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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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자의 노호가 광야를 진동하고
맹진하는 거목이 보답할 증오를 약속하는
그리고 그런 것들에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고대의 전설이 살아 춤추는 시대에

한 남자가 숲속을 걷고 있었다.

* * *

1

오라비가 찾아왔다. 돌아온 지 이틀 만이다. 들어서자마자 대뜸 절을 올리기에 눈살을 찌푸리고 물었다.

“뭘 하는 겁니까?”

“신은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폐하. 부디 강녕하십시오.”

“떠난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오라비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 그 말뜻을 깨달았다. 헛웃음이 났다.

이것이 오라비의 답인가. 왕족의 의무를 등한시한 채 적의 입장을 대변하고, 전사의 본분을 망각한 채 화친을 부르짖고, 아무도 제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자 모든 도리와 책임을 외면하며 도망치는 것이 오라비가 내린 선택이란 말인가.

나약하고 비겁한 자. 이런 자를 한때 오라비랍시며 따른 내 어린 나날에조차 경멸을 느낀다.

“그래. 가.”

그에게 차갑게 말했다.

“그렇게 떠나. 우리의 어머니가 물려준 나라를, 영웅왕이 세우고 선조들이 갈고 닦은 나라를, 우리의 백성이 피를 흘리며 지킨 나라를, 겁난다고 동생인 내게 떠맡긴 이 나라를! 나 혼자 아등바등 붙들게 내버려두고 마음대로 가. 도망쳐서 세상일에 눈감고 귀 막고 평화롭게 살아. 대신 다시는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왕으로서 내가 오라버니에게 무슨 명령을 내릴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오라비는 말없이 물러갔다. 영민한 전사 하나가 그를 따라가 감시하오리까 물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답했다.

―전란 중에 소실되어 현전하지 않는, 현대어로 번역된 극연왕의 436년 기록 中

* * *

천지를 까맣게 뒤덮은 비구름이 남쪽에서 서서히 올라와 마침내 숲의 머리 위로도 손길을 뻗쳤다. 쏴아아아……. 무성한 잎사귀를 방패처럼 치켜든 나무들은 잠시 저항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잎을 떨며 하나둘씩 빗방울을 아래로 흘려보냈다. 나뭇가지와 풀잎, 흙, 바위, 물웅덩이를 퉁기는 빗방울 소리는 무규칙성에 담긴 거대한 규칙을 노래하는 가야금 연주 같다.

빗방울은 사냥꾼의 어깨와 손등, 콧잔등 위로도 떨어졌다. 사냥꾼은 당황하지 않았다. 예상한 비였기 때문이다. 숲의 지붕이 얼마나 튼튼한지 익히 아는 사냥꾼은 이 정도 양의 비는 자신의 행로를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고, 따라서 성긴 빗방울이 자신의 어깨와 손등, 콧잔등을 적시도록 내버려둔 채 숲속의 한 지점을 주시했다. 광활한 규모로 하늘을 점령한 비구름이 숲에 설익은 밤을 선사했지만 사냥꾼의 밝은 눈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희끄무레한 인영을 알아보았다. 사냥꾼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서는 어떤 인간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 깊은 숲은 인적이 드문 편이다. 길이 험준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없으며, 맹수의 출몰이 잦은 탓에 나무꾼들도 들어오기를 꺼린다. 간혹 타지에서 사냥꾼이 흘러들어오는 일은 있지만 남자의 행색은 어떻게 보아도 사냥꾼의 그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냥꾼도 활이나 창 대신 일 미터가 족히 넘는 대검을 땅에 끌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검사라도 그러지는 않는다. 날붙이 무기를 그런 식으로 다뤘다가는 얼마 안 가 새 무기를 구해야 할 테지만, 남자는 칼날이 상하는 것쯤은 개의치 않는 태도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올바른 무기 관리법 같은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남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먼발치에서 남자를 처음 발견했을 때, 사냥꾼은 남자가 길을 잃고 숲속으로 잘못 들어온 여행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강도를 만난 후 길을 잃은 여행자가 아닌가 의심했다. 남자는 그 커다란 칼 외에 여행에 필요한 소지품이라고는 일체 지니지 않은 듯 보였다. 이 근방에는 강도가 없으니, 남자가 강도를 당했다면 꽤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지치고 느린 걸음걸이였지만 남자는 멈추거나 두리번거리는 법 없이 꾸준히 숲 안쪽으로 들어왔고, 깊고 어두운 숲을 혼자 헤맨다는 사실에 겁먹은 것 같지는 않았다. 사냥꾼은 남자가 좀 더 겁내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머잖아 진짜 밤이 찾아오면 칠흑 같은 어둠이 숲을 뒤덮을 것이다. 한밤중에 혼자 맹수를 맞닥뜨리면 검을 제대로 들 힘도 없는 남자는 무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냥꾼은 망설였다. 다른 사람 일에 간섭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은 사냥꾼과 거리가 멀었고, 사냥꾼의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남자를 두고 떠나기에는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결국 사냥꾼은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사냥꾼은 남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여긴 외지인이 혼자 다닐 만한 곳이 아닌데.”

사냥꾼은 남자가 두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쥐며 칼을 끌어당기는 것을 보았다. 사냥꾼의 차림새를 살핀 남자는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안심한 것 같았다.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그 음성은 비교적 차분했다.

“당신은 아마도 키탈저 사냥꾼이겠군요.”

사냥꾼은 눈썹을 치켰다.

“기다렸다는 투로 들리는군.”

“당신들을 만나기 위해 왔습니다.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지만.”

“우리를 왜?”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칼자루를 쥔 손에 다시 힘이 들어갔지만 공격 의사의 표현이 아니라 망설임의 표현인 것 같았다.

가까이에서 상대를 관찰한 사냥꾼은 남자가 고급스러운 의복을 입었다는 것, 그러나 의복의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볼썽사나운 몰골을 하고 있다는 것, 곳곳에 핏자국이 배어 있다는 것 등을 깨달았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피 냄새가 착각이 아님을 안 사냥꾼은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한참을 주저하던 남자가 어렵게 말문을 떼었다.

“당신들의 일원이 되고 싶습니다.”

남자는 눈을 들어 사냥꾼을 보았다.

“방법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냥꾼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우린 외부인과 잘 어울리는 사람들은 아닌데.”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온 겁니다.”

남자가 고개를 조금 떨어뜨렸다. 남자의 얼굴에 미약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미소였다.

“……달리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사냥꾼이 한 손을 펴 보였다. 손짓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남자가 어리둥절해하자 사냥꾼이 설명했다.

“미안하지만 무기를 든 사람을 등 뒤에 매달고 마을에 갈 수는 없어. 당신도 이해하겠지.”

“무슨…… 날 당신들의 마을로 데려간다는 말입니까?”

“혼자 결정할 문제는 아니니까.”

남자는 사냥꾼의 말을 이해했다. 그러나 남자는 검을 넘겨주는 대신 주저했다. 사냥꾼이 한결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마을에 도착하면 돌려준다고 약속하겠어. 상대의 신뢰를 얻으려면 먼저 신뢰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인가?”

짧지 않은 시간을 지체한 후 남자는 사냥꾼에게 다가가 칼자루 방향으로 칼을 내밀었다. 어쨌든 남자는 어려운 부탁을 하는 입장이었고 사냥꾼의 지적은 정당했다. 쌍신검은 크기만큼이나 무게도 상당했지만, 사냥꾼은 어렵잖게 한 손으로 갈무리하고는 남자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엔 남자도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능숙하게 숲을 타는 사냥꾼의 뒤를 따르며 남자는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사냥꾼은 남자에게 이름이나 신원을 묻지 않았다. 남자는 물으려던 말 대신에 다른 질문을 꺼냈다.

“나는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됩니까?”

앞장서던 사냥꾼은 남자를 돌아보지 않은 채 짤막하게 대답했다.

“여름.”

* * *

키탈저 사냥꾼 마을은 키탈저 숲에 위치한다. 그 사실은 키탈저 사냥꾼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널리 알려져 있지만, 외지인이 마을을 찾아가기는 쉽지 않다. 숲이 넓고 험한 데다가 마을은 숲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해 찾아가려고 해도 길을 잃기 십상이다. 물론 외지인을 살갑게 맞는 마을이 아닌 까닭에 찾아가려는 이가 많지는 않다. 마을 밖의 사람과 접촉할 때는 주로 키탈저 사냥꾼이 그들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오랜 세월 숲속에서 살아온 키탈저 사냥꾼들은 상당 수준의 자립적인 생활을 영위했지만 마을 외부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해 쓰는 일은 있었고, 사냥꾼들은 고기나 가죽, 질 좋은 수렵 도구를 팔러 나가곤 했다. 때로는 사냥이라는 용역 자체도.

사냥꾼 여름이 남자를 데려간 곳은 바로 그 마을이었다. 남자가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한 것이 분명했기에 사냥꾼들은 남자에게 먹을 것과 쉴 자리를 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들에게도 논의할 시간은 필요했다. 그늘진 곳에 혼자 앉아 모닥불로 몸을 말리며 남자는 이따금 우울한 눈을 들어 마을 중앙에 둘러 모인 사냥꾼들을 보았다. 거리가 떨어져 있어 남자가 있는 곳에서는 그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자에게 검을 돌려준 여름 또한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좀 찜찜합니다.”

젊은 남자 사냥꾼이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저 자가 진실을 말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왕자를 죽이고 검을 빼앗은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강도가 저런 옷을 입는다고?”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지요. 어쩌면 저 검이 위조품인지도 모르고요. 제 말은, 거짓을 말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이야기가 너무 황당하잖아요.”

“거짓은 아닐 거야.”

남자를 데려온 경위를 설명한 이후 줄곧 침묵을 지키던 여름이 입을 열었다.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면 보다 그럴싸한, 우리의 호감과 신뢰를 얻기 쉬운 이야기를 들려주었겠지. 영웅왕의 검을 훔쳐 나가들에게 바치려고 했다는 황당한 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젊은 남자 사냥꾼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참석자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말했다.

“여름. 너는 저 자의 요청을 듣고 이곳으로 데려왔지. 그건 네가 저 자를 받아들이는 것에 찬성한다는 뜻이겠지?”

“물론 그래요.”

“삼가 이유를 듣고 싶군.”

여름은 무표정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황상 저 자의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왕궁에서 젊은 왕자가 사라졌다는 소문은 돌고 있었고, 나이로 보나 차림새로 보나 저 남자는 조건과 일치하죠. 영웅왕의 검이 함께 사라졌다는 소문은 듣지 못했지만, 그야 왕궁에서 함구했을 겁니다. 저잣거리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까. 만약 왕자가 아닌 자가 바라기를 손에 넣었다면, 바라기의 위조품이라고 해도 마찬가진데, 장물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왕궁에 돌려주고 보수를 받거나, 암거래상과 흥정하거나, 저 자의 말마따나 나가들에게 팔아넘기거나, 이도저도 아니라면 기로틴 이후로 도전하는 자가 없었다는 반란군의 수뇌가 되는 것입니다. 숲을 헤매거나 키탈저 사냥꾼의 일원이 되는 것은, 세간의 눈을 피해 숨어 살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아무 이득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결정해야 하는 것은 도망친 왕자를 받아들일지의 여부지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게 뭐지?”

“우리가 그를 받아들인다면, 역사상 처음으로 드라카와 케이건이 손을 잡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죠.”

좌중이 침묵했다. 참석자들 중 드라카와 케이건이 암시하는 바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가 미심쩍은 투로 말했다.

“달아난 흑사자를 흑사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두고 보면 알게 되겠죠. 흑사자가 아니라면 얘기는 더 간단해요. 갈 곳 없는 사람을 거두고 사냥꾼 하나를 얻는 거니까.”

“만일 불순한 의도로 우리에게 접근한 거라면?”

“그것도 두고 보면 알겠지만, 그땐 우리 방식으로 처결하면 돼. 도망자 신세인 왕자가 우리에게 어떤 위해를 끼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쎄. 왕자라면 왕궁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 사람과 검 모두 찾고 있을 텐데.”

“저도 그 생각을 해봤죠.”

여름이 빙그레 웃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무언가를 내어주고 싶지는 않더군요.”

여름의 의도가 분명해졌다. 여름은 아라짓 왕가와의 화합 가능성을 제시하는 동시에 키탈저 사냥꾼의 오만함을 지킬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 둘은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순은 그들이 숭상하는 힘이기도 하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회의석상을 둘러보았다.

“여름의 의견에 더 이견을 말할 사람이 있나?”

참석자들은 공감하거나 생각하는 표정, 또는 회의가 빨리 끝나길 바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반대 의사를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기다리던 우두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정되었군.”

모닥불을 쬐고 있던 남자는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여름과 함께 다른 사냥꾼 하나가 남자 앞에 멈춰 섰다. 회의를 주재했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였다. 여름은 당신이 하라는 듯한 얼굴로 우두머리 사냥꾼을 쳐다보았다. 우두머리 사냥꾼이 걸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젤키버다. 수장을 맡고 있지.”

짧게 자신을 소개한 아젤키버는 역시 간결한 어조로 남자에게 회의 결과를 전했다.

“용의 자손이 된 것을 환영하네.”

* * *

2

여전히 바라기를 찾지 못했다. 오라비 또한. 수색대를 지휘한 전사는 송구스러워하며, 왕자가 변복을 하여 숨어 지내리라고 짐작된다는 보고를 해 왔다. 그야 그럴 것이다. 오라비는 순진하지만 우둔하지는 않으니까. 지상 유일의 왕이요, 저 용맹한 전사들을 거느리고도 사람 하나를 찾아내지 못하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도 든다.

수색이 어려움을 겪는 데엔 바라기나 오라비를 공공연히 찾을 수 없다는 까닭도 있다. 조신들 사이에서는 영웅왕의 검을 훔쳐 달아난 왕자에게 반역죄를 물어 공개 수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왕자가 나라를 배신했다는 추문이 널리 퍼진다면 왕실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물론, 전사들의 사기가 꺾이고 민심이 동요할 것이다. 어느 틈에 적이 침공해 올지 모르는 이때에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다. 전날 전사의 말대로 그를 감시했어야 했으리라. 일찍이 사도의 간언대로 그를 유폐시켰어야 옳았으리라. 모두 뒤늦은 후회다.

일몰 무렵 전령이 달려와 전선의 위급함을 알렸다. 적이 근래에 보지 못했던 대군을 이끌고 올라와 남쪽의 도시 세 곳을 위협한다고 했다. 어리석은 오라비도 오라비거니와, 저 비늘 덮인 괴물들이 아니었다면 이같은 일은 애당초 벌어지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니 새삼 괘씸하게 여겨졌다. 장수들을 불러 모아 명을 내렸다.

“상장군은 선발대를 이끌고 가 다급한 곳을 도우라. 짐은 대장군과 함께 친정하겠다.”

어마마마도, 아바마마도, 하나뿐인 형제마저 나를 떠나간 지금, 내게 남은 것은 나와 함께 싸우는 전사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싸워야 할 적뿐이다. 영웅왕의 검은 내 손에 없으나 나와 생사를 같이 해온 아라짓 전사들은 나를 따르리라.

“목표는 구원이 아니라 말살이다.”

―전란 중에 소실되어 현전하지 않는, 현대어로 번역된 극연왕의 436년 기록 中

* * *

왕자는 토끼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자가 토끼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왕실에도 사냥터는 있었으니까. 토끼는 섭식 행위에 매진하느라 열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왕자를 발견하지 못했고, 따라서 토끼를 잡으려면 지금 행동에 나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산 비탈면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는 왕자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사냥이라기보다 감상 같군요.”

목소리에 놀란 토끼가 식사를 중단하고 풀숲으로 뛰어들어 모습을 감췄다. 왕자는 딱히 원망하는 기색 없이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언제 왔습니까? 여름.”

“토끼가 점심을 들기 시작했을 때요.”

거의 처음부터 지켜보았다는 뜻이다. 여름은 왕자를 흉내 내듯 비탈면에 나란히 주저앉았다.

“케이건은 모두 전사라고 들었는데. 왕자님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군요.”

왕자는 전사답지 않다는 말에 화를 내지는 않았다. 여름이 지적한 것은 지난 며칠 동안 왕자가 보인 태도였다.

“싸움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나 자신의 죽음 또한.”

“남에게 죽음을 안겨 주는 것은?”

왕자가 여름을 보았다. 여름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젤키버가 그러던데요. 당신은 솜씨에 대한 자신은 있지만, 그 솜씨를 활용해 무언가를 죽이는 일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왕자는 발치에 돋아 있는 토끼풀로 시선을 보냈다.

“아젤키버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 아닐 겁니다. 나는 무슨 이타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잠깐 닫혔던 왕자의 입이 갑작스레 다시 열렸다. 왕자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상대를 죽일 생각에 골몰하다 보면 내 시간의 중심이 상대방이 되고 맙니다. 상대를 죽이기 전까지는 나도 편안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 자신은 사라지고 상대방을 향한 분노와 증오만이 나를 대변합니다. 나는 증오에 매몰되어 나를 잃는 것이 싫습니다. 살생에 소극적인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이유지요.”

여름은 왕자의 옆얼굴을 빤히 보았다. 전해 들은 것이 전부지만 여름은 왕자가 누구를 이야기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전사들의 방식인가요?”

왕자는 맥없이 웃었다.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봅니다.”

무릎을 감싼 팔에 뺨을 붙이고 왕자를 보던 여름이 다시 앞을 보았다.

“난 전사들의 방식은 잘 모르겠군요. 내가 아는 건 사냥꾼의 방식뿐입니다. 사냥꾼이 짐승을 사냥하는 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지요. 어떤 이들은 농사를 짓고 어떤 이들은 옷을 만드는 것처럼 우리에겐 사냥이 그렇죠. 내가 연장한 삶이 내가 죽인 짐승들의 피를 대가로 얻어낸 것이라도 어쩔 수 없어요. 모든 생물은 피를 마시며 살아가니까.”

“네 마리 새의 이야기군요.”

“그 이야기를 알아요?”

왕자는 짧게 대답했다.

“들은 적 있습니다.”

“뭐, 그런 얘기죠.”

여름은 무심한 동작으로 풀을 뜯었다. 왕자는 사냥꾼의 손에 휘감기는 풀들을 바라보았다.

“사냥에도 복수심이 개입할 때가 있지요. 대호 사냥이 그렇죠. 산노인은 다른 짐승들과는 좀 달라요. 사람을 습격하는 일도 빈번하고, 숲에 사는 다른 짐승들을 독차지하기 일쑤이니 사냥꾼에겐 숙적 같은 존재지요. 가족과 동료를 죽인 원수가 되기도 하고. 우리도 그 원한은 결코 잊지 않아요. 하지만 어느 때라도 그 중심은 ‘나’여야 하죠. 내가 살아가기 위해 피를 마시는 거죠. 피를 마시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별비의 간을 먹지 못했다면 나도 이런 말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여름이 담담한 어조로 말한 탓에 왕자는 알아차리는 것이 조금 늦었다. 왕자가 고개를 들고 여름을 보았다.

“별비라고 했습니까? 자보로의 성벽을 뛰어넘은 그 대호 별비?”

“그래요. 그 대호 별비.”

“그럼 당신도…….”

왕자의 말꼬리가 사그라들었다. 키탈저 사냥꾼들이 별비를 하모리 마립간에게 바친 것은 벌써 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다. 가족이 별비에 의해 죽었다면 여름이 꽤 어릴 때였을 것이다. 왕자가 머뭇거린 까닭을 짐작한 여름이 말했다.

“아홉 살이었어요. 가족을 모두 잃었을 때 내 나이가. 지금은 가족들 얼굴도 희미하지만 그땐 달랐겠지요. 별비에게 가족들을 빼앗긴 사람은 적지 않았고, 주위의 모든 사냥꾼이 별비에게 복수할 것을 꿈꾸고 있었어요. 물론 그동안 별비만 쫓았던 것은 아니지만, 오십 여 년 동안 쌓인 원한은 깊었지요.”

여름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름의 눈은 과거의 어느 시간을 바라보는 듯했다.

“놈이 죽었을 때 나는 열두 살이었어요. 날 빼고 의식을 치르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친 듯이 화가 나더군요. 놈의 간을 먹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생각했죠. 그 순간엔 내 생이 단 하나의 의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어요. 결국 어른들을 설득해 나도 의식에 참가했죠.”

여름이 침묵했다. 손으로는 계속해서 풀들을 무심히 뒤적이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던 왕자가 물었다.

“어땠습니까?”

여름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왕자를 보았다. 눈을 한 번 깜박인 여름은 다음 순간 피식 웃어서 왕자를 놀라게 했다.

“사실 맛은 별로 기억나지 않아요. 뭔가 기막힌 복수의 맛 같은 것이 날 줄 알았는데, 집에서 늘상 먹던 것이랑 다름없었어요. 시시했지요.”

왕자는 멍하니, 별비가 이 말을 들으면 섭섭해 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상대는 반백 년 동안 자보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고 온 왕국에 위엄을 떨친 대호다. 여름은 바람이 흐트러뜨리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모르지요. 내가 직접 별비를 잡은 게 아니라서 그럴지도. 아니, 복수든 뭐든 날로 먹는 간이 맛있어 봐야 사실은 거기서 거기겠죠. 그래도 한동안은 왠지 억울해서 오 년, 아니 삼 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도 나도 별비 사냥에 참가했을 텐데 생각했어요. 삼 년 뒤엔 별비 같은 대호를 쓰러뜨려면 얼마나 노련한 사냥꾼이어야 하는지, 또 그런 대호를 맞닥뜨리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내 손으로 대호를 잡을 기회가 오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겠군요. 별비에 대한 복수심 같은 건 아니에요. 레콘들의 표현을 빌리면 숙원 같은 거죠. 사냥꾼들의 숙원.”

문득 여름이 왕자를 돌아보았다.

“어때요? 싸움이나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대호를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왕자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대호에게 이길 자신이라면 물론 없습니다. 대호를 본 적도 없고. 하지만……”

“하지만?”

왕자는 토끼가 사라진 수풀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토끼보다 무섭진 않을 것 같군요.”

여름은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감은 과연 대단하군요. 뭐, 의기소침한 것보단 낫지.”

자리에서 일어난 여름이 손을 툭툭 털었다.

“산노인은 우리도 만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놈은 아니지만……”

여름은 왕자를 내려다보며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그 자신감으로 뭘 상대할 수 있는지 한번 볼까요? 토끼가 무서운 왕자님.”

* * *

키탈저 숲의 드넓은 하늘이 석양으로 물들었다. 여름과 왕자는 나무 사이로 미끄러지는 황금빛 햇살을 받으며 산을 내려왔다. 두 사람은 죽은 토끼 두 마리와 꿩 한 마리를 각각 손에 들거나 어깨에 들쳐 매고 밧줄로 연결한 멧돼지 한 마리를 땅에 끌며 운반하고 있었다.

“……검이라면 아젤키버와 의논해 봐요. 그 사람, 젊은 시절엔 검술깨나 했다고 하니까. 난 단검만 써서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군요.”

왕자에게 말하던 여름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왕자는 여름의 눈길이 향하는 곳을 보았다. 그곳에는 원추리가 군락을 이루며 피어 있었다. 여름이 멈춰 선 것을 해명하듯 말했다.

“제일 좋아하는 꽃이죠.”

여름은 원추리가 모인 곳으로 다가갔다. 멧돼지를 연결한 밧줄의 길이는 넉넉했지만, 왕자도 여름을 따라갔다.

“원추리는 한 송이가 하루 동안만 피어요. 아침에 개화해서 밤에 시드는데, 이때 꼭지도 함께 떨어져요. 그리고 다음날엔 다른 꼭지에서 새로운 꽃을 피우죠. 그러니 나는 날마다 이곳에 오더라도 매일 이 꽃을 처음 만나는 셈이지요.”

여름의 말대로 왕자는 원추리 줄기에서 꼭지가 잘린 흔적들을 볼 수 있었다. 원추리 한 송이를 꺾은 여름은 왕자에게 꽃을 내밀었다.

“한 번 맡아볼래요? 향기도 좋아요.”

왕자는 얼떨결에 꽃을 받아 들었다. 여름은 느슨해진 밧줄을 고쳐 쥐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의 뒷모습을 보던 왕자가 사냥꾼의 등을 향해 말했다.

“고맙습니다. 여름.”

여름이 우뚝 멈춰 섰다. 왕자는 꽃에 대한 감사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신이 다른 이들을 설득해 날 받아주었다고 들었습니다. 애초에 날 데려와 준 사람도 당신이고. 아직 인사도 제대로 못 했군요. 당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름은 왕자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훨씬 낫군요.”

“네?”

“첫날엔 다 죽어 가는 얼굴이더니, 이젠 좀 산 사람 같군요. 보기 좋네요.”

왕자는 말문이 막혔다. 여름이 계속 말했다.

“나도 처음입니다. 짐승을 죽이기만 했지, 사람을 살려본 건.”

듣기에 따라선 섬뜩한 말이지만 왕자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노을빛에 잠긴 여름의 얼굴은 거의 다정했다.

“기분이 썩 괜찮군요. 이 다음에 또 해볼 만하겠어요. 인사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지만, 감사는 잘 받겠어요. 어디에 쓸지는 차차 생각해 보지요.”

마지막 말은 여름이 발걸음을 옮길 때 들렸다. 말끝에 묻은 웃음기를 깨달은 왕자는 여름이 농담을 했음을 알았다. 왕자는 여름의 그런 목소리를 처음 듣는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키탈저 사냥꾼은 농담을 즐기는 자들은 아니었다.

여름을 뒤따르던 왕자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날 왕자라고 부를 겁니까?”

“왕자님 맞잖아요?”

“첫날엔 그렇게 안 불렀잖아요.”

“그땐 몰랐으니까요.”

왕자는 그 대답에 수긍하기 어려웠다. 첫날 여름이 보인 태도는 모르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왕자가 그 점을 지적하기 전에 여름이 먼저 물었다.

“그러는 왕자님은 왜 나나 우기스, 라이암, 잔키에르에게도 말을 높이죠? 같은 사냥꾼이고, 나이도 서로 비슷한데.”

“그야 난 외부에서 온 사람이고 아직 당신들을 잘 모르니까…….”

자신의 말 속에 답이 있다는 걸 깨달은 왕자는 말을 멈췄다. 여름은 빙그레 웃었다.

“가죠. 사람들이 기다리겠어요.”

여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왕자는 손에 들린 꽃을 얼굴에 가까이 가져왔다. 원추리에서는 여름해 같은 향기가 났다.

* * *

3

방 안에 불그림자가 너울거렸다.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계승을…… 하지 않겠다고요?”

“그래.”

“왜?”

“나는 원하지 않아. 내게 어울리지도 않고.”

“원하지 않아서 내게 넘겨준다는 겁니까? 왕위를?”

“원하지 않는 건 내가 받지 않는 이유지. 네게 권하는 것은 네게 왕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아라짓의 왕은 곧 나의 왕이다. 아무에게나 권하지는 않아.”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왕의 자질이 무엇인지 물었다. 오라버니는 엉뚱하게도 어린 시절 어마마마께서 들려주신 키탈저 사냥꾼들의 옛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설명이란 것이 막연하여 들어도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겁니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그럼 오라버니는 눈물을 마실 줄 모르오?”

“네가 보기엔 어떻지?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대답하지 않았다. 오라버니는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왕에 어울리지 않아. 나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보면 함께 울 뿐이야. 아니면 울지 않기 위해 눈물을 외면하거나. 그런 자가 다스리면 왕국은 침몰하거나 방치되겠지. 왕국을 그런 꼴로 만들 수는 없어.”

그러나 나는 갓 성년식을 치렀지 않은가. 오라버니에겐 4년의 시간이 더 있었다.

“나와 같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소.”

“모든 역사에는 처음이 있지.”

“그만큼 내 경험이 부족하다는 뜻도 되잖습니까?”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쌓이게 마련이야. 네가 필요하다고 하면, 나도 옆에서 돕겠다.”

불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얼굴로 오라버니가 조용히 물었다. 너는,

“왕위를 원하지 않니?”

나도 모르게 주먹을 힘있게 쥐었다.

“원하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초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허나 내가 왕위를 잇겠다 해도 사람들이 따르겠습니까? 최우선 계승권은 오라버니에게 있는데요.”

“네 말대로 계승권은 내가 너보다 높지만, 그런 사람도 나뿐이지. 내가 나서서 추대하면 반대의 목소리가 힘을 얻긴 어려울 거다. 네 총명함과 용맹을 모르는 이도 왕궁에 없고.”

“힘을 얻지 못하는 반대의 목소리는 어떻게 합니까?”

“하인샤 대사원에 이 일을 미리 의논해 두었다. 네가 왕위를 계승하겠다고 하면, 대사원에서 널 지지할 거야.”

막힘없는 대답에 오라버니가 이 일을 오래 생각해 왔음을 알았다.

심장 고동이 빨라졌다. 왕녀로 태어나 왕위를 꿈꿔 보지 않은 자가 있으랴. 정당한 계승권자로서 선대의 유산을 물려받아 더욱 훌륭하게 가꾸는 것을 상상해 보지 않은 자가 있으랴. 그러나 나는 장손이 아니며 그 지위를 구태여 바라지는 않았다. 온유한 성정을 염려했지만 오라버니가 부적격하다고까지는 여기지 않았다.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욕심 내지 않았던 왕좌가 돌연 손을 내밀면 쥐어질 거리에 다가와 있었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오라버니가 물었다.

“왕위를 수락하겠느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대답은 쉽게 나왔다.

“수락하오.”

오라버니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어마마마의 뒤를 잇겠소.”

가만히 보던 오라버니가 이윽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오라버니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럼, 돌아가 폐하의 대관식을 준비하겠습니다.”

내게 신하로서 경배한 첫 아라짓 전사였다.

―전란 중에 소실되어 현전하지 않는, 현대어로 번역된 극연왕의 434년 기록 中

* * *

시간이 만인에게 공평하다는 말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들어보았을 금언으로 취급되지만, 그러나 만인의 공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공평하다는 말에는 함정이 숨어 있다. 대개 그 말은 시간이라는 자원, 즉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만인에게 똑같이 주어진다는 뜻으로 쓰인다. 하지만 물리적 시간이 똑같이 주어지더라도 주어진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는 시간 외에 다른 자원도 개입한다. 감옥에 갇힌 인간 죄수의 3년과 세계 지도 제작을 숙원으로 삼은 레콘 여행자의 3년은 같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왕자를 바꾼 것은 3년이라는 시간과 거친 숲, 비내음을 품은 바람, 노을을 머금은 꽃잎, 타고난 신체 조건과 전사로서 받아온 훈련, 주변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그 안에서 그가 내린 선택들 따위의 총합이다. 3년 뒤, 왕자는 제법 단단한 사냥꾼이 되어 있었다. 또한 왕자로서의 면모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과거를 짐작케 하는 흔적은 별명처럼 붙은 케이건이라는 이름과 여전히 그의 손에 있는 바라기뿐이었다.

케이건은 바라기를 차츰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사냥에 필요했기 때문은 아니다. 대검은 사냥에 적합한 도구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바라기는 인간을 위해 설계된 도구도 아니다. 해바라기와 달바라기는 각각 한 손용 검이었지만 그 한 손은 레콘의 한 손이었고, 둘을 합친 바라기 역시 레콘에게 알맞은 것이었다. 바라기의 크기와 무게, 독특한 형태로 인해 인간 왕들은 대대로 영웅왕의 검을 살상용 무기라기보다는 상징적인 보물로 간주해 왔다. 그러나 케이건은 다른 사냥 도구들과 함께 바라기 사용법 또한 익혔고, 거기에 더해 바라기를 등에 거는 착용구를 만들어 늘 지닐 수 있도록 했다. 케이건의 태도에서 어떤 이는 검사로서의 자부심이나 왕족의 자존심,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미련, 장물에 대한 도둑의 집착 같은 것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젤키버의 조언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쌍신검의 특수성 때문에 케이건은 바라기 사용법을 대부분 혼자서 터득해야 했다. 방해물이 적은 공터에서 바라기를 베거나 휘두르는 케이건과, 그런 케이건 주변에서 사냥 도구를 손질하는 여름의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다.

그날도 여름과 케이건은 풀밭에 앉아 등을 맞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푸른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져 내렸고 두 사람 옆에는 그날의 일과를 마친 바라기와 활과 전통이 풀들 사이에 지친 몸을 뉘고 있었다. 별자리를 감상하던 여름이 주문했다.

“그 노래 불러 봐.”

케이건은 ‘그 노래’가 무슨 노래냐고 묻지 않았다. 케이건은 고개를 조금 돌려 여름을 보았다.

“그다지 밝은 노래는 아닌데.”

“그 노래를 부를 때 네 목소리가 듣기 좋아.”

케이건은 시선을 바로했다. 케이건은 이미 수십 번 했던 것처럼 별과 나무와 바위와 등 뒤에 앉은 한 사람을 청중 삼아 노래를 불렀다. 옛 전사가 부르는 아라짓 전사의 노래를 들으며 여름은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느리게 두드렸다.

그러나 케이건의 노래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여름도 노래를 멈춘 케이건을 재촉하지 않았다. 어느 새 여름의 손가락도 움직임이 멎어 있었다. 대신 두 사람의 손끝이 닿았다. 여름은 별에게 고백하는 바람 같은 어조로 말했다.

“밤마다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네 노래.”

‘지금도 언제든 불러주잖아’ 같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은 케이건이 자신의 말뜻을 이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흘끔 뒤를 돌아보자 별빛 아래에 드러난 케이건의 목덜미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여름은 자신도 귀 밑이 뜨거워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케이건. 넌 내게 바라는 거 없어?”

한참 뒤에 케이건이 나직이 말했다.

“여름.”

“응.”

“내겐 상상력이 부족해서 여기서 뭘 더 바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난 이미 분에 넘치는 행복을 누리고 있어.”

“그럼 상상력 말고 욕심을 발휘해 봐.”

“욕심?”

“그래.”

케이건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 여름과 손가락 하나를 겹치게 한 케이건이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보이는 사람이 너였으면 좋겠어.”

여름은 손가락을 뺀 다음 케이건의 손을 감싸듯이 덮고 꼭 쥐었다.

“그럼 그렇게 하자.”

고개를 젖혀 케이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여름이 말했다.

“그렇게 하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