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나만이

  • 장르: 판타지, 호러 | 태그: #자살숲
  • 평점×30 | 분량: 56매
  • 소개: 그 숲에 발을 들여 놓거든 아이를 따라가지 마시오 더보기

오롯이 나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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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둠속 콘크리트길을 걷는다. 드문드문 이어진 가로등 불빛이 이정표처럼 내가 가야할 방향을 밝혔다.

눅눅한 맞바람이 불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들썩였다. 셔츠 소매를 들어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아낸다. 땀에 절어 훔치는 소매에서 짠 내가 났다.

쏴아아. 바람결에 양 옆으로 펼쳐진 벼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마치 파도가 일 듯이 바람을 따라 벼가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바람이 멎으면 기다렸다는 듯 풀벌레와 개구리 울음이 한꺼번에 울려 퍼진다.

얼마를 걸었을까. 나는 어깨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배낭끈을 고쳐 메다가 걸음을 멈춰 아예 배낭을 벗었다. 등에 들러붙은 셔츠 끝을 잡아당기자 그 틈으로 바람이 드나들어 시원했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침부터 혹사당한 두 다리를 뻗었다. 저릿한 느낌이 드는 걸 보니 겨우 피가 도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운동화도 벗어던지고 싶었다. 두툼한 양말도 벗어서 맨발이 습한 바람을 맞이하길 바랐다. 하지만 여남은 이성이 약간의 호사도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배낭에서 물통을 꺼내 얼마 남지 않은 물로 입술을 축였다.

청수산 둘레 길을 떠올린 건 괴로움에 가슴을 두들기던 새벽이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걷던 길을 다시 걷고 싶었다. 그래서 배낭을 찾아 들고 버스터미널로 갔다. 청수산으로 가는 첫차 시간이 될 때까지 터미널 안을 서성거렸다. 마치 그 시간이 오지 않을 것처럼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길었다.

점심시간이 되어서 도착한 청수산은 드높았고 산자락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본 산은 그새 달라져있었다. 겨울에 그와 왔을 때보다 공기와 바람이 뜨거웠고, 초라했던 나뭇가지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잎을 틔웠다. 메마른 갈색 빛으로 가득하던 산이 선명한 초록색으로 뒤덮였고 한산하던 주차장엔 차로 가득했다.

연이어 주차장 안으로 색색의 관광버스가 뒤뚱거리며 들어섰다. 산에 메아리치는 엔진소리가 한껏 죽어들면 그 안에서 등산복을 입은 무리들이 내렸다. 여직 꺼지지 않은 엔진소리를 이기려고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들이 저마다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그들이 등산로로 걸어 들어갈 때까지 초입은 요란스럽다.

그와 오르던 길을 따라 산을 올랐다. 한참을 오르고 둘레길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걷는다.

산을 내려오고 농로를 따라 걸으며 나는 내 귓가를 울리는 맥박소리와 숨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고통엔 무감각해져도 그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깨닫는다. 아, 나는 살아있구나.

오롯이 나만이.

나는 배낭끈을 고쳐 쥐고 걷다가 끝을 모를 직선 길을 벗어나 논 사이의 길을 걸었다. 가로등에서 멀어지자 이대로 발을 헛디뎌 논안으로 굴러 떨어지지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손전등 기능을 켰다. 창백한 불빛이 좁은 논길을 내달렸다. 벌써 저만치 앞으로 간 빛은 곧 거대한 어둠에 먹히고 만다. 빽빽하게 들어찬 어둠이 있는 깊고 넓은 청수산자락에서.

지금 내가 오르는 이 길은 제대로 된 길이 아니었다. 가파르고 듬성듬성 솟아오른 수풀에 발이 묶여도 나는 이를 악물고 올랐다. 저마다 굵기가 다른 나무둥치를 잡고 몸을 끌어올렸다.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서 쉬자.

가로등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산을 올랐다. 몇 번을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나서야 조금은 평평한 곳이 나왔다. 여기다 싶었다. 숨을 몰아쉬며 거치적거렸던 배낭을 내려놨다. 서늘한 숲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가 사라졌다. 주머니에서 여전히 빛을 쏘아대는 핸드폰을 꺼내 바닥에 내려놨다. 그리고 배낭을 열어 준비해 온 밧줄을 꺼내들었다.

사람들은 그가 죽은 것을 단순히 운이 없어서라고 말했다. 운이 없어서 그 시각에, 운이 없어서 그 고속도로 일 차선에, 운이 없어서 졸음 운전한 그 버스 앞에. 반대로 사람들은 나에게 운이 좋아 그 사고에서도 살아남았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나만이 재수가 좋아 살아남았다한들 사랑했던 그는 이 세상에 없는데 말이다. 살아남았음에 죽을 만큼 괴롭고 그건 내게 큰 형벌이었다. 이제야 나는 그 형벌에서 벗어날 것이다.

내 키를 넘는 나뭇가지에 밧줄을 걸쳤다. 기둥에 그 끝을 묶고 대롱 매달린 고리에 목을 걸 수 있게 수풀 속에서 큰 돌을 굴려왔다. 고리를 잡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돌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돌이 넘어지지 않게 발 끝에 힘을 잔뜩 줬다. 골반이 후들거렸다. 저만치서 나뭇잎을 치대며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에 뒤로 나자빠질 새라 잡은 고리에 목을 꿰었다.

숨이 차올랐다. 이제 발밑의 돌을 치우면 그만이다.

“뭐해?”

갑자기 옆에서 남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고리에서 머리를 빼고 바닥에 내려왔다.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처럼 심장이 팔딱거렸다.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나타난 의외의 인물을 바라본다. 작은 키에 깡마른 아이가 나를 쳐다보았다. 몇 번 큰 눈을 깜빡이더니 시선을 돌려 빛이 나는 핸드폰을 신기하게 쳐다본다. 자리에 쪼그려 앉고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낡은 초록색 반팔 티 위로 드러난 날개 뼈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