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 장르: SF, 기타 | 태그: #환상문학 #단편선 #환상문학단편선 #커피잔을들고재채기 #김이환
  • 평점×5 | 분량: 51매
  • 소개: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현실이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다니까.” 어느 날 내게 말을 걸어 온 달팽이를 시작으로, 대문, 계단, 영화, 커피 잔, 키보드까지 모두 내게 말을 걸어온다... 더보기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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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구에서 기어 나온 달팽이가 나에게 물었다. 이봐, 뭐 재미있는 이야기 없어? 그때 나는 세수를 하던 중이었다. 면도를 하려고 턱에 면도 크림을 바르고 있는데 달팽이가 나타난 것이다. 세면대를 향해 열심히 기어가던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고 뿔 두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은데 그래, 나는 면도기로 수염을 깎으며 물었다. 아무 이야기라도 괜찮아, 세면대까지 기어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거든, 그동안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데, 달팽이는 대답했다. 그래, 나도 면도를 하려면 시간이 걸리니까 이야기 하나 들려 줄게. 나는 말했다.

*

나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며칠 전, 친구가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며 전화를 걸었다. 보통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전화까지 걸진 않는다.

그런데 친구는 전화를 걸었다. 나는 재미없으면 가만 안 두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건 진심이었다. 나는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다가 달려 나와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별것 아닌 일로 전화한 거라면 정말 친구를 가만 안 둘 생각이었다. 친구가 해 준 건 이런 이야기였다.

*

친구는 공포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 무서운 영화라면 사족을 못 쓸 만큼 좋아하는 친구는 팝콘에 음료수까지 거하게 사서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옆 좌석에 여자 둘이 앉았는데, 무서운 영화를 앞두고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영화가 시작도 하기 전부터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시작하자 두 여자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쳤다. 친구는 영화의 효과음이라 생각하며 두 여자의 비명을 억지로 견뎠지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그 사건이 터졌다. 친구는 먹던 음료수를 팔걸이의 음료수 받침대에 내려놓았는데, 옆에 앉은 여자가 긴장한 나머지 친구의 음료수를 자신의 음료수로 착각하고 마신 것이다.

친구는 여자에게 항의했다, 그거 제 음료수인데요. 그러자 여자는 당황한 나머지 마시던 음료를 컵에 다시 뱉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제건 줄 알고. 여자는 처음에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몰랐다. 여자가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친구에게 공포 영화는 코미디 영화가 되고 난 다음이었다.

영화가 상영되는 도중에도, 그리고 끝난 다음에도 여자는 친구를 따라오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공포 영화를 볼 때면 정신이 없어서, 음료수 하나 사 드릴게요. 친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힘들게 참으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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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이야기였다. 나는 재미있다고, 만족했다고, 친구에게 말했다. 그러자 친구는 물었다, 너는 뭐 재밌는 이야기 없어? 나는 대답했다, 웃기는 이야기는 아니고 무서운 이야기는 하나 아는데. 그럼 해 봐, 친구는 나를 위해 인심 써 준다는 듯 대답했다. 뭐야,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에게 인심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듣는 사람이 인심 쓰는 세상이라니, 것 참.

*

스웨덴에서 연쇄 살인범이 검거되었다. 소녀와 매춘부를 잔인하게 살해해서 스웨덴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범인이 범행 후 10년 만에 잡힌 것이다.

그런데 소름끼치는 일이 있었으니, 그가 붙잡히기 얼마 전 텔레비전에 출연했다는 사실이다. 정부 보조금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터뷰가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적 있는데, 범인이 인터뷰 대상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제작진은 남자의 집에서 남자를 인터뷰했고, 남자가 그린 그림을 붙여 놓은 벽을 촬영해 가기도 했다. 제작진은 몰랐다. 사실 그 그림들은 그가 살해한 여자들이 죽는 순간 고통스러워한 모습을 스케치 해 놓은 그림들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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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 소름끼쳐, 내가 친구에게 해 준 이야기를 듣고 달팽이는 말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현실이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다니까. 달팽이의 말을 듣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현실이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다는 말이 그 순간 상당히 철학적으로 들렸다. 맞다.

현실은 이야기보다 더 이야기 같다. 모든 이야기는 현실이 낳았으니까, 아마 그래서 그럴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가 이야기 같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원래 현실에 바탕을 뒀던 것이다. 현실이 이야기를 낳았다. 이야기는 웃기는 이야기를 낳았고, 웃기는 이야기는 무서운 이야기를 낳았고, 무서운 이야기는 지저분한 이야기를 낳고, 지저분한 이야기는 어려운 이야기를 낳고, 어려운 이야기는 재밌는 이야기를 낳았다. 현실은 이야기를 낳고 이야기는 현실을 낳고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

보답으로 나도 이야기 하나 하지, 달팽이는 말했다. 와플 알아? 길거리에서 많이 파는 그 과자 비슷한 디저트 말이야. 사실 그게 실수로 발명된 음식이래. 원래는 요리사가 핫케이크를 만들려고 했는데 잘못 돼서 이상한 요리가 나온 건데 그게 바로 와플이었대.

그런데 그게 너무 맛있었던 거지. 그래서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낸 요리사가 기쁜 나머지 만세를 불렀다가, 그만 미끄러져서 바닥에 머리를 찧고 죽고 말았대.

*

재미있다, 좋은 이야기야, 나는 말했다. 신기하면서 무서우면서도 유익한 이야기였다. 와플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지식을 전달해 줄 뿐 아니라 미끄러운 바닥을 조심하라는 교훈도 있었다. 죽은 요리사에겐 불쌍한 일이지만, 좋은 이야기였다.

그럼 이만, 나는 가 봐야겠어. 나는 달팽이에게 인사했고 면도를 끝냈다. 그리고 달팽이와 헤어졌다. 나는 외출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 후의 일은 모른다. 달팽이가 세면대에 도착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

세상은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하수구에서 기어 나온 달팽이도 재밌는 이야기를 알고 내 친구도 재밌는 이야기를 알고 면도를 하느라 바쁜 나도 재밌는 이야기를 안다. 지저분한 이야기, 야한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그래서 결국 재미있는 이야기, 이야기는 무한히 많다.

어젯밤 나는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를 했다. 그러자 우주가 다시 수축하고 한 개의 점이 되더니 새로운 빅뱅이 일어나고 세상이 다시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이야기는 재미가 없다. 내가 커피 잔을 들고 재채기를 한 이야기는 재미없는 이야기이다.

와플을 발명하고 죽은 사람은 재밌는 이야기를 세상에 남겼지만 커피 잔과 재채기는 세상에 아무 이야기도 남기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하는 대신 면도를 마치고 옷을 챙겨 입고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방을 나갈 준비를 한다.

문득 책상 위의 머그잔이 보인다. 머그잔의 바닥에는 커피가 말라 붙어 있다. 그 옆의 데스크 탑 컴퓨터는 흉한 괴물 같다. 웹 서핑 할 때는 멋진 컴퓨터인데, 전원을 껐을 때는 낡고 더러워서 마냥 흉해만 보이는 괴물 같다.

나는 지난 밤 저 컴퓨터 앞에 앉아서 머그잔을 들고 커피를 마시다가 재채기를 했다. 하지만 그건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므로 나는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않고 집을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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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오는데, 정확히는 문을 닫고 열쇠로 문을 잠그는데 대문이 묻는다. 언제 돌아올 거야? 오래 나가 있을 거야? 그걸 왜 알고 싶으냐고, 나는 대문에게 묻는다. 글쎄, 너 오기 전까지 잠이나 한숨 자 두려고.

대문의 말에 나는 대답한다. 영화 보고 올 거야, 오래 걸리니까, 한숨 자고 있어. 나는 계단을 내려온다. 계단은 말한다, 대문은 좋겠다, 낮잠도 잘 수 있고, 나는 사람들이 계속 오르내려서 잠도 못 자는데. 나는 계단에게 아무 대꾸하지 않는다, 계단은 원래 불평이 많다. 계단의 불평에 나는 요즘 질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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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나는 무서운 영화를 좋아한다. 무서운 감정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다. 웃다가 죽는 사람은 없다. 울다가 죽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놀라서 죽는 사람은 있다. 공포는 인간의 가장 깊은 곳을 움직이는 감정이다. 그래서 나는 무서운 영화를 선택한다. 무서운 영화를 볼 생각에 기분이 들뜬 나는 음료수까지 거하게 사서 상영관으로 들어간다. 옆 좌석에는 여자 둘이 앉아 있는데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겁에 질려 있다. 나는 왠지 더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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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말했다. 나는 이제 1초에 스물네 번 깜박일 생각이에요. 이 이야기는 너무나 무서워서 영화를 보다가 놀라서 죽은 사람도 있어요. 나는 대답한다. 그래 알아, 그건 다 팸플릿에 써 있어, 영화나 보여 줘. 나는 생각한다.

영화가 저렇게 거창하게 떠벌리다니 어째 불안한걸. 그리고 영화는 이야기를 들려 준다. 영화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다. 연쇄 살인범이 소녀와 매춘부를 잔인하게 살해해서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다. 경찰들의 치밀한 수사 끝에 범인이 붙잡히는데, 놀랍게도 범인은 검거되기 이전 텔레비전에 나왔던 적이 있음이 결말에 밝혀진다.

방송국에서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남자가 인터뷰 대상자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방송국은 남자의 집에 찾아가 그가 그린 그림이 붙은 벽까지 촬영해 갔다. 제작진은 몰랐다. 사실 그 그림들은 그가 죽인 여자들이 죽는 순간 고통스러워한 모습을 스케치해 놓은 것이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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