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흉

관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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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흉인은 고대 중국 남쪽 관흉국에 살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모습이지만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다. 옛날, 영웅인 우(禹)에게 살해당한 방풍 씨의 신하가 주군을 따라 가슴에 구멍을 뚫어 죽었다. 우가 이를 슬퍼하여 방풍 씨의 신하를 불사의 약으로 소생시켰다. 방풍 씨의 신하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관흉인이 되었다. 관흉인은 가슴의 구멍에 막대기를 꽂아 앞뒤로 두 사람이 들어 이동했다.
상해

 

탕 탕탕 탕탕탕탕 탕 탕탕

 

“상해 가정부(假政府)의 공금을 횡령하여 사적으로 사치한 죄를 물어 처단한다!”

 

상해 조계지 뒷골목에서 총성이 어지럽게 울렸다. 치파오를 입고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쓰러졌다. 처음 실탄으로 사람을 쏴 보는 청년들은 급소를 명중시키지 못 하고 아까운 총알만 여러 발 낭비했다. 여자가 수트 케이스를 품에 안은 채 쓰러졌다. 여자는 수트 케이스를 질질 끌면서 골목을 기어가 도움을 요청하려 하지만 아편굴과 매음굴이 곰팡이처럼 번진 이 골목에는 여자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 골목 안쪽 빈민가 오두막에 사는 사람들도 화려한 십리양장을 산책하는 서양인들도 총 소리를 신경 쓰지 않는다. 여기는 상해. 아편이든 총이든 폭탄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거래가 가능한 곳. 네온사인이 빛날수록 관짝 같은 북향의 정자간은 그늘이 지고, 마천루가 높아질수록 그림자는 길어진다. 여자의 핏자국이 그림자처럼 바닥에 번졌다.

 

 

내가 쏜 총알이 여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뚫었다. 여자가 사 준 백구두에 핏방울이 튀었다. 교수대에 오른 듯 답답하여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넥타이도 여자가 사 준 것이었다. 여자의 손에서 수트케이스가 떨어졌다. 총을 쏘던 청년들이 앞다투어 수트 케이스를 열려 했지만 잠금 장치를 풀 수 없었다.

 

 

수트 케이스의 잠금 장치를 쏘았다. 잠금 장치가 부서지며 수트 케이스가 열렸다. 소묘와 미완성작, 여자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 내 얼굴을 그린 자화상, 유화와 수채화들이 어지럽게 쏟아져 나왔다. 청년들은 그림을 함부로 뒤집어 엎으며 수트 케이스를 샅샅이 뒤졌다. 나는 노란 햇살 아래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푸른 그림자를 드리운 그림을 챙겼다. 수트 케이스에서 1원 1전도 나오지 않자 청년들은 당황했다. 침착하게 그들을 진정시켰다.

 

“여기서 뒷수습을 부탁하오. 나는 어서 외탄(外滩)의 홍콩-상해 은행으로 가서 자금을 인출할 테니까.”

 

외탄의 뉴욕을 본 딴 영국 건물들을 따라 거닐다가 세관 빌딩 앞에 멈췄다. 런던의 빅벤을 따라 지은 시계탑이 일각마다 울렸다. 4번의 종소리를 듣고 마음을 굳혔다. 헐리우드 영화 속 뉴욕을 모방한 외탄 거리를 걸으며 진짜 뉴욕으로 유학 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건만…주머니에 남은 돈을 모두 털어 마지막으로 백락문(百樂門, 파라마운트) 에서 영화를 보고 딴스홀에서 폭스트롯을 출까 하는데 피녀(그녀)가 없다.

 

“나는 완령옥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피녀의 목소리는 내 심장에서 울리다가 총성에 갈가리 찢긴다.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 구멍 난 심장으로 구라파의 밤공기가 들어왔다. 단장님만 보고 상해에 와서 ‘열혈단’ 단원이 된 후로는 언제 의거에 목숨을 바칠지 모르니 하루하루를 탕진하며 살았다. 미래가 없으니 저축이 없었고 결혼이 없으니 연애에 충실했다. 피녀는 최고급 레스토랑인 신야에서 식사를 하고 40원을 들여 내 양복을 입히고 8원을 들여 모자를 씌우고 6원을 들여 백구두를 신기고서야 자기도 모피 목도리를 두르고 치파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내 팔짱을 끼고 전족처럼 위태롭게 걸었다.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라는 공원을 “우리는 중국인이 아니고 조선인이니까 출입가능하다”며 손잡고 산책했던 기억. 공원에서 이젤을 놓고 풍경화를 그리다가 “건물은 구라파 풍이지만 햇빛은 구라파가 아닌 아시아의 햇빛”이라서 도로 이젤을 접었던 적이 있었다. 외서를 전문으로 파는 서점에서 <베네티 페어>잡지를 사서 나란히 앉아 읽던 추억. 순순 백화점의 유리부스로 된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공연하던 가수를 지켜보던 회억. ‘상해의 샹젤리제’라는 하비로(路)의 카페에서 재즈를 듣던 밤.

 

상해 가정부는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데 들어올 구석은 마땅치 않아 다들 곤궁하게 살았다. 그런데 피녀만 호화롭게 상해를 즐기니 뒷말이 많았다. 사실 프랑스인의 정부(情婦)라느니 중국인의 첩이라느니 하는. 아니면 자금운반담당인 피녀가 자금의 일부를 횡령했다느니 하는. 나는 그 뒷말을 다 피녀에게 전해주었다. 코뮌테른이 군자금을 지원해 줬는데 사회주의자들은 그 돈이 사회주의자들만 관리하는 돈이라 하고 열혈단 단장님은 상해 가정부 모두에 주어진 자금이라 한다고 했다. 그리고 피녀가 그 자금의 운반책인데 그 중의 일부에 손을 대어 옷을 사고 퍼머넨트 웨이브를 한다고도 했다. 피녀는 웃으며 자금에 손 댄 적은 없고 마작판에서도 돈을 따고 경마장에서도 운이 좋았다고만 했다. 그 돈은 자기가 번 돈이니 상해 가정부와는 상관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찌베니 바른 입술을 한쪽만 올리며 내게 머리를 기댔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 나는 관계치 않아요. 그러니 당신도 내가 무얼 하든 관계치 말아 줘요.”

 

열혈단 단장님은 내게 피녀를 감시하라고 했다. 나는 열혈단에 피녀가 자금을 횡령하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러나 수많은 밤을 함께 산책해도 피녀가 횡령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었다. 피녀와 열혈단 중에 누구를 믿을까. 나는 아주 천천히 피녀의 팔짱을 끼고 열혈단과 약속된 골목으로 향했다.

 

“그 수트케이스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지폐 다발이겠지. 그러나 피녀는 슬쩍 웃으며 수트 케이스를 끌어안았다.

 

“나에게 제일 소중한 게 들어 있어요. 해방이 되면 조선까지 가져 갈…”

 

상해의 뒷골목에서 총성이 울렸다. 수트 케이스가 열렸다. 내가 그린 습작과 소묘와 소품들이 피에 젖어 어지러이 쏟아지고 흩어졌다. 다시 이 곳에 올 일은 없겠지. 나는 피녀와 산책하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갔다. 외탄의 은행에는 들르지 않았다. 대신 상해 일본 총영사관의 묵직한 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열혈단이오. 사람을 죽였소.”

 

경성-종로경찰서

 

나는 ‘치안유지법 위반 및 살인 강도죄’로 피체되어 상해에서 경성까지 압송되었다. 코뮌테른에서 지원받은 자금은 사회주의자들이 수령하여 관리하고 있다. 피녀의 수트 케이스 안에 코뮨의 자금이 들어있다는 헛소문을 흘려 열혈단이 피녀에게 주목하는 동안 사회주의자들은 무사히 가정부의 이목을 돌리고 자금을 독식했다.

 

열혈단 단장님이 큰 실책을 저질렀다. 무고한 사람에게 불명예를 뒤집어 씌워 암살했다. 그러나 이후에 단장님은 실책을 인정하고 누명을 벗기는 성명을 내지 않았다. 상해에서 가정부원끼리 총질을 하여 한 명이 사망한 사건이면 경위를 밝혀야 함에도 단장님은 침묵했다. 단장님은 누군가에게 거짓된 오명을 덧씌우더라도 절대로 자신은 틀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일경이 심문을 시작했다.

 

“열혈단의 목적은?”

 

“요인 암살 및 유의미한 건물이나 행사에 폭탄 투척을 하여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고함이요.”

 

“열혈단에 가입하게 된 경위는?”

 

“외부에서 거사를 감행하면 내부에서 자극받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킬 것으로 믿었소.”

 

피녀도 언젠가 내게 물었다. 왜 붓을 놓고 총을 들었냐고. 그 때 내가 뭐라고 답했더라.

 

“화가로 살려면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해야 하는데, 입선하려면 ‘조선색’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하지요. 황토색 피부에 조선옷 입은 아이 같은, 조선이 미개함을 보이는 그림들. 나는 그런 그림을 그리기 싫습니다. 그러던 차에 졸업 학기에 교내 강연회에서 열혈단 단장님께서 하나뿐인 목숨을 조국에 바치라 하시니 젊은 혈기에 룸펜보다는 의사나 열사가 되자 했던 게지요.”

 

“그럼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까?”

 

“구라파에 ‘인상파’라는 미술사조가 있지요. 햇빛을 받아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그렸지요. 나도 인상파처럼 노란 햇살 아래 빨간 옷을 입은 여인과 푸른 그림자를 그리고 싶은데, 조선이나 일본에는 구라파의 찬란한 태양빛이 없어요.”

 

그 말을 기억해 두었던 것일까. 8월의 어느 날, 쨍한 햇볕 아래 피녀가 빨간 원피스를 입고 내가 기거하던 하숙집에 찾아왔다. 노란 태양과 빨간 옷을 입은 여인과 푸른 그림자. 단번에 붓질을 하고 구석에 서명을 하여 피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상해에서 수트 케이스가 열렸을 때 그 그림이 제일 위에 있었다. 일경이 심문을 이어갔다.

 

“열혈단에서 맡았던 임무는?”

 

“상해 가정부의 자금 운반책을 감시하였소.”

 

열혈단원으로서 내 첫 임무는 피녀와 경성에서 상해까지 동행하는 것이었다. 경성역에 나타난 서정은 조선옷을 입은 만삭의 임산부였다. 저 부푼 배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