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복협(蝙蝠俠) 대 옥나찰(玉羅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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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기성품으로 만들어져 지갑에 넣기만 하면 되는 동전과 같은 것이 아니다.
―프리드리히 헤겔, 『정신현상학』

1

지난밤부터 고담성(古潭城)을 덮기 시작한 안개는 새벽을 지나 아침이 되어도 걷힐 줄을 모르더니 한낮이 되어서야 겨우 앞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옅어져 사람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고담, 오래된 연못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도처에 널린 연못과 호수, 그 물웅덩이를 중심으로 고성의 구석구석을 거미줄처럼 연결한 운하와 수로 위로 안개는 굼뜬 생물처럼 천천히 떠돌다가 사람이 다가가면 조금 물러가고, 지나가면 또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진한 물비린내와, 그보다 진한 부패의 악취를 가득 담고서. 무엇보다도 간밤에 저질러진 살육의 피비린내를 그 안에 담고서.

죽은 자는 열여섯 명으로 추정되었다. 당연히 시신도 열여섯 구여야 했지만 잔해는 열여섯보다 훨씬 많았다. 흉수는 사람을 그냥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조각조각 잘라서 사방에 흩뿌려놓았다.

가죽과 살과 뼛조각은 안에서부터 폭발한 것처럼 산산조각이 나 사방의 벽과, 바닥과, 천장에 붙어 있었다. 물론 죽은 자가 운 좋게 벽과 천장으로 막힌 공간에 있었을 경우에. 안 그런 경우 시신은 마당과, 그 마당에 잔뜩 널린 천과, 웅덩이와, 물을 끌어오는 수로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피. 열여섯 구의 시신은 열여섯 마리의 고래를 도살한 것처럼 많은 피를 흘려보낸 듯했다.

집은, 마당은, 마당에 널린 천과 그 마당에 흐르는 수로는 온통 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피는 넘치고 또 흘러서 대문을 나서서 거리를 넘봤으며, 수로를 따라 사방으로 흘러갔다. 코를 틀어쥐게 하는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지독하군!”

보고를 받고 뒤늦게 달려온 즙포사신(緝捕使臣), 즉 고담의 치안을 책임지는 포청의 총책임자인 고둔(高鈍)의 첫마디였다. 현장을 확보하고 조사를 진행해온 고참 포두가 그 말에 동의했다.

“예, 지독한 수법입니다.”

“아니, 냄새가.”

고둔은 한 손으로 코를 움켜쥐고, 다른 한 손으로는 코앞에서 부채질을 했다. 그러면 냄새가 사라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고담의 공기는 원래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서 더욱 독해지고 있지. 특히 이곳에서는 코가 썩어 문드러질 것 같군.”

‘날씨 이야기를 하자는 건가? 살인현장에서?’

고참 포두는 잠깐 어리둥절해했지만 재빨리 적응하고 고둔의 말에 장단을 맞췄다.

“특히 이 동네가 그렇지요. 염방(染幇) 거리 아닙니까.”

“그래, 염방. 그놈들을 잡아들이게.”

염방, 그것은 염색을 업으로 하는 자들의 통칭이기도 하고, 그들이 만든, 혹은 그들을 지배하는 세력이기도 하다.

포두는 전자의 의미로 염방을 입에 올렸지만 고둔은 후자의 의미로 말했다. 그게 포두를 놀라게 했다. 그는 아들을 잡아 제단에 올리라는 명을 받은 사람처럼 놀라 되물었다.

“염방 사람들을 검거하라고 하셨습니까?”

“원칙 첫째, 모든 범죄에는 그로 인해 이득을 얻는 자가 있다!”

고둔은 엉뚱하게 들릴 이야기를 했다.

“원칙 둘째, 범인은 현장 가까운 곳에 있다!”

“염방을 건드리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고둔이 자기 할 말만 하겠다면 포두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다.

“거센 저항을 불러올 것입니다.”

세상은 명과 암, 밝은 낮과 어두운 밤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들이 앞을 상징하는 힘이라면 염방은 어둠을 지배하는 세 개의 힘 중 하나다. 고담에선 특히 어둠의 힘이 강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이 세 번째일세. 대량살인이, 그것도 엽기적인 방법으로 연속해서, 거기 더해 희생자는 모두 염색공이야. 거기에서 도출되는 결론이 뭔가?”

고둔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답은 자명했다.

“이것은 경고고 보복일세. 무엇에 대한? 당연히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어떤 일에 대해서겠지. 염색공과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자들이 누가 있나?”

어쩔 수 없이 포두는 고둔의 논리에 끌려 들어갔다.

“그게 염방에 속한 자일 수는 있지만 염방 자체를 건드리시는 건…….”

“시간이 없네. 내일은 성주님의 탄신일일세. 성주님은 그날만은 미제사건 없는 순결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 하신다네. 날 불러 특별히 명령하셨단 말일세. 내일 아침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목이 잘릴 각오를 하라는 경고와 함께. 그러니 그때까지 이 일을 해결 못하면 성문 위에 내 잘린 머리가 걸릴 테고, 그 옆에는 자네 머리가 함께 걸리겠지. 그러고 싶나?”

“물론 아닙니다.”

“그럼 염방 놈들을 잡아들이게. 졸개든 두목이든 상관없으니 걸리는 대로 잡아들여. 그러다 보면 누군가가 털어놓을 걸세. 이 일을 저지른 자는 자기가 아니라 아무개라고 말이야. 놈들은 자기만 살 수 있으면 부모까지 팔아먹는 놈들이니까 반드시 그럴 걸세. 그럼 그놈을 잡으면 되는 거지. 이의 있나?”

억지였지만 분하게도 이 논리는 고담에서는 잘 먹히는 이야기라는 걸 포두는 알고 있었다. 범인을 잡고 싶으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주변을 두들기면 된다. 그럼 그 중 누군가는 범인을 털어놓는다.

혹시 그러고도 범인을 못 찾으면? 그땐 혐의가 짙은 놈들을 모두 두들겨 패서 범인으로 만들면 된다. 분명 그 중 누군가는 범인일 테니까. 혹시 아니라도 상관은 없다. 놈들은 드러나지만 않았지 언젠가는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을 테니까. 혹은 곧 저지르게 되거나.

그런 식으로 그는, 그리고 고둔은 출세를 거듭해 왔고, 고담의 평화는 지켜졌다. 이번이라고 예외일 이유는 무언가?

많다. 아주 많다.

“그래도 염방은 너무 강합니다. 엄청난 저항이……!”

포두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목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져서였다. 고둔이 법집행자의 상징이자 무기인 금차(金叉)를 뽑아 그의 목에 댄 것이다. 삼지창의 끝부분을 닮은 금차는 날이 서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차갑고, 위협적이었다.

“명심하게. 이번 일에는 자네와 내 목이 걸려 있어. 저항이 있겠지. 그러면 밟아주면 돼.”

고둔은 희미하게 웃으며 금차를 거둬들였다. 그 웃음 뒤로 강철 같은 의지가 엿보였다.

“이번 기회에 염방 놈들을 일소하는 것도 괜찮겠지. 그럼 고담의 공기가 조금은 더 맑아질 거야.”

그는 포두를 내버려두고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오늘밤은 성주님의 탄신을 축하하는 전야의 연회가 완안세가(完顔世家)의 장원에서 열린다네. 물론 나도 초대받았지. 그 전까지 사건 해결에 진척이 있었으면 좋겠군.”

완안세가는 고담 최고의 명문가다. 고담의 경제를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인 도자기와 비단사업에 있어서 강자의 지위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담 경제의 지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염방이 밤의 힘이라면 완안세가는 낮의 힘이고 고담을 떠받치는 기둥의 하나였다.

문득 포두는 완안세가도 이 혈안과 아주 관계가 없지는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비단은 염색을 필요로 하는 물건이 아니던가. 물론 완안세가가 직접 염색과 같은 더러운 일에 손을 대고 있지는 않겠지만 어떤 식으로건 관련을 맺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물론, 이런 피비린내 나는 사건과 완안세가를 연결시킬 수는 없다. 그러기엔 그들은 너무 존귀하고, 너무나 돈이 많다. 누구나 알듯이 돈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 굳이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

포두는 곧 오늘 밤 열린다는 완안세가의 연회에 나올 산해진미를 생각하며 군침을 흘렸다. 하지만 일개 포두인 그가 거기 초대받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내일 목이 잘리지 않기 위해 시킨 일에나 충실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 전에 먼저 염방에 통보부터 하고.

그의 봉록은 포청에서 나오지만 그보다 몇 배나 더 많은 돈을 염방을 비롯한 고담의 흑사회에서 챙기고 있는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뻔히 예상되는 염방의 저항으로부터 그만은 예외로 비켜서기 위해서도 시급하고 필수적인 일이었다.

수하 포졸들에게 바쁘게 지시를 하며 한편으로는 염방에 이 일을 알릴 방법을 생각하며 걸어가는 포두를 저 높은 곳에서 한 사람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사람, 아니, 한 마리 박쥐였다.

고담의 지독한 습기와 곰팡이에도 불구하고 썩지 않고 천 년을 유지하는 고루거각의 뼈대와 살결은 모두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거대한 바위를 네모나게 깎고 잘라 쌓은 탑과 건물들, 그 한 곳의 튀어나온 처마에 그는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검은 복면과 검은 야행의로 온몸을 가린 자였다. 복면에는 박쥐처럼 세모꼴의 귀가 튀어나와 있고, 야행의에는 갑옷처럼 단단하고 윤이 나는 도편(陶片)이 근육의 모양을 따라 거북이 등껍질처럼 붙어 있다. 목을 감싸고 어깨를 두른 피풍의(披風衣)는 아래로 활짝 펼쳐져 마치 박쥐의 날개처럼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그의 모습은 전체적으로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박쥐를 닮았다.

그의 외양만 박쥐와 유사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청력 또한 박쥐처럼 민감해서 그는 저 멀리 수십 장 아래에서 고둔과 포두 사이에 오간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절반쯤 감탄하고, 절반쯤 비웃는 중이었다. 고둔의 식견과 판단에 대해서였다.

“경고고 보복이라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게 염방이 벌인 일이라는 건 틀렸지. 이건 오히려 염방에 보내는 경고고, 보복이니까. 고둔의 눈에는 저 핏물이 아무런 장애 없이 수로로 흘러들어 가는 게 안 보이나 보군.”

통상 염색공의 작업장에서 나온 물은 바로 수로로 흘러들어 가지 않는다. 염색을 위해서는 온갖 염료를 사용하는데, 그중에는 물을 오염시키고 사람을 해치는 것이 적지 않아서 몇 겹의 흙과 탄으로 거른 후에야 내보내도록 되어 있다.

물론 영세한 염색공이 이 모든 조치를 해두는 경우는 드물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대책 없이, 하다못해 막힌 웅덩이에서 자연적으로 걸러지도록 하는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경우도 많지 않다. 그런데 지금 저 아래 혈사가 벌어진 현장은, 그리고 어제와 그제 연이어 사건이 일어난 곳은 모두 염색한 후의 폐수를 그냥 수로로 흘려보내는 곳이었다. 고담의 백성들이 식수로 삼는 그 생명의 수로에.

어쩌면 이 혈사는 바로 그것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사람을 해치는 일에 대한 경고가 살인이라는 것은 큰 모순 같지만 세상에는 이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일도 얼마든지 일어나지 않는가.

“하지만 누가?”

그건 지금부터 알아볼 일이었다.

박쥐인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안개는 더욱 옅어져 지금까지 그를 가려주던 장막의 역할을 더 이상은 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박쥐가 대낮에 나오는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역시 남의 눈에 띄는 것은 재미없다. 어서 그늘을 찾아 숨어들어야 할 것이다.

박쥐인간은 그의 무게를 지탱하던 발끝에서 힘을 풀었다. 곧 그는 처마에서부터 몇 십 장 아래로 돌멩이처럼 추락하기 시작했다. 중간쯤의 허공에서 그는 두 손으로 피풍의의 양쪽 자락을 잡고 날개처럼 활짝 펼쳤다. 공기의 저항이 그의 속도를 늦추고, 잠깐이지만 그를 진짜 박쥐처럼 바람을 타게 했다.

거기에 어기충소(御氣衝)의 경공으로 몸을 위로 솟구치게 한 후, 금리도천파(金鯉渡穿波)의 신법을 사용해 눈앞에 펼쳐진 지붕들을 살짝살짝 발끝으로 밟으며 순식간에 몇 리 거리를 주파했다. 그의 입에서 용의 울부짖음 같은 휘파람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에 대답하듯 돌바닥을 부술 듯이 두드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박쥐인간은 마지막으로 힘껏 지붕을 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라 일곱 번이나 회전하며 속도를 줄인 후에 아래로 깃털처럼 내려앉았다. 휘파람소리에 반응하여 달려온 흑마의 안장 위에.

“돌아가자!”

흑마는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투레질을 하더니 네 발굽을 번갈아 움직여 땅을 박차며 달리기 시작했다. 눈에서는 푸른 섬광을 내뿜는 듯하고, 잘 빗은 검은 털은 융단처럼 부드럽게 그 아래의 거죽을 뚫고 나올 듯한 근육 움직임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비단실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긴 꼬리털과 갈기는 불길처럼 바람에 흩날리고, 발굽은 검은 옥을 깎아 만든 듯 정교하면서도 돌바닥을 찰 때마다 불꽃을 튀기도록 단단했다. 사람을 태우기 위한 안장과 등자만 매달고 있을 뿐, 재갈도, 고삐도 채워져 있지 않고 등에 탄 박쥐인간이 채찍을 휘두르지도 않았지만 이 한 마리 흑마는 마치 바람처럼 안개를 가르며 대지를 달려갔다.

곧 박쥐인간과 그가 탄 흑마는 고담을 둘러싼 성벽의 무너진 틈을 빠져나와 황량한 산곡으로 접어들었다. 계절의 추이를 알기 어려운 바위와 고목으로 이루어진 산이었다.

그 산곡의 한 곳에 기암괴석과 쓰러진 고목, 수염처럼 늘어진 이끼들로 교묘히 감추어진 동굴이 있었다. 흑마는 그 앞에서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고 쏘아 보낸 화살처럼 동굴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더 달려서 사방이 벼랑으로 막혀 있는 광장과도 같은 곳에 도착해서야 멈추었다.

그곳에는 넓지는 않지만 푸른 초원이 있고, 시내가 흐르고 있었으며, 비바람을 피할 목옥도 있었다. 물론 말을 위한 곳이었다.

박쥐인간은 가볍게 말에서 뛰어내린 후, 애정 어린 손길로 말의 털을 손질해준 후에야 들어온 반대 방향에 있는 벼랑 아래로 다가갔다. 그의 앞에서 벼랑이 갈라지며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한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늦으셨군요.”

“고담의 바보들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고 오느라.”

박쥐인간은 피풍의를 벗어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복면을 벗어 그 위에 올리고, 조금 더 걸어가서는 도편이 붙은 야행의와 속옷까지 벗었다. 그렇게 알몸이 된 후에는 앞에 나타난 연못으로 뛰어들어가 머리까지 잠겨들었다.

한참 후에야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박쥐인간을 노인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박쥐인간이 벗어던진 옷가지들은 이미 옆의 선반에 가지런히 정리하고서.

노인은 두터운 목면으로 된 수건을 내밀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던가요?”

아까 하던 대화의 연속이었다.

“딱 예상한 대로였어. 염방을 두들겨 범인이 튀어나오길 기다리겠다고 하더군.”

“예상 이상으로 바보군요. 그 정도로 할 줄은 몰랐는데.”

박쥐인간은, 아니 이젠 멀쩡하게 생긴 청년의 모습이 된 그는 노인에게 이채로운 눈길을 보냈다.

“알파도(斡巴途)도 염방이 건드리면 안 될 정도로 대단한 세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의외로군.”

노인의 성은 보기 드문 것으로 알이었다. 이름은 파도. 그 기묘한 이름보다는 직책인 총관이라고 부르는 편이 듣기 나을 테지만 청년은 어릴 때부터 그 이름을 재미있어하며 불러오던 습관이 있어 지금까지 늘 총관이라는 공식직함보다는 이름을 불러왔다.

특이하다면 이름을 불수(不隨), 성을 완안이라 하는 그 역시 만만치 않지만. 고둔과 포두가 입에 올렸던 완안세가의 당대가주, 그리고 유일한 혈족이 바로 완안불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청년이었다.

한편으로는 박쥐인간, 즉 편복협(俠)이라는 이름으로 고담의 밤을 수호하는 자이기도 했다. 평범한 백성에게는 무해한 괴인에 불과하지만 염방을 비롯한 흑사회의 무리들에게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등에와도 같고, 때로는 저승사자와도 같은 두려움의 대상이 바로 그였다.

“저는 염방을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건드림으로 해서 분노할 사람들이 두렵지요.”

“사람들이라면?”

“빈민들입니다.”

완안불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휘파람을 불었다.

“염방은 빈민들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자들 아닌가. 쥐벼룩을 잡는다고 쥐가 화를 낼까?”

알파도는 수건을 받아 팔에 걸치고 허리를 바로세웠다. 이제 그만 쉴 시간이라고 알리는 의례적인 자세였다.

“쥐와 쥐벼룩은 때로 공생관계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고양이나 개를 앞세우고 사람이 다가가면 그게 벼룩을 잡으려는 것인지 자기를 잡아먹으려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우니까요.”

“하지만…….”

더 말하려는 완안불수를 알파도는 부드럽게 떠밀어 침실로 향하게 했다.

“늦었습니다. 저녁 연회시간에 맞추어 일어나시려면 지금 잠자리에 드셔야 합니다. 연회준비는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안심하시고…….”

“하지만 할 말이 더…….”

“문제의 건에 대한 조사도 제가 나름대로 해놓겠습니다. 세가의 비단취급점을 통하면 포청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쉽고 정확하게 조사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정확히 무얼 조사해야 하는지…….”

“혈겁이 일어난 세 염색공 주변을 탐문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특히 그 염색한 후의 물처리에 대해 최근 무슨 말이라도 있었는지, 그것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있었는지 등등에 집중해서 말입니다.”

바로 그게 완안불수가 하려던 일이었다. 알파도가 거기까지 말하니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그가 ‘착한 아이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하기 전에 물러가는 수밖에.

부모님을 흑도의 무뢰배에게 잃은 그날 밤도 알파도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그러니 나는 더 이상 착한 아이가 아니라고 울며 말하자 알파도는 엄하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 이제는 더욱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야 한다고. 그리고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정말 나는 훌륭한 어른이 되었나?’

아마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죽을 때까지 그 문제로 고민해야 할지도 모른다.

2

어느새 그는 잠들었고, 네 시진을 죽은 듯이 자고 나서야 눈을 떴고, 늘 그렇듯이 알파도는 침상 옆에 새 옷을 가지런히 늘어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속바지 위에 비단 바지를 입고 짧은 적삼을 걸친다. 아랫자락이 짧은 단포(短袍)를 그 위로 걸치되 반드시 옷섶이 벌어지도록 한다. 자홍색 한요(腰) 위로 혁대(革帶)를 졸라매고, 양팔에는 비구(臂)를 단단히 묶어서 움직임이 편하도록 한다. 발이 너무 꽉 끼지도, 그렇다고 헐렁거리지도 않게 적당한 명주 버선을 신고, 목이 긴 통전화(筒靴)를 신되 윗부분을 끈으로 묶어 뛰고 굴러도 벗겨지지 않도록 한다. 삼단 같은 흑발(黑髮)은 잘 묶어 올린 뒤에 영웅건(英雄巾)으로 이마를 동인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그것 대신 이것을 써야 합니다. 제가 잘못 준비했군요.”

그러면서 알파도가 내민 것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모자 아래쪽에 비스듬히 두 개의 날개가 달린 유건(儒巾)이었다. 약관을 지난 나이인 만큼 맨머리를 드러내서는 안 되고, 고담에서도 제일가는 부호에 명문가의 자손답게 보석으로 장식한 보관(寶冠)이나 태자관(太子冠)은 지나치게 노숙해 보여서 안 되니 유생이 아닌데도 유건을 쓰는 것이다.

그게 그의 나이와 용모에 가장 잘 어울리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유건을 쓰는 이상 지금까지 입은 옷 위에 치렁치렁한 소매가 있는 유삼도 걸쳐야 한다.

그게 싫어 눈살을 찌푸리자 알파도가 나직이 말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을 잘해내는 것이 진정한 가주의 실력입니다. 그래야…….”

“쉽고 빨리 끝난다는 말이지. 알았어. 입으면 되잖아.”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면서도 그는 유건에 유삼까지 걸쳤다. 그러고 나서야 침실을 나서서 아침에 들어온 곳, 즉 흑마를 풀어둔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알파도가 손을 내밀어 가로막았다.

“벌써 손님들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가 잠든 사이 이미 저녁이 되어 연회시간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문으로 가서 손님을 영접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오늘의 주인은 그였으니까.

“성주가 도착하기 전에는 내가 직접 나가볼 필요까지는 없잖아.”

“그 성주가 곧 도착한다는 보고입니다.”

이번에야 말로 그는 인상을 썼다.

“빨리도 오는군. 고담이 이렇게 엉망으로 돌아가는 이유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니까. 시정을 살펴야 할 성주라는 작자가 이렇게 먹고 노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니…….”

“무능한데 열심히 하는 관리가 제일 위험하다는 말도 있죠.”

알파도의 말에 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성주는 무능하고 게으르기까지 하니 다행이라는 말이군. 과연.”

실없는 대화 덕분에 마음이 풀려서 그는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맞으러 나갈 수 있었다. 원래 가려고 했던 곳과는 다른 방향, 길고 긴 복도와 수없이 많은 방, 그리고 몇 채의 전각과 그 사이의 정원을 지나 그는 완안세가의 정문이 멀리 바라보이는 정전의 앞에 섰다.

벌써 몇 대의 마차가 정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세가의 호원무사들이 예복을 갖추어 입고 허리에는 패검을, 손에는 장창을 움켜쥐고 도열해 있는 앞에 마차는 문을 열고 고담성의 부와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을 토해내었다.

접객을 맡은 종복들이 빠르지만 어지럽지는 않게 손님들을 안내하는 것을 보며 완안불수는 단지 손님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것도 시립한 알파도가 작은 소리로 알려주는 이름을 따라 부르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키와 허리둘레가 비슷해 보일 정도로 비대한 위인이 온몸을 비단으로 감고서는 그의 앞에 섰다. 그 옆에는 그와 거의 맞먹을 정도로 비대한 여인이 비단에 더해 귀금속을 친친 감고서 서 있었다.

“본관의 사소한 기념일을 연회까지 열어 축하해 주니 무어라 감사의 뜻을 표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성주 내외였다. 완안불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연회를 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 자체가 백성의 영광입니다.”

그 말에 이의를 달고 싶지 않은지 성주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내를 받아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성주를 보좌하는 고위 관료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고담의 돈줄을 손에 쥔 전장의 주인들이 뒤를 따랐다.

고담을 떠받치는 두 개의 산업인 비단과 도자기를 만들고, 유통하고, 판매하는 상인들이 지나간 자리를 농장과 산림, 탄광을 소유한 대지주들이 채웠다가 비웠다. 그 다음에는 고담이 유지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식재료와 생필품을 만들고, 유통하고, 판매하는 업자와 상인들의 순서였다. 이렇게 사람들은 끝도 없이 밀려오고 또 밀려갔다.

거의 반 시진 가량 후에야 완안불수가 개인적으로 관료보다도, 부호나 상인보다도 가치를 두는 사람들, 학자들과 장인들이 방문했다. 그리고 그 끝에 원래는 최선두에서 지나갔어야 했을 추관(推官)이 직속부하인 즙포사신 고둔과 대포두 몇 명을 거느리고 다가왔다.

추관은 성주의 아래에서 고담의 법질서를 수호하는 최고관리다. 지금 그 중차대한 직책을 맡고 있는 자는 단톤(端)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인데, 안휘성 합비(合肥) 출신이라 통상 합비 단톤이라 불린다.

이 썩을 대로 썩어 부패하지 않은 곳을 찾기 어려운 고담에서 그나마 공정하고 청렴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 자가 이곳에서 무얼 하는지, 그런 자가 법을 관장함에도 불구하고 고담이 이 지경인 것은 어째서인지 궁금한 일이었지만.

합비 단톤과 고둔은 여기 오는 동안 하던 이야기를 완안불수의 앞에 와서까지 그치지 않았다.

“소요사태라고? 지금 민란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건가? 겨우 흑도의 쥐새끼 몇 마리를 잡아들였다는 이유로?”

“염방 놈들이 머리를 썼습니다. 실질적인 수뇌진은 뒤로 숨으면서 빈민들의 신망이 높은 장로들을 우리에게 잡아가도록 넘긴 겁니다. 장로라지만 이름뿐이지 실질적인 권력은 없고, 염방의 내부사정 같은 것도 모르는 자들이죠. 하지만 빈민들은 그걸 쌓인 불만을 터뜨리는 계기로 삼아…….”

“일이 생긴 모양이군요.”

듣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말을 걸어보았지만 합비 단톤은 손을 들어 말문을 막은 후 계속 고둔하고만 이야기했다.

“그래서 대처는?”

“포청의 모든 인원을 내보내 막고 있습니다. 주요 도로를 통제하고 군중을 해산시키고……. 여차하면 잡아들인 장로들을 풀어주는 것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건 안 돼! 애초에 잡아들이지 않았으면 모르지만 잡아들인 이상은 억류하고 있어야 하네. 지금 풀어주면 그들이 폭도들의 지휘부가 될 테니까.”

“하지만 그들이 있으나 없으나 실질적인 지휘는 염방의 수뇌들이 하고 있을 텐데요.”

“그러니까 그들도 잡아들여야지. 그것도 신속히! 생각해 보게. 빈민들의 소요는 어차피 이번 일이 아니었어도 일어나고야 말았을 걸세. 그들이 봉기한 것은 염방의 장로들을 잡아들여서도 아니고, 엽기적인 살인이 연달아 일어나서도 아니야. 문제는 가난이고, 무엇보다 물일세. 근래 점점 더 심해진 수질오염 때문에 수로의 물을 그냥 마실 수 없게 되었다는 게 진짜 원인이라는 걸세.”

듣고 있던 완안불수는 표시나지 않게 눈썹을 치켜세웠다. 정직하고 청렴하지만 무능하다고 생각했던 합비 단톤이 의외로 명민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였다. 핵심을 짚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번 봉기는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네. 그건 그것대로 처리하고, 그 배후에서 부추긴 염방의 수뇌들은 그것대로 따로 또 처리해야지. 이번 기회에 놈들을 잡지 않으면 나중에는 정말로 그들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빈민들은 또 봉기를 일으키게 될 걸세. 그러니 가서 잡으라고! 연회 따위에 참가할 시간이 어디 있나! 가서 잡아! 필요하다면 포청에서 물심부름 하는 노비까지 동원해서라도 놈들을 잡아들이라고!”

“삼가 명령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고둔이 부동자세로 외치고는 돌아서서 달려갔다. 단톤은 그 후에야 완안불수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체를 했다.

“안 좋은 모습을 보였구려.”

완안불수는 정중하게 포권하고 말했다.

“무슨 말씀을, 관아에 협조할 의무가 있는 평민으로서 무엇이건 요청하시면 도와드릴 의사가 있습니다. 가령 저희 세가의 무사들을 마음대로 쓰신다거나…….”

단톤은 코웃음을 쳤다.

“잡인들이 끼면 사고가 나기 때문에 불가하오.”

완안불수는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사고는 이미 난 것 아닙니까.”

“사고에도 정도라는 게 있으니까.”

가볍게 제안한 것인데 단톤은 정색하고 으르렁거렸다.

“법은 위임받은 자만이 집행할 수 있는 것이고, 반드시 그래야 하오. 잡인들이 제멋대로 끼어들면 통제불능의 사태가 초래되는 건 금방이거든. 요즘 정의의 사도인 양 날뛰는 박쥐새끼만 해도…….”

“박쥐라니요?”

완안불수가 모르는 척 묻자 단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박쥐탈을 뒤집어쓰고 고담의 밤거리에 출몰하는 괴인을 모른단 말이오? 위로는 성주님부터 아래로는 저잣거리의 어린애까지 모두 아는 이야기를?”

“아, 그 박쥐인간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난 또 진짜 박쥐 이야기를 하시는 줄 알고…….”

“박쥐인간 이야기요. 사람들은 그놈에게 편복협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줬더구려. 소위 약자를 도와 악을 물리치는 협객이라고……, 흥,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지요. 자고로 협객이란 폭력을 사용해 법을 어지럽히는 무리요. 마땅히 국법을 어지럽힌 죄를 물어 주살해야 할 것이오.”

“하지만 협객은 일반 무뢰배와는 달리 정의를 위해 악과 싸우고 약자를 돕는 자들이 아닙니까. 아무리 법의 저울에는 옳음과 그름을 판별하는 눈은 있어도 좋음과 나쁨을 재는 눈은 없다지만 그들을 무뢰배와 같이 취급해 주살한다는 것은 지나친 처사가 아닐까요.”

단톤의 태도는 단호했다.

“자의로 법을 어지럽히는 자의 뜻이 선의인지 아니면 악의인지는 누가 판단하겠소. 법에도 온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법을 무시하는 자에게 줄 온정은 없소. 그건 존재의 근거를 부정하는 일이기에.”

그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좌우의 소매를 차례로 털어 소리를 내더니 완안불수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에서 완안불수는 중얼거렸다.

“단호하시군. 본인이 법과 정의의 수호자라도 된 듯한 태도야.”

내내 아무 말 없이 시립해서 듣고만 있던 알파도가 말했다.

“실제로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그의 직위는 법과 정의의 수호자인 게 맞습니다. 그런 직위에 있는 사람이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것도 문제겠지요.”

완안불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법의 수호자인 건 인정할 수 있어. 하지만 정의의 수호자이기도 한 건가는 모르겠군. 법이 정의와 일치하는 건 법이 제대로 역할을 수행할 때만이니까. 불행히도 지금 법은 제 역할을 못 하고 있고, 정의의 균형은 무너졌어.”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걸 모르면 균형의 문제를 논하기도 어렵죠.”

알파도의 말에 완안불수는 코웃음을 쳤다.

“갑자기 대학사라도 된 것 같군. 대학사는 그 늙은 몸을 이끌고 아까 전에 이미 연회장으로 들어간 것 같은데 말야.”

알파도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요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죠. 들어가세요. 들어가서 연회의 시작을 알리셔야죠. 오늘 밤은 고담의 전역에서 모인 팔십사 인의 숙수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요리와 상상을 넘어선 모든 요리를 준비해서 내올 겁니다.”

“황제만이 맛볼 수 있는 스물두 가지 요리 말이지? 궁금한 건 내가 그 중 몇 번째 요리 사이에 사라질 수 있느냐는 것뿐이야.”

“여덟 번째 요리 이후에는 자리를 뜨셔도 아무도 모를 겁니다. 하지만 저라면 저 스물두 가지 요리 중 하나도 빼먹고 싶지 않을 겁니다. 오늘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것도 있으니까요.”

“지금 나는 요리보다는 저 고담의 수로와 연못 사이를 돌아다니는 혈겁의 흉수에게 더 관심이 있네. 대체 누가, 어떤 방식으로 그런 일을 했을지 궁금해 죽겠어.”

그러면서도 그는 알파도를 대동하고 안으로, 연회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관심은 연회와 요리로 향하지 않았다.

“봉기라고? 왜 내가 일어나자마자 이야기하지 않았지?”

“안다고 해도 할 일이 없으니까요. 그건 단톤 추관의 말대로 어차피 일어나게 되어 있던 겁니다. 살겁이 있었건 없었건, 주인님의 활동이 있었건 없었건요.”

“그러니 개입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군.”

“개입해 봤자 뭘 어쩔 수 없을 테니까요.”

“난 그 말이 너무 싫어. 뭘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그 말.”

“그게 사실이니까요.”

“아버지는 이곳 고담에서도 제일가는 부호셨지.”

“지금은 주인님이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빈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하셨어. 어릴 때의 내 기억은 그랬어.”

“확실히 그러셨습니다. 전주인님은 빈민구휼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죠.”

“내가 세가를 물려받은 이후에도 그런 활동에 지원을 아낀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적어도 아버지가 해오던 일을 중단시킨 일은 없었어.”

“새로운 일은 안 하셨지만, 중단시킨 일은 없었죠.”

“그렇다면 이번 빈민봉기에 대해서도 무언가 할 일이 있지 않을까? 봉기의 근원이 된 물 부족 사태를 해결할 무언가를 해 줄 수는 없는 걸까?”

“우물을 새로 파도 맑은 물은 나오지 않을 정도로 고담의 물은 오염됐습니다.”

“그 물을 다시 맑게 하는 방법은?”

“염색을 금지시키면 좀 나아지겠죠. 이번에 혈겁을 당한 자들은 그조차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염색업자들이 하는 침전수조 증류법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예 염색을 금지하는 게 한 방법이겠죠.”

“대신 돈을 벌지 못하게 되겠지. 그럼 음식을 사지 못할 테고, 결국 굶게 되겠지. 염색은 비단사업에 필수적인 공정이야. 금지시킨다는 건 말도 안 돼.”

“분뇨를 수로에 흘려보내는 것도 금지시키고, 세탁하는 것도 금지시켜야 합니다. 당분간은 목욕도 금지시켜야 할 테고요.”

“사람이 사는 걸 금지시키라는 말로 들리는군.”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죠. 고담에 사람이 사는 걸 금지시키고 백 년, 아니 십 년쯤만 지나면 물이 다시 깨끗해질지도 모릅니다. 사람이 돌아오면 다시 더러워지겠지만요.”

“빈민들은 그렇다 치고……, 오늘밤 여기 모인 관료나 부호들은 대체 깨끗한 물을 어떻게 해결하지? 아니, 우리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 건가?”

“고담 바깥에서 길어오죠. 업자들이 수레와 물통을 이용해서 먼 곳으로부터 길어옵니다. 돈 있는 자들은 업자들로부터 물을 사서 쓰죠. 빈민은 그럴 수 없지만.”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게 호흡하는 공기와 마실 물이라던데, 고담에선 그것도 아니라는 것인가? 돈이 없으면 깨끗한 물도 마실 수 없다는 건가?”

“불행히도 그런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셨지.”

“아버님의 뜻은 훌륭하셨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뭐라더라……, ‘가난한 자들의 생활이 나아지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부가 증대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알고 보면 이런 의미일 뿐이다. 고용되어 일하는 자들이 자신을 고용한 자들의 부를 더욱더 증대시키고, 증가시킬수록 그들은 자신들을 묶어 끌고 가는 황금사슬을 자신들 스스로 벼려내는 것에 만족하면서, 더 나아진 조건 아래에서 또다시 부호들의 부를 증가시키고, 그 힘을 강화시키기 위해 일하도록 허용받는다.’라고요.”

완안불수는 정말로 이맛살을 찌푸렸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