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인자 恐怖因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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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요일 저녁인데도 거리는 한산하기만 했다.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집 안에만 틀어박힌 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타인과 접촉하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 정우는 을씨년스런 거리를 혼자서 걷고 있었다.

흰색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양손엔 식료품이 담긴 비닐봉지를 잔뜩 들고 있었다. 거리엔 지나가는 차들도 얼마 없었다. 아주 가끔씩 버스나 택시 몇 대만 지나갈 뿐, 다른 차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 이런 풍경은 일상이 되어버린 듯했다.

사람들은 중요한 볼일이 있을 때만 외출을 했고, 그때마다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어떤 이들은 아예 민수용 방독마스크를 머리에 쓰고 다니기도 했다. 그것은 감기처럼 호흡기로 전염이 되기 때문에 외출 시 마스크는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공공장소나 혼잡한 번화가는 절대로 가지 않았다. 아니, 이제는 그런 곳을 찾아 볼 수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기 시작했다. 도시는 마치 생기를 잃어버린 묘지 같았다.

집에 돌아온 정우는 양손에 가득 든 식료품 봉지를 내려놓고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우가 들어온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안방에서 문을 열고 나왔다.

“다녀왔니?”

“네”

“그래, 고생 많았다.”

세형은 아들이 사온 식료품들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정우도 봉지 한 개를 들고 아버지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두 부자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세형은 장봐온 재료들로 요리를 준비하고, 정우는 남은 재료들을 냉장고에 집어넣고 나서 옆에서 아버지 일을 거들었다. 그들은 제법 능숙하게 일을 진행시켜 나갔다.

식탁에 앉은 사람은 세형과 정우, 막내딸 유미 이렇게 셋뿐이었다. 유미는 흰색 마스크를 턱 밑으로 내린 채 천천히 국을 떠먹었다. 그러다가 가끔씩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될 때면 고개를 옆으로 돌려 콜록콜록 기침을 해댔다.

두 부자는 그럴 때마다 자신들도 모르게 힐끔거리며 유미를 쳐다봤다. 그것은 불안에 의한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미에게는 여간 기분 나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유미는 참다못해 숟가락을 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미야!”

세형이 딸을 불렀다.

“됐어요! 그만 먹을래요.”

“아직 반도 안 먹었잖니.”

“이런 분위기에서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줄 아세요?”

유미는 화가 난 얼굴로 아버지와 오빠를 번갈아 쳐다봤다. 어린 소녀의 눈에 원망과 슬픔이 묻어나왔다. 두 부자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본 후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앞으론 나도 내 방에서 밥 먹을래.”

유미는 그 말을 남기고 자기 방으로 돌아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두 부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그러다 정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가 먹은 식기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세형은 아무 말 없이 식탁을 지키고 앉아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세형은 거실 소파에 앉아 정우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TV를 시청했다. TV에서는 연일 세상을 뒤덮은 공포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각계 전문가들, 정치인들이 나와 사태의 심각성과 정부의 시급한 대책 마련에 대해 설전을 벌였지만, 결국 뾰족한 대안 없이 토론은 늘 흐지부지하게 끝나버리고 말았다.

세계 의학계에서도 이 병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 내지 못하는 듯했다. 병리학적인 접근 방식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을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지, 아니면 정신의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지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분야가 맞다 틀리다만 놓고 싸움을 벌일 뿐이었다.

세형은 그만 보고 있던 TV를 꺼버렸다. 안 그래도 뒤숭숭한 세상에 TV마저도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놓고 있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닥에 내려놓은 쟁반이 보였다.

쟁반 위에 음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아내는 그가 가져다 준 음식에 일절 손도 대지 않았다. 은숙은 남편이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데도 계속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자는 척만 했다. 세형은 바닥에 내려놓은 음식을 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라도 좀 먹어야지. 계속 이렇게 굶기만 한다고 해서…….”

아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형은 아내가 깨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방 안에만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병에 걸리고 나서 아내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세형은 침대로 다가가 아내 옆에 걸터앉았다. 그러곤 이불에 덥힌 아내의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러자 은숙은 움찔하면서 몸을 옆으로 피했다. 세형은 씁쓸한 표정으로 손을 거둬들였다.

병 때문에 달라진 것은 비단 아내뿐만이 아니다. 그들의 생활 환경도 은숙에게 맞춰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집 안에서 뾰족한 물건들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모두 갖다 버리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 꼭꼭 숨겨둬야 했다. 은숙은 뾰족한 물건을 극도로 무서워했다.

그녀는 ‘모서리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병을 앓기 전까진 주사나 바늘을 두려워했어도,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것이 자신의 일상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병적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병을 앓고부터 그녀의 상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젠 바늘뿐만이 아니라 뾰족한 모든 것이 다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뾰족한 것만 봐도 그것에 찔리지 않을까 무척 두려워했다. 칼끝만 봐도 심장이 벌렁거리고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여서 이제는 부엌일도 할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있는 물건들도 뾰족한 모양, 각진 모양이 아닌 모두 둥글둥글하거나 뭉뚝한 것들로 대체됐다.

그러다보니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뾰족한 것을 피해 생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리 주변에서 뾰족하고 각진 것들을 찾으라고 한다면 제일 가까운 곳에서도 수십 개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들과 차단된 생활을 해야 된다는 것은,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란 말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녀는 젓가락도 쓸 수 없어 오로지 숟가락으로만 음식을 먹어야 했다. 앞에 포크가 달린 숟가락도 쓸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뾰족하면 그녀는 벌벌 떨었다.

세형은 착잡한 심정으로 이불을 뒤집어쓴 아내를 내려다봤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병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생활을 지속해야만 할 것이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끔찍한 공포였다.

2

처음에 그것은 가벼운 감기 증상으로부터 시작됐다.

공식적인 발표에 의하면, 최초의 발병 환자는 미국 매사추세츠에 사는 스물여섯 살의 스티븐 홉스라는 백인 남성으로, 사진작가인 그는 발병 석 달 전부터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사진 촬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마지막으로 아프리카 케냐에서 일주일을 보낸 후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에 그는 가벼운 감기 증상을 보였다. 두 나라 사이의 극심한 기온 차 때문에 감기에 걸린 것이라고 그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가벼운 오한과 발열, 기침, 콧물, 가래……. 전문의가 봐도 그것은 영락없는 감기 증상이었다. 하지만 이 병의 진정한 무서움은 감기가 끝나고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초기 감기 증상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길어야 1,2주 정도면 완전히 사라지고, 병원 치료를 받게 되면 그보다 좀더 빨리 낫는데, 약간의 개인차는 있어도 대략 일주일 정도 감기 증상이 지속된다. 그리고 감기가 끝나는 시점부터 이 병의 진정한 공포가 시작되는 것이다.

공포. 이 병을 가리키는데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최초 발병 환자인 홉스는 이 2차 증상이 일어나는 시기를 ‘검은 보름’ (black half a month를 줄여 black half라고도 함)이라 불렀다.

2차 증상은 1차 증상이 끝나는 시기부터 정확히 보름 동안 지속되며, 여기에 개인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타이머를 켜둔 토스터처럼 보름이 지나면 ‘땡’ 하고 끝나버린다. 그래봤자 보름쯤이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름 동안 환자는 지옥과도 같은 경험을 맛봐야 한다.

홉스는 2차 증상이 시작되던 날, 자기 집 욕조 안에 누워 있었다. 감기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는 중이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던 그는 갑자기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함께 있던 그의 약혼녀 제이미가 비명소리를 듣고 화장실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당시 그녀가 본 홉스의 상태는 너무도 절박한 사람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홉스는 낮은 욕조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살려달라고 부르짖는 그를 보며 처음에 그녀는 장난인 줄 알고 화를 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모습을 보고는 곧 장난이 아님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홉스는 정말로 자신의 집 욕조 안에서 익사의 공포를 체험한 것이다.

익사의 공포를 체험한 홉스는 어렸을 때 강물에 빠진 적이 있어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의 공포심은 성인이 되어서도 사라지지 않고 그의 심층의식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이 병으로 인해 그 시커먼 공포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기 시작한 것이다.

홉스는 자신이 환각에 시달리고 있다고 호소했다. 그가 겪는 물에 대한 공포증은 보통의 경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물에 관련된 갖가지 환각과 악몽, 망상에 시달렸다.

의사는 그의 증상이 마치 마약을 끊었을 때 일어나는 금단현상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혹시라도 여행 중에 마약을 복용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이 들어 의사는 그에게 몇 가지 약물 반응 테스트를 실시했지만, 검사 결과 그는 그런 종류의 마약을 복용한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때까지도 의사는 이것이 감기와 연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문제는 어디까지나 정신병적인 것이라 판단, 그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조치를 취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그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또 한 사람 나타났다. 그 환자는 바로 홉스의 약혼녀인 제이미였다. 그녀는 예전부터 거미를 두려워했는데, 감기 몸살을 앓고 나서 거미에 대한 두려움이 몇 배로 증가했다. 그 증상도 홉스의 경우와 매우 유사했다.

실제로 거미가 없는데도 그녀는 온 집 안에 거미가 득실댄다고 믿고 있었다. 거미가 사방 천지에 깔려 있어 방 안에서 꼼짝도 할 수 없던 그녀는 결국 911에 전화를 걸어 자신을 구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구조대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녀는 몸을 웅크린 자세로 침대 한가운데 앉아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벌벌 떨고 있었다. 구조대원 중 한 명이 이유를 묻자 그녀는 “당신들은 이 방안에 가득한 거미가 보이지 않나요? 지금 당신들 옷 위로 기어오르고 있잖아요.” 라고 대답했다.

구조대원이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증상을 살피던 중 반팔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팔에 심하게 긁힌 상처들을 발견했다. 그 상처는 팔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온몸에 가득했다. 어떤 상처는 너무 심해서 아예 살갗이 벗겨져 염증이 나 있는 곳도 있었다.

구조대원이 원인을 묻자 그녀는 자신이 그런 거라고 대답했다. “거미가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가려워 죽겠어요. 혹시 제 몸에 알을 까려는 건 아니겠죠?” 구조대원은 그녀의 손톱에 박힌 살점들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약혼자가 있는 병원으로 후송된 제이미는 홉스를 치료했던 의사에 의해 똑같은 약물 테스트를 받았지만,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서도 마약을 복용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이 두 사람은 계속해서 환각 증세에 시달리다가, 보름이 지난 후부터는 갑자기 그 증세가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환각이 사라지고 난 후에도 그들의 공포증은 전혀 나아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전보다도 훨씬 더 자신들을 억압하는 공포의 대상 때문에 더 큰 두려움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후로 홉스와 제이미 같은 환자는 계속해서 증가했다. 그들이 사는 집에서 집으로, 마을에서 마을로, 도시에서 도시로, 심지어 바다를 건너 다른 나라로까지 급속도로 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 질병이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낮은 사망률 때문이었다.

질병에 의한 사망률은 오히려 보통 감기에 의한 사망률보다도 훨씬 낮았다. 그래서 정부에서도 방역 대책이나 역학조사와 같은 번거로운 일들을 게을리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는 발 벗고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병이 확산된 후로 자살 사망률과 살인, 방화, 총기난사와 같은 강력 범죄 사건들이 급격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국제사회가 나서서 이 병의 심각성을 경고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들은 공식적인 발표에 의한 인류 첫 번째 환자인 홉스의 이름을 따서 이 병의 이름을 ‘홉스 증후군’이라 명하게 되었다.

3

정우는 교내 식당 한쪽 구석 자리에서 혜정과 함께 조용히 점심을 먹고 있었다. 지금쯤 학생들로 붐벼야 될 시간인데도 테이블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식사를 하러 온 학생들마저도 정우와 혜정처럼 한쪽 구석 자리에 따로 몰려 앉거나 한 테이블씩 띄엄띄엄 건너 앉아서 밥을 먹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턱 밑에는 하나같이 마스크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정우와 혜정도 마찬가지였다. 식판에 밥을 타기 위해서 기다릴 때나 식사를 마친 후 일어설 때도 항상 마스크를 쓰고 움직였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되는 어떤 불문율처럼 보였다.

오늘따라 식욕이 없는 혜정은 밥알을 깨작깨작 씹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들어 정우를 보며 말했다.

“은영이 알아?”

정우는 국을 한 숟가락 떠먹고 나서 대답했다.

“누구? 송은영?”

은영은 혜정과 같은 과 친구로 정우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응, 걔도 걸렸대나 봐. 안 그래도 요즘 안 보인다 했거든. 오늘 우리 과 애들이 모여서 얘기하고 있기에 가서 물어봤더니, 얼마 전에 걔도 포비아(phobia. 공포증, 대중적으로 홉스증후군을 지칭하는 또 다른 이름.)에 걸려서 2층 자기 방에서 뛰어내렸다는 거야.”

“증상이 뭔데?”

그러자 혜정은 누가 듣기라도 할까봐 얼굴을 바싹 들이댄 채 눈치를 살피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바늘 공포증이었대. 다른 말로는 모서리 공포증이라고도 하나봐.”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던 정우의 손이 순간 움찔했다. 그것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증상이 아니던가. 혜정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한쪽 다리가 부러졌대. 그나마 다행이지. 왜 그랬냐고 하니까, 어머니가 긴 대바늘로 자신을 찌르는 줄 알고 도망치려다 그랬다는 거야. 근데 걔 어머니가 주려고 했던 건 그냥 빨대였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우는 등골이 오싹했다. 지금 정우네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은 아파트 13층이었다. 만약 자신의 어머니가 은영처럼 뛰어내린다고 한다면, 다리 하나 부러지는 것만으론 끝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종말을 암시하는 거래.”

“그만 둬. 그런 불길한 소리.”

“요즘은 교회에 가도 목사님이 요한 계시록을 낭독할 정도라니까.”

“다 헛소리일 뿐이야. 인류는 그리 쉽게 멸망하지 않아.”

“지금까지 질병이 사회에 이정도로 영향을 끼친 적이 있을까?”

“있다고 한다면, 페스트 정도겠지.”

“페스트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야. 사람들은 이 병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단순히 치사율이 높은 질병만이 위험한 것은 아니란 걸 이 병이 보여주고 있다고. 세계는 금방 대공황 상태에 빠지게 될 거야.”

정우는 도저히 못 듣겠다는 듯 젓가락을 식판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혜정도 입을 다물었다.

“다 먹었니?” 하고 정우가 말하자, 혜정은 고개만 끄덕였다.

“그만 일어나자.”

정우와 혜정은 마스크를 끌어 올려 입과 코를 가린 후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을 나온 두 사람은 근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밖으로 나갔다. 그러곤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있는 벤치로 가서 나란히 앉았다.

젊음의 열기로 가득 차야 할 캠퍼스는 그저 썰렁하기만 했다. 그것은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은 그녀의 말대로 어쩌면 대공황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우는 아직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언젠간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될 거라고, 그래서 인류가 다시 한 번 한 단계 진보할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있잖아…….”

혜정이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그 병에 걸려서 이상해져 버리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바보같이. 그런 질문이 어딨어?”

“나…… 버리지 않을 거야?”

“그걸 말이라고 해?”

정우는 혜정의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살며시 혜정의 어깨를 감싸 자신의 품에 기대도록 했다.

“나 무서워 죽겠어. 세상이 점점 미쳐가는 것 같아.”

“나도 그래. 나도 무서워.”

“곧 좋아질까? 앞으로?”

“응, 그럴 거야. 반드시. 그때까지 내가 널 지켜줄게.”

혜정은 정우의 따뜻한 품 안에서 어느 정도 안정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정우는 혜정의 종이컵에 담긴 짙고 어두운 빛깔의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치 지금의 세계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들었다.

4

화장실에 가는 것을 제외하곤 은숙이 방 안에서 나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은숙은 한밤중에 자다가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잠에서 깼다. 오늘로서 2차 증상이 시작된 지 13일이 지났다. 앞으로 이틀만 더 버티면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었다.

그동안 너무나 끔찍한 고통에 시달렸던 터라 환각을 보지 않는다고 해도 그 공포감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병에 걸리고 난 후 한 달 동안이 더 고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통계상으로도 한 달 내에 자살하는 사람들의 수가 ‘검은 보름’ 때보다도 무려 다섯 배나 높았다. 그들은 더 이상 일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붕괴되어 버린 것이다.

공포가 사람들을 잡아먹고 있다는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가 다 그런 것만은 아니다. 공포를 극복해 낸 경우도 자주 매스컴에 보도되곤 했다.

매스컴에선 오히려 그런 예를 더욱 부각시켜서 방송에 내보냈다. 당신들도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것일 뿐, 한 번이라도 그것을 체험한 사람들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은숙은 옆에서 자고 있는 남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루 온종일 누워 있다가 간만에 일어나려니까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정신을 가다듬은 후에 조용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은숙은 차라리 어두운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불을 켜지 않았다. 불을 켰을 때 뾰족한 것들이 눈에 들어 올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눈은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있어서 길을 찾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화장실 문 앞에 도착하자 그녀는 불을 켠 후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에서까지 불을 꺼놓고 볼일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볼일을 보고 나서 물을 내린 후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었다. 문득 세면대 옆에 놓여 있는 칫솔과 면도기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칫솔의 길쭉한 모양과 뾰족뾰족한 솔들이 점점 확대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면도기의 날카로운 면도날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 들어올 것만 같았다. 은숙은 질끈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곤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환상이야. 현실이 아냐. 환상이야. 환상…….’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은숙은 용기를 내서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뜬 순간, 세면대 위에 놓여 있는 칫솔의 머리 부분에서 뾰족한 가시들이 솟아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기괴한 식물마냥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게다가 옆에 놓인 면도날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요동쳤다. 칫솔모에서 나온 가시들은 세면대 거울을 타고 가시덤불마냥 계속해서 자라나고 있었다.

은숙은 얼른 화장실을 빠져나가야 된다는 생각에 재빨리 뒤로 돌아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문이 열리지가 않았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두들기며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여보! 이 문 좀 열어줘……. 정우야! 유미야! 얼른 이 문 좀 열어봐! 어서!”

칫솔모에서 자라난 가시들이 화장실 내부를 휘감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찌를 것처럼 덤벼왔다. 은숙은 울며불며 소리쳤다.

“여보! 제발 살려줘!”

그때, 부르르 떨고 있던 면도기에서 갑자기 날카로운 면도날이 팅, 소리를 내며 날아왔다. 면도날은 정확히 그녀의 목에 가서 박혀버렸다.

“히익—”

외마디 비명과 함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장실은 온통 그녀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뿜어져 나오는 피를 막아보려고 두 손으로 목을 꽉 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 사이로 피가 계속해서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화장실 안에서 죽음의 공포에 직면해 있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남편이 들어왔다. 문은 처음부터 잠겨 있지 않았다. 세형은 아내를 보자마자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아내를 붙잡아 흔들었다.

“여보! 정신 차려! 여보!”

은숙은 여전히 손으로 목을 누르고 있었다. 어찌나 세게 붙잡고 있는지 기도가 막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 그녀의 얼굴이 몹시 창백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질식해 버릴지도 모른다. 세형은 목을 잡고 있는 아내의 손을 힘껏 잡아당겼다. 하지만 손을 내리면 피가 뿜어져 나올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은숙은 끝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여보! 제발 목을 놔! 어서!”

“아, 안 돼…… 요. 크윽…… 피…… 피가 나온…… 단……, 큭.”

“무슨 피가 나온다고 그래! 피 같은 건 안 나온다고. 그러니까 얼른 놔! 제발!”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이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퍼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아빠, 왜 그래?”

“무슨 일이세요?”

뒤늦게 방에서 나온 유미와 정우가 아버지에게 물었다.

“정우야! 얼른 이리 와서 엄마 손을 좀 풀어봐! 어서!”

그때서야 정우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목을 움켜잡고 있는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엄마!”

깜짝 놀란 정우는 재빨리 아버지 옆으로 다가가 어머니의 목에서 손을 풀기 시작했다. 유미는 그 모습을 보고 비명을 질러댔다.

“꺄악—!”

“시끄러! 넌 얼른 가서 119에 신고나 해. 어서!”

세형이 딸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유미는 겁먹은 얼굴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 거실로 향했다. 그러곤 전화기를 들어 119 버튼을 눌렀다.

“엄마! 제발 이 손 좀 놓으세요!”

“여보! 힘 풀어!”

두 남자가 달려들어 힘을 쓰는데도 손은 목에서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손을 놓기에는 죽음의 공포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그녀는 차츰 의식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그 순간 손에 힘이 약해졌을 때 두 부자는 드디어 은숙의 손을 풀 수가 있었다.

은숙은 곧바로 쇼크 상태에 빠져들었다. 두 부자는 은숙을 들어 거실 바닥에 눕혔다. 곧바로 세형이 인공호흡과 흉부압박을 실시했다. 그것을 몇 차례 반복하고 나서야 은숙의 호흡이 어느 정도 안정 상태에 접어들 수 있었다.

세형은 갑자기 맥이 풀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길게 한 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정우도 마찬가지였다. 유미는 그 옆에서 젖은 수건으로 엄마의 얼굴을 닦아주며 흐느껴 울고 있었다. 은숙의 목에는 자신의 손에 의해 눌린 손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잠시 후, 119 구조대원들이 집에 도착해서 그녀를 병원으로 후송해 갔다.

5

은숙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유미의 감기 증상이 사라진 후였다. 은숙은 목이 졸린 것 말고는 아무런 외상도 없었고, 2차 증상도 끝난 뒤여서 곧바로 집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그녀는 병원에서 받은 안정제를 꾸준히 복용하며 어느 정도 심리적 안정을 되찾아 갔다. 하지만 그녀의 의식 속에 내재되 있는 공포의 인자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의사는 그녀에게 지속적인 정신과 상담을 받도록 권유했다.

감기 증상이 사라진 후로 유미는 언제 2차 증상이 나타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감기는 어제부로 끝이 났다. 그것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더 이상 머리도 무겁지 않았고,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컨디션도 꽤 좋았다. 유미는 감기가 사라진 것을 알고 처음엔 기분이 좋았지만, 곧 엄청난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것이 혹 보통 감기가 아닌 엄마가 앓고 있는 포비아라고 한다면 언제 2차 증상이 시작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유미는 감기가 끝난 하루 동안 심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것이 정말로 포비아라고 한다면,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높은 곳? 새? 어둠? 벌레? 주사바늘? 고양이? 파충류? 밀폐된 공간? 치과? 피부병? ……하지만 이런 것들은 누구나 다 조금씩 가지고 있는 공포증이 아니던가.

자신이 진정으로 심각한 패닉 상태에 빠질 수 있는 그런 것을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단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덧 하루가 지나버렸다. 그때까지 유미에겐 포비아라고 부를 만한 그 어떤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유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휴우, 역시 그냥 감기였구나. 그럼 그렇지. 괜히 걱정했네.”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아냐. 그럴 리 없어. 이건 그냥 착각일 거야. 착각.”

유미는 머리를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곤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헛것이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을수록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온 몸의 털들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 들었다. 목 뒤쪽으로부터 서늘한 냉기가 올라와서 자기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유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곤 어두운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듯했지만, 동시에 뭔가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눈 속으로 이상한 것이 하나 들어왔다. 그것은 옷장 옆에서 서서히 일어서고 있었다. 검은 형체!

유미는 재빨리 침대 위에서 일어나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다. 방에 불이 들어오자 순식간에 어둠이 물러갔다. 유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옷장 옆을 봤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안정을 되찾은 그녀는 방금 전 자신이 본 것을 애써 부정하려고 했다.

‘잘못 본 게 틀림없어. 감기 때문에 몸이 약해져서 그래. 한 숨 푹 자고 나면 괜찮아 질 거야.’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설득하며 다시 불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다시 어두워지면 그것이 또 나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녀의 손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그래. 오늘 밤만 불을 켜두고 자자.”

긴장을 했던 탓인지 갑자기 목이 말랐다. 유미는 방에 불을 켜둔 채 거실로 나갔다. 다들 자고 있을 시간이라 거실은 어두컴컴했다.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유미는 거실이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부엌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열고 안에서 차가운 생수 한 병을 꺼냈다. 뚜껑을 따서 유리컵에다 물을 따르는데, 갑자기 거실 TV가 탁! 소리를 내며 켜졌다. 유미는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유리컵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는 재빨리 뒤로 돌아 거실을 쳐다봤다.

“뭐야, 엄마였어? 깜짝 놀랐잖아.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안자고 TV 보게?”

아무 대답이 없자 유미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유리컵에 물을 마저 따랐다. 차가운 생수는 머리가 찡 할 정도로 시원했다. 물을 마시고 나서 컵을 제자리에 놓은 뒤 유미는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실을 가로질러 갔다. 엄마는 여전히 TV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미는 돌아보지 않고 “엄마, 잘 자.” 하고 인사를 하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건 방금 전에 마신 차가운 생수 때문이 아니었다.

유미는 그때서야 거실에 앉아 있는 여인이 어쩌면 엄마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왜 처음부터 엄마라고 생각했는지 자기 스스로도 의아했다.

어쩌면 이 집 안에 여자라곤 엄마와 자기뿐이라는 생각이 그런 선입견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모습도 비슷하지 않은가. 저 여자도 엄마처럼 약간 살이 찐 타입이다.

하지만 유미가 결정적으로 엄마가 아닐 거라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머리 모양 때문이었다. 헤어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아까는 왜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까?

거실을 등지고 멈춰선 유미는 머리 뒤꼭지가 쭈뼛 설 정도로 강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대로 그냥 방으로 돌아가도 될까? 아니면 뒤돌아서 누군지 확인해야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더 더욱 결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이젠 서 있기 조차 힘들 정도로 오금이 저려왔다.

마침내 방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유미는 천천히 다리를 들어 움직이려고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바닥에 붙은 다리는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강한 공포가 그녀의 다리를 꽉 옭아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