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들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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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안이니 조금 더 기다려보라는 친절한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겼다. 휴대폰을 손에서 놓자 휴대폰의 무게가 가볍게 뒷목을 자극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손가락을 세워서 아주 천천히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네 장의 종잇장을 만졌다. 엄지손가락 끝으로 엷게 돋을새김 되어 있는 세종대왕님의 얼굴 윤곽이 느껴졌다. 4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절대로 적지 않다.

공원 뒤편에 늘어서 있는 고깃집에 들어가서 영배 녀석과 술을 한잔할 수 있을 것이다. 고깃집이 아니라 중국 요릿집에 들어가서도 적당한 가격의 고급 요리에 술을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종로 3가 역 바로 앞에 있는 일본식 돈가스 집에서 안심이나 등심을 시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에어컨 바로 앞에 앉아서 시원하게.

땀에 젖은 모시 적삼이 등줄기에 들러붙었다. 등을 꼿꼿이 세우려고 했지만 모시 적삼은 영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침의 일이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며느리가 항상 화장대 오른쪽에 돈을 넣어둔다는 것을 안 건 정말 오래전이었고 그전에는 단 한 번도 그 돈을 꺼내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지금 와서 며느리에게 말해보아야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화장대 오른쪽에서 만 원권 한 장을 집어 들었을 때 문이 열렸고 무어라 입을 뗄 틈도 없이 며느리는 팔자로 처진 눈썹을 하고는 말없이 만 원권 네 장을 꺼내 내 주머니에 꽂아주었다. 나는 가래를 돋워 보도블록에 침을 뱉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 경우 없는 계집애가 누굴 민망하게 만들려고…… 라고 생각하다 고개를 숙였다.

그 착한 며느리를 두고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생각이 아닌가. 더욱이 며느리는 지금 거의 남산만큼 배가 부른 상태였다.

나이 든 시아버지를 봉양해야 하는 딸아이 걱정에 얼굴이 어두운 사돈을 앞에 두고 나는 연금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혼자서도 괜찮다고 되레 큰소리를 떵떵 쳤었다. 연금은 자주 연체되었다. 벌써 반년 가까이 연체되고 있는 연금을 달라고 전화를 걸면, 지금처럼 이 친절하고 사근사근한 여자가 몇 십 분 가까이 걸리는 통화 끝에 조금 더 기다려보라고 말해준 뒤 전화를 끊기 일쑤였다.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퇴직 공무원이었다. 어디에도 내 근무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게 문제였지만. 청와대에 글을 쓸 수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전화기 너머의 직원에게 내가 조국을 위해 바람을 불러왔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괴로웠다. 평생 나쁜 놈들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는데, 어느새 자신이 도둑놈이 된 셈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생활이 넉넉해 본 적은 없었고 결국 아내에겐 고생만 시켰지만, 아들을 마주할 기회만 있으면 나는 아무리 사정이 어렵고 생활이 괴로워도 인간으로서의 도덕과 기품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왔다.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마음속으로 내가 사회 속에서 사는 인간이라는 점을 몇 번씩이고 되새겨왔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는 아무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원망하다간 결국 내가 사는 세상마저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설마하니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마음의 기둥까지 무너진 것일까. 가슴이 서늘해졌다.

전철 안에 자리가 없었다. 나이 어린 총각애 하나가 다리를 넓게 벌리고 앉아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치어다보고 있는 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많이 늙었고 저 청년은 그렇게 피로해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청년 앞에 가서 섰다. 에어컨 바람이 모시 적삼 사이로 스며들면서 조금 등이 편해졌다. 청년은 계속 입을 벌리고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청년에게는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몇 번 헛기침했고, 청년의 눈동자는 약간 흔들렸지만 다시 천장에 고정되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에어컨에서 쏟아져 내린 바람들을 몇 가닥 조심스럽게 머리 위로 끌어당겼다.

사람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므로 내 머리 위에서만 천천히 맴돌게 했다. 잠시 뒤, 나는 그 바람들을 죄다 청년의 엉덩이 밑으로 밀어 넣었다.

“으어!”

소리를 지르며 청년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고, 바람들은 청년의 등과 엉덩이를 떠밀어냈다. 나는 가볍게 바람들을 전철 안에 흐트러뜨리고 그 자리에 앉았다.

독립문역을 지나면서부터는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늘어갔다. 곧 도착이었다. 오직 이곳에만 정의의 기억들이 남아 있었다. 역 계단을 올라오면서부터는 다시 내 몸에서 나는 땀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지경이었다. 결국, 며느리에게 새 빨랫감을 오늘도 늘려주게 될 것이었다.

벚꽃처럼 수십 개의 태극기가 공원 문 앞에서 반짝거리며 흔들렸다. 나는 느릿느릿 배를 조금 내밀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손병희 선생의 얼굴은 오늘도 경건했고, 손병희 선생을 치어다보는 시야로 영배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형님, 이렇게 휴대폰 목에 걸고 다니다가 말년에 디스크 걸리면 뼈도 못 추린다. 여, 스마아트폰은 두껍기도 두껍고 무겁기도 오죽이나 무거운데. 형님 같은 약골은 디스크 금방이야.”

팔각정에 도착하자마자 영배는 모자를 벗고 팔각정 한가운데 우뚝 섰다. 그리고 익숙하게 아리랑을 부르기 시작했다. 영배의 목소리에 실린 에너지는 하루가 다르게 옅어져 갔지만 미군정 때부터 영배는 포기를 모르는 놈이었다. 영배 역시도 자신의 목소리가 갈수록 힘없이 흩어지는 건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영배는 굴하지 않고 애타게 목청을 부여잡았다.

영감들은 영배가 노래를 부르건 말건 신경 쓰지 않았다. 가끔 몇몇은 얼쑤, 좋구나, 를 외치기도 했지만. 대체로 영배는 팔각정 주변의 영감들의 기분을 유쾌하게 만들기 위해 노래했다. 영배 덕분에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노인네들은 그럭저럭 유쾌한 기분으로 웃고 떠들었다. 영배 덕분인지는 영영 모르겠지만.

아리라흥, 우리라흥, 아리어리우리라흥.

바람이 모시 적삼 속으로 훅 끼쳐 들어왔다.

“아이고, 시원허다.”

이마 위로 땀줄기가 스쳐 지났고 비둘기가 종종거리며 옆을 지나쳤다. 늘 그렇듯이 시원한 바람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나는 바지춤에서 부채를 꺼내 들었다. 바람 정도야 이 부채만으로도 탑골공원 전체에 휘몰아치게 할 수 있었다. 가볍게 목 주변을 부채로 부치는 내게 영배가 슬그머니 웃어 보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알고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이 어린 한 쌍이 손을 꼭 붙들고 천천히 걸어서 팔각정 옆으로 다가왔다. 계집아이 쪽이 영배 쪽을 손가락질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을 터뜨린 계집아이에게 노래를 부르는 영배 대신 화단 근처의 얼치기 영감들부터 팔각정 가운데 자리 잡은 말 많은 영감들까지, 모든 노인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삿대질을 멈추지 않으며 연인을 치어다보는 계집아이의 하얀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계집아이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그럴 수도 있었지만, 모르는 게 있으면 알아가야 할 일이었다.

계집아이가 사내놈에게 달라붙어서 스위티, 어쩌고, 영어로 주절댔다. 사내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겨오는 팔을 몇 번 떨어내려고 시도했지만, 계집애는 그때마다 눈치 없이 다시 사내놈의 팔에 엉겨 붙었다. 그러더니 기어코 주둥이를 쭉 내밀었다.

사내놈은 계속 주변을 둘러보며 영감들 눈치를 살피기는 했지만, 입이 귀에 걸릴 듯이 웃어대더니, 결국에는 계집아이의 입술에 손가락을 몇 번 가져다 대다가 슬쩍 계집아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계집애가 물을 만난 듯 사내놈의 혀에 혀를 얽어대기 시작했다. 세조의 비가 세조의 죄를 씻기 위해서 세웠던 그 원광사지 십층석탑 바로 앞에 서서.

그럴 수 있는 일이었지만, 누구나 모르는 게 있으면 배워야 했다.

나는 가래침을 뱉으면서 바닥을 발로 슬쩍 내질렀다. 중력의 도움을 받아 땅으로 곤두박질치던 가래침은 그대로 신 나게 바람을 가르고 달려서 계집애의 허벅지에 철썩 들러붙었다. 잠깐 입술을 떼고 고개를 숙인 계집애가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다. 계집애는 사자 눈을 뜨고 주변을 살폈지만, 석탑 근처까지 걸어온 영감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영배의 노래를 감상했다. 영배의 노래가 겨냥하고 있는 건 사내놈 쪽이었다. 영배는 분명히 많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저런 어린놈의 기분 정도야 누워서 떡 먹기였다.

사내놈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비명을 지르는 계집애를 오만상을 찡그린 채 보고 있었다. 영배의 목소리가 흔들거리며 허공으로 날아들었고, 사내놈은 계집애에게 그만 좀 하라고 벌컥 소리를 지르며 계집애를 떠밀었다. 날뛰던 계집애는 모랫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치마가 뒤집혀 계집애의 파란 줄무늬 팬티가 보였고, 영감들은 슬그머니 모두 계집애를 주목했다.

계집애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영어로 소리를 치기 시작했고, 사내놈은 무어라 한 마디 내뱉고는 인사동 쪽 쪽문으로 휑하니 자리를 떴다. 계집애 역시 씩씩거리며 종로 쪽 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모든 실패에서는 배우는 게 있게 마련이었다. 영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형님, 안 죽었네.”

말세는 말세였다. 하기야, 말세가 아닌 적이 어디 있기는 했던가. 우리는 여느 때처럼 장기를 두는 영감들 옆에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서 단둘이서만 아는, 끔찍한 말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격퇴해온 말세의 끔찍한 망령들과 선량했던 옆집 처녀들을 충동질해 야산으로 데려갔던 빨치산 놈들에 대해서.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 놈들 틈바구니에서 엿가락처럼 긴 팔을 뻗어 경찰들의 방패와 곤봉을 날리던 흉물스러운 그 남자에 대해서. 법이고 뭐고 없이 대로변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던 마녀 같은 그 여자에 대해서.

옛날이야기 속에선 여전히 대쪽같이 정의와 허기의 시간이 살아 있었다. 모두가 그때는 배가 고팠다. 허기를 감내하는 것이 정의였고, 허기를 막아줄 수 있는 것이 정의였다. 장기판 주변의 노인들은 눈을 빛내기도 하고 훈수를 두다 조용히 좀 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나 그들 역시 정의와 허기의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흔들리는 영배의 모자 깃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깃털 너머로 낯익은 표식을 발견하고는 얼떨결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기판이 약간 흔들렸고, 이기고 있는 편의 몇 명이 안타깝게 소리를 질렀다. 틀림없었다. 눈앞으로 이파리 다섯 개 모양 대마초 문신이 뾰족하게 새겨진 팔뚝이 지나갔다. 이기고 있던 쪽이 내게 무어라 큰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꼼짝도 않고 녀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허여멀건한 얼굴, (숱이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목을 덮는 구불구불한 곱슬머리, (근육이 모두 없어져서 헐렁해 보였지만) 러닝셔츠 같은 민소매 셔츠에 관자놀이 옆으로 지나가는 큰 흉터 자국이 모두 그대로였다. 도무지 잘못 볼 수가 없는 그 걸음걸이.

여전히 녀석은 어깨를 비뚜름하게 추켜올리며 해괴한 스텝으로 춤을 추는 것같이 걸어갔다. 어느새 영배도 입을 벌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크게 열린 동공으로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녀석이었다.

녀석을 처음 만난 건 광복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있었던 파업 사건 때였다.

나는 탱크와 기관총 뒤에 숨어 있었지만 내게 걸려 있는 기대는 탱크 이상이었다. 군인들은 열다섯 살 소년을 조심스럽게 이동시켰다. 서울 어디든 골목골목마다 소문이 파다했던 바로 그, 대한민청 감찰부장님이 내 어깨에 따뜻하고 묵직하게 손을 얹었다.

나는 김좌진 장군의 피가 내 심장으로 흘러드는 기분이었다. 거의 열흘째 철도가 완전히 마비 상태였다. 장사꾼들은 물건을 나르지 못했고, 환자들은 병원에 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쌀, 쌀을 옮길 수 없었다. 감찰부장님의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넘어왔다.

네 손에 달려 있다.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모든 무기보다도 바로 내 손이었다. 곳곳에서 사람들이 굶고 있었다. 서울철도 파업단에는 수많은 사람이 진을 치고 있었다.

두 대오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얼굴이 뚜렷하게 드러났고 함성이 하늘을 치받으면서 경관들 앞에 선 대한노총 청년들은 방망이를 치켜들었다. 사람들에게 쌀을 실어다가 줄 기차를 움직이기 위해 방망이들이 용감하게 움직였다. 감찰부장님은 힘차게 내 등을 쳤다.

자, 나가라. 나는 그들을 노려보며 힘껏 바람을 떠밀었다. 방망이들 사이로 날카롭게 달려 나간 바람은 격전지를 한참 지나 적진 한가운데에서 칼을 뽑아들었고 곧 피가 솟구쳤다. 바람에 얻어맞고 몇 명이 바닥에 나뒹군 듯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정신없이 양손을 뻗었다. 어디로 바람이 흘러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바람 끝에 휘말려 눈이나 손을 잃어가고 있을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던 어린 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휘젓다가 손을 붙잡는 강한 힘에 바닥에 넘어졌다. 다루고 있던 바람이 사방으로 터졌고, 내 옆에 서 있던 경관의 양 발목이 끊어졌다.

손을 붙잡은 건 땅속에서 불쑥 뻗어 나온 손이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면서 손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땅 밑에서 뻗어 나온 긴 팔은 더욱 억세게 내 손을 휘감았다. 손에 이끌려서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버둥거리고 있자, 감찰부장님은 부대들에 각기 지시를 내리고 나서 권총을 들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손목을 휘감은 손가락은 가늘고 희었지만, 도무지 떨치지 않았다. 감찰부장님은 망설임 없이 내 손을 향해 총을 쏘았고 나는 한 번 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손이 자유로워졌다. 바닥에 구멍만 남기고 기괴한 손은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적진을 바라보았다. 바닥에 손을 넣고 있던 소년 하나가 자기 손을 깨끗이 회수하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쩡한 길이의 팔로 이쪽을 돌아보는 짧은 더벅머리의 소년은 나보다 한 뼘이나 키가 작았다.

뼈가 흐느적거리며 늘어나서 땅속을 통과해 오다니. 엿가락도 아니고. 소년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자니 등줄기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