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행 필유적사(赤蛇)

  • 장르: 판타지, 호러 | 태그: #괴력난신 #조선괴력난신 #구흘산 #뱀이야기 #백사 #적사 #전설 #선비
  • 평점×35 | 분량: 68매 | 성향:
  • 소개: 조선괴력난신 시리즈 <선비들은 첩첩산중으로 간다>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구흘산 적사골에서 책 봇짐을 진 선비들 셋이 나란히 걸어간다면, 그 중 하나는 반드시 선비로 둔... 더보기

삼인행 필유적사(赤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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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하나가 바위에 책 봇짐을 내려놓고 잠시 땀을 들이는데, 약초꾼들 산막 뒤쪽 오솔길에서 또 다른 선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큼지막한 책 봇짐을 진 선비였다. 초면임에도 선비들은 서로 반색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황경여라 하오. 동래에서 왔소이다.”

“청도에서 온 권희민이오.”

망종에 즈음하여 외지 선비 둘이 구흘산 서쪽 기슭에 당도하였다면 필시 회혼촌 조문명 선생의 새 제자들일 터이니, 둘은 곧 동문수학할 사이였다. 조문명은 일찍이 성균관 관원을 지낸 학자였으나 지천명에 돌연 낙향하여 구흘산 회혼촌에 터를 잡고 십수 년째 제자를 받고 있었다. 해마다 보리농사를 끝내놓고 나면 제자들을 사랑에 들여서 먹이고 재우며 반년쯤 가르친 뒤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황경여와 권희민은 언틀먼틀한 산길을 디디며 나아갔다. 반 시진쯤 지나자 회화나무의 무성한 가지들 사이로 상아색 바위들이 어리비치고 물소리가 들려왔다. 교목 숲을 벗어나자 오시(午時)의 햇살이 쏟아지는 계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팔자 좋은 한량들이 기생들을 대동하여 술잔치를 벌이고 갔는지 계곡 가장자리에 가마를 대는 터가 다져져 있고 여기저기 깨진 술병들도 나뒹굴었다. 하얀 바위의 경사면에는 김 아무개와 송 아무개가 다녀간다는 낙서가 있었다.

하지만 다시 반 시진쯤 계곡을 따라가자 산세가 급격히 변하였다. 바위들은 모서리마다 날이 섰고, 계곡이 산그늘에 묻히어 물도 자갈도 그 빛이 검었다.

구흘산 적사골에 들어선 것이었다.

누구는 붉은 뱀이 살아서 적사골이라 했고 또 누구는 이무기가 어느 노승의 붉은 핏물을 뒤집어쓰고 죽었다는 전설이 있어서 적사골이라 하였는데, 물과 바위가 흔하고 잡풀마저 우거진 것이 한눈에 보아도 뱀이 깃들기 쉬운 형세였다.

“여기가 적사골인가 보오.”

청도 사람 권희민이 운을 떼자 동래 사람 황경여가 말을 받았다.

“적사골을 지나 두어 시진을 더 가면 회혼촌이라 했으니 신시 전에는 스승님 댁에 당도할 듯하오. 산 아래 객점 주인이 적사골은 요기(妖氣)가 강한 곳이니 주의하라 당부하던데, 난 그런 건 모르겠고 그늘이 짙고 시원하니 그저 좋소이다.”

“길이 험하니 낙상에 유의하라는 뜻이 아니겠소. 본디 여항의 지혜들은 듣는 이를 으르는 이야기로 전해지는 법이니.”

황경여와 권희민이 꽃이 시들한 이팝나무 아래를 지나는데 곁가지로 난 숲길을 따라 키가 자그마한 선비가 걸어왔다. 세 번째 선비가 책 봇짐을 지고 등장하자 두 선비는 혼란스런 눈빛을 주고받았다. 조문명 선생은 해마다 제자를 두 명만 받기로 유명했다. 배움을 원하는 선비들이 청을 넣으면 서너 차례 서신으로 글을 시험한 뒤, 딱 두 명만 구흘산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그쪽도 회혼촌에 가는 길이오?”

권희민이 묻자 마지막에 합류한 선비도 다소 난감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하오만…….”

선생이 왜 갑자기 제자를 셋이나 들이려 하는지 다들 궁금한 눈치였으나 선뜻 말을 뱉는 이가 없었다. 공자가 이르기를 공손하더라도 예가 없으면 피곤하고, 신중하더라도 예가 없으면 두렵게 되며, 용기가 있더라도 예가 없으면 난폭함이 된다 하였으니, 어찌하여 둘이 아니라 셋이냐고 누군가 발설하는 순간 셋 중 하나는 자격 미달이 아니겠느냐는 무례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일행이 하나 늘었으니 황경여와 권희민도 다시 통성명을 해야 했다. 마지막에 온 선비는 잠시 주저하다 입을 떼었다.

“나는…… 영천에서 온 이지운이오.”

그 뒤론 셋 다 말없이 산그늘에 녹아들었다. 잣나무, 박달나무, 굴참나무, 전나무가 숨 막히게 빼곡했고 그 밑동으로도 생강나무와 복수초, 뱀고사리가 들어차서 숲은 틈을 주지 않았다. 길이 좁아지는 곳에서는 황경여가 앞장을 서고 이지운과 권희민이 그 뒤를 따라갔다.

이지운이 두어 번 발을 헛디디고 넘어지는 바람에 권희민까지 지체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권희민은 언짢은 낯으로 저만치 앞서가는 황경여를 일별했으나 이지운에게 불만을 드러내진 않았다. 대신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는 법도 없었다. 황경여는 황경여대로 뒤에서 누가 자빠지는 기척이 나도 돌아보지 않았다. 풍문으로는 조문명 선생댁 사랑에 방이 두 칸이어서 제자도 둘만 받는다 하였는데 올해는 어찌 셋이란 말인가. 벼리어진 침묵이 산바람인 듯 세 선비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산길이 느슨히 휘어지며 적사골 계곡 물소리가 멀어지고,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만한 산길이 나왔다.

저만치 여남은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약초를 캐고 있었다. 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는 아이의 누이로 보이는 코흘리개가 작대기로 하릴없이 숲 바닥을 때리고 있었다. 아이들의 등장에 선비들도 잠시 숨통을 텄다.

“얘야, 회혼촌을 알고 있느냐?”

황경여가 말을 붙이자 아이는 뭐에 놀란 얼굴을 하고 일어섰다.

약초를 캐는 데 정신이 팔려 선비들이 다가오는 걸 몰랐던 눈치였다. 아이는 약초 바구니도 챙기지 않고 누이만 달랑 안아들고 달아났다.

“회혼촌으로 공부하러 가는 선비들이니 겁낼 것 없단다.”

이지운이 소리쳤지만 아이는 돌아보지 않았다.

“우리가 공연히 겁을 주었구나. 서둘러 지나갈 것이니 하던 일을 마저 하려무나.”

권희민도 말을 보탰다.

하지만 약초꾼 아이는 희멀쑥한 입석들이 줄지어 늘어선 곳에 이르러서야 뜀박질을 멈추었다. 아이는 정체 모를 입석들이 제 뒷배라도 되는 듯 다소 당돌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적사골로 들어오신 겁니까?”

“무얼 말이냐? 우리가 적사골에 대해 알아야 될 게 있다는 뜻이냐?”

이지운이 아이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자 아이가 입석 쪽으로 한 걸음 더 물러나며 대꾸했다.

“선비님들이 우리를 지나쳐서 저기 죽은 박달나무가 아래까지 가시면 그때 알려드리겠습니다.”

세 사람은 아이들 곁을 지나쳐 갔다. 다섯 자 간격으로 늘어선 입석들이 아이가 말한 고사목 있는 데까지 늘어서 있었고, 입석들 사이에는 어김없이 금줄이 쳐져 있었다. 박달나무 고사목 아래서 황경여가 약초꾼 아이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 네 뜻대로 했으니 이제 네가 아는 걸 말해다오.”

아이는 그래도 온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동생을 등에 업었다.

“삼인행 필유아사란 말을 아십니까?”

한낱 약초꾼 아이 입에서 논어의 구절이 나오자 선비들은 하나같이 흥미로운 눈빛이 되었다.

“삼인행 필유아사언, 논어 술이편에 나오는 구절이 아니더냐.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뜻이지.”

이지운이 대답하였다.

“하지만 구흘산 적사골에선 그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삼인행 필유적사’라고들 합니다.”

“삼인행 필유적사?”

권희민이 되묻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책 봇짐을 진 선비 셋이 적사골을 같이 걸어간다면 그 중 하나는 반드시 붉은 뱀이란 뜻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이는 약초 바구니를 두고 온 쪽으로 달아나버렸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