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가 지나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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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은 괴팍하고도 잔인한 취미를 가진 살인자의 창고 같았다. 바닥에 나란히 정렬되어 있는 플라스틱 바구니에는 절단된 팔, 다리, 몸통의 일부분이 아무렇게나 담겨 있었다. 접합부에서 삐죽이 튀어나온 철골이나 가느다란 전선이 아니라면 사람의 진짜 몸과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하란은 바구니 속에 있는 팔을 하나 집어 들고 탄력 있는 인공피부를 쓰다듬어 보았다. 인공피부는 인간의 살결처럼 부드러웠다. 하드웨어 2실에 있는 지호가 개발한 인공피부였다.

이 피부를 개발한 뒤, 지호의 연봉은 두 배로 뛰었고 연구소의 매출은 50% 증가했다. 하지만 살며시 눈을 감은 하란의 손끝에 닿은 인공피부에는 체온이 없었다. 하란은 냉랭함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다시 눈을 떴다.

눈높이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는 인공피부를 벗겨낸 로봇의 철골이 빨래처럼 줄에 매달려 있었다. 철골은 모두 여기서 이루어지는 창조의 재료였다. 흙으로 사람을 빗는 대신, 철골을 이어 인간을 만들어 낸다.

작업실의 주인인 마겐은 작업실을 ‘신의 작업실’이라고 불렀다. 그 말을 들은 지호가 그러면 너는 창조의 신이냐며 비꼬았지만, 마겐은 그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하지만 창조는 하드웨어에서 끝나지 않는다. 흙에 생기를 불어넣듯 철골에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안 된다. 2진수와 복잡한 규칙으로 이루어진 숨결. 그 숨결을 만드는 일이 하란의 몫이었다. 하란이 프로그래밍한 프로그램이 탑재되는 순간, 마겐이 만든 인형은 인간이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히려 ‘창조의 신’이라는 별명은 하란에게 더 어울렸다.

작업실에 서서 마겐의 재료들을 쳐다보던 하란은 갑자기 발치에서 낑낑대는 소리를 듣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부드러운 털이 발목을 비비고 있었다.

“세네구나.”

하란은 자신을 올려다보며 꼬리를 치는 강아지를 안아 올렸다. 프로그램의 발달 속도에 맞춰 일주일 전에 마겐이 교체한 세네의 몸은 이전보다 컸다. 묵직한 세네의 무게를 느낀 하란은 진짜 세네가 자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세네에게 탑재한 프로그램은 스스로 학습하며 발달해 나가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학습을 통해 점점 뇌를 발달시키듯 세네에게 탑재된 프로그램, 인공지능은 초기에 주어진 조건과 복잡한 규칙을 조합하며 느릿느릿하게 진화해 나간다. 움직임조차 느리던 세네는 팔, 다리의 근육을 사용해서 천천히 일어섰고, 짖고 울기 시작했다.

하란을 비롯한 연구실 식구들을 알아보기까지는 5년쯤이 걸렸다. 진짜 강아지와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느린 속도였다. 세네라는 이름도 ‘세월아, 네월아 발달해 나간다.’라며 지호가 붙인 이름이었다. 이름의 유래를 떠올린 하란은 세네를 품에 안으며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얌전히 세네를 쓰다듬어준 하란은 다시 세네를 바닥에 놓고, 작업실 밖으로 달려 나가는 세네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스스로를 튜닝 해 나가는 프로그램은 성공적이라는 평가였다. 연구소는 10년 안에 인간형 로봇인 안드로이드에 이 프로그램을 탑재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내어놓았다.

판매 대상은 키우기에 편리한 ‘아이’를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아이를 원하는 독신자나 노부부부터 임신과 출산 그리고 귀찮은 양육 과정은 원치 않지만 애정을 쏟을 아이를 원하는 부부들까지 구매자는 다양했다.

지금은 디자인된 인체에 구매자가 원하는 옵션을 넣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탑재해 주고 있지만, 세네에게 탑재된 튜닝 프로그램이 개발되면 구매자는 진짜 인간을 기르는 기분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튜닝 프로그램은 주어진 자극에 일정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학습의 결과로 나타나는 다양한 반응은 자라나는 인간의 불확실함만큼이나 불확실했다. 때로 구매자가 원하지 않는 반응을 하며 엉뚱한 성격을 지닌 프로그램이 되어 버렸을 때, 구매자가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가장 문제였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하란의 몫이 아니라 다른 부서의 몫이었다.

하란은 마겐이 가끔 신이 된 기분을 느낀다는 작업실을 다시 둘러보았다. 근무 부서를 재배정 받은 뒤에는 이렇게 일부러 오지 않으면 마겐의 작업실에 들를 일이 없었다. 하란은 오랜만에 다시 느껴보는 창조의 에너지를 아쉬워하며, 창조의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마겐의 작업실을 나왔다.

작업실이 있는 5층 야외 테라스에서는 마겐과 지호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있던 두 사람은 작업실 쪽에서 걸어오는 하란을 보자 그녀의 몫으로 챙겨 두었던 샌드위치를 내밀었다.

“어서와.”

시원스럽게 웃은 마겐은 하란이 조금 수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진 않았다.

“프랑스어가 시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어. 지호, 이 친구가 어울리지 않게 그런 말을 꺼냈지 뭐야.”

“갑자기 프랑스어는 왜?”

“어제 옛날 드라마를 보는데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뭐야. 개와 늑대의 시간은 개와 늑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진 황혼 무렵을 가리키는 프랑스어라는 말. 묘하지 않아? 아군과 적군을 구분할 수 없는 혼란의 시간이라니 말이야. 그래서 내친 김에 검색을 해 봤더니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도 있지 뭐냐.”

“그건 뭔데?”

하란이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어허, 명색이 프로그래머인데 잡학에 능해야 다양한 데이터를 입력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지호가 장난스럽게 집게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그 왜 있잖아. 사람들이 한참 떠들다가 갑자기 일순 조용해져서 대화가 끊기는 시간. 그 시간이 바로 천사가 지나가는 시간이라는군.”

“천사를 빙자해 고독과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을 미화해 보려는 시도로 들리는데?”

“그렇다면 우리야 말로 천사를 파송해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로군.”

마겐이 특유의 큰 목소리로 껄껄 웃었다.

“우리가 만든 로봇이야말로 사람들의 고독과 외로움을 구원해 주잖아.”

“구원이 사라지면 지옥의 입구가 입을 벌리고?”

냉소적인 하란의 대꾸에 대화가 그쳤다. 어색한 불편함이 침묵으로 놓였다.

“아, 방금 천사님께서 지나가셨나 보군.”

마겐과 하란은 지호의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새로 옮긴 부서는 괜찮아?”

“그다지. 코드엔 익숙해도 사람엔 영 익숙하지가 않아. 프로그래밍 결과는 확실하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예측하기가 힘들어. 미칠 노릇이야.”

“혼자서 힘들겠군.”

마겐의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무거워졌다.

“응. 뭐,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하륜이 있으니까.”

“하륜? 아. 하륜. 맞아, 하륜이 있었지.”

지호가 샌드위치의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다.

“데이트는 자주 해?”

“아예 같이 살고 있는데 매일이 데이트지, 뭐.”

“아아, 좋군. 외롭지 않아서.”

지호가 하늘을 보며 낮게 허밍을 했다.

“난 요즘 개를 한 마리 기를까 싶기도 해.”

“잘도 기르겠다.”

마겐이 피식 웃었다.

“똥, 오줌 치우고 일일이 먹이 주는 일이 귀찮은 너 같은 인간을 위해 세네를 개발해 내라고 나한테 난리를 떨 때는 언제고.”

“난 요즘 체온이 그립다고. 바빠서 체온이 느껴지는 여자를 만들 시간이 없으니, 뭐.”

“항온 외피를 개발한 본인이 그딴 소리를 하는 걸 듣고 있자니 웃기군. 내가 잘 빠진 골격을 갖춘 여성형 로봇이라도 하나 만들어 주랴? 외피는 네가 붙이고, 네 취향의 성격은 하란이 프로그래밍해서 탑재해 주면되겠네.”

“요리사가 요리를 그냥 즐길 수 없듯이, 이 몸은 안드로이드를 그냥 즐길 수 없으셔. 항온 외피를 가진 안드로이드라는 걸 알고 안아봐라, 그냥 즐기게 되는가. 분명히 좀 더 편안한 온도는 지금보다 몇 도 이상이나 이하가 되어야 할 것 같고, 개선점은 뭐가 있고……. 이렇게 분석하고 있을 걸?”

세 사람이 마주보고 웃어대는 동안 점심시간 끝을 알리는 벨이 짧게 울었다. 하란은 일어설 준비를 하지 않고 마냥 태평인 두 남자를 보면서 탁자 위에 쌓인 쓰레기를 앞으로 밀어내고 일어섰다.

“나중에 봐.”

“잘 가.”

“잘 가.”

하란의 뒤에 남은 두 사람은 느긋하게 앉은 채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하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저 녀석, 부서를 옮기고 난 뒤에 확실히 말랐어.”

“그래, 확실히.”

아무리 본인의 요청이었다고 하지만, 연구소의 우수한 프로그래머를 고객센터 따위에 처박아 버리다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그 일은 하란의 탓이 아니라 사고였을 뿐이었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고객센터가 있는 층으로 내려오는 동안, 하란은 3개월 전에 일어난 사고를 다시 떠올렸다. 3개월 전, 부유한 구매자였던 한 늙은 남자가 자살했다. 원인은 남자가 구매해서 10년간 사용했던 안드로이드의 정지였다. 안드로이드를 수거한 연구소에서는 노화한 하드웨어가 문제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늙은 남자는 10년 동안 안드로이드의 본체를 정비하기는커녕, 정기적인 검사마저도 하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반려자로 삼을 목적으로 안드로이드를 구매한 사람들은 종종 벌이는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외피 아래의 하드웨어는 점점 노화되고 안드로이드의 수명은 줄어든다.

그러니까 3개월 전 늙은 남자의 안드로이드가 갑자기 멈춰버린 사건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만약 남자가 연구소로 바로 연락을 했다면 비슷한 사건들처럼 안드로이드는 하드웨어를 교체한 뒤 다시 늙은 남자의 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늙은 남자는 연구소에 연락하지 않았다.

현장을 조사했던 직원은 늙은 남자가 안드로이드를 살려보려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인공호흡과 심폐소생술을 했었는지, 안드로이드의 입술은 늙은 남자의 침 범벅이었고 흉곽의 철골이 휘어 있었다. 하지만 인간을 소생시키는 방법으로는 안드로이드를 살릴 수 없다. 안드로이드는 일어나지 못했고, 늙은 남자는 욕실로 들어가 손목을 그었다.

“노망기가 있었다고나 할까, 조금 착란 증세가 있었다고 합디다. 주치의에게 안드로이드를 진찰해 달라고 보채곤 해서 주치의가 곤란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현장 조사원이 덧붙였다. 충분한 설명이었지만, 하란은 완전히 납득할 수 없었다. 정기적인 검사도 빠뜨릴 정도로 소홀하게 안드로이드를 다룬 그 늙은 남자는 왜 안드로이드의 죽음을 보고 자살해 버렸을까.

“대체 왜 이렇게 굼뜨시는 거예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하란의 곁으로 하륜이 투덜대며 다가왔다.

“고객이 둘이나 와서 점심시간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뭐예요. 또 나만 두고 위층에서 지호 씨와 마겐 씨랑 데이트 한 거예요?”

“질투라도 하는 거야?”

하륜은 종알종알 잔소리를 해대며 하란을 따라가고 있었다.

“질투예요. 점심은 여기서 먹을 수도 있잖아요. 맛없는 매점 샌드위치 말고 진짜 맛있는 샌드위치를 싸와서 같이 먹으면 되는데.”

“너랑은 집에서 매일 밥 먹잖아.”

하란이 하륜에게 손을 내밀었다. 접수한 고객의 서류를 달라는 뜻이었다. 하륜은 여전히 투덜대며 서류를 건넸다.

“처음 온 고객은 부부예요. 육아용 안드로이드를 가져왔어요. 그리고 두 번째 고객은…….”

하륜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까다로운 고객이에요. 오이영 씨요. 알겠죠?”

“뭘?”

하란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하륜을 보았다. 하륜은 과장되게 한숨을 길게 쉬었다.

“연예인에 관심이 없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오이영이요, 오이영. 인기 여배우요.”

하란은 하륜을 무시하고 건네받은 서류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연구소에 근무한 지 십여 년이었다. 상세히 보지 않아도 모델명만 보면 고객이 가져온 안드로이드에 대한 데이터가 머릿속에 상세히 떠오른다. 하란은 문을 열고 데스크로 나갔다.

데스크가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부부는 하란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란은 데스크 건너편에 놓인 의자로 걸어오는 부부의 손을 잡은 안드로이드를 쳐다보았다. 약 15세 정도로 디자인된 본체였다. 두 부부의 얼굴 특징이 조화롭게 섞인 얼굴로 보아 몹시 고가에 팔린 안드로이드임이 분명했다. 이 정도로 공들여 디자인된 외피라면 기본 본체와 프로그램보다 옵션으로 딸린 외피가 두 배 이상 비싸다.

“어서 오세요. 뭘 도와드릴까요?”

“프로그램 오류를 수정 받으러 왔어요.”

아내 쪽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류인지 아닌지는 프로그래머가 검사할 일이다. 고객센터에서 고객이 말하는 프로그램 오류란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아.’의 다른 말이었다. 외피에 돈을 아끼지 않을 정도면 탑재된 프로그램도 맞춤형으로 제작되었을 것이 뻔했다. 까다로운 고객의 요구에 맞춰 일일이 프로그램을 손봐야 하는 프로그래머들의 노고를 아는 하란은 아내가 약간 밉살스러웠다.

“어떤 오류 말씀이신가요?”

‘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하란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말을 듣지 않아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말을 아주 잘 들었거든요. 몹시 사랑스럽고 예쁜 로봇이죠. 그런데 최근 들어서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요. 처음 주문할 때, 우리는 모범적이고 성적이 우수한 아들로 자랄 모델을 원했어요. 물론 운동 능력도 최상이길 바랐고요. 대체로 만족스럽긴 한데, 최근 들어서 좀 오작동을 하는군요. 공부에 소홀해졌고 학교에서도 소소한 사고를 쳐서 연락을 몇 번 받았어요. 최근엔 우리에게 대들기까지 하더군요.”

“그건 오류가 아닙니다.”

“네?”

이해할 수 없어진 아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사춘기일 뿐이에요.”

그 말에 남편 쪽이 크게 웃었다.

“이봐요. 이 녀석은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에요. 로봇에게 사춘기가 있다는 말입니까?”

“이 모델은 최고급 주문 맞춤형 모델이에요. 아이를 기르는 것과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디자인 되어 있죠. 지금 연령이 15세 정도니까, 사춘기 프로그램이 시작되었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고칠 수 있다는 말이군.”

남편이 하란의 말을 잘랐다.

“원하지 않으신다면 그 프로그램만 삭제하고 수정할 수 있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사춘기의 아이를 길러보는 경험은 하실 수가……”

“고쳐주쇼.”

남편이 다시 하란의 말을 싹둑 잘랐다.

“고치는 것이 아니라 수정하는 겁니다.”

남자의 무례함에 불쾌해진 하란이 점잖게 그의 말을 고쳐주었다.

“그거나 그거나.”

“아아, 제가 접수하죠.”

화가 난 하란의 눈치를 보며 하륜이 끼어들었다. 하륜은 소년의 스위치를 끄고 접수증을 작성한 뒤에 확인증을 부부에게 건네주었다.

“프로그램 수정은 사흘 정도 걸립니다. 연락드리죠. 그동안 오랜만에 두 분만의 시간을 즐기세요.”

싹싹하게 인사를 건넨 하륜은 돌아가는 부부에게 깍듯하게 허리까지 숙였다. 하란은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친절함이었다. 인간을 다루는 일은 늘 서툴렀다. 진심을 말하면 상처 입고,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면 인간미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 상대에게 맞춰 배려를 해야만 하는 고객 상담은 하란과는 절대 맞지 않았다.

“왜 그렇게 뻣뻣하세요? 오늘 고객은 모두 VIP라고요. 이러시다간 당장 연구소에서 해고해 버릴걸요?”

“못할 거야. 내가 없으면 세네랑 관련된 프로젝트에 차질이 많을 거니까.”

“프로그램실로 돌아갈 생각은 하고 계신 거네요? 다행이에요. 슬럼프 극복해서.”

“극복했다고 누가 그래?”

“그러면 극복하는 중이라고 해 둘게요.”

세륜이 상냥하게 웃었다.

“오이영 씨는 눈에 띄기 싫어서 VIP실에 있어요. 제가 가서 모시고 올게요.”

하란은 성큼성큼 걸어서 고객센터를 나가는 하륜을 보면서 덩그러니 로비에 멈춰 있는 소년 안드로이드를 곁에 세워진 운반용 수레에 실었다. 부부의 불만사항은 마케팅 부서에 상세히 보고할 작정이었다. 맞춤형 프로그램에 이렇게 불만이 제기될 정도라면 개발 중인 상향식 프로그램에는 더 많은 불만이 밀려들 수 있었다.

예측 불가능한 프로그램이 탑재된 안드로이드를 키우는 일이 어떤 사람에겐 진짜 인간을 키우는 것처럼 몹시 흥미진진한 일이겠지만, 오늘 방문한 부부 같은 사람들에겐 끔찍한 일일 수도.

부부 같은 사람이 더 많다면 상향식 프로그램이 탑재된 안드로이드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 하지만 마케팅 부서라면 어떻게든 알아서 하겠지. 하란은 안드로이드를 뒤편 창고 앞에 세우고 다시 데스크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자 화려한 오이영을 앞세운 하륜이 고객센터의 문을 열었다.

오이영은 경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른 고객이 없음을 확인하고 데스크로 곧장 다가왔다. 하지만 안드로이드는 오이영의 곁에 없었다.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내 안드로이드를 폐기처분해 주세요.”

“어? 정말이세요?”

하란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하륜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그 안드로이드는 어제 당신 목숨을 구했잖아요. 기사에서 봤어요. 목숨을 던져 연인을 구한 오이영의 남자. 멋지던걸요?”

“그게 문제죠. 누가 고의로 머리 위에서 집어던진 화분을 팔로 막으며 날 감싸서 구한 건 좋았지만, 화분에 직통으로 맞은 머리가 멀쩡한 인간이 있을 수 있나요? 매니저가 옷을 머리에 뒤집어씌우고 응급차를 불러서 안드로이드를 빼돌린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이 일이 매스컴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오이영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안드로이드를 연인으로 삼은 변태적인 여배우. 뭐, 그런 거겠네요.”

머리를 벅벅 긁는 하륜을 보며 오이영이 어이가 없는 얼굴로 웃어버렸다.

“하지만 5년 동안이나 아끼셨던 안드로이드 아닌가요? 소중하게 여기시니까 이런 일이라면 어떻게든 무마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능력이 좋으시잖아요.”

“그건 맞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요.”

추켜세우는 하륜의 말에 조금 기분이 좋아진 오이영이 다리를 꼬며 피식 웃었다.

“별로 소중하게 아끼신 것 같진 않은데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서류를 넘겨보던 하란이 오이영을 쳐다보았다.

“구입한 뒤로 정기 검사하러 한 번도 안 오셨네요.”

“당신은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을 숫자로 세요? 정기 검사하러 자주 오면 안드로이드를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이 백 점. 이런 거?”

“적어도 아끼셨다면 검사일에는 오셨어야죠. 요즘은 검사원을 파견해 주기도 해요. 전화 한 통이 그렇게 어렵진 않잖아요.”

“아껴서 그렇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오이영이 소리를 내며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꼈다는 생각이 별로 안 들어요.”

고객센터 직원 치고는 불친절하기 그지없는 태도였지만, 하란은 그냥 그렇게 밀고 나가기로 했다. 오이영은 그런 하란의 태도가 그다지 싫진 않았다. 가식적인 친절보다는 솔직함이 나았다.

“거기다가 소중하게 아꼈다면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쉽게 폐기처분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 같네요.”

“당신, 고객센터 직원 맞아요? 이렇게 불친절해도 되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긴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던 오이영이 창고 문 앞에 세워진 소년형 안드로이드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건 고장 났어요?”

“아뇨. 프로그램 수정 때문에 접수된 물건이에요.”

“물건이라.”

오이영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알만하군요. 누가 주인인지 모르지만 데리고 있다가 뭔가 입맛에 맞지 않으니까 고장 났다면서 고쳐 달라고 왔겠죠. 친구 중에도 있어요. 처음엔 귀여워하다가 지겨워지면 고장 났다는 핑계를 대면서 프로그램과 외피를 싹 바꾸는 그런 애들. 난 적어도 그런 짓은 안 했죠. 5년간이나. 대단하지 않아요?”

‘그렇지만 아예 폐기처분하러 왔지.’ 하란은 헛기침을 하며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처음 데려왔을 때는 어색하기만 했는데,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오이영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란은 길어지려는 오이영의 말을 잘라버릴까 했지만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차피 기다리는 고객도 없었고, 오이영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내 입맛에 딱 맞는 남자였어요. 내가 어떻게 굴든 절대로 마음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그 점이 최고였어요. 날 외롭게 만들지도 않을 테고, 언제나 내 독차지였죠. 마음을 맡겨도 안심이 되는 인간 따위는 세상에 없으니까, 당신들은 정말 굉장한 일을 하고 있어요. 안심하고 마음을 맡겨도 되는 인간처럼 느껴지는 로봇을 만들고 있으니.”

대사를 하듯 오이영이 말했다. 하란은 오이영의 인기가 화려한 외모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오이영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상 혼자이지도 외롭지도 않았고 나는 외로움에서 구원 받았어요. 그런 시간이 영원히 이어지길 바랐어요. 하지만 슬프게도 영원한 시간이란, 언젠가 죽게 되어 있는 인간에겐 있을 수가 없죠.”

오이영이 빙그레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당신 마음이 변했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폐기처분을 하겠다는?”

“그런 뜻일 수도 있겠죠.”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씀해 주시겠어요? 난 이공계 출신이라서 그런 은유적인 표현은 잘 이해를 못하겠네요.”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