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미리보기

매캐한 연기와 잿내가 주변을 뒤덮고 있다. 흙먼지가 자욱하다. 여의도 일대는 큰 망치로 두들긴 듯 납작하게 내려앉아 있다. 구조대며 영웅을 찾는 아우성이 귀에 꽂힌다. 국회의사당은 반으로 갈린 채 땅에 박혀 있다. 어디선가 위태하게 기울어져 있던 전신주 하나가 픽 쓰러지며 전선을 두둑거리며 당겼다. 쿵 하고 자동차 하나를 깔아뭉개는 것과 동시에 어둠이 퍼져나갔다. 하늘은 먼지에 번져 이른 저녁인데도 온통 피처럼 붉었다.

“딸애 보고 싶네.”

나는 그 앞에 선채 머리에서 노란 잿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너덜너덜한 소매에서 살점처럼 천을 뜯어내었다. 실이 섬유근처럼 쭉 뽑혀 나왔다.

“수원역에 두고 왔는데.”

*

1분 전

*

속보가 뜨면 이미 늦장이다.

방송국에 제보가 폭주하고 그치들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요새 물오른 아침 프로 대신 내보내도 시청자들이 오냐오냐 TV에 붙어 있을 만한 사건인가 위에서 타진해 보고, 당직 아나운서가 대기실에서 불려 나와 목청 가다듬고 옷매무새 한번 쓰다듬을 시간이면.

나는 그새 열 번도 더 다녀왔어야 했다.

좀 전부터 살얼음판이 된 길 위로 싸락눈이 춤을 춘다. 젖은 하늘에는 아직 희뿌연 해가 남아 있다. 나는 눈발이 두려웠다. 해는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후딱 다녀오면 되잖아.”

딸애가 속삭였다. 옛날 저기 무슨 혼인잔치에서 아들의 손을 감아쥐며 ‘얘야, 포도주가 떨어졌다는구나.’하고 속삭였던 여인네처럼. 전능자의 귀여운 투정을 다독이는 것이 그를 보필하는 자의 소소한 시련이겠거니 하는 눈으로.

“예지야, 아빠 가기 싫어. 저기 너무 멀고…….”

“아빠 일이잖아.”

TV 속의 마트는 연기에 뒤덮여 있었고 눈에 띄게 기울어져 있었다. 연기보다 기울어짐이 기괴했다. 상황은 아직 파악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여지가 있다. 상황 파악할 시간까지 있다면 사람 구할 가망은 없는 거니까. 3층에서 사다리차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들이 카메라에 잡힌다. 4층 창에서는 손들이 아우성친다. 돌아가는 것이 녹화 영상인 걸 보면 지금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속보가 뜨면 이미 늦장이다.

속보가 떴는데도 여지가 남아 있다면 뭐든 일이 매끄럽지 않게 돌아갔기 마련이다. 대피방송이 늦었거나, 대피로가 막혔거나, 누군가 지 선에서 일을 처리하려 하다 신고가 늦었거나. 일이 매끈하게 돌아가면 내 선에 닿기 전에 끝난다.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전철은 어디 무슨 대단한 일 났냐는 듯이 한가로이 역에 안착했다. 문이 열리자 승객들은 세상에 이보다 더 대단한 일이 있겠냐는 듯 종종걸음으로 안으로 사라졌다.

“집에는 갔다 가야 할 텐데. 너는 데려다 주고…….”

“얼른.”

예지가 내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예지의 유치원 가방에 달린 번개 인형이 탈랑탈랑 춤을 춘다. 뿔테 안경을 쓰고 꽃무늬 몸뻬 바지에 빨간 후드티를 둘러쓰고 있다. 내가 언젠가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내야 했을 때 근처 옷가게에서 대충 챙겨 입은 것이다. 빨간 실로 만든 입이 배시시 웃는다.

“다녀와.”

“응.”

우리는 10초 뒤에 다시 만날 것이다.

내가 돌아온 뒤에도 TV는 아직 녹화 영상을 돌리고 있을 것이다. 예지는 내 손을 감아쥔 손 모양을 한 채 서 있을 것이고 나는 그 앞에 조금 허름해진 채 앉아 있을 것이다. 예지는 눈을 깜박이다가 활짝 웃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을 것이다.

“다녀왔어?”

“응.”

나는 건성으로 답하며 예지의 가방에 나처럼 조금 허름해진 번개 인형을 매달 것이다. 실이 좀 해졌어도 여전히 배실배실 웃을 것이다.

“것봐, 간단한 걸.”

“그러게.”

TV는 그제야 속보자막을 띄우고 우리가 전철에 탈 때쯤에야 새 화면을 내보낼 것이다. 내가 만든 잔상이 건물을 휘감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바람처럼 건물에서 휙휙 들려나와 마트 앞마당에 일렬로 눕혀지는 진풍경은 전철 안에서 스마트폰으로 볼 것이다. 다른 뉴스가 더 나오면 조용히 끄고 창밖에 구름이나 보자고 할 것이다.

10초만 지나면.

* * *

“겨우 10초 사이에,”

사회자가 ‘그런데 말입니다’를 앞에 붙이고는 입을 열었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사회자 뒤로는 수십 개의 CCTV와 블랙박스 영상이 돌아간다. 잔상, 혹은 돌연한 바람, 아니면 초현상일 것이 분명한 무엇인가들. 국소 안개가 꼈거나 녹화 화질이 나쁜 것과 구분이 가지 않는 영상들.

“달릴 수는 있었다 칩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생각은 언제 하죠? 그 짧은 새에 그렇게 많은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요?”

“화질이 영 별로네요.”

패널 중 하나가 말했다.

“뻔히 눈앞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이잖습니까. 갈만한 곳에 초고속 카메라를 설치하면 찍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 뭘 하는지도 알 수 있을 거고요.”

“못 찍습니다. ‘번개’는 빛의 속도로 움직이니까요.”

무슨무슨 대학 무슨무슨 교수라는 자막이 붙은 대머리 아저씨가 말했다.

“시간이 멈춘 가운데 움직인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사회자의 질문에 교수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 시간이 멈췄다고 가정해 봅시다. 지금 제가 팔을 한 번은 왼쪽으로 뻗고 한 번은 오른쪽으로 뻗겠습니다.”

교수는 국민체조를 하듯이 손을 쭉 뻗어 좌우로 쭉쭉 움직였다.

“그럼, 저는 지금 손을 어느 방향으로 뻗고 있겠습니까?”

주위에 앉은 패널들은 ‘우리가 아무래도 잘못 불려나온 모양입니다, 아뇨, 어리둥절한 표정 지으라고 불려왔죠.’ 하는 표정을 교환했다.

“좌우로 빠르게 움직이나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니까요. 제가 왼쪽으로 손을 뻗은 것과 오른쪽으로 뻗은 사이에 시간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면 두 사건은 동시에 일어난 겁니다.”

“팔이 네 개로 보일까요?”

“알 수 없습니다.”

배경음악이 있었다면 누가 심벌즈를 차라랑 쳤을 법한 여운 속에서 교수가 말했다.

“어떤 중첩 상태에 있을 겁니다. 우연히 그 중 한 동작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 뭘 볼지는 알 수 없어요. 그것마저도 동작을 두 가지만 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번개는 그 사이에 무수한 동작을 하고 수많은 곳에 가 있을 테니, 그때에 번개가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참치 김밥을 먹었습니다!”

종교방송에서 목사가 호통을 치며 연단을 내리쳤다. 청중 사이에서 자그마하게 “할렐루야”하는 화답이 들렸다. 목사는 기름과 김 부스러기가 묻은 쿠킹호일을 청중을 향해 좍 펴 보이며 호통을 쳤다.

“참치 김밥을요!”

어디서 ‘아멘’ 소리도 들렸다.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사람이 나자빠져 죽어 가는데 앞에서 김밥 먹을 정신이 있어요? 현장에는 애들도 있었어요. 번개가 김밥이나 먹는 사이에 심장마비가 오거나 뇌졸중이 왔을 수도 있어요. 그 앞에서 이 악마는 지 배나 채우고 있어요!”

“많이 먹어야 할 겁니다…….”

「생생정보 비타민 쇼」에서 여의사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힘은 질량에 가속도를 곱한 값이죠. 속도를 내려면 에너지가 필요해요. 사람으로 치면, 칼로리죠.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의사는 주섬거리며 ‘운동별 칼로리 소모량’과 ‘식품별 칼로리’라고 적힌 도표 두 개를 꺼내 탁자에 세웠다.

“사람이 1킬로미터를 달리면 대강 제 체중만큼의 칼로리를 씁니다. 60킬로그램의 사람이라면 60칼로리쯤 필요하겠죠. 참치김밥 칼로리가……, 580칼로리 정도 되는군요. 그냥 김밥보다 열량이 높네요.”

여의사는 도표와 카메라를 번갈아 보느라 연신 고개를 기웃거리며 말했다.

“말하자면, 번개가 김밥 한 줄을 먹으면 10킬로미터쯤 달릴 수 있다는 겁니다.”

방청객들은 김밥에 그런 놀라운 기능이 있는 줄 몰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번개를 볼 수 없어도 먹은 양을 보면 얼마나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는 거죠.”

오오, 그렇군요. 방청객들이 연신 감탄했다.

“번개는 이번에 현장에서만 김밥천국 하루치 재료를 거덜 냈어요. 주점 하나와 파리바게트 하나, 편의점 네 개를 털었죠. 피해액 보고에 따라 칼로리 계산을 해 보면…….”

의사는 더듬거렸다.

“……번개는 10초 사이에 대략 만 오천 킬로미터를 달렸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열여섯 번은 왕복했어요. 초속 천오백 킬로미터. 음속의 사천사백 배, 제트기의 이천이백 배…….”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