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놈의갈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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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이 내게 딱지를 붙였으니 나도 딱지를 붙이겠어
그래서 나는 당신들을 용서받지 못할 자라 부르겠어
You labeled me, I’ll label you
So I dub thee unforgiven

― 메탈리카, 『용서받지 못할 자(The Unforgiven)』 중에서

*

“도둑놈의갈고리가 붙었네요.”

기억할는지 모르지만 당신 첫 마디가 그거였어요. 도둑놈의갈고리가 붙었네요. 그 목소리, 참 좋았어요. 굵직한 바리톤에 부드러우면서도 귀에 쏙쏙 들어오는 독특한 음색. 기억나요? 등산 동호회에서 정기 산행 마치고 하산하던 길이었잖아요.

산을 내려오는데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거예요. 딴 사람 시선이 뒤통수에 달라붙는 느낌 들 때 있죠? 왜, 사람들이 뒤통수가 따갑다고들 하잖아요. 길거리 걸어가는데 자꾸 누가 쳐다보는 거 같을 때, 혼자 욕실에서 머리 감느라 샴푸 거품 내서 눈도 못 뜨는데 누가 뒤에서 노려보는 거 같을 때…….

네, 전 그런 때가 간혹 있어요. 그날이 딱 그랬거든요. 그래요, 썩 유쾌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무시하기로 했죠. 쳐다보는 것 갖고 뭐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지금이야 당신 덕택에 몰골이 영 아니게 돼 버렸지만 전엔 저 예쁘단 소리 곧잘 들었어요. 당신도 익히 알고는 있겠지만 몸매도 캐리비안 베이 같은 데 가서 비키니 입고 돌아다녀도 창피할 정도는 아니고요. 주말에 홍대 입구 같은 데 가서 놀면 더러 명함도 받았어요. 연예인 하고 싶음 연락하라는 기획사 삐끼들 있잖아요.

근데 전 끼가 있는 편도 아니고, 튀는 것도 싫어서 연예계 쪽은 생각도 안 했어요. 모르는 사람들한테 저를 무방비로 드러내고 싶지가 않았거든요. 그 흔한 미니홈피에 사진 한 장 올려본 적도 없었으니까요. 제 사진이 인터넷 여기저기에 막 돌아다니면서 모르는 사람들 눈요깃거리 되는 게 정말 싫었어요.

암튼 반반한 얼굴 덕에 버스나 전철역, 길거리 같은 데서 말을 걸거나 사귀자는 남자는 꽤 있었죠. 처음엔 당신도 그런 부류라고 생각했고요.

뭐야 싶어 돌아봤더니 당신이 제 바짓부리를 보고 있었어요. 한 동호회라 일면식은 있었지만 그때까지 우리, 따로 얘기를 해본 적은 없던 사이였죠. 그래서 당신이 제 뒤통수에 대고 한 말이 저한테 한 말인지도 확실치 않았어요.

하지만 당신 닉네임이 ‘피핑톰’이었다는 건 똑똑히 기억해요. 자기 소개하는 자리에서 누가 당신한테 왜 닉네임이 ‘피핑톰’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잖아요.

“어쩌면 제 닉네임만 보고 색안경 끼고 보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 솔직히 전 그래요. 결국 산다는 것 자체가 엿보는 거라 생각하거든요. 진실을 엿보고 성공을 엿보고 행복, 사랑…… 뭐 그런 의미나 가치들을 엿보면서 차근차근 진실로 다가가는 과정인 거죠.

전 이렇게 등산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것도 멋진 산세를 엿보고 자연의 진가를 엿보려는 마음에서 우러난 행동이라고 보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전 언제나 피핑톰이고 싶어요.”

정확하진 않겠지만 그때 당신 대답이 대충 그랬어요. 반응 좋았죠. 물어본 사람은 크으 감탄하고 누구는 박수까지 쳤으니까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아시죠? 당신 생긴 게 딱 그래요. 사람들이 말하는 조각 같은 얼굴. 근사한 외모에 독특한 정신세계, 유창한 말솜씨까지…… 여자들 눈길 끌만한 조건은 제대로 갖췄죠.

암튼 당신 지론대로라면 제게 말을 걸었던 그때, 당신은 제 바짓부리를 엿보고 있던 셈이에요. 근데 도둑놈의갈고리라니…… 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했어요.

이러고 내려다봤더니 아닌 게 아니라 도톰한 초승달 모양의 납작한 열매들이 제 청바지 종아리 부근에 다닥다닥 붙어 있더라고요. 깨진 선글라스? 그게 딱 생각났어요. 반달 모양의 도도록한 테두리는 선글라스 테 같고, 납작한 가운데에 그물처럼 엉긴 맥은 금 간 선글라스 유리알 같았거든요.

또 어찌 보면 내리깐 사람 눈 같기도 했고요. 그물처럼 엉긴 맥은 눈알에 돋아난 실핏줄이랄까요. 어리벙벙해서 어 하고 서 있는데 당신이 제 앞에 떡하니 쪼그려 앉더니 제 종아리에 붙은 열매를 하나하나 떼어 주면서 이렇게 말했죠.

“이름 참 별나죠? 요 열매가 뒤꿈치를 든 도둑놈 발자국같이 생겼고, 끝에 갈고리처럼 생긴 잔털이 사람이나 동물한테 슬쩍 들러붙어 먼 데까지 퍼져 번식한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래요.

도깨비바늘이니 진득찰이니 가막사리니 다 고만고만한 놈들이에요. 혹시 하산하시다 보셨는지 모르지만 꽃은 참 예뻐요. 여러 개의 연분홍 꽃송이가 총상 꽃차례로 나 있는데…….”

총상 꽃차례는 또 뭔가 했는데, 당신이 제 얼굴에 떠오른 물음표를 읽었던가 봐요. 총상 꽃차례는, 기다란 꽃대에 꽃자루의 꽃들이 어긋나게 붙어서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차례로 피어 올라가는 모양이고 총상화서라 부르기도 한다면서 조곤조곤 설명을 해주는데, 이건 뭐, 들꽃 박사가 따로 없더라고요.

그리고 당신, 몸을 일으키더니 떼어낸 열매들을 제 손에 꼭 쥐어 주었죠. 그 까슬까슬한 감촉이 지금도 손바닥에 남아 있는 거 같아요. 참 이상하죠, 어떻게 생각하면 상당히 불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런 행동들이 전혀 거북하지가 않았어요. 당신의 화사한 미소 때문이었는지, 아님 유창한 말솜씨 때문이었는지…….

거기다가요, 보통 산행 다녀오면 대개 시큼한 땀 냄새만 풀풀 풍기잖아요. 근데 당신은 그 대신 은은한 들꽃 향 같은 체취까지 풍겼어요. 도둑놈의갈고리란 별난 들풀의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지만 어쩜 그 꽃의 향기가 당신의 체취랑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하는 엉뚱한 망상까지 들었다니까요.

그래요, 맞아요. 그 순간부터 저, 당신한테 끌렸어요. 이 사람이 내 외모에 혹해 수작을 거는 건가 싶은 의심 같은 건 추호도 없었으니까요.

당신, 그 후로는 은근슬쩍 저랑 나란히 걸었어요. 그치만 그 동행이 쑥스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내심 기분 좋았죠.

내려가는 동안 당신이 들려준, 며느리밑씻개니 동자꽃이니 하는 들꽃에 얽힌 전설들, 어찌나 구수하고 감칠맛 나던지 꼭 어릴 때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날이야기를 아랫목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듣는 기분이었어요. 들으면 들을수록 더 들려달라고 조르고 싶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전까지는 만만치 않은 산행 땜에 온몸이 천근만근이었는데, 당신 얘기에 푹 빠져 산을 내려오는 동안 산행의 피로가 말끔히 날아가 버렸죠. 이마에 맺힌 구슬땀이 산들바람에 날아가듯이 말예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들려준 얘기가 제비꽃에 얽힌 전설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당신이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어 보여줬죠.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을 소스로 주문 제작했어요. 혹시 더 궁금한 들꽃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흰 바탕에 접사로 찍은 연보라색 제비꽃 한 송이가 서 있고 그 옆에 당신 이름 석 자가 홀씨처럼 흩날리는 명함. 저 지금도 그 명함을 갖고 있어요. 김, 완, 규. 그때 정말이지 당신 이름 석 자가 민들레 홀씨처럼 들어와 제 가슴에 뿌리를 내리는 것만 같았어요.

동호회 사람들하고 합류하기 전에 당신이 명함을 손에 쥐어주는데, 어찌나 손이 떨리고 명치끝이 간질거리던지 얼른 돌아서야 했어요. 그렇게 강렬한 끌림과 설렘을 느껴본 지가 너무 오랜만이라서 그날 밤 잠을 다 설쳤죠.

잠자리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다 몽유병 환자처럼 벌떡 일어나서 핸드폰을 열고 ‘피핑톰’이라는 별명으로 당신 전화번호를 저장했어요. 솔직한 심정으론 바로 전화하고 싶었죠. 근데 너무 쉬운 여자로 보일까 봐 사흘을 억지로 버텼어요.

그러고 나서야 두근대는 가슴을 안고 당신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당신의 부드럽고 굵직한 목소리가 ‘여보세요?’ 하는데 숨이 턱 막히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거예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렸죠. 한참을 더듬대다 당신한테 기껏 물어본 게 제비꽃의 꽃말이었어요.

궁색하죠. 맞아요, 인터넷 검색 창에 제비꽃 꽃말만 쳐도 결과가 주르륵 나올 텐데요. 그치만 그땐 뭘 물어보든 당신이랑 다시 만나고픈 맘 가리는 핑계밖엔 안 됐을 거예요. 그나마 당신이 흔쾌히 받아준 게 천만다행이었죠.

“아, 꽃말이요? ‘순진무구한 사랑’이에요. 비너스의 농간 때문에 아티스만 바라보다 죽은 이아의 처지를 상징하는 말이죠.”

그 다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했는데, 오히려 당신이 이런저런 화제를 꺼내서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어요. 어떻게 지냈냐, 일교차가 장난 아닌데 감긴 안 걸렸냐, 연락이 없어서 자기 명함을 버린 줄 알았다, 뭐 그런 얘기를 하다가 당신이 일주일 후 저녁을 사고 싶다고 했죠. 속으론 옳다구나 하면서도 겉으론 좀 망설이다 못 이기는 척 승낙했어요. 약속 날짜를 기다리는 일주일이 어찌나 길던지 거짓말 좀 보태서 7년 같았어요.

드디어 일주일 만에 당신이랑 만났어요. ‘고디바’라는 레스토랑에서. 그날 당신, 까만 원 버튼 슈트를 입고 나왔는데 그 자태가 모델 뺨쳤어요. 털털하고 수더분했던 산행 때완 다르게 샤프하고 시크한 이미지였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게 꼭 운명 같아요. 고디바도 피핑톰이랑 관련된 사람 이름이잖아요. 존 콜리어의 「레이디 고디바」란 그림 모사화가 은은한 조명을 받으면서 레스토랑 벽에 걸려 있었죠.

숱 많은 갈색 머리를 늘어뜨린 벌거벗은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빨간 비단 안장을 두른 백마에 탄 광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었는데 당신이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죠.

“은진 씨, 이 레스토랑 상호 ‘고디바’가 바로 저 여자에게서 빌려 온 거예요. 11세기 영국 코번트리의 영주 레오프릭 백작의 아내였죠. 그 백작이란 작자가 농노에게 매기는 세금이 너무도 가혹해서 당시 고작 열여섯 살이었던 고디바가 세금 좀 낮춰달라고 호소했어요.

근데 그 노친네가 무슨 고약한 심사였는지 고디바한테 알몸으로 말을 타고 코번트리 거리를 한 바퀴 돌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한 거예요. 고디바도 만만치 않은 여자라서 남편 말대로 진짜 알몸으로 말을 타고 거리를 돌았죠.

그때 모든 마을 사람들이 예우의 차원에서 창문을 닫아걸었는데 그 마을의 재단사 톰이란 친구만 고디바를 엿봤어요. 그 직후 톰은 눈이 멀었고, 여기서 피핑톰이란 말이 유래됐죠. 보세요.

여인의 알몸을 클로즈업한 그림인데도 결코 성적인 상상을 불러일으키진 않아요. 오히려 초라한 알몸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해요. 재론의 여지가 없는 명작이죠. 근데 참 씁쓸하기 그지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고디바란 이름이 저 그림보다 이걸로 유명해졌어요.”

당신이 말끝에 작은 종이상자 하나를 저한테 내밀었어요. 무심코 받아들고 봤더니, 정말 말을 탄 고디바가 그려져 있고 그 밑에 ‘GODIVA’라는 상표가 금박으로 박혀 있었죠. 상자를 열어보니 와, 상자 속은 스무 개로 나뉘어져 있고 칸칸이 초콜릿이 빼곡했어요. 그때 당신이 속삭였죠.

“누가 그랬죠.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 당신이 어떤 걸 갖게 될지는 절대 모른다고……. 자, 하나 골라 보세요.”

각양각색의 초콜릿 위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GODIVA’라는 상표가 음각으로 새겨진 하트 모양의 초콜릿을 골랐어요. 초콜릿을 입에 넣었는데 달콤한 첫맛과 달리 혀끝에 맴도는 씁쓸한 뒷맛이 일품이었어요.

근데 그때 갑자기 당신이 인상을 팍 쓰면서 테이블 위에 푹 쓰러졌죠. 그때 제가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는지 아세요? 제가 당신 어깨를 막 흔들었을 때 당신이 눈을 스르르 뜨더니 씩 웃으면서 그랬죠.

“놀라지 마세요, 방금 가져가신 게 바로 제 심장이었어요.”

너무 황당하니까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오는 거 있죠. 그 뒤로 당신이 들려주는 유려한 얘기들이 형형색색의 음악이 되어 제 마음을 끌어당겼고 당신이 풍기는 은은한 들꽃 향과 당신이 절 바라보며 짓는 미소가 향기로운 와인이 되어 저를 취하게 했어요.

참 행복했어요,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과 마주앉아 얘기하고 있단 자체가. 정말이지 단 둘이 만난 지 단 세 시간 만에 당신한테 푹 빠져 버렸다니까요.

나흘 뒤에 당신이 애프터 신청을 했고 전 대학 합격통지서를 받은 날보다 더 기쁜 맘으로 달려 나갔어요. 그날 당신이랑 홍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스카이라운지에서 첫 키스를 했고…… 잤어요. 빨랐죠. 그치만 빠르단 생각도 안 들었어요. 당신한텐 모든 걸 기꺼이 내주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당신이랑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어요. 처음엔 굉장했죠. 퇴근할 시간 되면 제가 일하는 병원 앞에 아우디A4인가 하는 외제차를 떡하니 대놓고 기다려주고, 솔직히 전 세상에 그런 차가 있는지도 그때 처음 알았어요, 루이비통이니, 샤넬이니 프라다 같은 명품을 선물로 턱턱 사주고…….

알고 보니 당신 아버지가 홍주에서 유명한 부동산 큰손이었어요.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 때문에 4년제 대학을 포기하고 간호전문대를 나와 괴팍한 시어머니 같은 의사 밑에서 군내 나는 환자들과 하루하루 씨름하며 살아온 저와는 태생부터가 달랐죠.

그래서 당신한테 더 환상을 품었는지도 모르구요. 어쩌면 이 사람이 정말 내 신분을, 소독약 내 풀풀 풍기는 병원에서 탕진할 내 젊음을 구원해 줄지도 모른단 환상. 드넓은 아파트의 가족 소파에 앉아 클래식을 틀어놓고 에스프레소를 홀짝이며 인테리어나 자산관리를 고민하며 살고픈 속물근성을 충족시켜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런 환상과 기대에 자다가도 실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행복했어요. 그땐 정말 이상형을 만난 줄로만 알았거든요.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어요. 환상적이어서 절대 깨고 싶지 않은 꿈. 근데 그런 꿈일수록 막상 깨고 나면 그 허탈함이란 게 이루 말할 수 없잖아요.

당신이랑 했던 연애가 딱 그랬어요. 한여름 밤의 꿈. 백일몽. 개꿈. 꿈으로 꿀 당시엔 정말 굉장해서 비몽사몽간에도 ‘와, 이거 영화로 만들면 대박이겠다!’ 싶다가도 막상 깨고 나서 떠올려 보면 그게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나거나, 기억이 나더라도 코웃음이 날 정도로 유치기만 한 개꿈.

저를 그 개꿈에서 깨어나게 해준 건 그 여자였어요. 그날도 당신이랑 만나 ‘고디바’에서 저녁을 먹었죠. 식사를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서다 거리에서 그 여자와 마주쳤죠. 당신 얼굴에 어 하고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어요. 그 여잔 싸늘한 얼굴로 외면하곤 우릴 지나치더군요.

누군지 궁금했지만 당신한테 캐묻기도 뭣해서 관뒀어요. 그날 밤 여기서 사랑을 나누고 저만 나왔던 거 기억나요? 당신은 ‘고디바’에서 마신 와인이 과한 것 같다며 엘리베이터까지만 배웅 나왔다 들어갔죠.

원룸 건물을 막 나오는데 웬 차 한 대가 졸졸 따라오며 빵빵대는 거예요. 돌아보니 그 여자였어요.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있다가 움직이는 품이 아무래도 절 기다린 것만 같았죠. 잠깐 얘기 좀 하재요. 예쁘장하면서도 어딘가 음울해 보이는 여자였어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당신의 전 약혼녀래요.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무시했죠. 왜, 당신같이 멋진 남자한테는 정신 나간 스토커 하나쯤은 따라다닐 수도 있잖아요.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상대할 가치도 없겠단 마음에 종종걸음을 치는 제 뒤통수에 대고 그 여자가 대뜸 이러는 거예요.

“도둑놈의갈고리가 붙었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자리에 우뚝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죠.

“그 인간이 맨 처음 그런 말로 접근했죠? 등산동호회에서 그 인간이랑 알게 됐고……. 지금 그 동호횐 아니지만 저도 한때 그 인간이랑 같은 동호회 회원이었어요. 아는 후배가 그러더군요. 아무래도 그쪽이 그 인간한테 된통 걸려든 것 같다고.”

그 말까지 듣고 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내키지는 않았지만 무슨 얘길 하나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그 차 조수석에 올랐어요. 그 여자, 근처 커피숍으로 차를 몰더군요. 거기서 그 여자와 마주앉았죠. 그 여자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어요.

모든 걸 알고 있더군요. 도둑놈의갈고리에서부터 시작해서 들꽃 전설, 제비꽃 명함, 레이디 고디바, 초콜릿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만날 때마다 심부름센터 직원이라도 붙여 미행한 것처럼 모든 걸 훤히 꿰고 있는 거예요.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고 비웃고 싶은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전부 사실이었으니까요.

“제가 어떻게 그런 일들을 다 일일이 아는지 궁금하시죠?”

여자는 저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어요. 그 시선을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저는 테이블에 놓인 커피 잔으로 눈을 내리깔았죠. 그 여자, 자문자답하더군요.

“저도 다 겪은 일이니까요.”

여자가 그랬어요. 도둑놈의갈고리가 붙었다며 목표물에게 접근해 바짓부리에서 열매를 떼어주며 자연스럽게 환심을 샀던 게 전부 당신이란 남자가 여심을 사로잡는 수법일 뿐이라고, 당신은 여기저기서 긁어모은 그 알량한 지식과 현란한 말발로 여자를 낚는 카사노바일 뿐이라고, 그 도둑놈의갈고리조차도 당신이 목표물의 꽁무니에 붙어 산을 내려오며 바짓부리에 흩뿌린 것이라고,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접근해 환심을 사고 그 여자를 제 것으로 만든 뒤 단물이 빠지면 껌을 뱉듯 걷어차는 게 부동산 졸부를 아버지로 둔 백수건달 당신의 유일한 인생의 낙이라고, 그렇게 당신에게 당한 여자들이 자신을 비롯해 수십 명에 이른다고 했어요.

믿기지 않았어요. 아니, 믿을 수 없었어요. 그래서 따졌죠. 당신 정도의 남자라면 좋다고 먼저 다가서는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굳이 그런 수고와 정성을 들이겠느냐고. 그 여자, 콧방귀를 뀌더군요.

“낚시꾼은 제풀에 어망으로 뛰어드는 고기를 달가워하지 않아요. 그런 고기한테선 절대 손맛을 느낄 수 없으니까. 낚시는 어디까지나 손맛이거든요. 입질하던 고기가 미끼를 덥석 물었을 때 낚아 올리는 손맛.”

충격이었어요. 당신이 달콤한 미끼로 여자를 낚는 난봉꾼이라니, 내가 당신의 미끼를 문 고기라니……. 아무리 진정하려 애써도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그 여자, 그런 저를 빤히 들여다보며 결정타를 던지더군요.

“은진 씨라고 했죠? 은진 씨, 환상을 깨서 미안한데 그 인간, 요샛말로 나쁜 남자예요. 그 인간한테 은진 씬 그냥 엔조이고, 컬렉션일 뿐이에요. 은진 씨가 그걸로도 감지덕지한다면 말리고 싶진 않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이상을 원한다면 더 늦기 전에 꿈 깨라고 얘기해 주고 싶어요. 더 늦기 전에 정신 차리고 그 인간이랑 인연 끊으라고…….

멜로영화처럼 달콤한 사랑? 하루아침의 신분 상승? 그딴 건 현실에 없어요. 대신 치졸한 배신과 구질구질한 악다구니가 있을 뿐이에요. 끝내세요.

이건 그 인간과 한때 약혼까지 했다가 세 번이나 애를 지우고도 그 인간의 엽색 행각에 치를 떨며 파혼했던 전 약혼자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한 살이라도 더 먹은 언니로서 은진 씨가 순진한 동생 같아서 해주는 충고예요.”

그날 어떻게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 여자가 해준 말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아우성쳤어요. 당신에게 전화를 걸어서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물었어요, 절 사랑하느냐고. 당신은 천연덕스럽게 그렇다고 했죠. 그리고 물었죠, 왜 그러냐고, 무슨 일 있냐고. 아무 일 없다고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 여자를 정신 나간 스토커라고 믿고 싶었어요. 당신의 뒤를 집요하게 밟으며 당신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가 저를 당신한테서 떼어낼 작정으로 벌이는 수작이라고 믿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날 밤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그간의 연애를 되짚어보면서 그 여자의 말이 사실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어요.

막상 연애를 시작한 후로는 전에 비해 눈에 띄게 말수가 줄었던 당신, 세심한 배려와 다정다감한 마음 씀씀이는 줄어가고 점점 신경질과 퉁명부림만 늘어가던 당신, 만나자마자 모텔이나 여기로 직행해 제 몸을 탐하기 바빴던 당신, 사랑을 나누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울리던 당신의 핸드폰, 둘이 있을 때 전화가 걸려오면 전화기를 들고 자리를 뜨던 당신, 전화를 받고 돌아온 당신이 늘어놓던 궁색한 변명, 운전을 하다가도 매력적인 여자를 지나칠라치면 어김없이 그쪽으로 돌아가던 당신의 눈동자, 집요하게 여자의 몸매를 훑던 당신의 시선, 당신이 아우디의 대시보드 수납함을 뒤적이던 날 잡동사니 틈으로 언뜻 보였던 책 『한국의 들꽃 전설』, 그리고 다른 여자랑 모텔 들어가는 당신을 본 것 같다던 친구의 귀띔…….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번뜩 들었어요. 물론 그 여자의 말들이 온전히 진실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었어요. 근데 온전히 거짓이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래요, 당신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날 이후로 당신에게 씌었던 콩깍지가 스르륵 벗겨져 버렸어요.

그제야 내가 애써 외면했던 진실이 보였어요. 당신이란 남자의 휘황찬란한 껍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얕디얕은 영혼의 깊이, 말라비틀어진 사과처럼 보잘것없는 당신의 내면을 가득 메운 위선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은근히 멸시하는 오만, 잠자리에서조차 일말의 배려 없이 자기만족만을 추구하는 이기심……. 그렇게 당신한테 혹해 있는 동안 보이지 않던 단점들이 그때부터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며칠 후 ‘고디바’에서 제가 당신에게 애써 에둘러 헤어지자고 말했을 때 당신은 무슨 농담이냐며 웃었어요. 재차 말했을 때에야 제 진심을 깨닫고 안색이 변하며 진심이냐고 되물었죠. 세 번째로 그 말을 되풀이했을 때 당신은 저를 말없이 노려보았어요.

그 눈이 꼭 먹이를 노리는 뱀눈 같았죠. 눈자위로 뻗어 나온 실핏줄들은 담장을 뒤덮은 담쟁이덩굴 같았고요. 그제야 저는 당신에게 상대가 심기를 건드릴 때마다 상대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습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당신이 물었죠.

“그러니까 지금, 그만 끝내자, 이거지?”

여러 가지로 힘들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렇다고, 미안하다고 했어요. 그러곤 당신과 눈을 마주대하고 있기가 껄끄러워 창가 너머로 보이는 버스정류장에 앉은 여자의 뒤통수에 시선을 돌렸어요. 제 시선을 느낀 여자가 절 흘끔 돌아보더군요. 문득 궁금해졌어요. 남의 시선을 감지하는 감각기관은 어디에 있는 건지……. 그때 당신이 서릿발 곤두선 목소리로 말했어요.

“야, 말할 땐 내 눈 보고 얘기해. 성의 없이 딴 데 쳐다보지 말고. 사람 개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마지못해 당신한테로 눈을 돌렸죠. 당신이 절 빤히 노려보며 넘겨짚었던 것 기억나요?

“뭐가 그렇게 힘든데? 남자 생겼냐? 양다리 걸치고 이놈 저놈 어장 관리하려니까 힘들어?”

그럴 여유 없는 거, 당신이 더 잘 알지 않느냐고 항변해도 막무가내였어요.

“까구 있네. 지난주부터 슬슬 피하는 게 어째 수상하더라니. 나보다 돈 많어? 아님 나보다 잘 생겼냐?”

그렇게 묻는 당신의 입술 한쪽이 치켜 올라갔어요. 바로 그 순간, 당신과 알고 지낸 이후 처음으로 당신이란 사람이 싫다는 생각을 했어요.

도둑놈의갈고리를 떼어주던 그날의 당신과, 악의에 찬 눈으로 저를 노려보며 빈정대던 그날의 당신은 동일인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딴판이었어요. 그러니까 전자는 제 환심을 사려는 연기였고, 후자야말로 당신의 참모습이었던 셈이었죠.

당신이란 남자의 됨됨이를 진즉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럼 당신의 거짓된 호의와 배려를 코웃음 치며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제 일상도 지루하나마 평온하게 흘러갔을 텐데, 그 이후의 악몽들도 비껴갈 수 있었을 텐데……. 부질없는 후회건만 그 후로 수천 번은 했던 것 같아요.

암튼 그때부터 당신은 더 이상 졸렬한 속내를 알량한 껍데기로 감출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던가 봐요. 심지어 당신, 아랫도리를 앞뒤로 들썩여가며 이렇게까지 말했죠.

“아님…… 나보다 더 잘해 줘?”

모멸감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어요.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옛정이며 미련마저 몸서리를 치며 후드득 날아가 버렸죠. 더 이상 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어요.

“앉아! 안 앉아? 확 다 엎어 버린다.”

그렇게 위협하는 당신의 눈이 악의로 희번덕거렸어요. 레스토랑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를 돌아보았죠. 그러자 당신이 주위를 휘둘러보며 눈을 부라렸어요.

“뭘 봐. 사랑싸움하는 거 처음 봐?”

당신의 목에 곤두선 핏대가 볼끈거리던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해요. 한마디 불평이나 야유라도 보내는 사람이 있으면 손에 쥔 맥주잔이라도 내던질 태세였죠.

당신이 다혈질이라는 사실은 사귀는 동안 익히 눈치 챘지만 그 지경일 줄은 몰랐어요. 차라리 잘 된 일이었어요. 당신이란 남자의 됨됨이를 그때 정말이지 확실히 깨달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당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심에서 우러난 마지막 말을 또박또박 내뱉었어요. 우리, 다신 보지 말자고.

그 길로 돌아서서 고디바를 나왔어요. 그때 당신이 던진 술잔이 화살처럼 날아와 출입문 옆의 벽에 부딪쳐 박살났죠. 그렇지만 돌아보지도 않았어요.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당신 눈빛이 어떨지 뻔했으니까요. 당신이 쏘아보는 눈빛에 뒤통수가 따가울 지경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가슴은 아팠어요. 어떻게 안 아플 수가 있겠어요. 오랜만에 품었던 연애의 감정이 순전히 저 혼자만의 착각이었는데……. 그 사실이 너무나 슬프고 괴로웠어요. 그래서 혼자 술집에 들어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까지 홀짝이며 청승을 떨었죠.

그때 그 술집이 ‘투다리’였던가, ‘간이역’이었던가 그랬을 거예요. 그런 술집, 실내가 비좁아서 테이블도 다닥다닥 붙어 있는 구조인 거 아시죠? 제가 앉아 있던 자리 뒤편에 대학생으로 보이는 애들 서넛이 쌍쌍으로 앉아 오래된 괴담을 늘어놓고 있었죠.

그 빨간 눈 괴담 있죠? 귀신 나온단 흉가에 갔다가 구멍 난 창호지 틈으로 빨간 방 안만 들여다보고 왔는데 알고 보니 귀신 눈이 빨갛다더라 하는 괴담. 듣고 싶지 않아도 워낙 지척에서 떠들어대니 들을 수밖에 없었어요.

근데 참 이상하기도 하지,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그 괴담이 어쩐지 고막을 파고들어와 가슴속에서 불길하게 맴도는 거예요. 어쩌면 그 괴담이야말로 제가 앞으로 겪게 될 악몽을 암시하는 전조였는지도 몰라요. 당신이 보낸 문자메시지가 도착한 게 그때였거든요. 그 문자 내용 기억나세요? 전 토씨 하나 잊어버리지 않고 똑똑히 기억해요.

수많은 년들을 만났고 수많은
년들을 찼지만 먼저 날 찬 건
니가 첨이다. 미안하지만 널
용서할 수가 없을 거 같다.
지금이라도 와서 잘못했다고
빌어라, 그럼 후회할 일은 안
일어날 거다.

당신이 연달아 보낸 문자를 확인하는 제 손이 바들바들 떨렸어요. 두려워서가 아니라 울화가 치밀어서요. 용서? 잘못? 후회할 일? 대체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누가 누구한테 잘못했으며, 후회할 일이란 건 대체 뭐냐고 당신에게 따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참았죠. 당신의 유치한 협박 따위가 무서워서가 아니었어요. 상대해 봐야 저도 똑같이 치사한 인간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 얘기처럼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날 당신의 전화번호를 스팸번호로 등록하면서 저는 당신이란 사람을 내 인생에서 깨끗이 지우기로 했어요. 당신, 아는지 모르지만 전 한번 아니면 영영 아니에요. 한 번 돌아서면 그 사람 다시 안 보는 성격이거든요.

혹시나 했지만 그날 이후로 당신, 다신 제 앞에 나타나지 않았어요. 그래도 한두 번 정도는 눈앞에 나타날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병원 앞에 아우디를 대놓고 기다리던 일도, 그 화사한 미소로 제게 깜짝 선물을 안겨주던 일도 다 옛일이 되어 버렸죠.

시원섭섭했어요. 그래도 더러 버스를 타고 레스토랑 ‘고디바’를 지나칠 때마다 당신 생각이 나서 피식 쓴웃음 짓곤 했어요. 그래요, 그렇게만 끝이 났어도 당신과 있었던 일들, 씁쓸한 추억으로나마 기억될 수도 있었겠죠.

당신과 헤어진 지 반년이 지났을 즈음, 저는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어요. 당신과는 다른 사람, 당신과는 정반대의 남자였죠. 아우디 대신 구형 아반떼를 끌고 다녔고, 부동산 대신 초등학교 앞 학용품 가게로 생계를 유지하는 부모를 뒀고, 조각 같은 외모와는 거리가 먼, 조물주가 대충 주물럭대다 만 듯 밋밋한 외모에, 더듬거리는 말솜씨에, 저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빨개져서 시선을 피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매일같이 제가 일하는 병원으로 손님으로 찾아와 빨개진 얼굴로 장미꽃 한 송이를 내밀고는 허둥대며 달아나는 순정이 귀여웠어요.

그렇게 한 달을 하루도 빠짐없이 출석 체크를 하고 달아났던 그 사람이 머뭇거리며 영화표를 내밀던 날, 전 흔쾌히 그의 호의를 받아들였어요. 기분 전환이라도 하고 싶었던가 봐요. 어쩜 당신이란 남자에 대한 반감이 불러온 반작용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날 그 사람이랑 영화 보고, ‘즐거운 편지’란 커피숍에서 원두커피를 홀짝이며 그 사람이랑 참 많은 얘기를 나눴어요. 그 사람, 알고 보니 엉뚱하게도 직업이 심부름센터 주임이었던 거 있죠. 네, 흥신소요.

언뜻 보기엔 진짜 안 어울리는 듯한데도 묘하게 어울리는 조합이었어요. 그 사람, 언뜻 보기엔 어수룩해 보여도 알고 보면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거든요.

사실 저도 그 사람 만나기 전까진 심부름센터에 대해서 부정적인 선입견 같은 게 있었는데 그 사람이랑 얘기해 보니 실상은 꼭 나쁘지만도 않더라고요. 그 사람, 직업이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선 안 된단 걸 깨닫게 해줬어요.

잃어버린 개 찾아주기부터 시작해서 공과금 대납, 긴급 서류 배달 등등 별의별 일들을 다 한대요. 그중에 제일 많은 건수는 역시 불륜 추적이고요.

흥신소 일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들도 하나둘 얘기를 해줬는데 어떤 얘긴 진짜 웃겼고 어떤 얘긴 굉장히 섬뜩했어요. 그 사람, 겉으로 보기엔 어눌해도 머뭇머뭇 털어놓는 얘기들이 깊이도, 철학도, 여운도 있었어요.

당신이란 남자가 미리 정해진 시나리오를 상황에 맞게 척척 내놓는 인터렉티브 게임이라면 그 사람은 영감에 따라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써내려가는 소박한 수필 같다고나 할까요.

현란한 말발이 없어도, 명품 선물이 없어도 그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마음이 참 푸근했어요. 그래서 그 사람하고 만날 때마다 자우림의 「애인 발견」이란 노래가 자꾸 떠올랐는지도 몰라요.

‘바보 같다 생각했어, 너를 한 번 봤을 땐. 멍청한 눈, 헝클어진 머리, 마른 몸. 착하다고 생각했어, 너를 두 번 봤을 땐. 상냥한 눈, 귀여운 머리, 날씬한 몸. 사람들은 너를 몰라, 안경 너머 진실을 봐.’ 그래요, 그 남자, 당신처럼 꽃미남은 아니어도 만나면 만날수록, 겪으면 겪을수록 내면의 향기가 진국으로 우러나는 사골 같은 남자였어요.

겉보기엔 화려하고 톡 쏘는 향에 자극적인 맛이 처음에는 그럴싸해도 지나고 나면 느끼하고 역겹기까지 한 당신과는 차원이 달랐죠. 모든 행동이 연기였고 모든 말이 가식이었던 당신.

하다못해 산행 때 당신에게서 풍겨왔던 그 들꽃 향마저도 실은 ‘구찌 엔비 포 맨’이라는 향수 냄새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을 땐 내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했지 싶더라고요.

그 남자가 당신과 달리 진실했기 때문에 저는 당신이란 남자와 있었던 개운치 않은 일들을 어렵사리 잊을 수 있었어요. 그렇게 당신이란 남자가 그 기억조차 희미해져갈 즈음, 사건이 터졌어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치욕, 여자로서의 삶을 송두리째 낭떠러지로 떠미는 청천벽력.

전조는 시선에서 시작됐어요. 모르는 남자의 시선. 똑바로 마주보는 것도 아니고 뒤에서 뱁새눈으로 흘끔대는 시선. 제가 일하는 병원이 비뇨기과였던 거 기억해요? 그래서 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대개 남자들이었어요.

근데 어느 날부터인가, 환자들 중에서 저를 이상한 시선으로 흘끔대는 사람이 있는 거예요. 전처럼 선망이나 호의를 담은 시선은 절대 아니었어요. 놀람과 냉소와 멸시가 뒤섞인, 못 견디게 꺼림칙한 시선이었죠.

처음에는 제 얼굴이나 옷에 뭐가 묻었나 싶어 이리저리 살펴봤어요. 그게 아니었어요. 흠잡을 데가 전혀 없는데도 저를 쉴 새 없이 흘끔대는 거예요. 제가 돌아보면 얼른 눈을 딴 데로 돌리더군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딴전을 피우던 시선은 내가 눈을 돌리면, 땀 냄새를 맡고 덤벼드는 모기처럼 또 달려들었죠.

처음엔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어요. 어쩜 그 사람이 아는 누군가, 그 사람이랑 안 좋은 사이인 누군가와 제가 빼닮았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볼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요, 어쩌다 한둘이었던 시선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거예요. 한두 번은 우연의 일치로 보고 웃어넘길 수 있었지만 그런 눈으로 저를 보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하니 그럴 수가 없었어요.

어쩜 저 사람들이 제가 알지 못하는, 그렇지만 저와 관련된 뭔가를 보았고 저를 바라보며 그걸 확인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죠.

한번은 병원비를 수납하던 한 남자가 창구에 앉아 있던 저를 자꾸 위아래로 훑어보며 기분 나쁘게 히죽대기도 했거든요. 그러면서 넌지시 이렇게 묻는 거예요.

“저기, 어디서 뵌 적 있는 거 같은데…….”

그리고 또 예의 히죽거림. 참다못해 물어봤어요.

“전 오늘 첨 뵙는데, 구면이신가요?”

그 남자, 어깨를 으쓱하더라고요.

“글쎄요, 구면인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 느물느물한 태도에 화가 치밀어 귓불까지 달아올랐어요. 그치의 멱살을 붙들고 흔들어대며 묻고 싶었죠. 도대체 뭐냐고, 뭐 때문에 나를 그딴 눈초리로 보고 히죽대느냐고.

하지만 엄연히 그치도 고객이라 그러지도 못하고 울화를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죠. 제가 빼준 처방전을 들고 병원을 나가면서도 그치, 저를 흘끔 돌아봤어요. 그제야 그 시선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어요. 그치의 시선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어요.

‘난 다 봤지.’

병원만이 아니었어요. 출퇴근 때 버스를 타거나 거리를 걸어 다녀도 절 묘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어요. 온몸에 진드기가 들러붙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것만 같았죠. 옷을 들추고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은 시선. 불쾌하고 궁금해서 못 견딜 지경이었어요. 도대체 이유가 뭘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나를 저렇게들 보는 걸까.

퇴근 후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을 지나친 적이 있었어요. 얼굴이 여드름으로 울긋불긋한 걔들도 절 흘끔대며 저희들끼리 뭐라 수군대고 시시덕거리더군요. 무시하고 지나치려는데 저만치 멀어진 녀석들 중 하나가 제 뒤통수에 대고 이러는 거예요.

“고은진,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마라!”

그러곤 낄낄대며 도망가는데, 전 그 자리에 우뚝 얼어붙었어요. 전 분명 처음 보는 애들이었거든요. 도대체 쟤들이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 걸까, 거기다 인생 그 따위로 살지 말란 소리는 무슨 의미이며, ‘그 따위’는 뭘 가리키는 걸까.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