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먹어도 좋아

  • 장르: SF, 호러 | 태그: #촉수 #슬라임
  • 평점×50 | 분량: 79매
  • 소개: 등떠밀려 4수하다 실패하고 아르바이트 하나로 근근이 연명하는 ‘나’ 의 방에 갑자기 촉수 달린 슬라임이 나타난다. 더보기

나를 먹어도 좋아

미리보기

검은 늑대가 나타나 당신의 원수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당신에게 배를 까고 누워 애교를 부린다. 당신은 그 늑대를 기쁘게 쓰다듬으면서 가족으로 들일 수 있는가? 가끔 당신을 바라보는 늑대의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번들거려도 애써 무시할 자신이 있는가?

문제의 원인

삶은 고통이고, 고통의 근원은 얼굴이다. 만악의 근원은 입이 아니라 얼굴이다. 다들 얼굴을 달고 다니니까 세상에 좆 같은 일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디저트 카페 마감 알바를 마치면서 이런 사회부적응자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도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입 밖에 내지 않고 꾹꾹 참으면서 바닥을 닦았다. 하지만 이성을 백 퍼센트 발휘해도 진상이라는 자연재해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것이 서비스직의 현실이다.

사람들은 일단 손님이 되면, 가게의 일반쓰레기통에 배수시설이 없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래서 30% 정도 먹다가 질린 톨 사이즈 오레오 프라푸치노를 조그만 쓰레기통 안에 던져버리고, 이제 쓰레기통을 비우는 아르바이트생은 곤죽이 되어서 다른 쓰레기와 엉겨붙은 오레오의 시체와 마주치게 된다.

‘우와 씨발, 어떤 새끼지?’

크리스마스와 새해, 발렌타인 데이와 화이트 데이도 혼자 꿋꿋하게 이겨낸 베테랑 알바생도 욕을 참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각종 기념일로 단련된 나는 입 안으로 꾹꾹 욕을 묶어두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얼굴은 마음의 거울인지라, 언짢아진 눈썹은 수습을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가게에 들어온 손님은, 알바생이 찡그린 얼굴로 인사를 하는 게 굉장히 기분 상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기분을 알리고 싶었다.

“아가씨, 지금 인사하는 사람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못 들어올 곳 들어왔어요?”

“아닙니다, 맛 고르시고 나서 얘기해주세요.”

“지금 그 얼굴을 보고 내가 살 기분이 날 것 같아?”

“죄송합니다. 물건 고르시고 나서 말씀해주세요.”

“이거 봉투에 담아줘.”

“봉투 값 백 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봉투 하나에 왜 이렇게 비싸?”

“죄송합니다 손님, 봉투 값이 정해진 가격이라서 제가 공짜로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이 종이봉투에 담아가시면 봉투 값을 받지 않습니다.”

“아니 그거에 담아가면 잡을 손도 없는데 어떻게 가져가. 진짜 어이가 없네. 이만큼 샀으면 봉투는 기본적으로 줘야하는 거 아니에요? 이걸 그냥 들고 가라고?”

“죄송합니다. 환경법 때문에 비닐봉투는 계산을 하셔야 합니다.”

“아유 짜증나. 백 원 추가해줘요. 마트에서도 이렇게 안 받는데 무슨 이런 가게에서 이렇게 비싸게 받아. 다음부터는 일 똑바로 해요. 알겠어?”

“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2021년에도 봉투 값을 안 받는 그 환상의 매장은 대체 어디 있는걸까. 나는 나머지 마감 청소를 열심히 했다. 그리고 영업 종료 3분 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6잔 포장해달라는 취객이 왔고, 그 사람이 커피 한 잔을 바닥에 엎는 바람에 뒷정리를 하느라 막차를 놓쳤다. 영업 종료 이후 청소시간이 수당에 들어가지 않는 마당에 택시까지 타자니 아주 손해보는 느낌이 들었고, 택시 탈 돈도 없었기 때문에 집까지 25분을 걸어갔다. 씩씩거리며 열심히 걷다가 가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바라보는 내 모습이 남들이 보기에 조금 웃겼을 것 같다.

퇴근을 하고 나면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하다. 저녁으로 먹으라며 육천 원짜리 전기구이 통닭을 챙겨주던 알바 초기에 그만두었어야 한다. 시급을 올려주겠다는 기약 없는 약속 하나만 믿고 일하기에는 슬슬 한계였다. 그러나 다른 가게로 가봤자 딱히 더 나은 사장도 없었다. 월 100시간을 넘게 일해도 근로계약서나 주휴수당은 말도 없고, 명절 추가근무수당도 안 주는 사장이지만, 이 주변은 다들 그랬다. 여러 가게를 거치다가 다시 이 가게로 돌아온 언니도, 주휴수당 같은 거 챙겨주는 사장은 4년 알바 경험 중 딱 한 명 만났다고 했다. 옆옆 건물 방탈출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일하다가 넘어져서 다치는 바람에, 치료비도 없이 당일 해고 통보를 받았지만, 그 카페는 지금도 페이스북 광고 계정에 잘만 올라오고 있다. 그 아르바이트생은 지금 우리 매장 맞은편 카페에서 여전히 근로계약서 없이 최저시급만 받고 일한다. 다들 그렇게 산다.

집에 도착하면 가족들은 이미 다 자고 있을 것이다. 이르면 12시 반, 늦으면 1시에 도착해서 혼자 저녁을 먹는다.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이 내 저녁이다. 전자레인지를 이용할 때에는 다른 가족이 깰까봐 종료 1초 전에 미리 취소 버튼을 누른다. 그들의 내일 아침 스케줄을 걱정하는 게 아니다. 깨어있을 때 서로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다. 한 명이라도 일어나서 말을 섞기 시작하면 3분 만에 온 집안 식구들이 일어날 정도로 싸울 수 있다. 내가 패륜아인 게 아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하지만 가족들은 나에게 예비범죄자 후보라며 욕을 하고 인성 교육을 한답시고 때리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 한 잔 마시고 다시 잘 것이다. 그리고 나만 새벽 내내 죽고 싶다고 이를 갈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온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중학생 때 그 짓 한 번 했다가 주민자치회에서 집 값 떨어지지 않게 딸 단속하라고 민원이 들어왔다. 엄마는 그 날 밤 내 머리채를 잡고 온 집안을 돌아다녔고 아빠는 밖에 나가서 다음 날 저녁에 들어왔다. 초등학생이었던 동생은 악을 쓰며 울다 지쳐 잠들었고, 나는 엄마가 울다 잠든 다음 화장실에 가서 코피를 닦았다. 사춘기의 한 페이지가 이 모양인 인간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자랄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의지박약인건지, 아니면 이겨낸 다른 사람들이 히어로인 건지. 나는 트라우마에 빌빌거리느라 대학교도 못 가고, 재수도 삼수도 실패해서 아르바이트로 자기 용돈이나 벌고 있다. 엄마아빠는 나를 기생충처럼 여기고, 동생은 곧 자살할 쓰레기로 본다. 나는 당연히 벌레가 아니고, 죽고 싶지도 않다. 내 이름은 ‘그레고르 잠자’ 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입을 열면 셋이 합심해서 나를 몰아붙인다. 나만 빼고 다들 대본이라도 짜고 있는 것처럼 죽이 척척 맞는다.

‘대학도 못 붙은 새끼가 사회에 나가서 무슨 일을 할 건데. 정신 나간 소리 말고 대학이나 가. 4수하는 게 사람 새끼야? 말 못하는 개새끼도 너보다는 똑똑해!! 벌어오는 것도 없는 게 돈이나 펑펑 써대고. 부모 등골 빼먹고 사는 네가 사람인 거 같아? 인두겁을 뒤집어 썼다고 다 사람인 게 아니야,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 방구석 쓰레기로 살다 죽을 거면 나가!!!!’

내가 딱히 등골을 빼먹을 만큼 뭔가 받았던가? 내 등골이 아빠가 휘두르는 골프채에 부러질 뻔 한 적은 있다.

‘너 얘기만 나오면 내가 창피해서 어디 가서 말도 못해. 우리가 너한테 뭘 못해줬어. 밥을 굶겼어, 학교를 안 보냈어? 동생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쟨 벌써 대학교 2학년이야. 인생에 위기감이 안 들어? 우리가 널 천년만년 먹여살려야 하니? 정신차려!’

난 초등학교때부터 성적표가 나오면 틀린 문제 수대로 맞는 게 일이었다. 저녁 내내 맞으면서 저녁을 굶었고, 다음 날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학교를 못 가기도 했다. 아무래도 기억을 못하시는 것 같다. 50대 초반에 조기 치매라니, 애석한 일이다.

‘내가 너처럼 살았으면 진작에 자살했다. 주제 파악 좀 하고 살아. 공장에 가든 몸을 팔든 뭐라고 좀 해봐.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학비부터 용돈까지 지원받고 있는 새끼가 뭘 잘났다고 입을 털어, 개새끼!!

저런 소리가 듣기 싫다면 진작 독립과 자살 중에 하나를 택해야 했다. 하지만 나가서 세상 풍파를 견딜 자신도 없고 번듯한 대학생이 될 능력도 없어서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25살이 되었다. 요즘 내 가장 큰 걱정은 이렇게 아무 것도 못 이룬 채로 서른 살이 되는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나. 사실 나는 태어나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7개월만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무 궁금해서 일찍 나왔다고 친척 중 누가 농담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수정란 때부터 엄마랑 안 맞아서 일찍 탈출한 것 일수도 있다. 태아 때의 나는 무슨 용기로 자궁을 나올 결심을 했을까. 25살의 나는 집 밖에 나가는 것도 무섭다. 요 몇 년 간 내 소원은 딱 하나다.

‘집에 괴물이 나타나서 나부터 잡아먹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그랬듯이 현실도피성 망상을 하면서 도시락을 먹는다. 도시락만 먹으면 배고픈데, 컵라면까지 먹으면 배가 너무 불러서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컵라면은 가능한 천천히 먹게 되는데, 결국 꽉 찬 배에 퉁퉁 불은 차가운 면발을 꾸역꾸역 넣는 미련한 돼지가 된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12시간 공복인 채로 편의점에 들어가면 사방에 가득한 음식의 향연에 정신을 놓게 된다. 밥, 국 대신 마실 라면, 과자, 빵, 음료수까지 한 가득 사서 나오지만 항상 라면도 다 못 먹었는데 배가 부르다. 그렇게 사놓고 못 먹은 빵이랑 과자들이 내 방 이곳저곳에 처박혀있다. 저게 다 돈인데. 난 돈 주고 쓰레기 만드는데 재주가 있다. 일하고 들어와서 바닥에서 빵을 주워먹긴 싫어서 계속 새로 사고 또 사고 쌓이고 또 쌓이고, 그러다가 폭발한 아빠한테 날 잡아서 맞고. 이쯤 되면 내가 매를 자초하는 것 같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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