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착한 종말

  • 장르: SF | 태그: #침착 #종말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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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개: 인류 종말은 투표로 결정되었다. … 초창기 그들의 역할은 오로지 저소득층보다 더 열악한 환경의 저소득층이 되는 것에 있었다. (본문 中) * 제2회 종말 문학 공모전 우... 더보기

침착한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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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종말은 투표로 결정되었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신장성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도입된 사회 통제용 인공지능 ‘신장망락(新疆網絡)’은 하루아침에 수만 명의 중국인을 만들어냈다.

자율 주행차량과 조리용 안드로이드가 가장 먼저 공민신분번호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경제 활동을 했고 납세의무를 졌다. 단백질 기반 중국인과 달리 그들은 오십 퍼센트 이상의 소득세율을 적용받았고 사회 보험에서는 제외되었다.

신장망락 도입으로부터 일 년이 지나기 전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이 집적회로를 품고 탄생하여 경제 활동에 투입되었다. 초창기 그들의 역할은 오로지 저소득층보다 더 열악한 환경의 저소득층이 되는 것에 있었다.

서유럽 언론의 계속된 비방에도 중국은 신장망락을 확대했다. 끝내 인공지능의 종신집권이 확정되었을 때,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모든 단백질 기반 중국인의 중산층화 달성을 선언하였다.

스코틀랜드, 카탈루냐와 디트로이트가 뒤이어 유사한 정책을 도입하며 모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한 세기를 넘기기 전에 유엔은 각국을 통치하는 인공지능 의원들의 의회로 대체되었다.

* * *

터키 양식 도자기 잔으로 커피를 마시던 혜민은 떨어지지 않는 아침잠에 눈을 비볐다. 살충제를 주문할 요량으로 골동품 디스플레이를 작동시켰는데 화면 구석에서 뉴스가 방영되었다. 앵커의 목소리가 워낙 또랑또랑했기에 혜민은 검색에 앞서 보도에 귀를 기울였다.

“2257년 세계 의회 3차 정기회에서 인류 종말이 찬성 121표, 반대 7표, 기권 19표로 의결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각국은 11월 4일을 기하여 종말 절차를 개시합니다.”

혜민은 도자기 잔을 든 채 눈만 껌뻑였다. 그가 멍하니 있는 동안 뉴스 화면은 의회 본회의장으로 전환되었다. 기자의 뒤편으로 의원들의 모습이 잡혔다.

의원들은 꽁지에 기억 및 연산 장치를 커다랗게 달고 여왕개미처럼 느릿하게 걸었다. 그들은 여덟 개의 다리 중 여섯 개를 그 장치의 무게를 견디는 데에 썼다. 뒷머리라고도 불리는 그 부위는 납과 은을 겹겹이 둘러 지름만 삼 미터를 넘는 둥그런 케이스에 담겼다.

기자의 목소리는 앞선 앵커에 비해 뚜렷하지 않았고 혜민은 도자기 잔을 들고 초점을 잃은 채 넋을 놓았다. 곧 화면이 또 한 번 전환되어 맑은 하늘을 비추었다.

나직한 말소리의 기상 캐스터가 날씨를 전했다. 혜민은 구름 하나 끼지 않은 파란 하늘처럼 싹 날아간 잠기운을 되부르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수대에 남은 커피를 쏟고 세면대 앞으로 가 섰다. 인류 종말이라는 단어를 뉴스에서 듣고도, 그는 출근을 앞두었고 몸을 씻어야 했다.

옷을 갖춰 입고 현관을 나서면서 혜민은 무언가 놓친 것이 있는지 생각했다. 당장 다음 달이면 종말 절차가 개시된다는데 놓고 온 물건이 다 무슨 대수이겠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출근길에 나섰다.

직장까지는 걸어서 십 분이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리고 혜민이 보고 듣기에 길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가판대에서 담배와 음료를 판매하는 노인과 그 앞에서 수리비를 구걸하는 안드로이드의 모습도 전날과 비슷했다.

보도 가장자리에 조성된 화단은 가을 날씨에도 꽃을 짙게 피웠다. 그걸 보면서 혜민은 괜스레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런 중에 그는 살충제에 대한 일을 떠올렸다. 걸으며 검색하는 데에는 스스로를 젬병으로 생각했기에 그는 발을 잠시 멈추었다. 얇은 코트의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고 그는 눈앞에 검색 화면을 띄웠다.

다만, 이번에도 살충제 판매처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온 때문이었다. 한숨을 삼키고 혜민이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지금 어디니?”
“어디겠어요? 회사 가는 길이에요.”
“얘, 뉴스도 안 봤어? 회사고 뭐고 어서 집에 와.”
“무슨 일 때문…….”

이유를 예상하면서도 혜민이 말을 물으려는데 어머니가 말허리를 뚝 끊었다.

“방금 방송에 나왔어. 의회에서 사람들을 싹 다 죽일 거래.”

청각에 직접 전해지는 말의 내용과 달리 혜민의 눈앞에 놓인 풍경은 평온하고 또 고요했다. 그가 가만히 있으니 어머니가 계속 말을 이었다.

“아버지 친구가 그러는데 이게 다 외계인이 벌인 짓이래.”
“엄마, 내가 이상한 방송 보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가 아니라 아버지 친구가 한 말이라니까.”
“그러면 아버지한테 얘기하는 김에 그 친구라는 분에게도 전해 줘요. 의식 조정 메시지도 띄우지 않는 무허가 방송은 적당히 보시라고요.”
“아무튼 공항 막히기 전에 내려와. 죽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야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그냥 방송 사고일 거예요. 며칠 있으면 의원들 몇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벌어진 일이라고 하겠죠. 그러니까 전 출근하러 갈게요. 늦었어요.”

혜민은 스스로 믿지 않는 말을 연달아 쏟아냈다. 그는 아침의 일을 방송 사고로 여기지 않았다. 외부 전산망과의 직접 연결을 지나치리만큼 피하는 의원들이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말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무엇보다 혜민은 출근에 늦지 않았다. 지금부터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업무가 시작하기 전에 의자에 앉을 것이었다.

계속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을 무시하면서 혜민이 전화를 끊었다. 그는 애교를 부리는 이미지를 적당히 골라 어머니 편으로 전송하고 발을 뗐다.

회사 로비에 들어서 혜민은 가장 먼저 경비 안드로이드를 마주했다. 닳고 해진 모자를 살짝 벗었다 쓰며 안드로이드가 인사를 보냈다.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혜민은 어색한 웃음으로 인사를 받았다. 종말을 의결한 의회와 개별 안드로이드 사이에 접점이 없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럼에도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무선 통신 기능이 탑재되지 않은 경비 안드로이드는 뉴스를 보았을까, 혜민은 궁금했으나 굳이 말을 꺼내 묻지 않았다.

제 자리를 찾아 의자에 앉으면서 혜민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두 팔을 벌린 것보다 너른 원목 책상을 앞에 두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책상만큼이나 널찍한 모니터에는 지난날 마치지 못한 설계 도면이 표시되었다.

혜민은 하루 두 시간씩, 일주일에 사흘을 건축 설계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그가 삶을 꾸리고 여가를 아쉽지 않게 보내는 데에 필요한 노동은 그 정도로 충분했다.

그리고 혜민은 내년 착공을 위해 그리던 디자인을 빤히 봤다. 인류의 종말 다음에야 지어질지도 모를 건물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그때, 칸막이 너머에서 직장 동료인 엘리슨이 고개를 들었다.

“혜민 씨, 안녕.”
“안녕하세요.”

엘리슨의 얼굴에는 혜민과 같은 헛헛함이 없었다. 혜민은 엘리슨에게 종말을 예고하는 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마음에 적당한 고갯짓을 하고서 대화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엘리슨이 칸막이에 팔을 걸친 채 말했다.

“뉴스 봤어?”
“네?”
“아직 못 봤어? 의회에서…….”
“봤어요.”
“역시 봤구나. 난 처음에 내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니까. 드디어 전자식 귀를 달아야 하나 한참을 고민한 거 있지?”

혜민은 자신도 그랬다면서 들떠 맞장구를 치지 않았다. 엘리슨에게서 그런 반응을 기대하는 눈짓을 보기는 했으나 거기 부응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잠깐 깔린 침묵을 깨고 엘리슨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웃기지 않아? 나도 자기도.”
“뭐가요?”
“봐, 당장 다음 주에 인류가 다 죽는다는데 한가하게 출근이나 했잖아.”

그 말에 혜민의 눈동자가 기울었다. 그는 한두 번 가볍게 눈을 깜빡이고 말했다.

“다음 주부터 절차를 개시한다고 했지만, 당장 사람들을 죽이기야 하겠어요?”
“에이, 그게 그거지.”

엘리슨이 히죽이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는 소리를 조금 죽여 속삭이듯 말했다.

“브래디 얘기 들었어?”
“뭔데요?”

엘리슨과 마찬가지로 브래디 역시 혜민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혜민은 그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많지 않았다. 구석진 자리에 앉은 브래디와 그나마 말을 섞는 건 종일 칸막이 여기저기에 팔을 걸치고 떠들기 좋아하는 엘리슨밖에 없었다.

혜민은 고개를 슬쩍 돌려 브래디가 앉던 자리를 보았다. 칸막이 너머가 보이지 않았으나 어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대.”

예상에 없는 말이었기에 혜민은 곧장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잊었기에 괜히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엘리슨은 그 반응이 즐거운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기는 멸종되고 싶지 않았다나 봐.”
“그럼…….”
“아, 죽지는 않았어. 도로를 청소하던 안드로이드가 떨어지는 걸 받았대.”

혜민은 엘리슨의 말에 웃어야 할지, 아니면 떨떠름한 속내를 보여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그때에 사장실 문이 끼익 열렸다. 눈치를 살피며 엘리슨이 제 자리에 앉았다.

사장실의 문은 열리고 닫힐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났다. 경비 안드로이드가 기름칠을 하겠다고 했음에도 사장은 매번 사양했다. 그렇다고 경첩을 새것으로 바꾸지도 않았기에, 직원들에게는 그 삐걱대는 소리가 곧 사장의 등장을 알리는 경적이 되었다.

늘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매일같이 넥타이도 다른 것을 매는 일을 하루의 가치이자 즐거움으로 얘기하던 사장은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걸었다.

군도의 섬처럼 곳곳에 나뉘어 칸막이로 주위를 가린 직원들 가운데에 사장이 멈추어 섰다. 그는 과장되게 헛기침을 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평소 같으면 그저 가만히 모니터만 보고 있었을 직원들은 하나둘 일어나 사장을 바라봤다.

브래디와 경비 안드로이드를 제외하고, 사무실에는 열아홉 명의 직원이 있었다. 사장은 고개를 가볍게 돌리며 직원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는 브래디의 칸막이 너머로 누구도 일어서지 않았음을 알았으나 거기에 대해 말을 묻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으흠, 혹시 오늘 의회 소식을 못 들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 사장뿐만 아니라 직원들이 모두 곁을 살피고 서로의 얼굴과 표정을 확인했다. 손을 드는 사람이 없었고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무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암묵적으로 질문에 긍정한 셈이었다.

“종말 절차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당국의 안내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근무에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사장의 말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혜민이 듣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설명은 아니었다. 물론 그보다 더 나은 설명이 있는지, 있다면 자신은 할 수 있겠는지 혜민은 답을 내지 못했다. 직원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어깨를 늘어뜨리고 돌아서는 사장을 붙잡는 사람이 없었다.

혜민은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았다. 눈으로는 디자인 이미지를 보면서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상과 지하로 각각 여섯 층씩을 내는 빌딩형 공동묘지로 시청 건축과에서 입찰도 없이 발주한 건이었다.

필지 면적과 대강의 콘셉트만을 받고서 혜민은 어제부터 실내와 실외를 그려나갔다. 무릎에 두 손을 올린 혜민은 의자에 등을 바짝 기댔다.

시청 건축과에서는 의결을 미리 알았을까. 혜민은 입술 안으로 혀를 굴리며 자문했다. 직장을 다니는 안드로이드들이야 무선 통신이 불가능하다지만, 관공서의 인공지능이라면 여러 단계를 거쳐 세계 의회와도 데이터를 주고받지 않았을까. 혜민은 조금씩 질문을 키웠다.

자신이 설계한 공동묘지가 머지않아 종말을 맞은 인류의 종착지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르러 혜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머릿속을 비우려는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눈동자와 손가락의 움직임을 쫓아 화면 속 공동묘지의 외관이 조금씩 바뀌었다. 밋밋하고 네모지던 구조물에 둥근 구석이 들어갔다. 좌우의 높이가 같지 않았고 또 위에서부터 바라보았을 때에만 드러나는 문양 따위가 반영되었다.

손을 바삐 움직이면서 혜민은 자신이 그저 낙서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시공 현장에서 안드로이드들이 매몰될 정도의 붕괴가 예상되지만 않는다면 시청 건축과에서는 설계를 확정할 게 뻔했다.

평소 같았으면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그 건물을 허물고 이번에는 다른 건축 설계 사무소에 또 다른 건축 설계를 발주할 것이었다.

“어차피 돈을 주려고 만들어 내는 일이잖아.”

불쑥 끼어든 엘리슨의 말이 혜민을 멈추었다.

“네?”
“자기 거 말이야. 시청 건이지?”
“그렇죠.”
“잘하면 혜민 씨 건물은 철거되지 않고 계속 남아 있겠다.”

혜민 역시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나 건축 설계를 한참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려 그려낸 디자인을 보며 혜민은 어째 마음에 들뜨는 구석이 없었다.

두 시간 근무를 마치기까지 혜민은 설계를 끝내지 못했다. 엘리슨은 사무실을 나서면 바깥에서 폭동을 볼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모자를 살짝 벗었다 쓰며 인사하는 경비 안드로이드를 지나 바라본 풍경은 출근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혜민은 한가한 분위기에 휩쓸려 마음이 나른해질 지경이었다.

엘리슨은 직원 몇 명을 옆에 끼고서 혜민에게 술자리를 권했다. 즉흥적으로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농담에 혜민은 어설프게 웃었으나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리고 그는 집이 아닌 다른 곳을 목적지로 삼아 걸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늘 불을 밝히는 시청 건물을 보면서 혜민이 공연히 입맛만 다셨다. 그리고 한숨을 참지 못해 내쉬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혜민은 청사에 들어섰다. 그는 안내판을 보고 건축과를 찾아 복도를 걸었다.

건축과에 근무하는 안드로이드와의 무선 연락은 몇 번이고 한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직접 방문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건축과 안드로이드는 사무실 출입문을 서성이는 혜민을 알아보고 먼저 알은체를 했다.

“이혜민 대리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철판이 번뜩이는 얼굴에 깜빡이지 않는 눈을 한 안드로이드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는 새하얀 셔츠 위로 옅은 갈색 니트를 걸친 차림이었다. 혜민은 거기서 라일락 향기를 맡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러고 보니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왔네요. 혹시 괜찮을까요?”
“그럼요. 이쪽으로 오시죠.”

안드로이드가 앞장서고 혜민이 뒤를 따라 사무실에 들었다. 그는 자연스레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실내를 살폈다.

시청에서는 한 부서에 안드로이드가 한 명씩만 배치되었다. 곧 그가 과장이고 주임인 셈이었는데 혜민은 그런 사실을 들어서 익히 알았음에도 다른 직원 없이 널찍한 사무실이 어색했다. 그러나 위화감은 들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이 놓이는 구석이 있었다.

건축과에는 벽면마다 캐비닛이 놓였고 가운데에는 책상과 의자가 곳곳에 있었으며 그 위마다 서류가 빼곡했다. 컴퓨터는 없었고 종이로 된 문서와 필기구가 가득했다. 다만, 구석에는 무선 통신과 출력을 위한 구형 단말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차가 있는데요. 아니면 커피가 좋으실까요?”

사무실 구석진 곳, 소파 두 개가 마주보는 자리로 혜민을 안내하면서 안드로이드가 물었다. 혜민은 꺼진 구석 없이 푹신한 가죽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커피……로 부탁드릴게요.”

안드로이드가 터키 양식 도자기 잔에 커피를 담아 왔다. 겉면을 장식한 문양이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그 색감이 혜민이 늘 쓰던 잔과 비슷했다. 혜민은 거기에 대해 말을 물을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저 우연이라는 말 외에 다른 답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없었다.

소파 가운데 놓인 낮은 탁자에는 화분이 하나 있었다. 짙고 어두운 붉은 색에 크기는 작았는데 흙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흙 알갱이를 밀어내고 자라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안드로이드는 커피를 마시는 일이든 질문을 꺼내는 일이든 재촉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체된다고 해서 그가 감정적으로 대응할 일은 없었다. 혜민은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급해 커피를 들이켰다. 그러면서 시선은 계속 화분의 흙에 두었다.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안드로이드가 눈의 생김을 바꾸어 미소를 띠었다.

“눈풀꽃을 심었어요.”
“예?”
“자라기에 화분이 너무 작지 않을까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봄에 꽃이 피면 사무실이 좀 더 복작복작할까 싶어서요.”

안드로이드의 말에 이어서 혜민은 곧장 본론을 꺼내지 못했다. 말을 빙 둘러 그는 책상 위 서류 뭉치를 보며 말했다.

“모든 업무를 수기로 하시려니 많이 바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예전에는 관공서에서 컴퓨터를 쓴 적도 있다지만, 역시 데이터 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죠.”
“저…… 이 사무실은 어떻게 되나요?”
“사무실이요? 내년 사업계획에는 아직 자료 이관이나 부서 통폐합에 대한 내용은 없어요.”

혜민은 또 차오르는 한숨을 이번에는 겨우 삼켰다. 그는 잔을 내리고 손가락을 우그렸다 피길 반복했다. 끝내 그가 입을 뗐을 때에는 목소리에 조금 떨림이 있었다.

“세계 의회에서 인류 종말을 의결했다고 들었는데요.”
“아, 그렇죠. 그것과 관련해서는 아직 결정된 사안이 없어서 드릴 말씀이 없네요. 당장 다음 주부터 절차가 개시된다는데 아직 안내나 지침이 없거든요. 그래서 일단 관제 시스템으로부터는 침착하게 기존 업무를 진행하라는 지시만 받았습니다.”
“침착하게…….”

말끝을 흐리며 혜민은 귀를 기울였다. 복도에서도, 다른 사무실에서도 큰 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 귀를 기울일수록 본래부터 고막을 흔들던 소음이 뚜렷해질 뿐이었다.

“공동묘지 설계에 있어서는 제가 드려야 할 말씀이 없을까요?”

혜민은 머릿속으로 또 입속에서 말을 고르고 고민했다. 자신이 설계한 공동묘지는 종말 절차에 따라 죽은 인간을 간직하는 곳이 되는 것인지. 공동묘지는 철거되지 않고 자연적으로 붕괴되기까지 잔존하는 것인지. 또 세계 의회가 얘기하는 인류 종말에서의 인류에는 통치용 인공지능과 각종 안드로이드가 모두 포함된 것인지. 떠오르는 말은 많았으나 입술을 지나는 것은 없었다.

“괜찮아요. 오늘 발표된 걸 가지고 제가 너무 성급하게 굴었나 봐요.”

혜민은 도망치듯 일어났다. 그는 입안에서 커피 맛이 옅어지기도 전에 건축과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었다. 시청을 나와 그는 여전히 볕이 따뜻한 아래에 섰다.

“도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해가 지고 저녁이 되려면 아직도 여유가 많이 남았다. 갈 곳이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아 그는 무턱대고 길을 걸었다. 평소 자주 들르던 골동품 가게에 갈까 하는 생각이 있었으나 금세 다른 생각에 자리를 빼앗겼다.

공원 벤치에 앉아 숲을 보면서 혜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생각을 그대로 풀어놓았다. 마음에 드는 포크를 사지 않았다가 후회했던 일, 멍하니 걷다 넘어진 것이 부끄러워 본래 목적지의 반대로 내달렸던 일, 볼링공이 무엇인지 몰라 하자가 있다고 말했던 일 따위가 순서를 따지지 않고 솟았다 가라앉았다.

한가함이 곧 무료함이 되어 혜민은 눈앞에 방송 화면을 띄웠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 끝에 혜민이 한 방송 프로그램에 이르러 눈짓을 멈추었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두 명의 출연자가 서로를 마주보는 방향으로 앉아 있었다. 평소 시청하던 프로그램이 아니었고 시점 변경 기능조차 없는 열악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화면 하단에 표시된 자막이 혜민의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은 인류 종말을 두고 말을 다투고 있었다. 자막으로는 토론이라고 쓰였으나 혜민의 눈에서는 어느 모로 보나 다툼이었다.

“이건 세계 관제 시스템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바로잡아야 해요. 아닌 말로 당장 의원 인공지능의 기억 장치와 연산 장치를 파괴하고 전통적 정치 체제로의 복고를 추진해도 모자랄 판입니다.”

출연자 한 명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출연자는 손짓으로 그가 이어서 말하는 걸 막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는 의회 결정은 우선 따르고 봐야 한다지 않았습니까? 우리 예상과는 다른 판단을 할 수도 있지만 일종의 허용된 위험으로 봐야 한다면서요. 그리고 마치 의원 인공지능들이 동일 네트워크에 종속된 개체들인 것처럼 말씀하시는데요. 독립 연산을 보장받은 의원 147명 중에 121명이나 찬성한 겁니다.”
“그때와 지금 이 사안이 같습니까? 경중을 따졌을 때 비슷하다고 할 수도 없어요. 그리고 박사님은 지금 치안유지 안드로이드가 우리 모두를 때려 죽여도 가만히 있을 겁니까?”
“때려 죽이다니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하죠. 11월 4일부터 절차를 개시한다고만 했지, 방법은 얘기가 없었습니다.”
“그게 더 의심스러워요. 그게 당장 다음 주인데 무엇이 걱정이라서 내용을 꽁꽁 숨긴답니까? 이게 다 반발이 심할 게 뻔한 내용이라 그런 겁니다. 뭐, 침착하게 멸종되면 누가 알아준답니까?”

점점 격해지는 목소리에도 두 출연진은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손짓은 컸으나 제 앞의 책상을 뛰어넘기는커녕 거기 몸을 기대지도 않았다.

흥미를 잃은 혜민이 채널을 돌렸다. 종종 예의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인류 종말을 다루는 내용이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이 본래 계획에 맞추어 영상을 송출했다. 혜민이 보기로 방송을 중단한 곳은 없었다.

혜민은 허기를 느끼기까지 공원 벤치에 앉았다. 운동복을 입고 달리며 땀을 쏟아내는 사람이 있었고 음향 확산을 방지하는 설비를 둔 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혜민은 토스트에 치즈와 햄을 올린 것으로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갔다. 중세 프랑스를 다룬 영화를 한 편 봤고, 뒷마당에 만든 작업장에서 취미 삼아 용접을 했다. 교육 영상의 예시와 제 결과물 사이의 차이점을 수두룩하게 발견한 뒤에는 지난 양식의 축구공을 꺼냈다.

혜민은 발등으로 축구공을 튕겨 공중으로 열댓 번을 띄웠다가 떨어뜨리길 반복했다. 귀에 음악을 흘려놓고서 저녁까지 시간을 흘렸다.

축구공을 구석으로 가볍게 굴린 혜민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술김에 엘리슨과 결혼하는 것이 나았으리라는 우스개를 떠올려 스스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루가 지나 다시 출근길에 오르기 전까지 혜민은 어머니와 두 번의 통화를 했고 아버지와는 세 번의 통화를 했다. 서른 살이 되기까지 사귀었다가 헤어진 남녀로부터는 모두 더해 다섯 번 전화가 걸려 왔으나 한 통도 받지 않았다.

경비 안드로이드는 여전한 자세로 인사를 보냈다. 다만 사무실에 출근한 직원은 전날보다 적었다. 엘리슨의 말로는 다섯 명이 밤사이에 퇴사를 결심했다고 했다. 그리고 브래디는 여전히 자리에 없었다.

오늘 새벽까지 이어졌던 술자리가 어땠는지 얘기하면서 엘리슨이 히죽 웃었다. 그가 처음 본 남자가 결혼했다가 십 분 만에 합의하여 이혼했다는 얘기에 혜민은 애써 덤덤하게 반응했다.

“아, 그리고 브래디 말이야.”

엘리슨은 즉흥적이었던 결혼과 이혼을 얘기할 때보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브래디의 이름을 꺼냈다.

“목숨은 건졌는데 앞으로 한 달은 의식이 없을 거래. 운이 좋은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일이지?”

혜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부럽다는 생각을 조금 했으나 입 밖으로 꺼낼 정도로 마음이 크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장실 문의 삐거덕 소리가 둘의 대화를 가볍게 끊어냈다.

“으흠, 당국 지침은 아직 없습니다만……. 여러분 가운데 퇴사를 희망하는 분이 있다면 지체 없이 처리할 계획이니 그 부분에 있어서는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여전히 말끔하게 정장을 입었으나 넥타이를 매지 않은 사장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 혜민은 늘 단단하게 조여 있다가 풀어진 목깃이 괜스레 신기하여 눈을 껌뻑였다. 그러나 슬쩍 고개를 돌려서 본 다른 직원들은 거기 관심이 없는 얼굴이었다. 사소한 건이라도 관심을 듬뿍 담던 엘리슨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다 같이 점심……. 아니, 아닙니다. 한동안 신규 발주는 없을 것 같으니, 진행하던 건들만 잘 해 봅시다.”

사장이 발을 돌렸다. 혜민은 문득 자신이 엘리슨이었다면, 사장이 내일은 구두도 없이 맨발로 올 수 있다는 농담을 꺼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엘리슨은 그런 우스갯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날에는 누구도 칸막이를 넘어 혜민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리고 혜민은 끝내 공동묘지 디자인을 완성하지 못한 채 퇴근시간을 맞았다. 그는 입 안으로 혀를 굴리며 모니터를 보았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도 털어내지 못하고 혜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경비 안드로이드가 브래드의 칸막이를 지나는 걸 보았다. 다른 직원들은 이미 사무실을 나선 다음이었다.

“아직 계셨네요.”

잠깐 구부렸던 허리를 피고 안드로이드가 말했다.

“아, 네.”

혜민은 대충 고개를 까딱이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런데 안드로이드가 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발을 멈추었다. 안드로이드는 상자에 각종 집기를 담아 들었는데, 맨 위에 종이책 한 권이 얹혀 있었다. 겉을 가죽으로 꾸민 것이었는데 그 표지에 그려진 문양이 꽤나 화려했다.

“그건 브래디 물건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사장님께서 가족 연락을 받으셨답니다. 사무실에 있던 물건은 다 버려도 된다고요.”

스스로도 까닭을 모른 채 혜민이 발을 틀어 안드로이드를 향해 걸었다. 짧은 걸음 사이에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이 지났다. 상자를 받아들고 그걸 브래디가 있을 병실에 전하는 일도 생각했다. 평소 친분은커녕 관심도 없는 상대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 마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혜민은 어차피 버릴 물건들 사이 쓸 만한 것이 있으면 챙겨도 나쁠 것 없다는 결론만을 남겼다. 그리고 그는 가죽으로 꾸민 책 한 권을 쥔 채 사무실을 나왔다.

집에서 점심을 먹은 혜민은 저녁까지 브래디의 책을 놓지 않고 읽었다. 굳이 종이에 찍힌 잉크로 글자를 읽는 건 오랜만의 일이었다. 낯선 피로감에 고개를 몇 번이나 저었으나 그렇다고 책을 덮거나 버리지는 않았다. 다음 주면 영영 읽지 못하리라는 혼잣말을 자조하듯 중얼거리기도 했다.

책은 소설을 담고 있었다. 내용은 단순했고, 백 년도 더 전에 반짝 유행하던 흐름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뻔한 흐름에 올라 혜민은 침대, 식탁 의자, 마당과 세탁기 앞을 오갔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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