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도의 남자

  • 장르: 판타지, 호러 | 태그: #불안 #불안판타지 #코로나 #코로나시대의낙석동 #김아직작가 #39도의남자 #고열 #열화상카메라 #선별진료소
  • 평점×25 | 분량: 52매 | 성향:
  • 소개: 연작소설 <코로나 시대의 낙석동> 제6화 [39도의 남자] 어느 출판사의 막내 편집자인 나는 낙석동으로 외근을 나왔다가, 39도의 체온을 가진 남자를 목격한다. 그는 열... 더보기

39도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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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다만 한 사람의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도시의 상가 골목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유리벽 너머의 구매자들. 대부분은 값을 선지불한 뒤 제 몫의 끼니와 차를 기다리거나 취식을 하는, 도시의 풍경을 이루는 정물이자 생의 허기에 떠밀린 인간 군상. 나도 그네들 중 하나였다.
문제의 베이커리 카페에서 치아바타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문해놓고 있었을 뿐 주인장과 친분도 없었고 심지어 그 동네 사람도 아니었다. 나는 근처로 작가미팅을 나왔다가 갑자기 약속이 어그러지는 바람에 간단히 끼니나 때우러 온 뜨내기였다.

하지만 그 남자의 등장으로 모든 게 바뀌었다.

“삐익! 삐이익! 정상체온 범위를 초과하였습니다. 가까운 선별진료소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체온측정 열화상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건 벙거지를 눌러 쓴 남자였다.

바람이 제법 선선하던 터라 폭염으로 인한 측정 오류를 추정하긴 힘든 상황이었다. 치명적인 치사율의 변이바이러스가 국내에 유입되었다는 뉴스들이 (물론 반나절 만에 오보로 밝혀지긴 했다) 쏟아진 날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모자의 그늘과 검은 마스크 사이로 드러난, 남자의 피부가 붉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이미 마스크로 가려진 입에 손을 덧대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출입문 근처 창가 자리에 있던 나도 가방을 움켜쥐었다. 벙거지를 쓴 남자도 황급히 몸을 돌려 가게 유리문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이, 어쩌면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그 바이러스를 잔뜩 묻히고 있을지도 모르는 신체 일부가 손님들의 공공재인 문손잡이에 닿은 순간…… 나는 정확히 6500원을 지불하고 얻은 손님이라는 지위를 내려놓아야 했다.

벙거지에 가려진 그 얼굴이 웃고 있었던 것이다.
눈 가장자리의 웃는 주름과 나직이 낄낄대는 소리…….

매장 내에서는 오직 내 위치에서만 보이고 들리는 실재들이었다. 그 음산한 웃음을 목격한 건 나 하나였다. 그 사실이 스물아홉 살 먹도록 부단히 학습된 책임감을 부추겼다. 카페 안의 사람들을 대표하여 그의 정체를 확인하고 놈이 곧장 선별진료소로 향하는지 감시해야 할 의무 같은 걸 느꼈던 것이다.
나는 가방을 움켜쥐며 창가자리의 높은 스툴에서 내려왔다.

내 발이 땅바닥에 닿는 순간 쩌저적 하는 소리가 울렸다. 근처에 앉은 여자가 메신저백 덮개의 벨크로 테이프를 떼어내는 소리였지만 나는 출판사 문학팀의 편집자답게 그 소리가 은유하는 바를 즉각 알아차렸다. 그건 벙거지를 쓴 남자의 웃음을 기점으로 내가 이전까지의 인생에서 완벽하게 분리되었음을 뜻하는, 실존적 갈라짐의 소리였다. 도시의 손님이라는 지위 또한 순식간에 박탈당했다.
39.2…….
나는 열화상 카메라의 푸른 액정을 일별한 뒤 그 체온의 주인공을 쫓아갔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돼 보이고, 180센티미터 전후의 키에 라운드티셔츠 아래로 다부진 근육을 드러낸 남자였다. 상의는 하얀색 톰브라운 오프화이트 파스칼 핸드프린트 라운드셔츠, 하의는 울소재의 생로랑 9부 배기팬츠였다. 깊숙이 눌러쓴 베이지색 모자는 펜디 피쉬아이 버킷햇이었다.

제 아무리 군중 속에 섞여들어도 나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내가 꿈꾸던 인생의 일부를 선점한 존재였다. 서른 중반쯤에 다다르고 싶었던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해낸 사람이었다. 삼각근과 대흉근이 탄탄하게 발달한 상체에 톰브라운 라운드셔츠를 면티처럼 가볍게 걸치고, 카드와 휴대폰만 소지한 채 한낮의 거리를 활보하는 남자…….

하지만 맹세코 질투를 느끼진 않았다. 놈은 고열과 악의적인 웃음을 가진 존재였으니까.
와플 가게와 젤라또 가게를 차례로 지나친 그는 갑자기 오가닉 제품 전문매장의 유리문을 밀었다. 예상치 못한 동선이었다. 나는 조용한 추격자의 신원이 탄로 날 위험을 감수하고 놈을 따라 들어갔다. 그는 열화상 카메라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삐익! 삐이익! 정상체온 범위를 초과하였습니다. 가까운 선별진료소로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유모차를 밀던 아이 엄마는 매장 구석 쪽 냉장식품 진열대 쪽으로 달아났고 매장 직원은 굳어진 표정으로 남자를 예의주시했다. 이윽고 남자는 예의 그 웃음을 흘리며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이번에도 놈의 표정을 본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위험한 체온을 가진 그 놈은 열화상 카메라의 경고음과 그로 인한 군중의 소요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친 놈!
나는 실소가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놈은 낙석동 사거리 앞에서 멈추었다. 신호등 앞 그늘막 밑에는 아기를 품에 안은 젊은 엄마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서 있었다. 아기띠 어깨끈 사이로 언뜻 보이는 아기는 채 백 일도 안 돼 보였다. 놈이 그늘막 아래로 들어설까 봐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놈은 그늘막 반대쪽에 자리를 잡았다. 같은 체육복 차림의 십대들이 모여 있는 쪽이었다.

횡단보도를 건넌 뒤에는 아파트 옆길을 따라 동네 초등학교 앞까지 곧장 이동한 다음, 초중고가 몰려 있는 학교 앞 상가 지역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걷는 속도를 조절해가며 그의 뒤를 밟았다.
놈이 세 번째로 택한 곳은 패스트푸드 전문점이었다. 나는 놈이 배를 채우려고 들어간 게 아니라는 데 내 청약통장을 걸 수도 있었다.

역시나 열화상 카메라에서 경고음이 울렸고 사람들은 경악한 눈빛으로 술렁거렸다. 이번에도 원하는 그림을 손에 넣자마자 놈은 매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놈을 따라가지 않고 패스트푸드점에 남았다. 더 늦기 전에 놈의 만행과 정체를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날선 시선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서류봉투가 비집고 나온 에코백을 멘 남자, 너의 체온은 정상이냐? 너도 매장에 들어왔으면 빨리 열화상 카메라 앞에 다가서란 말이다!
억울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벙거지를 쓴 남자가 받았어야 마땅한 비난과 경계의 눈초리였다. 당연히 나의 체온은 정상이었다. 오늘만 해도 두 차례나 체온을 잰 터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군중 앞에서 내가 정상임을 증명해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노고도 몰라주고, 피아 식별도 안 되는 저 무지한 군중들을 위해서 뭘 더 하란 말인가.
나는 여전히 놈의 체온이 새겨져 있는 열화상 카메라의 액정을 노려보고는 패스트푸드점을 빠져나왔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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