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 가거라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미리보기

1

사실 따지고 보면 첫 경험 때부터야.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나. 눈이 꽤 많이 내린 날이었어. 독서실 책상에 앉아 무기력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그냥 이런저런 생각들. 수능은 1년 앞으로 다가왔는데 가고 싶은 학과도 딱히 없고, 엄마아빠 등쌀에 못 이겨 독서실등록을 하긴 했는데 분위기는 또 왜 이리 칙칙해. 공부는 오지게 안 되는데 밖에는 청승맞게 눈이 수북수북 쌓이고 있는 거야.

그런데 나는 나가서 만날 여자친구도 없고. 그러니까 뭐랄까. 만약에 외계인이 지구인들을 납치해서 표본실을 만든다면 나는 마치 대한민국 한심한 고교생 ‘표본’으로 꽂혀 있을만했다고 할까.

그때 그 누나가 나한테 왔어. 나보다 두 살 많은, 재수하는 같은 동네 누나였는데 커피 한 잔 사주면서 괜히 친한 척을 하더라고. 이름? 안 물어봤어. 그 누나도 내 이름 따위 관심 없었을 텐데 뭘.

그나저나 원래 남자 독서실에 여자가 들어오면 안 되는 거거든. 그래서 슬쩍 주위를 둘러봤는데 독서실 안에 우리밖에 없는 거야. 그때서야 알아차렸지. 누나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끈적끈적하다는 걸.

유혹당한 거냐고? 글쎄. 누가 먼저 유혹한 걸까. 황 대리는 여자니까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남자들도 은근히 내숭 떨 때가 있어. 순진한 척하는 거랄까.

그때의 내가 그랬지. 누나가 뭘 원하는지 다 알면서, 수학 문제를 가르쳐준다는 말을 철썩 같이 믿는 척하고 자취방에 따라 간 거야. 코사인과 탄젠트의 차이점을 알려준다나? 지금 생각하면 웃겨. 그 누나 나보다 수학 한참 못했거든.

안 떨렸냐고? 니미, 처음인데 어떻게 안 떨려. 이런 거 네가 처음이야, 하고 말하면서 브래지어 후크 쉽게 푸는 새끼들. 그거 다 구라야. 처음엔 다 어설플 수밖에 없어.

어쨌든 이야기로 돌아와서,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낑낑거리고 있는데 누나가 한숨을 쉬고는 자기가 스스로 브래지어를 풀더라고.

약간 존심이 상했지만 처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애무를 하기 시작했어. 처음에는 누나한테 별 반응이 없더라. 그냥 내가 열심히 땀 흘리는 모습만 귀여워하더군.

열 받았지. 내 하드디스크의 절반을 차지했던 숱한 야동들도 별 도움은 안 되더라니까. 어떤 야동? 왜 있잖아, 지금은 은퇴한 AV 배우 히토미 칸나. 그렇게 잘 나갈 때 느닷없이 컬렉션을 중단하다니, 에효.

그런데 누나가 스스로 짚어준 곳들을 공략하니까 누나 몸이 조금씩 뜨거워지더라고. 그런데 막 넣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막아서는 거야. 콘돔 없이는 절대 안 된다고. “그냥 하면 안 돼?” 하고 졸라봤지만 누나는 단호했어. 그리고 책상 서랍에서 콘돔을 꺼내 손수 끼워주더라. 능숙한 솜씨였어.

얼굴 빨개졌다? 어이, 황 대리. 순진한 척하지 마. 별로 친하지도 않은 직장 동료를 손쉽게 모텔로 끌어들여놓고 어디서 내숭을. 아침부터 남자랑 이런 얘기하는 건 좀 민망하다고? 하긴 그럴 수도 있겠네. 근데 나는 아니야.

이런 얘기하는 거 황 대리가 몇 번째인지 기억도 안 나니까.

2

경과보고서 93001.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공화국의 43번 소혹성에서 수령님께서 친히 허가하신 극비리의 연구를 진행하고 있던 연구소가 습격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28개의 연구소 중 습격당한 연구소가 추진 중이었던 연구안이 하필 저희 함대의 주력 항속 장치인 범우주중력무시광속추진동력기관 ‘므라크하브담’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닌 걸로 보여집니다.

시각은 어젯밤 38시 103분으로 추정되며 연구 장비 일체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된 걸로 보입니다. 연구소의 경비를 맡고 있던 네 명의 자랑스러운 동지들이 저항을 벌인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생체 신호는 찾을 수 없어 모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습격자들의 정체는 아직 파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나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습격자들의 당초 목적은 ‘파괴’가 아닌 ‘정찰’이었던 걸로 여겨지며 그것이 발각되자 증거 인멸을 위해 공격을 감행한 걸로 보여집니다. 현재 저희 수색대는 43번 소혹성을 향해 신속히 다가서고 있는 중입니다.

120시간 내에 습격자들의 정확한 의도와 피해범위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3

첫 경험을 했다고 해서 갑자기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거나 뿌듯하지는 않았어. 그건 하룻밤의 잠자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거든.

물론 할 때는 세포벽을 뚫고 핵이 뛰쳐나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강렬한 경험이었지만, 누나의 집을 빠져나왔던 새벽에 나는 아버지에게 둘러댈 변명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새벽하늘 구석에 떠 있는 별이 유난히 커 보이더라. 괜스레 날 쳐다보고 있는 느낌도 들고.

동정을 잃고 남자가 되었지만 그 사실이 나를 둘러싼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아무것도 없더라고. 그냥 그 별과 나만 공유하는 비밀 하나가 생겼을 뿐.

사실 처음이 어렵지, 뭐든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법인가 봐.

환상이 현실이 되고, 일탈이 일상의 범위 안에 포함되어버리는 그런 순간이 있잖아. 세상의 음부를 하나 훔쳐 본 대가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느낌. 그냥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한 번 여자와 자본 남자는 더 이상 첫 경험에 대한 환상을 가질 수가 없잖아. 그래서 왠지 난 그때 자유를 얻었다기보다 잃어버린 것 같아.

그날 이후로 독서실은 한 번도 가지 않았어. 누나가 다시 보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당시에는 왠지 모를 죄책감도 느껴졌었고, 무엇보다 그 장소 자체가 꺼려지더라고. 그날 있었던 일에서 아무것도 연관되고 싶지 않았어.

가스 배달을 하던 동네 형이 알려준 사실이지만 그 누나, 생각보다 소문이 안 좋더군. 왜 그런 여자들 있잖아, 동정남들만 골라서 노리는. 여자 몸 건드리고 싶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모습에 우월감이나 쾌감을 느끼는 걸지도. 그 얘기를 듣고도 당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어. 나라고 뭐 떳떳한가.

그런데 두 달쯤 뒤에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는지 누나가 연락을 해왔어.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지. 내 아이를 임신했다는 거야. 나는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고, 안전하게 하지 않았냐고 했지만 누나는 한 마디로 일축했어.

재수가 좆같이 없으면 이래.

누나는 수술비를 반반씩 내자면서 10만 원을 달라고 하더라고. 삼촌이 물려준 기타를 몰래 팔아야 했지. 대학에 가면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틈틈이 연습도 하고 그랬는데. 우리 집이 특별히 유교적 신봉의 가풍이 있다거나 엄격한 건 아니었어. 하지만 미성년자가 임신을 시켰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만약 알았다면 아버지의 재떨이가 날 용서치 않았을걸.

물론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 누나가 가진 아이가 내 아이라는 보장도 없고, 병원에도 같이 가지 않았으니 어쩌면 난 사기당한 건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어수룩해서 덜컥 겁부터 났지. 매일 누군가한테 쫒기는 꿈을 꾸기도 하고 소문이 퍼질까봐 두렵기도 했어. 그리고 그 날 이후 몇 달 동안 신발에 붙은 껌처럼 내 입 속에 붙어 있던 두 마디가 있었지.

콘돔 했는데. 진짜 했는데.

4

경과보고서 93002.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피해 현장은 예상보다 참혹합니다. 방어 시설물의 7할이 녹아내렸고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연구시설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입니다. 저희 군사전문가의 진술에 따르면 이 정도의 막대한 피해를 낼 수 있는 전투력을 가진 집단은 가우리스탄 제국과 용병집단인 나퀴렉뿐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단순한 연구소 습격이 아니라 성단전(戰)을 암시하는 신호탄일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

현재 저희는 43번 소혹성의 수석연구원 동지인 왈 크아톰이 암호화하여 남긴 기록을 해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연구소 피습 당시 최후까지 생명을 보존하여 사망 직전 서신을 남겼는데, 수령님께서도 매우 근심하실 것이라 사료되는 므라크하브담에 대한 행방이 기록되어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5

두 번째 여자는 기억이 좀 흐릿한데, 이름이 수미였나? 아니, 숙미였던 것 같기도 하고. 하긴, 황 대리 말이 맞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그냥 수미로 할까 그럼.

어쨌든, 내가 합격한 대학교는 집에서 두 시간 반 거리였는데 도저히 가방을 메고 왕복할 엄두가 나질 않았어.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겠다는 약속 하에 아버지가 학교 근처에 방을 하나 잡아주셨지.

2층짜리 호프집에서 홀서빙을 시작했는데, 생각해 보면 거기 사장님이 진짜 악덕이었어. 돈 떼먹는 건 일쑤인데다가, 툭하면 알바생들한테 욕지거리나 하고.

그러니까 어떤 스타일이냐면…… 언젠가 한 번 3000cc통에 맥주를 조금 모자라게 따랐더니 뒤통수를 딱 후려치더라고. 맥주 몇 방울 아끼다가 손님 잃어버릴 거냐면서 말이야. 그래서 다음부터는 거품까지 가득가득 따랐지 뭐.

그런데 어느 날 팔뚝에 힘 꽉 주고 맥주통을 나르는데 또 면박을 주는 거야. 맥주통이 좀 비어 있어야지, 미련하게 그걸 가득 따르고 다니냐, 흘린 맥주 네놈 월급에서 깎으면 좋겠냐면서.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겠어?

니미, 대체 어쩌라고.

대신에 그런 사장 밑에서 일하다보니 알바생들끼리 사이가 굉장히 좋았지. 그때 깨달은 건데 사람 사이가 가장 빨리 가까워지는 방법은 목욕탕 가는 것도, 술 한 잔 하는 것도 아니야. 바로 윗대가리 뒷담화지.

수미는 나보다 일주일 정도 늦게 들어온 동갑내기 여자애였는데, 몸매도 호리호리하고 얼굴도 예쁘장해서 사장이 늘 카운터를 맡기곤 했어. 걔가 다니던 학과가 비서과였던가? 아무튼 그랬을 거야.

그런데 문제는 손님들이 밀어닥치는 주말이 되면 카운터고 홀서빙이고 구분이 없어진다는 데에 있어. 테이블을 마저 치우기도 전에 단체손님들이 꾸역꾸역 밀려 들어와 자리에 앉아대면 너나 할 것 없이 앞치마 휘날리며 뛰어다녀야 하는 거지.

그런데 수미는 카운터에서 손님들 카드 긁어주고 생글생글 웃어주는 건 잘 했지만 서빙은 영 꽝이었거든. 그래서 사건이 터졌지.

2번 테이블 안주로 나온 오코노미야키를 수미가 12번 테이블에 가져다 줘 버린 거야. 원래대로라면 손님들이 “안 시켰는데요.”하고 돌려줬을 텐데 12번 테이블은 단체석이거든. 스무 명이 넘는데 지들도 뭘 시켰는지 알 턱이 없으니 그냥 주는 대로 넙죽 받아먹은 거야.

그럼 2번 테이블 애들은 어떻게 됐겠어? 한 시간 동안 나초만 씹고 있다가 열불이 나서 항의를 한 거야. 그렇다고 한 시간 전에 먹은 안주를 12번 테이블 애들한테 토해내라고 할 수 도 없는 노릇 아니겠어.

재빨리 사장이 다시 만들겠다고, 서비스로 황도도 드리겠다고 가까스로 달래놨는데……. 글쎄, 마침 오코노미야키 반죽이 다 떨어진 거야. 손님들은 열 받아서 나가버렸고.

결국 사장이 폭발했지. 2번 테이블 주문 받은 게 어떤 새끼냐고 주방까지 달려와서 씩씩거리는데, 주방 이모들부터 알바생, 얼음물 따르고 있던 손님까지 바싹 굳어버렸어. 그런데 그때 냉장고 옆에서 하얗게 질려 있는 수미를 본 거야. 바들바들 떨고 있더라고. 그도 그럴게 사장 손 옆에 하필 버너가 놓여 있었거든.

내가 손을 들었어. 모르고 2번 테이블 안주를 잘못 적었다고. 글쎄?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 고향에서 일하고 있을 누나 얼굴이 그 애 얼굴이랑 겹쳐보였던 건지, 아니면 그냥 쿨해 보이려고 그랬는지. 둘 다 아니면 그냥 잠깐 겁대가리를 맥주통 옆 아이스박스에 깜빡 흘려버린 건지도.

다행히 주방 이모들이 말려서 정수리에 버너가 박히는 일은 면했어. 대신 그날부터 수미와 급격히 친해질 수 있었지. 근무가 같이 끝나는 날이면 집까지 데려다주기도 했고.

수미한텐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반년이 지나고 나서 남자 쪽이 조금 시들해졌는지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더라. 원래 공대생들이 좀 그래. 늘 지껄이는 얘기는 늘 자동차나 토익 점수, 격투기나 레이싱 걸뿐이지.

근데 수미 남자친구는 그 중에서도 최악이었어. 온라인 게임에 미쳐 있었다지. 내가 아까 얘기했던가? 뒷담화만큼 사람 사이를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건 없다고.

수미가 남자친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투덜대는 걸 나는 그 애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묵묵히 들어줬어. 가끔 ‘저런, 쯧쯧, 아이고.’ 등등의 추임새만 넣어주면 되는 일이었거든.

그런데 어느 날 수미가 남자친구랑 크게 한바탕 했는지 하루 종일 씩씩대더라고. 카운터에 기대서선 잘 웃지도 않고. 나중에 안 사실인데 남자친구가 기념일을 잊어먹은 모양이야. 그 남자친구, 수미가 PC방으로 찾아가 씩씩거리며 컴퓨터 전원을 꺼 버렸을 때도 그날 획득한 아이템에 대해 미치도록 아까워했다는군.

그날, 수미는 치킨이 먹고 싶다고 했어. 집에 가는 길에 느닷없이 말이야.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난 당황했지. 물론 여자들이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걔 저녁 9시 이후론 감자튀김 한 조각도 입에 안대는 아이였으니까.

결국 어영부영 내 자취방에 수미가 오게 된 거야. 응? 치킨? 물론 안 남기고 다 먹었지. 꾸역꾸역. 태연한 척 수미 입가에 붙은 양념을 놀려대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몹시 복잡했어. 방 한 편에 묵묵히 자리 잡은 침대가 자꾸 눈에 어른거리고.

그래서, 덮쳤냐고? 으이구, 이 여자야. 남자들을 다 짐승들로 보는 거야? 뭐, 다 늑대들이긴 하지. 그런데 알아두는 게 좋아. 늑대들은 사냥감의 약점이 보이기 전까진 절대 이빨을 드러내지 않거든.

치킨을 다 먹고 함께 TV를 봤어. 연예인들이 나와서 첫 키스 장소에 대해 시시콜콜 떠들어대는 프로였던 것 같아. 수미가 졸립다며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눕더라. 언제 프로가 끝났는지도 모르겠는데 CF가 나오고 있었어.

살짝 내려다봤더니 어느새 수미가 날 올려다보고 있지 뭐야. 하필이면 방금 TV에서 ‘키스’란 말이 수십 번은 흘러나왔고. 물론 입 맞추고 싶었지. 그런데 자세가 영 아니었어. 수미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대려면 목이 부러질 판국이었거든. 그런데 그때, 수미가 내 목에 손을 둘렀지. 수미 입술에서 치킨 먹을 때 함께 주는 무 냄새가 났지만, 좋았어.

왜 갑자기 웃냐고? 아니, 분명 뜨거운 밤으로 기억되긴 하는데. 웃지 않을 수 없었거든. 너 그거 하다가 피식 해 본 적 있어? 난 있어. 한창 그걸 하다가 수미가 내 위로 올라타서 허리를 돌려대는데…… 무지하게 뻣뻣한 거야. 이건 무슨 고장난 방적기도 아니고. 그러니까 리듬감이 전혀 없더라고.

웃음 참느라 혼났지. 콘돔은 했냐고? 아니, 분명히 기억하는데 안 했어. 내가 그럼 안에다 해도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수미는 이렇게 대답했지.

“걱정 마. 오늘 안전한 날이거든.”

6

경과보고서 93003.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다행히도 므라크하브담은 무사하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간 얼마나 염려가 많으셨습니까? 가우리스탄 제국에 대한 수적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궁극의 무기는 아직 우리 손에 있습니다. 왈 크아톰은 습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그 순간, 완공되고 있던 므라크하브담을 스스로 폭파시킨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설계도를 암호화시켜 놓았고, 그 설계도는 지금 저희 수중에 들어와 있습니다. 저희 모성(母星)에는 이 설계도를 복원하여 므라크하브담의 공사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인재들이 충분할 겁니다.

이곳에서의 잔여작업이 끝마치는 대로 공화국으로 복귀하겠습니다.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7

뭐야, 뻥 친 거야?

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어. 분명 안전하다고 해 놓고선 이제 와서 임신이라니. 그런데 수미가 거의 울먹이면서 말하더라. 자기가 계산을 잘못했을 수도 있고, 여자들 주기는 원래 불안정할 때도 있다고.

그러면서 좀 있으면 배가 불러올 텐데, 남자친구가 알면 가만 안 둘 거라고. 갑자기 울음을 왈칵 쏟아내는 것도 짜증났지만 별 볼일 없는 남자친구한테 매여 있는 그 애 처지에도 화가 나더군.

제길, 그 애 수술비로 또 한 달치 월급이 날아갔어. 그때부터 내가 뭘 했는지 알아? 난생 처음으로 자발적인 공부를 하기 시작했지. 완벽한 피임법에 대해서 말이야. 뭘 알아야 실수를 안 할 거 아냐.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벽한 피임법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더라고. 콘돔 불량품에는 미세한 구멍이 있을 수도 있고, 완벽히 착용을 했다 하더라도 확률은 95퍼센트란 거 알아?

그래서 충분한 인내력으로 밖에다 싸면 되지 않을까 해서 알아봤는데. 어이쿠, 그거야말로 위험천만한 피임법이더라고. 살짝 삐져나온 쿠퍼액으로도 임신이 될 수 있다는 거야. 저주스러운 정자의 생명력 같으니.

결국 인터넷에서 누군가 알려준 방법이 그나마 가장 안전해 보였어. 일을 다 치른 다음에 화장실로 가서 방금 쓴 콘돔에 물을 한가득 집어넣어 보라는 거야. 그러면 아주 작은 구멍도 잡아낼 수 있다는 거지.

세 번째 여자애한텐 그 방법을 써 봤어. 클럽에서 만난 애였는데 도대체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하다며 화장실까지 따라오더니 그 광경을 본 거야. 그러곤 한 마디 하더군.

“어머, 너 존나 깬다.”

아 그 순간의 쪽팔림이라니. 하지만 그 이상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어. 산부인과 문 두드리는 짓 좀 그만 하고 싶었단 말이야. 어떻게 된 줄 알아? 세 번째 여자애한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어. 운이 없었다는 표정으로 담담히 돈을 요구하지도, 엉엉 울며 매달리지도 않았지.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이 우리 사이는 그냥 그렇게 끝났어. 드디어 벗어났구나, 싶었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 1년 정도 뒤에 우연히 그 여자애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거든? 그런데 대문에 그 여자애가 웬 갓난아이를 떡하니 안고 있는 거야. 그리고 그 사진 아래엔 이렇게 씌어 있었어.

‘아자아자, 당당한 싱글맘.’

8

경과보고서 93004.

도라쉬크 공화국의 위대하고 위대하신 수령님께.

옥체를 보존하셨다는 전보를 듣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릅니다. 저희 수색대 역시 포격에 말려들어 약간의 부상을 입었지만 사망자는 없습니다. 물론 므라크하브담의 설계도 역시 무사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군요.

가우리스탄 제국과 나퀴렉이 합동전선을 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신병기 므라크하브담에 대해 예상보다 더 큰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훌륭한 삶의 터전이었던 모성이 대규모 함대의 갑작스런 포격에 완전궤멸 되었다는 사실도 비통하지만, 유일한 반격의 불씨가 위태롭다는 사실이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공화국의 86개 소혹성으로 유능한 동무들이 뿔뿔이 흩어진 지금, 므라크하브담을 복원시킬 수 있는 인재를 수소문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입니다. 만약 저희의 수색대가 발각되는 날에는 가우리스탄 제국에 므라크하브담을 빼앗기게 되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수령님, 무운을 빌어주십시오.

앗사라크 쉬아돔 전술보좌관.

9

물론 내가 카사노바 체질이라는 건 아니야. 사실 작업 건 여자한테 퇴짜 맞은 적도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황 대리가 짐작하는 것처럼 밤 기술이 현란하지도 않고. 물건이 큰 편도 아니야. 못 봐서 그런데 사실 조그만 흉터도 있어. 엄마가 그러는데 아주 어렸을 적에 자전거에 치였대나.

사실 이 모텔까지 날 끌어들인 황 대리가 그 방면에선 훨씬 탁월한 셈이야. 그러니까 이것만은 알아줘. 내가 어젯밤 황 대리를 거절한 건 성적 매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황 대리가 싫어서도 아니야.

물론 황 대리가 악에 받쳐 소리친 것처럼 내가 ‘고자’라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고.

어쨌든 얘기로 돌아와서,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어. 나와 잠자리를 같이 한 여자들은 몽땅 임신을 해버리니 말이야. 연속적으로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여자가 무서워지더라. 하룻밤 즐긴다는 생각도 불가능해지고. 물론 방황의 세월도 그리 길진 않았어.

나라가 날 부르더라고.

그런데 군대에 가니까 문제가 더 심각한 거야. 황 대리는 잘 모르겠지만 군대란 곳이 좀 이상하거든. 정상적인 남자의 성 의식을 격렬하게 변화시킬 정도로 뒤틀린 공간이니까. 군대에선 왜 그리 현란 무쌍한 무용담들이 그렇게 많은지. 선임들이나 동기들한테서 여자들을 단순한 정액받이로 취급하는 이야기들을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어.

그리고 난생 처음 노란 집에 가게 된 거야. 노란 집이 뭐냐고? 아, 우리 부대 앞 사창가들이 다 노란 간판을 달고 있었거든. 군인들이 외박 나가면 달리 할 일이 뭐 있겠어. 기분은 어땠느냐고? 그냥 찝찝했어.

그 여자들 단순히 수컷들의 욕망해소를 위해 봉사하고 돈 받는 불쌍한 애들이야. 거기서 땀 흘리며 허리를 흔들었던 내 처지도 참 그렇더라고. 물론 그런데서 일하는 여자애들 피임 하난 잘 하지. 주기적으로 무슨 약 같은 것도 먹는다던데.

헌데 다음 외박 때 근처를 지나다가 들여다 본 그 노란 집은 여자애가 바뀌어 있었어. 뭐, 무슨 사정이 생겨 일을 그만 뒀었겠지.

그런데 왠지 난 그 ‘사정’이 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어.

제대를 하고 나서 더 이상 여자를 침대에 끌어들이는 일에 흥미가 생기질 않더군. 아니, 그보다는 이제 나 자신에 대해 무서워지기까지 하더라고.

일단 복학을 해야 하니까 등록금을 버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쌓이는 날엔…… 그냥 혼자 해결했고. 친구들이 소개시켜 주는 여자들도 다 거절했어.

그랬더니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 거야. 게이로 오인된 적도 몇 번이나 있었지. 그런데 말이야. 그건 억울하더라고. 그래서 어느 날 만취한 채 친구들한테 털어 논 적이 있었어. 괴이하게도 난 만나는 여자마다 임신을 시킨다, 그 어떤 피임법도 통하지 않는다하고 말이야.

그러더니 얼마 뒤에 한 아줌마가 날 찾아왔어. 아, 처음에는 그냥 아가씨인 줄만 알았지. 보자마자 압도되더군. 극소수지만 그런 여자들이 있다니깐. 남자를 한 입에 꿀꺽 삼키게 생긴 얼굴. 색기(色氣)라고도 하지?

내 얘길 듣고 수소문을 했대. 정말로 그 어떤 피임법도 통하지 않느냐고 말이야. 그래서 내가 그렇다고 했지. 왜요, 기인열전에라도 나가 보란 말이에요? 하고 비아냥거렸어. 그런데 그 아줌마, 눈 하나 깜짝 않고 굉장히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이렇게 얘기했어.

너, 불임인 여자랑도 해 봤니?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