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시 Cassie

  • 장르: 판타지, SF | 태그: #종말문학 #백합 #GL #종말 #초능력
  • 평점×23 | 분량: 146매
  • 소개: 세상이 끝나기 20년 전부터, 종말에 대한 꿈을 꾸었던 이상한 예언자의 이야기 더보기

캐시 Cass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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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미 세상이 어떻게 끝날지에 대해 질릴 정도로 상상해보았다. 운석 충돌, 전염병, 화산 폭발, 기후 위기, 식량과 물 부족, 핵전쟁, 심지어는 외계의 침공, 기계의 반란에다가 좀비 아포칼립스까지.

아, 좀비. 사람들이 종말을 상상할 때 그 허무맹랑한 괴물에 대해 말하는 걸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가 얼마나 수없이 재생산되었는지를 안다면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 것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과대광고인지 이해할 것이다. 사람들은 상상 속에서 더한 것도 겪었다. 이것은 가장 새로운 방식의 끝도, 가장 참신한 방식의 끝도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사태에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현실은 언제나 상상의 헐거운 틈새를 찌르고, 자신이 무적이라고 자신하는 사람들은 으레 파리스의 화살에 발꿈치를 찔려 피를 흘리며 죽어가게 되어있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이 사건을 서술한다면 그것은 이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일이 진짜로 일어날 거라고, 아무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하기야 아무리 최악을 상정한다고 해도 세상이 정말 이렇게 끝나리라는 것을, 미래라도 볼 수 있지 않고서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이 세상이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종말 20년 전부터.

*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장아찌 담그는 냄새가 나던 작은 빌라, 어깨가 구부정하게 굳어 본래보다 더 작아 보이던 우리 외할머니, 그리고 장롱 속에 들어있던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개함이었다. 97년 즈음하여 개인파산을 신청한 우리 부모님은 나를 할머니 댁에 맡겼다. 할머니는 마지못해 나를 받아주었고 나는 5살 때부터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하나뿐인 손녀딸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랑하시긴 했지만, 통 안에 가득 든 할머니의 간식거리와 안방 장롱 속에 들어있는 자개함만큼은 절대 건들지 못하게 했다. 그 자개함은 어린 내 입으로는 발음조차 힘든 어떤 명인이 구한말 마지막으로 만든 작품 중 하나라고 했는데, 난리 통에 가족들과 헤어져 식모살이와 반찬가게 일로 평생을 먹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의 유일한 보물이었다.

‘난 가족들에게 덕 본 거 하나도 없다.’

할머니는 말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신의 평생 자랑은 전후에 혼자 남은 고아가 누구에게 손 벌린 적 없이 혼자 힘으로 꿋꿋이 살아남은 것이었다. 한때 부유했던 외가의 가족들은 막내딸을 나무에 묶어놓고 가버린 뒤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채 40년을 보냈다. 경기도 외곽의 야채 직판장에서 우연히 작은 오빠의 큰아들을 만나 가족들과 조우했을 때, 할머니는 이미 작은 반찬 가게와 방 두 개 달린 허름한 빌라 한 채를 소유하고 계셨다.

‘오래 떨어져 있으면 가족들 그거, 그것도 남이 된다.’

이것이 할머니의 두 번째 말버릇이었다. 누군가의 한평생보다 긴 세월 동안 떨어져 있었다면 재회의 즐거움은 울음으로 범벅이 된 하루 반나절 만에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후였다. 할머니는 당신에게 미안해하면서도 동시에 당신의 존재를 어색하게 느끼는 가족들 틈바구니에서 세 번의 멀뚱한 가족 모임을 경험한 뒤 다시는 그들과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외증조할머니는 마지막에 돌아가시면서 할머니에게 약간의 패물과 자개함을 남겼고, 할머니는 걸핏하면 증조할머니를 ‘망할 여자’라고 부르면서도 매일 함을 꺼내 닦으며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러니 어린 내가 그 함을 가지고 놀게 해달라고 했을 때 할머니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무시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내가 몰래 안방에 숨어들 정도로 진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할머니는 아예 함을 숨겨버렸다. 그러나 당시 6살이었던 내 눈에 반짝거리는 자개함은 도무지 포기할 수 없는 보물이었다. 할머니가 가게에 나간 사이 나는 기어코 함을 꺼내 내 물건들을 가득 채우며 놀았다. 할머니는 두고 온 것이 있어 잠깐 들렸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고 노발대발하셨다. 회초리를 찾는 할머니 앞에서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 내가 이 함을 안 만지면 할머니가 내일 커다란 화분에 머리를 맞을 거란 말이에요. 금숙 할머니네 베란다에 있는 버들잎 화분에요.”

궁지에 몰린 어린애들이 다 그렇듯, 나는 참과 거짓을 적당히 섞어 말도 안 되는 말을 지어내는 데 능했다. 할머니가 내일 화분에 머리를 맞는 사건은 자개함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내게 그 귀한 함을 꺼내주는 대신 내일 저녁 베란다 아래를 피해가기만 하면 되었다.

내 말을 들은 할머니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졌는데 어린 나는 내 거짓말이 들켰나 싶어 더럭 겁을 먹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놀랐을 뿐이었다. 전날 금숙 할머니는 정말 버들잎이 그려진 커다란 화분을 베란다에 옮겨놓았는데, 내가 그것을 알았을 리 없을뿐더러 애초에 할머니는 당신의 친한 벗인 금숙 할머니가 이 사람한테 건강식품 떼다 팔고, 저 사람한테 황토장판 주워다 파는 게 싫어 그분에 대해 가족들에게 한마디도 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저녁, 할머니는 금숙 할머니네서 젓갈을 얻어 나오다가 내 말이 생각나 발걸음을 멈추었고 금숙 할머니가 놓친 화분은 할머니 바로 앞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할머니는 발등을 다섯 바늘이나 꿰매야 했지만 목숨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가끔씩 내게 자개함을 꺼내주셨고 내가 그것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셨다.

“아가, 내일 내가 여길 가도 괜찮을까?”

그 뒤로 할머니는 내게 종종 그렇게 물었다. 그 경우는 교회 말씀 모임에 나가는 것부터 노인정의 다른 노인들과 호수 공원 산책을 가는 것까지 다양했다. 나는 할머니가 구워준 과자를 우물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네, 괜찮아요. 잘 다녀오세요.’라고 말했고 한동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화분 사건 이후 매사에 불안해 보이던 할머니는 점차 진정하는 듯했다. 할머니가 내게 자개함을 꺼내주는 일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몇 달을 보낸 뒤 ‘네, 괜찮아요.’만 반복하던 내가 처음으로 다른 말을 했다. 심지어, 이번엔 묻지도 않았는데.

“할머니, 오늘 반찬가게 가지 말고 저랑 있어요.”

할머니 말에 따르면, 오래 자면 정오까지도 늘어져 자던 잠 많은 내가 그날에는 어째서인지 할머니가 나가는 6시에 맞춰 일어났다고 했다. 할머니는 신발장에서 등을 동그랗게 말고 구두를 신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오늘?”

“네, 오늘. 가지 마세요.”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단호하게 그렇게 말했고 할머니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신발을 도로 벗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분의 마음 한켠에는 유치원 봄방학 중이던 내가 혼자 집에 있기 심심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반찬가게 쪽에는 시커먼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고. 할머니가 반찬가게를 얻었던 상가가 통째로 전소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인은 방화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지하상가 구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상가에 입주한 다른 가게들의 주인들은 대부분 할머니의 친구분들이었다. 나는 종종 할머니의 가게에 따라가 그들을 만났었다. 촌스러운 옷을 한가득 떼오면서도 무슨 수완인지 다 팔아치우던 옷가게의 아줌마와 내게 허쉬 초콜릿 작은 것을 하나씩 쥐어주던 수입과자점 할아버지, 과묵하지만 내심 나를 예뻐했던 철물상 아저씨와 내가 오빠라고 부르며 따르던 젊은 조카.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지나치게 덤덤해 보였다고 한다. 마치 이 광경이 익숙하다는 듯이, 심지어는 지루하기까지 하다는 듯이.

장례식장에 돌아온 할머니는 검은 옷을 벗고 나를 씻겼다. 나는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이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과하게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저녁을 먹는 내내 나는 만화영화를 보며 깔깔거렸다. 나에겐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능히 갖추고 있어야 할 뭔가가 결여된 것이 틀림없었다. 할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얘야.”

할머니를 돌아보았을 때 할머니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씹고 계시던 모습도, 보통의 노인이라면 절대 손녀딸을 향해 보이지 않을, 희미한 외경(畏敬)이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셨던 것도 기억한다.

“너는…….”

할머니는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너는 신이 보낸 아이구나.”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