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 Cassie

  • 장르: 판타지, SF | 태그: #종말문학 #백합 #GL #종말 #초능력
  • 평점×15 | 분량: 146매
  • 소개: 세상이 끝나기 20년 전부터, 종말에 대한 꿈을 꾸었던 이상한 예언자의 이야기 더보기

캐시 Cassie

미리보기

이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세상이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 질릴 정도로 상상해보았다. 운석 충돌, 전염병, 화산 폭발, 기후 위기, 식량과 물 부족, 핵전쟁, 심지어는 외계의 침공, 기계의 반란에다가 좀비 아포칼립스까지.

아, 좀비. 사람들이 종말을 상상할 때 그 허무맹랑한 괴물에 대해 말하는 걸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얼마나 수없이 재생산되었는지를 안다면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 것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과대광고인지 이해할 것이다. 사람들은 상상 속에서 더한 것도 겪었다. 이것은 가장 새로운 방식의 끝도, 가장 참신한 방식의 끝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사태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의 헐거운 틈새를 찌르고, 자신이 무적이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은 으레 파리스의 화살에 발꿈치를 찔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게 되어있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이 사건을 서술한다면 그것은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거라고, 아무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하기야 아무리 최악을 상정한다고 해도 세상이 정말 이렇게 끝나리라는 것을, 미래라도 볼 수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종말 20년 전부터.

*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장아찌 담그는 냄새가 나던 작은 빌라, 어깨가 구부정하게 굳어 본래보다 더 작아 보이던 우리 외할머니, 그리고 장롱 속에 들어있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개함이었다. 97년 즈음하여 개인파산을 신청한 우리 부모님은 나를 할머니 댁에 맡겼다. 할머니는 마지못해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5살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하나뿐인 손녀딸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랑하시긴 했지만, 통 안에 가득 든 할머니의 간식거리와 안방 장롱 속에 들어있는 자개함만큼은 절대 건들지 못하게 했다. 그 자개함은 어린 내 입으로는 발음조차 힘든 어떤 명인이 구한말 마지막으로 만든 작품 중 하나라고 했는데, 난리 통에 가족들과 헤어져 식모살이와 반찬가게 일로 평생을 먹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의 유일한 보물이었다.

‘난 가족들에게 덕 본 거 하나도 없다.’

할머니는 말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의 평생 자랑은 전후에 혼자 남은 고아가 누구에게 손 벌린 적 없이 혼자 힘으로 꿋꿋이 살아남은 것이었다. 한때 부유했던 외가의 가족들은 막내딸을 나무에 묶어놓고 가버린 뒤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채 40년을 보냈다. 경기도 외곽의 야채 직판장에서 우연히 작은 오빠의 큰아들을 만나 가족들과 조우했을 때, 할머니는 이미 작은 반찬 가게와 방 두 개 달린 허름한 빌라 한 채를 소유하고 계셨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가족들 그거, 그것도 남이 된다.’

이것이 할머니의 두 번째 말버릇이었다. 누군가의 한평생보다 긴 세월 동안 떨어져 있었다면 재회의 즐거움은 울음으로 범벅이 된 하루 반나절 만에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후였다. 할머니는 당신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동시에 당신의 존재를 어색하게 느끼는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세 번의 멀뚱한 가족 모임을 경험한 뒤 다시는 그들과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외증조할머니는 마지막에 돌아가시면서 할머니에게 약간의 패물과 자개함을 남겼고, 할머니는 걸핏하면 증조할머니를 ‘망할 여자’라고 부르면서도 매일 함을 꺼내 닦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러니 어린 내가 그 함을 가지고 놀게 해달라고 했을 때 할머니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무시했다. 내가 몰래 안방에 숨어들 정도로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할머니는 아예 함을 숨겨버렸다. 그러나 당시 6살이었던 내 눈에 반짝거리는 자개함은 도무지 포기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할머니가 가게에 나간 사이 나는 기어코 함을 꺼내 내 물건들을 가득 채우며 놀았다. 할머니는 두고 온 것이 있어 잠깐 들렸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노발대발하셨다. 회초리를 찾는 할머니 앞에서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 내가 이 함을 안 만지면 할머니가 내일 커다란 화분에 머리를 맞을 거란 말이에요. 금숙 할머니네 베란다에 있는 버들잎 화분에요.”

궁지에 몰린 어린애들이 다 그렇듯, 나는 참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 말도 안 되는 말을 지어내는 데 능했다. 할머니가 내일 화분에 머리를 맞는 사건은 자개함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그 귀한 함을 꺼내주는 대신 내일 저녁 베란다 아래를 피해가기만 하면 되었다.

내 말을 들은 할머니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졌는데 어린 나는 내 거짓말이 들켰나 싶어 더럭 겁을 먹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놀랐을 뿐이었다. 전날 금숙 할머니는 정말 버들잎이 그려진 커다란 화분을 베란다에 옮겨놓았는데, 내가 그것을 알았을 리 없을뿐더러 애초에 할머니는 당신의 친한 벗인 금숙 할머니가 이 사람한테 건강식품 떼다 팔고, 저 사람한테 황토장판 주워다 파는 게 싫어 그분에 대해 가족들에게 한마디도 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저녁, 할머니는 금숙 할머니네서 젓갈을 얻어 나오다가 내 말이 생각나 발걸음을 멈추었고 금숙 할머니가 놓친 화분은 할머니 바로 앞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할머니는 발등을 다섯 바늘이나 꿰매야 했지만 목숨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가끔씩 내게 자개함을 꺼내주셨고 내가 그것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셨다.

“아가, 내일 내가 여길 가도 괜찮을까?”

그 뒤로 할머니는 내게 종종 그렇게 물었다. 그 경우는 교회 말씀 모임에 나가는 것부터 노인정의 다른 노인들과 호수 공원 산책을 가는 것까지 다양했다. 나는 할머니가 구워준 과자를 우물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네, 괜찮아요. 잘 다녀오세요.’라고 말했고 한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분 사건 이후 매사에 불안해 보이던 할머니는 점차 진정하는 듯했다. 할머니가 내게 자개함을 꺼내주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몇 달을 보낸 뒤 ‘네, 괜찮아요.’만 반복하던 내가 처음으로 다른 말을 했다. 심지어, 이번엔 묻지도 않았는데.

“할머니, 오늘 반찬가게 가지 말고 저랑 있어요.”

할머니 말에 따르면, 오래 자면 정오까지도 늘어져 자던 잠 많은 내가 그날에는 어째서인지 할머니가 나가는 6시에 맞춰 일어났다고 했다. 할머니는 신발장에서 등을 동그랗게 말고 구두를 신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네, 오늘. 가지 마세요.”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고 할머니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신발을 도로 벗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분의 마음 한켠에는 유치원 봄방학 중이던 내가 혼자 집에 있기 심심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반찬가게 쪽에는 시커먼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고. 할머니가 반찬가게를 얻었던 상가가 통째로 전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인은 방화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지하상가 구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상가에 입주한 다른 가게들의 주인들은 대부분 할머니의 친구분들이었다. 나는 종종 할머니의 가게에 따라가 그들을 만났었다. 촌스러운 옷을 한가득 떼오면서도 무슨 수완인지 다 팔아치우던 옷가게의 아줌마와 내게 허쉬 초콜릿 작은 것을 하나씩 쥐어주던 수입과자점 할아버지, 과묵하지만 내심 나를 예뻐했던 철물상 아저씨와 내가 오빠라고 부르며 따르던 젊은 조카.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지나치게 덤덤해 보였다고 한다. 마치 이 광경이 익숙하다는 듯이, 심지어는 지루하기까지 하다는 듯이.

장례식장에 돌아온 할머니는 검은 옷을 벗고 나를 씻겼다. 나는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과하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저녁을 먹는 내내 나는 만화영화를 보며 깔깔거렸다. 나에겐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능히 갖추고 있어야 할 뭔가가 결여된 것이 틀림없었다.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얘야.”

할머니를 돌아보았을 때 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씹고 계시던 모습도, 보통의 노인이라면 절대 손녀딸을 향해 보이지 않을, 희미한 외경(畏敬)이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도 기억한다.

“너는…….”

할머니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너는 신이 보낸 아이구나.”

당신은 어린 손녀가 선풍기를 틀어놓고 자는 것을 보면 호들갑을 떨던 어리석은 노친네였다. 당신이 말하는 ‘신’이라는 개념은 민속신앙과 기독교적 믿음이 엉망으로 뒤섞여 백내장 걸린 왼쪽 눈만큼이나 흐리멍텅했다. 할머니는 ‘신’이 나를 사랑하며, 이유가 있어서 나를 이 땅에 보낸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후 남은 어린 시절을 나는 할머니의 그 굳센 믿음을 들으며 자랐다.

할머니는 나를 지나치게 귀히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면 간식은 언제든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학교에 진학한 뒤에는 아무 핑계를 대지 않아도 학교를 빠질 수 있었다. 계속 자개함을 꺼내 가지고 놀게 해주었음은 물론이다. 이미 몇 번이나 가지고 놀았기에 그 보석함에 대한 내 관심은 이미 시들해 진지 오래였지만 나는 할머니가 함을 꺼내주며 짓는 표정이 좋아 기꺼이 그 특혜를 받아들였다.

할머니는 이후 어떤 말씀을 듣거나, 계시를 받거나, 꿈을 꾸지 않았는지 나에게 집요하게 캐물었다. 나는 매번 없었다고 답했다. 하지만 한 번은, 할머니의 집착에 질려 거짓말을 꾸며낸 적이 있었다.

“네, 어제 무슨 꿈을 꿨던 것 같아요.”

나는 말했다.

“근데 기억은 안 나요. 별로 중요한 건 아녔겠죠.”

그리고 진짜로 기이한 것은, 그렇게 말한 뒤 내가 진짜로 꿈을 꿨다는 것이다. 꿈에서 나는 회색 사막과 같은 눈밭을 보았다. 회백색 재가 섞인 눈이 계속해서 내리는 곳이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 거무죽죽한 눈에 뒤덮였다. 그리고 그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닥치는 대로 주워입은 것 같은 허름한 방한복과 새까만 방독면 때문에 나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깨어난 뒤 나는 어리둥절했지만 귀찮아질 게 두려워 딱히 할머니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꿈을 꾼 뒤 몇 달 뒤, 나는 부모님 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우리 아빠는 외할머니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아빠의 눈에 우리 할머니는 가진 것 없이 목소리 크고, 남편은 없으면서 이상한 것을 믿고, 노년의 지혜 대신 지저분한 고집만 더께처럼 덕지덕지 붙은 여자였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다고 해도 하나뿐인 딸을 직접 키우지 않고 할머니에게 맡긴 것에 대해 아빠는 엄마를 들들 볶았고, 사업이 성공해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마자 바로 엄마 일을 그만두게 하고 나를 데리러 왔다. 내가 엄마 아빠 집으로 가기 전날, 할머니는 나를 식탁에 앉혀 온갖 좋은 것들을 배불리 먹였다. 나중에 알게 되는 사실이었지만, 부모님의 집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나 대신 동생 몫으로만 주어질 그런 비싼 음식들이었다.

“안녕 할머니.”

나는 할머니를 꽉 끌어안으며 그렇게 속삭였다.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해요. 차가운 거 먹을 때 조심하고. 또 봐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를 떠났다. 찬 것을 먹지 말라는 것은 그저 멀쩡한 이빨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할머니의 치아 상태를 걱정해서 했던 말이었지만 그 뒤 그분은 죽을 때까지 더운 음식만 드셨다 했다.

할머니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나는 미처 몰랐던 사실이지만, 그날 이후 내 삶은 변화의 국면을 맞이했다. 부모님은 할머니와 달리 내 예지를 전혀 믿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몇 차례 미래를 보았고 그때마다 재빨리 어른들에게 알렸지만, 엄마는 귀찮다는 듯 내 말을 무시했다. 엄마는 가끔 나를 노려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노인네 대체 애를 어떻게 키운 건지. 귀염성도 없고 툭 하면 이상한 말이나 지껄이고…….”

사실 엄마는 내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더 좋아했다. 엄마는 공인인증사 시험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런데 자신은 어떻게 그것을 한 번에 붙었는지, 사람들에게 좋은 집을 찾아주기 위해 없는 시간을 쪼개 도배기능사까지 따 놨는지를 떠들었다. 하지만 네 아빠 사업이 재기에 성공해서 일은 그만둬야 했지. 엄마는 그렇게 말할 때면 일을 하던 손을 잠시 멈추었다. 어린 내 눈에도 엄마는 그 시기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이내 꿈에서 깨어나 급히 빨래를 개거나 청소기를 돌리며,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라고 말하곤 했다. 이야기는 보통 그렇게 끝났다.

나를 불신하는 어른들 틈에서 불길한 미래를 볼 때마다 나는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불길한 미래를 막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결국 나는 거짓말에 능숙해졌다. 아니, 나 오늘은 학교에 안 갈래요. 같이 있어 줘요. 수진이가 맨날 나 괴롭혀요. 싫어, 가족 여행 안 갈래. 가기 싫어요. 배가 아파요. 배가 아파. 병원에 가야 할 것 같아.

나에 대한 가족 내 평가가 급격히 나빠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닫힌 방문 너머로 ‘뮌하우젠 증후군’이라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애가 당신 때문에 이상해졌다며 서로에게 소리지르는 것도 들었다. 동생이 태어나며 내 겉돎은 더 심해졌다. 깨물어 더 아픈 손가락은 있다. 동생은 나보다 훨씬 더 예쁘장했고 거짓말로 관심을 끌어오려고 하는 일도 없었으며 성격은 사근사근하고 장밋빛 볼은 통통하고 말랑했다. 무엇보다 가장 어리고 사랑스러울 때에, 외할머니 집에 몇 년이나 맡겨졌다가 징그럽게 훌쩍 큰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질투는 조금 났다. 할머니 집에 살 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나였는데. 가끔 할머니의 집이 그립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내게 남겨준 많은 것들 중 가장 도움이 되었던 것은 바로 높은 자존감이었다. ‘너는 신의 아이야, 신이 보낸 귀한 아이야’. 이 말을 한참 자아가 잡혀가던 어린 시절 수도 없이 반복해 듣는다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한 것은 그즈음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그 사람을 다시 보았다. 꿈에서 그는 거무죽죽한 눈밭을 휘청거리며 걸었고, 폐허를 뒤지며 통조림이나 과자 따위를 그러모았으며 지도를 확인하며 끝없는 도로를 걸었다. 기이한 일이었다. 그 공간은 현재의 어느 곳처럼 보이지 않았고 사실 현실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 여행자는 폭이 넓은 도로를 따라 걸었는데 그가 넘어지며 드러난 바에 따르면 그것은 꽁꽁 얼어붙은 강이었다.

때로 그는 눈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서 잠이 들었다. 사람 없이 수십 년은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도시를 발견하면 그는 그곳에 들어가 물건들을 뒤졌다. 꿈이 반복되자 그가 가장 먼저 뒤지는 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병원을 뒤진 날 밤이면 그는 자기 몸뚱이만 한 짐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기계장치를 꺼내 신호를 보냈다. 후에 모스 부호를 공부한 후에야 그가 보내는 메시지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무사함. 찾지 못함.’

OTT 서비스도, 유튜브도 없던 시대였다. 나는 매일 밤 꿈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건 밤마다 나만을 위해 상영되는 단편 영화제였고 나를 홀대하는 가족들과 징그럽게 예쁜 동생 사이에서 내가 즐기던 유일한 유희였다. 꿈속에서 그 여행자는 들개 떼에게 쫓기다 신호탄을 이용해 그들을 무찌르기도 하고, 하루종일 하염없이 걷기도 하고, 가끔은 폐건물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가 눈투성이의 공간을 걷는 동안 현실에서 나는 가족을, 특히 동생을 몇 번이나 위험에서 구해냈다. 세상은 왜 그렇게 위험투성이였던지. 동생은 몇 번이나 끓는 물에 실명할 뻔하거나, 여름 휴가 동안 이안류에 휩쓸릴 위기에 처했고 나는 그 애를 성묘날 말벌 떼에서, 독이 든 소라 한 바구니에서 번번이 구해줬다. 그러나 내 용맹한 행적이 밀어남과 비례해 동생을 밀치고, 가두고, 멀쩡한 음식을 창밖으로 쏟아버리는 나에 대한 부모님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결국 어느 가을날, 그들은 나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당시 정신병원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고려한다면 부모님의 조치는 상당히 극단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나는 묘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나는 수도 없이 가족들을 위험에서 구해낸 사람이었다. 나는 히어로였다. 할머니 말이 맞았다. 신이 나를 보낸 거라면 그건 이유가 있을 거였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을 구하는 것이 바로 내 임무였다. 히어로가 임무를 수행하면서 약간의 고난을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동생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예지하자마자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병원을 탈출했다.

동생은 당시 초등학생이었고 곧 첫 수련회를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수련회장으로 향하는 버스가 큰 사고를 당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고가 난 뒤에 우리 가족이 돌려받을 수 있는 것은 으스러진 좌석들 사이에서 끄집어낸 작고 창백한 몸뚱이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기에 엄마와 아빠는 긴장을 풀고 동생을 과보호하는 것을 멈춘 상태였다. 아직 어린 내 동생은 하굣길에 언니가 나타나자 어리둥절하면서도 설득에 넘어가 나를 따라왔다. 나는 광역 버스를 타고 최대한 멀리, 엄마 아빠가 쫓아올 수 없을 정도로 먼 동네의 찜질방에 숨어버렸다. 동생은 칭얼거렸지만 혼자 돌아가는 법을 몰라 이내 얌전해졌다. 훔친 돈으로 동생에게 라면과 구운 계란을 사 먹이며, 나는 그곳에서 수련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꿈을 꾸기 위해 누웠을 때, 나를 찾아온 것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누군가의 통곡과 울부짖음이 엉망으로 나를 짓눌렀다. 크고 두꺼운 어른들의 울부짖음이었다. 보통의 어른들이 절대 아이 앞에서 보이지 않는 사나운 날 것의 울음. 오직 자식을 잃은 부모만 낼 수 있는 처절한 울음이 울려 퍼졌다. 그 가운데에 박살 난 버스의 차체가 있었다. 동생만 빠진, 작은 초등학교 아이들의 어린 몸이 지우개 똥처럼 짓눌려 서로 섞여 있었다. 등줄기가 타는 듯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꿈은 새하얀 세상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여행자는 군데군데 무너진 도로를 걷고 있었다. 다친 것인지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으며 그 몸으로도 계속 걸으려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몇 번이나 쓰러진 끝에 피난처를 찾았다. 그는 반쯤 무너진 컨테이너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해골들이 둥글게 모여 있었다. 가운데에는 옷가지 같은 것을 불태우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안쪽에 있는 것일수록 작았다. 마치 큰 사람들이 작은 것들을 최대한 보호하려 안쪽으로 몰아넣은 것처럼.

여행자는 흠칫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문을 닫았다. 그는 해골들과 멀리 떨어진 구석에 쓰러지듯 누워 몸을 웅크렸다. 그는 천천히 방독면을 벗었고 나는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여행자는 마치 우는 듯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약 가능했다면, 나는 그 오래된 낯선 이의 얼굴을 오랫동안 가만히 들여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내 돌아누웠고 한동안 들썩거리던 몸뚱이는 이내 고르고 낮은 숨을 뱉기 시작했다. 나는 잠든 여행자와 그 옆의 해골을 지켜보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났을 때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동생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색색 숨을 고르며 내 무릎을 베고 자고 있었다. 나는 그 애를 내려다보며 한참 생각에 잠겼다.

나는 미래를 볼 수 있다. 아주 나쁜 미래만, 아주 불길한 미래만.

그러나 미래를 본다는 관용적인 표현은 내가 실제로 미래를 예지하는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 엄밀히 따지면 나는 미래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시간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이 빼곡히 적힌 크고 두꺼운 책이 아니다. 시간을 몇 페이지 거슬러 올라가 읽는 식으로 간단히 미래를 알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수없이 많고 복잡한 미래를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앞에 놓인 가능성들의 파편 속에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감각은 재채기가 나올 것 같은 묘한 기분이나 오르가즘에 달하기 직전 느껴지는 아찔함, 혹은 꿈속에서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디는 순간의 오싹한 느낌과 비슷했다. 나는 나쁜 미래가 닥치기 직전 그 직감만 믿고 내게 소중한 것, 오직 가족들만 재빨리 건져내는 데 만족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나는 잠든 동생을 버려두고 그대로 학교로 돌아왔다. 이른 새벽이었지만 수련회를 위한 버스는 이미 운동장에 주차되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버스에 다가가 예전에 TV 프로그램에서 본대로 볼펜을 이용해 타이어의 공기를 빼다가, 타이어가 충분히 평평해지지 않자 학교 공구실에서 양손 가위를 훔쳐와 타이어 고무를 조각조각 잘라버렸다.

하지만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통솔해 나온 선생님들은 출발할 수 없게 된 버스를 보고 화가 난 표정으로 기사를 닦달했고 기사는 쩔쩔매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돌려 새로운 버스를 들여왔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한눈파는 사이 새로운 버스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려야 했다. 어른들은 당황했고 문을 열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내가 버티고 또 버틴 끝에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몇 시간 뒤 나는 어른들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 나오고 아이들은 지친 표정으로 버스를 타고 수련회장으로 향했지만, 버스를 들이받았어야 화물차는 이미 혼자 벽을 박고 견인된 지 오래였다.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내가 일으킨 ‘사고’ 때문에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아빠에게 있는 힘껏 뺨을 몇 대나 얻어맞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래서, 이야기의 요점이 뭐야?”

너는 그렇게 물었다. 나는 그 ‘사고’의 경위를 먼저 물어본 건 너였다고 지적하려다가 그냥 어깨만 으쓱하고 말았다.

너는 이미 학교에서 나만큼이나 유명했다. 우리 학교를 다니는 보육원 출신 아이들은 대부분 얌전하게, 사실 지나치게 얌전하게 행동하려 노력했지만 너는 그렇지 않았다. 너는 대담하고 목소리가 컸으며 1학년 때 너에 대해 질 나쁜 소문을 퍼뜨린 남자애의 반을 찾아가 얼굴을 몇 번에나 무릎으로 가격한 일은 너에게 질 나쁜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세상에, 지금 와서 생각하니 너와 어울리던 유일한 아이가 나였고, 나와 어울리던 유일한 아이가 너였다는 사실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버스를 부순 이유가 네 꿈 때문이라는 말이야?”

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그 머리칼. 목덜미 위에서 살짝살짝 흔들리는 부드러운 머리칼은 네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그 안에 손가락을 넣으면 마치 비단처럼 미끄러졌고 별다른 관리를 하지 않아도 윤기가 흘렀다. 이후 네가 몇 차례에 걸친 탈색으로만 제대로 빛깔이 나온다는 새파란 머리색을 하기로 결심한 것도 그 타고난 머릿결을 믿은 덕분이 컸다. 나로서는 네 첫 급여의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해야 했던 그 비싼 염색이 처음엔 탐탁잖았다. 하지만 이후 끝에서부터 빛이 점차 옅어지는, 군데군데 우아하게 회색이 섞이는 모습으로 변한 머리가 아주 예뻤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종종 네 머리끝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색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잠자리에서도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해서 네 핀잔을 듣곤 했다.

“난 버스를 부순 적 없어.”

내가 말했다. 타이어에 구멍 좀 낸 것 가지고 버스를 부쉈다고 하는 건 지나친 과장이었다.

“그리고 꿈 때문이 아니야. 난 꿈으로 미래를 보지 않아. 그냥 예지하는 거지. 꿈은 그냥 거기에 딸려오는 보너스 같은 거야.”

“그래, 그래. 예언자 씨. 근데 내 개인적인 생각으론, 너 그 ‘예언’에 너무 목 안매는 게 좋겠다.”

너는 달래려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는 투로 말했다. ‘건강하지 못하다고.’ 너는 그렇게 덧붙였지만 나는 그 말을 무시했다.

나는 내가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학교라고 해서 딱히 믿어주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애들에게 나는 별종으로 통했다.

음, 어쩌면 모든 애들에게.

어쩌면 선생님도 포함해서.

뭐, 그게 중요하겠는가.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진짜 미래를 알 수 있었고 이번에는 그것을 이용해 가족뿐만 아니라 초등학생 서른 명을 죽음에서 구해내기까지 했다. 비록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 정도면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한 일이었다.

“그럼 네가 꾼다는 그 눈밭에 대한 꿈은 뭐야?”

네가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글쎄… 그냥 내 생각이지만. 먼 미래가 아닐까. 아직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와.”

너는 기가 막힌다는 듯한 소리를 냈다가 무슨 생각인지 킥킥 웃었다.

“너 엄청난 스포일러를 당했네.”

딱히 놀라울 것도 없는 소식이었다. 내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로 점칠 되어있었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멸망한다고? 그럼 준비 단단히 해둬야겠는 걸.”

너는 내 말을 진지하게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정말 믿었더라면 세상의 끝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렇게 눈을 휘며 활짝 웃을 리 없지. 나는 네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네가 불편함을 느끼고 살풋 눈썹을 찌푸릴 때까지.

“그래.”

나는 그렇게 말했다.

“준비 잘 해둬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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