 바라보는 귀비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씨는 용기를 내어 귀비의 모습을 곁눈질하였다. 아비의 목숨을 앗아가고 가문을 풍비박산 낸 경국지색의 용모가 궁금하였다. 이는 호기심이 아니라 증오심이었다.

꽃도 부끄럽게 만든다는 용모를 지녔다는 귀비는 처량한 눈빛을 지닌 여인이었다. 한 씨가 상상했던 요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리 사이로 천하를 쥐고 흔드는 요부의 낯빛이 어찌 저러할까. 아비를 잃고 가족과 생이별한 자신에게서도 볼 수 없는 슬픔이 요부의 얼굴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 씨는 당혹감을 감추며 허리를 숙인 뒤 뒷걸음질을 하였다.

황제는 천명을 내렸다.

“대명궁으로 가거라. 함량전에 네 주인이 있을 것이다.”

황명을 받잡은 한 씨는 그 길로 대명궁으로 향했다. 황제는 한 씨를 오품 여관으로 삼았다. 천하디 천한 침선방 궁비가 하루아침에 오품 여관이 된 것이다. 장생전을 나서자 평소에는 얼굴도 마주 볼 수 없던 환관이 한 씨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였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한 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환관을 따랐다.

환관이 한 씨를 안내한 곳은 함량전의 편전이었다. 텅 빈 편전에 당도하자 환관은 문을 굳게 닫으며 말을 뱉었다.

“황상께서 주신 것을 먼저 읽어보시지요.”

한 씨는 고개를 숙이며 서책을 펼쳐 들었다. 서책에 쓰인 것은 모두 황제의 말이었다. 한 씨가 태어나기도 전에 쓰인 말이었다. 한 씨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로 기록을 읽어갔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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