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의 이름

  • 장르: 판타지, 호러 | 태그: #코로나 #코로나시대의낙석동 #김아직작가 #그것의이름 #성장소설 #누군가의인생 #아빠와아이 #어른을위한동화
  • 평점×30 | 분량: 59매 | 성향:
  • 소개: <코로나 시대의 낙석동> 제4화 [그것의 이름] 이번에는 낙석동 주민이 아니라 낙석동에 사는 먼 친척을 찾아온 외지인들의 이야기다. 주인공 아이는 아빠를 따라 낙석동에... 더보기
작가

그것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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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먼 친척 집에 간다고 했다.

아이는 ‘먼’이라는 수식어를 당연히 물리적 거리로 받아들였다. 밤새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왔으니까. 날이 샐 즈음, 고층 아파트 샛길마다 냄새가 다른 바람이 부는 어느 동네에 이르렀으나 ‘먼’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아빠는 저만치, 무겁지도 않은 가방을 자꾸만 고쳐 메며, 끝도 없이 앞서 가고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는 아이도 알지 못했다.

아이는 몇 번이나 아빠를 따라잡아서 손을 쥐었다. 하지만 아빠는 전화를 받거나, 왼쪽 어깨에 있던 가방을 오른쪽 어깨로 옮기는 등의 사소한 계기로 아이의 손을 놓치곤 하였다. 처음엔 동동거리고 짜증을 내던 아이도 차츰 아빠와 떨어져 걷는 데 익숙해졌다.

아빠를 놓칠까 봐 겁이 나는 것만 빼면 아이도 혼자 걷는 게 좋았다. 아이에겐 아직 일곱 살의 권능과 마법이 남아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의 엄마가 병으로 쓰러졌을 때 이제 곧 아이에게서도 마법이 떠나갈 거라고들 했다. 아빠의 식당이 코로나로 빚을 크게 지고 문을 닫은 뒤에는 아이에게 한줌의 마법도 남지 않았을 거라고들 확신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직도 세상을 비밀을 볼 줄 알았다.

이를 테면 초등학교 뒷길로 접어들자마자 아빠와 아이에게 덤벼들었던 하루살이 떼는 단순히 웅덩이에서 태어난 곤충들이 아니었다. 그건 이 동네 사람들의 잡념이 허공에 떠다니는 것이었다. 아빠는 성가시다는 듯 하루살이 떼를 손으로 쫓고 말았지만 아이는 그 붕붕거리고 정신 사나운 것들에게서 비밀을 엿들었다.

오늘도 학교를 빼먹은 열일곱 살짜리 언니는 간밤에 어느 골목을 뛰어다니며 인생을 낭비한 대가로 늦잠을 자야 했다. 또 몇 년째 밥값을 올리지 않는 육개장집 사장 할머니는 나이가 350살이 넘었고, 최근 어느 빌딩의 경비로 취직한 대머리 아저씨는 사실 외계 행성 출신이었다. 남들 앞에 고백할 수 없었거나, 털어놓아도 믿어줄 사람이 없었을 법한 사연들이 상념이 되어 그네들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다가, 언제부턴가 하루살이 떼가 되어 동네 골목을 부유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뒷길은 폭이 좁은 샛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끝이 났다. 다리 너머는 버려진 비닐하우스들이 줄지어 있는 온실단지였다. 아빠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벌써 온실단지 앞길을 지나고 있었고, 아이는 이제 막 다리 앞에 다다랐다.

“낙…… 석……교…….”
최근 글자를 배운 뒤로 아이는 뭐든 발음하고 입에 머금어 보는 습관을 들였다. 발음이 탐탁지 않은 글자들에선 떫은맛이 났고 그때마다 아이는 침을 뱉었다. 발끝으로 침을 뭉갠 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빠는 또 훌쩍 멀어져 있었다. 아빠는 비닐들이 너푼거리는 온실단지 끄트머리를 지나는 중이었다. 서둘러 따라붙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샛강의 검은 물빛이 아이를 붙들었다. 아빠가 보았다면 여름가뭄에 강바닥의 슬러지가 검게 변했을 뿐이라 했겠지만 아이는 진즉 수상한 낌새를 챘다.

아이가 난간 너머로 침을 뱉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물이 굼실거리기 시작했다. 물굽이도 없이 곧기만 한 샛강 복판이 사납게 출렁이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거대한 뱀이 대가리를 치켜들었다. 놈은 한낱 물뱀이 아니라 검은 샛강 자체였다. 뱀은 샛강의 물을 모조리 끌어안은 채 난간보다 높이, 몸을 곧추세웠다. 뱀이 아이를 굽어보았고 아이도 뚝뚝 떨어지는 강물을 팔뚝으로 막으며 뱀과 눈을 맞추었다.

이 동네 아이가 아니구나.
뱀은 축축한 인사를 남기고 다리를 훌쩍 뛰어넘어 상류로 갔다. 강이 하류로만 흐르는 데 불만을 품고 있던 녀석이 드디어 상류로 가 보기로 맘을 먹은 모양이었다.

어느새 아빠는 온실단지를 벗어나 비술나무가 늘어선 모퉁이를 돌아가고 있었다.
“아빠!”
아이가 달렸다. 아빠 뒤에서 혼자 걸을 수는 있지만 아빠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는 건 무서웠다. 하지만 아빠는 순식간에 모퉁이를 돌아가 버렸고 아이는 온실단지 초입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흰 장갑을 낀 손이 불쑥 나타났다.

아이는 눈길이 천천히, 상대의 손을 지나 팔뚝으로, 어깨로 옮아갔다.
하지만 아이는 상대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감색 줄무늬 양복과 파란색 모자 사이, 얼굴과 목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던 것이다. 그곳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고여 있었고, 그 어둠 속 어디선가 서늘한 냉기가 훅훅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이는 무언가 일이 틀어졌음을 알았다. 하루살이 떼나 샛강의 뱀과는 다르게 그것이 품은 생각이나 이야기가 전혀 읽히지 않았다. 그것은 아이의 마법이 찾아내거나 불러낸 존재가 아니었다.
놈은…….

앉은 채로 뒷걸음질 치며 비명을 내지르던 아이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달아났다.
“아빠! 같이 가!”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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