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

  • 장르: 추리/스릴러
  • 평점×19 | 분량: 62매
  • 소개: 아파트 입구에 덩그러니 걸린 치마… 치마를 가져간 이는? 더보기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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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치마는 1층 출입구 손잡이에 걸려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바로 보이는, 계단을 내려가기 전 지나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울긋불긋한 할인마트 전단과 광고지로 폭격당한 철제 우편함 옆에서, 치마는 우연히 포획된 심해생물의 매끈한 표피처럼 신비로운 윤기와 우아함을 뽐냈다. 바지 걸이에 치마 양쪽이 집게로 느슨하게 고정되어 있고, 벌어진 안감으로 유혹하듯 상표 딱지가 내보였다. MADE IN ITALY.

희정의 눈길이 다시 한번 치마를 훑었다. 어둔 회색과 분홍색 스프레이로 그린 듯한 무늬가 활짝 핀 작약꽃 같기도, 먹구름 같기도 했다. 어쩐지, 좋아 보이더라니. 출근하면서 세탁소에 맡기려던 걸 허둥대다 그냥 걸어 놓고 간 것 같았다. 오전 아홉 시. 어둡고 무겁게 쳐진 대기를 뚫고 힘겹게 가랑비가 내린다. 차라리 속 시원히 퍼부어주면 좋으련만.

“와, 이 치마 정말 예쁘다.”

딸이 조그만 손으로 치마 귀퉁이를 쥐고 만지작거렸다.

응, 남의 거야, 만지면 안 돼, 하며 딸의 노란색 우산을 펼쳤다. 윤솔이가 우산을 건네받더니 조르르 계단을 앞서 내려가고, 희정은 안도한다. 한 달 전까지 계단 앞에서 매일같이 벌였던 실랑이가 떠오른다. 버스 시간 늦어, 얼른 가자, 하면 어김없이 윤솔이는 싫어, 놀이터 먼저 갈 거야, 하며 버텼다. 유치원 갔다 와서 가면 되잖아, 하면 선생님이랑 친구들이 영어만 해, 가기 싫어, 하며 엉엉 울었다. 놀이터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유치원에 가기 싫다는 얘기였다. 윤솔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투쟁했고, 위태롭게 가늘어지던 희정의 인내심은 이따금 뚝 끊어지곤 했다. 고함을 지르고 나면 속은 후련했지만 움츠린 아이를 보고 있자면 곧바로 후회가 밀려왔다.

유치원을 옮길 마음을 굳힌 건 세 달 전 우연히 재희 엄마를 만나고 나서였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 붙은 필라테스 광고지를 보고 서로 말을 튼 게 인연이었다. ‘다이어트의 계절’이라네요. 서먹한 분위기를 깨려 희정이 먼저 말을 건네자, 그녀가 전 이십 년째 다이어트 중인데요, 하고 받아쳤다. 두 사람은 까르르 웃었다. 서글서글한 얼굴에 말투가 조곤조곤하니 친근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도 유치원 다니는 딸이 있었다. 희정의 푸념을 듣던 그녀가 코끝을 찡긋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그런 일로 상담하러 오시는 부모님들이 많아요. 매일 아침 출근길에 희정이 딸과 벌이는 실랑이를 목격했다고 했다. 이상하게 창피하지가 않았다. 재희 엄마에게는 상대방의 기분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대학에서 아동심리학을 가르쳤고, 요새 유행하는 숲 교육 분야 전문가였다. 또 아동 심리치료센터도 운영 중이라 했다. 첫 만남인데도 왠지 고민거리를 낱낱이 털어놓고 위안받고 싶은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인지 몰랐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숲 교육으로 흘러갔다. 그녀의 딸 재희도 숲 유치원을 다녔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로 다니며 흙을 만지고 놀게 하는 자연 체험형 유치원이었다. 희정도 이 근방에 그런 유치원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야외용 팔 토시에 야구 모자를 쓴 숲 유치원생들이 와글와글 버스에 타는 걸 볼 때마다 영어 유치원 엄마들은 코웃음을 쳤다. 체험은 무슨, 방치고 방임이지, 하면서. 하늘하늘한 검은 원피스 차림의 그녀들은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며 아이들의 빳빳한 원복 치맛단과 나비넥타이의 매무새를 자기 자존심처럼 매만지고 또 가다듬었다. 그 모습은 신앙만큼 경건해 보이지만 어떨 땐 주술에 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희정의 눈은 자꾸만 재희를 더듬어 찾았다. 재희의 통학은 주로 외할머니가 담당해 재희 엄마와는 거의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희정이 바라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어느 날 재희가 곁에 다가와 그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나 공부 많이 해요. 어제도 칭찬받았어요. 재희가 불쑥 내뱉었다. 공부? 무슨 공부? 하고 물으니 숲 공부, 하며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어제는, 지렁이랑 송충이 봤어요. 선생님이 사마귀 잡아서 보여줬어요. 재희가 스스럼없이 희정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다리에 달라붙었다. 조금 움찔했지만, 아이의 붙임성이 귀여웠다. 희정은 아동심리 전문가인 재희 엄마의 선택을 믿어보기로 했다.

오늘도 버스 정류장이 있는 인도에는 양 진영의 구분이 뚜렷했다. 영어 유치원 진영과 숲 유치원 진영. 보도블록에 경계선이 그어져 있기라도 한 듯, 두 진영의 엄마와 아이들은 서로 인사를 하거나 안면을 트는 일이 결코 없었다. 둘의 가치관과 교육관은 하나의 이념처럼 확고부동해서 서로 섞이거나 갈아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양 진영 또한 그렇다고 철석같이 믿었다. 희정이라는 변절자가 그 믿음 체계에 흠집을 내기 전까지는.

윤솔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에 올라탔다. 굵어진 빗줄기에도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다.

“윤솔이, 이젠 영어 안 시켜요?”

돌아보니 영어 유치원에서 알게 된 수지 엄마였다. 낯선 냄새를 맡은 고양이처럼 희정을 빤히 쳐다본다.

“지금은 아무것도 안 해요. 학습지라도 시킬까 하고 있네요.”

“교문 방문 학습 시켜요. 거기, 금요일 수영하고 일찍 오지 않아요? 그날 교문 선생님이 우리 동 방문하던데.”

숲 유치원생들이 금요일마다 수영가방을 메고 버스에 타는 걸 본 모양이다. ‘거기’라는 말이 은근히 거슬렸다. 공부를 많이 안 시킨다는 것 외에 원비가 영어 유치원의 반도 안 된다는 것 역시 그네들에겐 얕잡아 볼 하나의 이유였다.

학습지니, 학원이니 그런 걸로 미리 들들 볶아봤자 소용없어요. 어릴 땐 자연 속에서 뛰어노는 것만큼 좋은 공부가 없으니까요. 숲 유치원을 나온 아이들은 다른 애들보다 창의력이 월등히 뛰어나다고 했다. 또 그동안 공부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덕에 뭘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쏙쏙 흡수하고 고학년이 되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공부한다고도.

재희 오빠가 영어 말하기대회에서 3등을 했다고 했지. 아직 머리도 영글지 않은 아이에게 어쩌자고 미련하게 영어를 주입했는지. 영어 유치원에서 허비한 지난 4개월이 후회스럽기만 했다. 수지 엄마가 권한 교문 방문 학습은 월회비만 한 달에 수십만 원이었다. 희정은 아아, 그래요, 하며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수지 엄마가 큰 선심이라도 베풀었다는 듯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희정의 곁을 지나쳐갔다. 콘크리트 바닥에 명품 슬리퍼 굽이 닥닥 끌렸다. 어휴, 보기만 해도 족저 근막염 생길 것 같네. 언젠가 재희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희정은 피식 웃었다.

축축한 아파트 입구에 빨간 매트가 깔려 있었다. 청소부 아주머니가 대걸레로 바닥의 물기를 닦느라 분주했다. 오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안녕하세요, 하면 빨간 립스틱 칠한 입술을 활짝 벌리며 안녕하세요, 하고 기분 좋게 인사를 받아주는 아주머니였다.

오늘도 아주머니의 표정은 밝았다.

“장마철이라 일이 많아서 번거로우시겠어요.”

희정이 한 마디를 더 건넸다. 전에 없던 붙임성이 자신에게도 조금 생소했다. 마음이 여유로워지면 입에서도 너그러운 말이 튀어나오는 모양이었다.

“뭐, 어쩌겠어요. 못 배웠으니 이런 거라도 해야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희정은 귀를 의심했다. 뭔가 대답할 말을 찾아 헤매던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서서히 닫히는 문 사이로 언뜻 치마가 보였다. 여전히 출입문 손잡이에 걸려 있었다. 주인이 퇴근길에 찾아가기 전까지 계속 저기 있을 것 같았다. 아파트 입구를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아직 아무도 가져간 이가 없다는 게 신기했다.

생각해보니 이 아파트로 이사 와서는 한 번도 택배 상자가 분실된 적이 없었다. 그전에 살던 주택가에서는 곧잘 일어나던 일이다. 조그만 상자나 의류가 든 가벼운 비닐백이 가끔 없어지곤 했다. 소득과 도덕 수준은 비례하는 것일까. 어쩐지 뒷맛이 씁쓸했다. 악착같이 아끼고 모아 대출까지 왕창 보태 입성한 아파트인데도. 없어지지 않는 치마를 보며 공연히 배알이 뒤틀리는 건 아마 그 동네에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일 테다.

태어난 이래 삼십 년간 벗어나지 못했던 동네. 수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도 아니고, 아파트 단지 바로 뒤 언덕배기가 바로 희정이 살았던 동네였다. 늘 종아리 근육을 팽팽히 뭉쳐 놓던 그 언덕길과, 좁은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열패감의 그늘이 그녀는 내내 싫었다. 출퇴근길에 가래침을 뱉는 사내를 마주칠 때마다 막연히 언덕 아래에는 저런 인간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이웃에는 아파트로 청소나 파출부 일을 다니는 아주머니들이 더러 있었다. 저 청소부 아주머니도 그 동네에 사시는 걸까. 새벽마다 아파트로 출근하며 집 앞에 까만 비닐봉지를 몰래 버리고 가던 옆집 할머니가 떠올랐다.

오후 4시, 윤솔이를 데리러 나선 길이었다. 8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재희 엄마였다. 오늘은 강의가 일찍 끝나는 날이라 했다.

“저건 아직도 걸려있네요.”

1층에 도착하자 재희 엄마가 한 마디 던졌다. 아침 출근길에 자기도 치마를 봤다고 했다.

비싸 보이는 데 가져가는 사람이 없네요, 하자 그녀가 저게 비싼 거예요, 하고 되물었다. 상표가 ‘MADE IN ITALY’인 걸로 보아 그런 것 같다고 하자, 그녀의 얼굴에 뜻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상표를 들여다본 게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딴 건 모르겠고, 정말 손바닥만 하네요.”

재희 엄마가 하하 웃었고 희정도 따라 웃었다.

옷걸이가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울어 있었다. 하긴, 누가 보더라도 한번 만져보고 싶을 만큼 예쁘고 귀태 나는 치마였다. 어차피 갖지도 않을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심리는 뭘까. 그건 윤솔이가 본능에 이끌려 치마를 만지작거린 것과는 조금 다를 것 같았다. 어느 쪽이건 주인 입장에서는 남의 손을 탔다는 게 불쾌할 것이다.

오늘 저녁이면 치마를 못 보겠구나,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아쉬웠다. 좀 작아 보이긴 하지만 며칠 굶으면 영 못 입을 크기는 아니었다. 마침 주말에 여고 동창 모임이 있었다. 칙칙한 장마철에 저런 화사한 무늬를 입으면 돋보일 것이다.

신혼 시절에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다. 그땐 맞벌이를 해서 생활이 지금보다 여유롭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남들 눈에 궁상맞아 보이기가 죽어도 싫었다. 맨 얼굴에 흰 운동화를 신고 밖에 나가면 낡은 빌라에 산다는 걸 사람들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대출을 잔뜩 끼고 작년에 아파트를 장만한 뒤부터 희정은 백화점에 가지 않았다. 매달 이자를 갚고 윤솔이 유치원비를 감당하기 위해서 이기도 했지만, 공들여 화장하고 비싼 옷을 입지 않아도 예전처럼 마음이 위축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 집 마련에 그리도 열을 올리나 보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중산층 동네에 마련한 내 집 한 채는 평생 안고 살아온 낮은 자존감마저 단박에 끌어올려 주는 묘약이었다.

영어 유치원의 엄마들은 합리적이고 센스 있는 소비를 했다. 질 좋은 원단의 옷을 입고, 작은 명품 가방이나 단화, 팔찌 같은 아이템으로 옷맵시에 힘을 주었다. 그러면 그녀들이 걸치고 있는 옷마저 왠지 명품처럼 보였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려는 그런 작은 노력이 희정은 한심해 보이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 치르는 거울 앞에서의 몸부림이 지겨웠다. 그녀들의 옷차림은 이사 오기 전 자신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게 있다면 아마 살아온 삶 자체일 것이다. 허름한 빌라가 아닌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고, 집 살 때 친정에서 몇억을 보태줬다느니, 시댁에서 용돈을 받는다느니 하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는 여자들.

아무리 차림새가 후줄근해도 자신이 이 아파트의 주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재희 엄마의 헐렁한 바지와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여느 때처럼 길고 부스스한 머리를 검은 고무줄로 올려 묶고 어깨엔 흰 에코백을 메고 있었다. 반소매 밑으로 드러난 두툼한 팔뚝에는 튼 살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희정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늘 좋은 향이 나는 수지 엄마의 하얗고 매끈한 팔을 떠올렸다.

숲 유치원 엄마들은 꾸미는 데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외모에 신경 쓰는 엄마들을 골이 비었다며 은근히 무시하는 분위기였다. 희정은 그게 좋으면서도 그녀들이 정한 그 틀이 지금은 어딘가 버거웠다. 하지만 자꾸 어울리다 보면 자신도 곧 그녀들에게 녹아들 수 있을 것이다. 명품 치마를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재희 엄마의 경지에 언젠가는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에도 치마는 여전히 제 자리였다. 어떻게 된 거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수지 엄마가 나타났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즐거운 탄성을 내질렀다.

“뭐야, 아직 있어요?”

“그러게요. 어제저녁에 찾아갈 줄 알았는데.”

수지 엄마가 우산 손잡이를 팔뚝에 걸더니 치맛단을 손으로 주물럭거리며 자세히 살폈다.

“뭐 이쯤 되면, 가져가란 얘긴가?”

“그거, 엊그제 1층에서 이사 나간 집이 놓고 간 거예요. 찾으러 안 오네.”

손걸레로 난간을 닦던 청소부 아주머니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현관에서 짐보따리를 꺼내고 난리를 치더니, 그걸 놓고 갔어.”

잠시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치맛단을 손가락으로 한번 꼭 쥐어짜더니 결국 손아귀에서 떨구었다.

“하긴, 누가 입던 건 줄 알고.”

수지 엄마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웬일인지 그런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어느 쇼핑몰이 마스크를 세일 중이고 어떤 적립 카드로 유치원 할인을 받을 수 있는지, 어떤 학습지 선생님이 아이를 잘 다루는지 빠삭하게 꿰고 다니는 것도, 누가 입었는지 모를 찝찝한 치마를 끝끝내 손에서 놓지 못하는 탐욕스러움도.

근데 대체 왜 치마는 여기 남겨진 것일까. 실수로 흘린 걸까, 아니면 누군가 가져가라고 걸어 놓은 걸까? 옷걸이에 걸려있는 걸 보면 일부러 놓고 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청소부 아주머니는 주인이 찾으러 올 거라고 믿는 눈치였다. 뭔지는 몰라도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터였다.

아무튼 멀리 이사를 했다면 찾으러 오는 데도 시간이 걸릴 테고, 결국 치마는 며칠 더 아파트 입구에서 주인을 기다려야 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오늘까지 걸려있는 걸 보고는 안심하고 치마를 가져갈지도 모를 일이다. 마음에 슬그머니 조바심이 일었다.

“흠, 그렇구나.”

수지 엄마가 콧방귀를 뀌며 희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교문 방문 학습, 알아봤어요?”

그녀는 자신이 흘려준 정보가 고맙게 잘 활용되고 있는지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아뇨. 아직…”

“빨리 알아보세요. 어차피 우리 동에 하는 애들이 있으니까, 같은 날 하겠다고 잘 얘기하면 깎아줄지도 몰라요. 윤솔이 엄마가 몰라서 그렇지, 그중에…”

수지 엄마가 말을 멈추고는 갑자기 희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눈알을 굴리며 뭔가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무튼 애 공부를 너무 놓고 있는 것 같아서. 원래 좀 그렇잖아요, 거기가.”

가르치려는 듯한 태도에 마음이 상해 희정은 더 묻지 않았다. ‘거기가’라는 말을 듣자 화가 치밀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다음 날 아침에도 치마는 걸려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문이 열리자, 밀폐 공간 속 철제 손잡이에 걸린 치마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실내조명 아래 분홍색과 회색 원단이 한층 신비롭고 우아하게 빛났다. 마치 백화점 피팅 룸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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