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소찰

  • 장르: SF, 로맨스
  • 평점×49 | 분량: 93매 | 성향:
  • 소개: 급격하게 뒤틀린 지반 밑에서 움직이는 것의 정체를 파헤치기 위해 지하 탐사를 간 에스터와 인류세로 만들어진 괴물의 한시적 조우 더보기

파라소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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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소찰은 사선으로 몸을 비틀며 꿀렁였다.

미끈한 뱃가죽은 방금 막 갉아먹은 수정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파라소찰은 땅 밑의 광물을 주식으로 삶을 연명했다. 그들이 바닥이 아닌 천장을 지탱하는 수정을 먹어 치울 때마다 지반이 살짝씩 뒤틀리며 움푹 꺼졌다.

파라소찰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한 번 내쉬는 숨은 아주 느리고 길지만, 그래서 그들이 체감하는 시간 또한 무한에 가깝지만, 그 징그러울 만치 끈질긴 기다림은 오히려 커다란 허기를 불러오곤 했다. 신체적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소화를 할 때만 바닥에 배를 비비 꼬아 비비는 그 생물은 자신들이 빛 하나 들지 않는 어둑하고 습한 공기 속에서 평생을 살아갈 줄 알았다.

***

지반으로부터 300m 아래, 수정동굴로 가는 카트에 탑승한 에스터는 헬멧과 보호복, 산소마스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여분의 손전등 배터리와 초코바를 주머니에 끼워 넣고 동료들이 비는 건투를 받은 그는 2시간 뒤에야 다시 마주할 지상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카트로 왕복 한 시간이면 실질적으로 동굴 내부에서 활동하는 시간은 단 한 시간… 갔다가 돌아오는 길까지 생각하면 기껏해야 정거장으로부터 걸어서 20분 거리 정도밖에 못 가겠구먼.’

프로답게 무의식적으로 탐험 가능성을 어림잡아 셈하며 에스터는 레버를 당기고 끝없는 지하 광산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듯 빠르게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덥고 습해졌다. 지상에서는 차갑고 서늘하게 맨살에 달라붙었던 신소재 보호복이 점점 더 열기로 부풀고 후줄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산소마스크 안은 호흡을 조절하며 발생한 입김으로 가득해졌다.

고된 일이 되리란 건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최근 들어 땅과 관련된 기이한 일들이 두더지처럼 불쑥 튀어나와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건’은 사람들에게서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지 못했다. 첫 소식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지만, 몇 년 동안 비슷한 일이 반복되자 사람들은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였다. 심각성을 느끼는 건, 단 일주일. 그 이후에는 모든 관심이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땅굴이든 궁금증이든, 무언가를 깊게 파고 내려가는 건 에스터의 본성이므로, 그는 동료들의 만류에도 고집스레 탐험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지경에 다다랐다.

우리는 현재 지구의 핵을 향해 달리고 있다. 후끈거리는 공기에 습도가 90%에 육박하여 동굴 속에서 2시간 이상 있게 된다면 질식할 수도 있다. 따라서 다이브와 마찬가지로 제시간에 정해진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 광부들은 그런 직업이다. 바다가 아닌, 땅 밑으로 잠수하는 존재들. 그리고 에스터 또한 육지의 숙련된 잠수부다.

30분 만에 지하 300m까지 도달한 에스터는 안전벨트를 풀고 카트에서 내렸다. 헤드랜턴을 켠 그는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주변을 살폈다. 동굴 바닥에는 미지근한 물들이 얕게 깔려 있어 걸을 때마다 찰박찰박 소리가 났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그는 왼쪽 통로로 향했다. 에스터는 중간중간 동굴 바닥에 침을 뱉었다. 중력이 어디로 작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동굴을 탐험할 때는 실제로 올라가고 있더라도 밑으로 내려가고 있다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비틀비틀 꺾인 통로를 기어가다 보면 그러한 착각은 더 심해진다. 수평으로 기고 있는 건지, 아니면 수직으로 땅에 처박혀 지구 내핵 쪽으로 기어가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땅 위가 아닌 밑을 파고들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오면 이미 중력에 몸이 묶여 벗어날 길이 없다. 지금 에스터가 움직이고 있는 동굴은 길이만 11m가 넘는 거대한 수정들의 향연이다. 투명하고 매끈한 거대한 기둥들이 제각기 다른 각도로 통로를 가로막고 있어 에스터는 그 사이로 몸을 빼내는 동시에 중력까지 가늠하려 애를 먹었다.

‘매번 마스크 벗고 침 뱉을 수도 없고. 번거로워 죽겠네.’

결국 에스터는 잠시 멈춰 선 채, 가방에 있던 추를 실에 매달고 손목에 묶었다.

‘한결 편하군.‘

아직까진 추가 발밑을 향해 떨어져 달랑이고 있었다. 에스터는 한숨을 푹 내쉬곤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수정 기둥으로 이리저리 막혀 있는 구간을 통과하고 나니, 어느새 에스터의 눈앞에 탁 트인 넓은 광장을 연상시키는 장소가 나타났다. 에스터는 천장에서 드리우고 있던 그림자들이 자신의 등장과 동시에 어디론가 후다닥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렸지만 이미 그들은 전부 달아났고, 헤드랜턴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천장만이 에스터를 맞이할 뿐이었다. 에스터는 주변을 찬찬히 살피며 걸었다. 그는 끈적한 점액질이 천장으로부터 자신의 머리 위로 툭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헬멧을 타고 흐르는 액체를 장갑 낀 손으로 만졌다. 파랗게 반짝이는 형광 물질이었다. 동시에 에스터는 자신을 둘러싼 동굴에서 새파란 형광 물질이 끈적하게 차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사삭, 사사삭. 작은 것들이 바쁘게 배를 문지르며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스르륵, 스윽. 거대하고 느릿한 것이 뱀처럼 동굴을 휘감고 타는 소리가 들렸다. 동굴 자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으스스한 소리를 냈다.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지는 고래의 울음소리에 에스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는 소리는 안 했잖아.

이렇게 거대한 존재는 더욱이.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