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

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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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두운 골목길로 돌아들어오는 경차의 전면등이 눈부셨다. 증기 내뿜는 소리가 아리의 귓가를 어지럽게 했다. 순사의 차였다. 아리는 다닥다닥 붙은 건물 틈새로 보이는 하늘을 따라 걸었다. 어두운 거리의 풍광을 충혈된 눈으로 훑었다. 저 너머에서 껌뻑거리는 도시 불빛들이 가까스로 아리에게 닿았다. 망막을 따갑게 찔러대는 감각이 싫었다. 아리는 입술을 불쾌하게 일그러뜨렸다. 빠드득 하고 이를 갈았다. 지끈거리는 두통 너머에서 밀려오는 파도, 그건 충동이었다. 피가, 도시를 잇는 기차보다 빠르게 온몸을 휘도는 감각이 느껴졌다. 직후 내장을 다 토할 것만 같이 역하고 끔찍한 냄새가 아리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헛구역질 해대며 아리는 돌벽에 몸을 의지했다. 극도로 예민해진 후각이 익숙한 더러움마저 낱낱이 찾아내는 통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떨리는 오른손이 주머니에서 과도를 꺼내들었다. 끼기긱 소리 내며 뽑힌 칼날을 그대로 왼 손목에 그었다. 사선을 따라 따갑게 튀는 붉은 방울이 뜨거웠다. 이윽고 거칠게 솟은 피가 진득한 냄새를 풍겼다. 끈적거리며 아프게 흘러내렸다.

진한 열상의 색은 아름답고 또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넘실대던 충동이 감정을 넘어섰다. 아리는 찰나의 짜릿함 속에서 떠오르는 환희와 떨림을 억누르지 못했다. 왼 손목 상처를 얼른 입으로 가져가 콱, 하고 물었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핏덩이가 비릿하게 느껴졌다. 상처를 저릿할 정도로 빨아대던 아리는 문득 제정신이 돌아왔다. 표정을 구기며 혀를 찼다. 골목에 인적이 드물어서 다행이었다. 혹여나 목격자라도 있었다면 아리는 그 자를 죽여야만 했을 것이다. 죽은 자에게서 흡혈할 수는 없다. 사체의 뒤처리만 귀찮아질 뿐이다.

서둘러야 했다. 스스로의 피를 마셔서 버티는 것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했다. 그러니 또다시 몸살이 도지기 전에 어떻게든 사냥감을 구해야 했다. 하지만 불쑥 뚫고 올라오는 생각이 아리의 발을 걸었다. 자신에게 누군가의 생명을 함부로 끊을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리는 지금까지 죽인 사람의 수를 자문했다. 그런 걸 따질 자격 따윈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연약한 목숨을 가진 자의 숙명이다. 아리는 매번 고민에 빠지고 마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시답잖은 도덕 따위는 목숨 앞에서 하찮았다.

피가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이젠 팔의 상처도 잘 아물지 않았다. 아픔조차도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몸은 어서 사냥감을 찾길 격렬히 원하고 있었다. 슬슬 한계였다. 머리가 돌아가질 않았다. 아리는 어느새 푸름에 물든 하늘을, 멀고도 가까운 달빛과 별빛을 새빨갛게 젖은 눈 안에 담으며 남몰래 체념했다. 마치 열병을 앓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리의 온몸은 뜨거운 동시에 차가웠다. 불어오는 바람에 오슬오슬 떨리는 몸을 추슬렀다. 아리의 머리는 깨질 듯 아파왔다. 눈알도 빠질 것 같았다. 담배, 술, 오물, 먼지, 공기, 하천, 썩어가는 쥐 사체, 고양이 똥, 음식물 쓰레기…. 오만가지 것들의 지독한 냄새가 콧구멍을 자극했다. 역한 기운이 밑바닥부터 올라왔다. 하지만 그 지독한 냄새 속에는 달콤하고 매혹적인 냄새들도, 예를 들면 땀 냄새 같은 것도 섞여있었다. 아리는 후각에 의존해 필사적으로 먹잇감을 찾았다. 좋은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무작정 움직였다. 점점 더 아파오는 머리로 어떻게든 제정신을 유지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땀범벅이 된 팔을 필사적으로 저었다. 마침내 발견한 것은 아리보다 어린 소년이었다.

아리는 사냥감에게 다가가면서 주위를 빠르게 살폈다. 인적은 드물었다. 사냥감은 손에 든 낡은 종이를 바라보는 데 열중해있으며 어깨에는 신문 가방을 메고 있었다. 아리의 머리는 뒤처리가 힘들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이미 사냥감의 뒤로 소리 없이 접근한 후였다. 아리는 가까스로 붙잡은 정신으로 사냥감의 목덜미를 잡았다. 남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더 깊고 어두운 골목 구석으로 사냥감을 밀어붙였다. 드디어, 아리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콱.

쇄골 조금 윗부분의 얇은 피부에 뾰족한 이를 박아 넣었다. 부드러운 살점을 비틀어 뜯었다. 솟구치는 뜨거운 액체를 목구멍에 흘러 넣는 때의 황홀감은 아리가 가지고 있던 고민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선언하듯 덮쳐왔다. 요동치는 아리의 심장 고동과 어딘가의 필사적인 심장 고동은 전장의 북소리가 울려 퍼지듯 격렬히 맞부딪혔다. 그러다 이윽고 하나가 되었다.

아리는 숨을 몰아쉬며 싸늘해진 사체를 놓았다. 생명을 취했다는 쾌감이 온몸을 짜릿하게 뒤덮음과 동시에 그 쾌감은 극심한 후회로 바뀌었다. 바닥을 바라보는 아리의 눈에 비치는 건 소년의 사체였다. 얼굴에는 공포와 쾌감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소년의 크게 뜨인 두 눈에 담긴 놀람이나 두려움, 짜릿함. 피부의 굴곡마다 남은 필사적인 머리 굴림의 흔적들. 아리는 그것들을 감히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밀려오는 고민들을 떨쳐버리듯 우선 몸을 움직였다. 뭔가 쑥 빠져버려 창백한 사체의 눈을 감겨줬다. 부드러운 부위의 살점을 이로 조심스레 물어뜯어 허리춤에 매달린 얼음주머니에 포개 넣었다. 피에 비하면 별로 맛있지는 않지만 허기를 달랠 수 있다. 아리는 피와 살점을 먹음으로서 순환하는 생명 고리의 한 축을 자신이 담당할 수 있게 된다고 믿었다. 아리는 남은 잔해와 내장 부위들과 찢어진 옷가지, 기타 소유물들을 분류해 돈이 되는 건 챙겼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신문이 잔뜩 들어있는 소년의 가방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 근처 산에 가지고 들어가 묻어줄 생각이었다.

아리는 자리에 선 채로 두 손 모아 합장했다. 짧은 의식을 끝내고나서 작은 가방을 등에 억지로 맸다. 아리는 어서 뒤처리를 끝내고 학교로 가야 한다는, 들키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급한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의 구석, 아리의 그림자가 사라진 곳에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햇살이 비쳤다. 바닥에 말라붙은 혈흔이 탁하게 빛났다.

2

말라붙은 핏자국이라고, 골목 바닥의 붉은 흔적을 본 쿠로사와 이치고 순사는 직감했다. 조선인 거주구역은 본디 치안이 좋지 않았다. 이곳은 막다른 골목이니 근거는 충분했다. 허리춤에서 뽑아낸 간이 탐지기를 흔적 위에 올려두고 버튼을 눌렀다. 톱니바퀴가 털털대며 돌아가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서, 이치고는 발걸음을 조금 옮겨 근방을 돌아보았다. 골목 입구 쪽에는 조선인 남자 한 명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그가 순찰 중인 자신의 차를 멈춰 세웠다. 이곳에서 사람이 죽은 것 같다고, 핏자국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이치고는 근방에서 그나마 평판이 좋은 순사에 속했다. 조선인들을 윽박지르거나 멸시하지 않는 것만 해도 그네들 입장에서는 양반이었다. 그렇기에 별 거 아닌 핏자국에도 칼 차고 총 매단 순사에게 말을 걸 수 있었으리라.

간이 탐지기의 탐지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이치고는 남자에게 걱정 말고 가보라 전했다. 남자는 고맙다며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대다 얼른 물러갔다. 순찰차에 기대서서, 이치고는 붉게 점등한 탐지기를 손에 들고 가만 바라보았다. 누구의 피 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치고는 최근 신문을 배달하던 소년 한 명이 근방에서 실종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온 것을 알았고, 이 자국이 그 소년의 피라고 직감했다. 근거는 불충분했다. 유일한 단서는 이 혈흔이 근시일 안에 생겼다는 것뿐이었다. 이치고는 무능한 순사가 아니었다. 정확하지 않은 직감을 맹신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단 한 가지, 이치고가 일본군 소속 기술 장교 직속부관에서 조선총독부 휘하 조선인 거주구역 담당 순사의 위치까지 밀려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치고는 흡혈귀에 집착했다. 그리고 이 혈흔의 원인이 흡혈귀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치고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존재했다. 이 구역에서 어린아이가 실종되는 일은 한 두 번 일어난 게 아니었다. 그것은 나름의 주기를 가지고 발생했다. 이번 실종자도 마찬가지로 그 주기 안에 들었다. 또한 이 주기 안에 실종된 아이들 중 시체를 발견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보통 이런 일들은 어린아이를 납치해 팔아넘기는 조직의 소행일 가능성이 컸다. 보통 이런 조직들은 서의 윗대가리에게 돈을 찔러주곤 했다. 때때로 발견되는 혈흔들이 분명한 증거가 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칙칙 증기를 내뿜는 차안에서 핸들을 잡은 채, 두 눈을 조금 가늘게 뜨며, 이치고는 이 직감과 증거가 흡혈귀를 가리킨다고 믿음을 굳혔다. 자신의 연인을 죽인 그 가증스런 원수의 동족이라고.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