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랗게 물든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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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기가 힘들다.

나는 서른에 가까운 몸을 질질 끌며 발코니로 향한다. 다시 얼굴을 찡그리며 멈춰 후드 티의 모자를 뒤집어쓴다. 어두운 그늘이 얼굴을 가린다. 바닥에 시체처럼 널브러진 만화책을 검은 발가락으로 툭툭 밀치며 결국 발코니의 타일을 밟았다. 빗방울이 5층짜리 임대아파트를 비스듬히 치고 들어온다. 습기에 묻어올라온 썩은 곰팡내가 익숙하다.

나는 난간에 조금 떨어져 찡그러진 시선을 옮겼다. 잘게 자른 내장 같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뒷산에 비를 뿌려대고 있었다. 쏟아질 듯 경사에 박힌 나무가 가지를 흔들어 댄다. 밤 동안 수면을 파고들던 고양이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나는 진통제의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씹듯이 숨을 뱉어냈다.

아이들의 짧은 비명 소리가 빗속을 갈랐다. 몇몇의 아이들이 흠뻑 젖은 채 페인트가 벗겨진 정글짐 속을 돌아다닌다. 한 아이가 위태위태하게 공중에서 균형을 잡더니 곧 웅덩이로 뛰어내린다. 박수를 치던 아이들도 구조물에 올라선다. 도리어 내 심장이 뛰고 있었다. 자칫 미끄러지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

해마다 많은 아이들이 순간의 경솔함에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뒷산을 기어오르던 아이의 비명횡사가 떠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몇 년이 지나도 말뚝 박힌 기억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놀이터의 아이들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거침없다. 뼈대 위에 올라선 여자 아이가 비틀거리다 겨우 균형을 잡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듯 조급하고 답답하다. 그 광경에 빠져 핸드폰이 울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엄마?”

우습지만 나는 아직 어머니를 엄마라 부른다. “괜찮니?”하고 묻는 엄마는 이어 주름 같은 한숨을 뱉어낸다. 내가 갑자기 어른이 된 사이, 엄마는 갑자기 노인이 되어 버렸다. 말하자면 젊은 노인이었다. 비가 오면 토실한 무릎을 붙잡고 낑낑대면서도, 역시 병원에 가는 날이라고 전화를 한 것이다.

“준비하고 있어. 엄마가 데리러 갈게.”

엄마의 말투는 여전히 엄마였다. 초등학교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러운.

멍하니 빗줄기 사이에 시선을 멈췄다. 20년 전의 기억이 아이들의 외침 소리 가운데 불룩 솟아날 것만 같았다. 퍼즐 조각을 잃은 아이처럼 조바심이 앞선다. 기억, 기억이 문제였다. 다른 것보다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은 떠오르지 않는 그것이었다.

내 친구 상우는, 아홉 살의 상우는 그때 죽었다. 바닥에 번지는 핏물처럼 아홉 살의 내 기억도 흐릿했다. 흐릿한 부분은 상우의 죽음을 바라보던 몇 초간이었다. 아니, 몇 분간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잘 모르겠다.

검붉은 살덩이 위로 돋아난 수염을 어루만지며 멍하니 빗줄기를 바라볼 뿐이다.

아줌마는 상우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었다. 수녀 같은 검은 치마 아래로 하얀 발목을 드러낸 아줌마는 크레파스 통을 손에 쥔 채 해맑게 인사했다.

치와와 같은 눈동자에 샴푸 냄새 풍기는 머리카락이 비스듬히 내려와 앙상히 드러난 어깨를 감은 모습은 엄마가 자주 보는 드라마의 여주인공을 떠올리게 했다. 진주 귀걸이는 창백하고 긴 목덜미로 외롭게 흘러내렸다. 보통의 아줌마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애잔한 분위기가 주위 공기를 물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가방을 고쳐 매며 상우 옆에 섰다. 엘리베이터는 곧 붕 뜨는 느낌을 심장에 전달했다. 학교 친구들은 이 느낌 때문에 우리 아파트에 놀러오곤 했다. 88올림픽이 끝나면 엘리베이터 있는 고층 아파트들이 많이 생길 거라고 나는 친구들에게 자랑스레 말해 주었다. 물론 아빠에게 주워들은 얘기였다.

땡하고 열린 문 사이로 포개진 자전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줌마의 눈빛이 상우의 얼굴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등 뒤로 닫히는 동안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줌마의 말, 그러니까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하고 와.”가 분명했을 그 말은, 문이 닫히는 바람에 ‘공부’에서 토막 났다.

현관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린 나는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리 쓸쓸한 기분에 젖어들었는지 모르겠다. 아줌마의 아련한 눈빛 때문인지…….

우리는 G.I. 유격대나 새로 나온 오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골목골목을 걸었다. 중간 정도 왔을 때 크레파스를 안 가져 온 것을 깨달은 상우의 얼굴엔 당혹한 표정이 역력했다.

“다시 돌아갈까?”

뿌연 먼지가 바람을 타고 골목을 휘저었다.

“그냥 가자, 내 것 빌려줄게.”

집에 갔다 오면 지각할 것이 뻔했다. 색은 좀 적지만 내 것을 같이 쓰는 게 나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사실 상우의 크레파스는 너무 컸다. 탐날 정도로 많은 색을 가지고 있었는데 금색과 은색도 두 개나 있었다. 상우가 조르지 않아도 아줌마는 최고 좋은 것으로 사주었다.

나도 그런 엄마를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우리 엄마는 용돈도 200원밖에 주지 않았는데 그것으론 오락을 네 판밖에 못한다. 게다가 상우 엄마보다 훨씬 뚱뚱하고 머리카락도 너무 보글보글했다.

미술 시간에 엄마를 그리는데 딱 떠오르는 것이 보글보글한 파마머리였다. 검은색으로 돌리면서 퍼지게 하니 엄마랑 꽤 비슷한 모양이 나타났다. 상우는 그걸 보며 똑같다고 웃어 댔다.

나는 억지로 따라 웃었다. 상우의 스케치북 위에는 예쁜 아줌마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상우는 색을 칠하다 말고 점수가 매겨진 산수 시험지를 책상 밑으로 힐끔거리며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빠의 얼굴을 옆에다 그리려다 생각이 나질 않아 대충 문질러댔다. 사우디에서 일하니까 분명히 얼굴이 까매졌을 테니, 검은색으로 칠해야 할 것이다.

상우가 시험지에서 눈을 돌려 까만 얼굴을 보더니 또다시 기분 나쁘게 실실 웃어댔다. 선생님이 상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가 미인이시네.”하고 말하자 상우의 입이 헤 벌어졌다. 나는 운동장에 날리는 먼지를 바라보다 배경을 노란색으로 쓱쓱 칠해버렸다.

청소가 끝나고 나는 슬쩍 상우에게 물었다.

“오늘 오락실 갈 거지?”

그는 대걸레를 어깨에 걸친 채 고개를 갸우뚱 했다. 갈망하는 눈빛을 뒤로 한 채 상우는 “모르겠어.” 한 마디를 남기고 수돗가로 달려갔다.

나는 쫓아가 졸랐다. 꼭 ‘더블 드라곤’의 세 판 왕이 보고 싶다 솔직하게 얘기도 했고 같이 안 가주면 다신 안 놀아준다고 위협도 했고 아쉽지만 내 용돈으로 시켜준다고 입술을 깨물며 말하기도 했다.

제안에 살짝 끌린 듯한 표정이 일더니 “오늘 집에 빨리 가봐야 해.” 툭 던진 뒤 복도의 그늘로 숨어버렸다. 노을이 번진 골목길을 지날 때도 나는 집요하게 부탁했지만 상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커다란 도로의 건널목 앞에 서 있는데, 가게 앞쪽에 몰려 있는 아이들이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내가 먼저 아이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자 상우가 따라 들어왔다.

아저씨가 나눠주는 책받침 한쪽은 속셈 학원 광고였고 반대쪽엔 초등학교 2학년에게 절실히 필요한 구구단이 적혀 있었다. 나는 책받침 두 개를 받아 하나를 상우에게 건넸다.

우리는 잠시 대화를 중단한 채 책받침을 황홀하게 쳐다보았다. 트럭 하나가 노란색으로 반짝이는 먼지를 날리며 지나가자 파란 불이 들어왔고 우리는 여전히 책받침에 시선을 둔 채 횡단보도를 밟았다.

중앙의 노란 두 줄 위에 멈춰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 하나 더 받아올까?”

그 다음, 기억이 희미하다. 상우의 눈이 반짝이며 몸을 돌리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이 없다. 우리 몸뚱이 크기의 바퀴가 세상을 삼킬 듯 두터운 비명을 질렀고 상우의 살갗이 아스팔트 바닥에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빨간 물감이 내 눈동자 속에서 아롱거렸다.

타이어 냄새가 짙게 퍼지며 굳어버린 내 몸을 감싸 돌았다. 가슴팍이 휑하니 뚫린 것 같고 몸속의 내장이 엉덩이까지 축 처진 기분이었다. 누런 먼지가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하늘로 경적 소리가 엉겨 붙었다. 눈앞에서 뭔가 복잡하고 빠르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큰 일이 벌어진 걸까? 아닌가? 나는 부유하듯 그들을 바라보다 가방 끈을 쥐어 잡고 남은 횡단보도를 건넜다. 반짝이는 녹색 불빛이 어지럽게 눈동자를, 곧이어 뒤통수를 물들였다.

보도블록 틈새로 튀어나온 잡초들과 눈을 마주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오락실에 닿아 있었다. 어두컴컴한 공간과 기계 맛이 나는 공기는 언제나 세상을 잊게 해준다.

나는 주머니를 비운 다음에도 한동안 모니터의 백색 불빛을 응시했다. 정말 상우가 죽은 것일까? 순간 머릿속이 멍해지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근원 모를 죄책감이 목덜미와 어깻죽지를 무겁게 눌렀다. 하늘에 뜬 별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나는, 산수 시험지를 꺼내 전봇대 구석에 묻었다. 엘리베이터의 노란 불빛은 무심하게 내 무게를 떠안았다.

엄마의 그늘에서 나는 곧 울음을 터뜨렸다.

“상우가 죽었대.”

말을 흘리고 다시 울었다. 엄마는 파마약 냄새를 풍기며 나를 끌어안았다. 내 옷은 땀으로 축축했다. 엄마는 기진맥진한 나를 옆에 눕혀두고 한 손으론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드라마에 시선을 두었다.

나는 엄마의 체온 아래 눈을 숨긴 채 병원으로 뛰어갔을 아줌마를 상상했다. 우는 모습이어야 할 텐데 상상 속의 아줌마는 지독히도 무표정을 유지했다.

엄마는 드라마 때문인지 아니면 상우의 죽음 때문인지 “쯧쯧쯧.” 소리를 듬성듬성 뱉어냈다. 기름보일러의 낮은 울음소리와 엄마의 체온 속에서 나는 금세 잠에 빠져 들었다.

88올림픽의 첫 금메달 소식으로 아침을 맞은 날, 나는 여느 때와 같이 도시락 통을 들고 집을 나섰다. 친구가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났고 새로운 짝꿍에 적응하던 중이었다. 오락실에선 혼자 할 수 있는 레슬링 게임만 했고, 나쁜 기억이 박힌 횡단보도를 피해 다른 곳으로 건넜다. 그러다 보면 잊게 될 거란 막연한 생각이었다.

10층, 땡.

아침 공기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흘러들었다. 두 명의 어른이 타고 있었는데 한 명은 모르는 사람이고 한 명은 상우 엄마였다. 나는 시선을 마주치고 움찔했다가 이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인사를 했다. 괜히 목소리가 떨렸다.

아줌마는 그때처럼 검은 치마와 하얀 티셔츠로 몸을 감쌌지만 공허한 눈동자 밑으로 엷은 살들이 금방이라도 퍼런 피를 토해낼 것 같았다. 귀밑머리 사이로 드러난 진주는 누런빛을 발했다.

“학교 가니?”

당연한 질문 하나에 나는 다시 움찔했다.

“네.”

목소리는 죄지은 사람처럼 작았다.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아줌마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눈동자는 분명 앞을 향해 있었다. 아줌마의 앙상한 손가락이 내 목덜미로 올라왔다. 차가운 가스관이 살 속으로 기체를 불어넣는 느낌, 그 싸늘한 기운에 순간 움츠려 손가락을 피했다.

“공부 열심히 해라.”

나는 대답도 못한 채 1층 현관으로 뛰어 나왔다. 책가방 안에서 도시락 통이 철렁거렸다.

아침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눈 안쪽에서 못 박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것 같았고, 특히 관자놀이 부분을 누르면 아팠다. 참아볼까 하다가 결국 양호실로 향했고 알약을 삼킨 뒤 오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깨어나 보니 흠뻑 젖은 티셔츠는 침대에 달라붙었고 목가엔 땟물이 흘렀다. 꿈을 꾼 것 같은데 떠오르는 건 없었다. 집으로 가는 내내 기억을 짜내보려 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1층, 땡.

나는 무심코 안으로 들어가려다 익숙한 치마 앞에 우뚝 섰다. 아줌마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 뒤 시선을 피해 안으로 들어와 섰다. 끼이익 엘리베이터는 한 살이 채 되기 전에 신음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버튼 주위에 동그랗게 때가 끼어 있었다.

“상우랑 같이 있었니?”

황사처럼 지독히도 건조한 목소리였다.

“네?”

5층, 6층. 엘리베이터는 느릿느릿 움직였다.

“상우랑 같이 있었니?”

“아니요.”

나는 순간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말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순간으로,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로서 평소 행실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나는 거짓말이 싫었다. 엄마는 거짓말을 더욱 싫어했다. 내가 거짓말을 하다 들키면 비오는 날 먼지 날 정도로 맞는다. 엄마의 두툼한 손바닥은 꽤 아프다. 엉덩이가 벗겨지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도 거짓말을 싫어하게 된 것이다.

7층, 8층…….

귀고리의 달랑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빨갛게 떠오르는 숫자를 보는 동안 숨통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심장은 전기밥솥처럼 요란하게 울려 댔다. 온몸의 닭살이 일제히 일어나 피부를 탈출할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치마의 검은 그늘이 엘리베이터 안을 밀봉하진 않을까. 결국 아줌마의 얼굴과 내가 남을 듯한 상상에 어깨가 저려왔다. 쓰러질 듯 아득한 느낌이 이어졌다.

나는 어느새 엘리베이터를 나와 복도를 달렸고 엄마의 품에서 불안한 숨을 씩씩 뱉어내고 있었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아줌마의 시선이 묻어온 듯했다.

“엄마, 상우네 엄마가 이상해.”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를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아침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보고, 저녁에도 보고……”

말하면서 문득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나는 텔레비전 앞으로 뛰어가 앉았다. 유도 선수들이 화면 안에 엉켜 뒹굴고 있었다. 태극기를 흔드는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아줌마도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까.

순간 상우의 집이 떠올랐다. 가구가 꽉 차 있고 형형색색의 벽지로 도배된 상우의 방과는 대조적으로 거실은 무척이나 썰렁했다. 서랍장 위에 텔레비전 하나만이 빈 공간을 차지할 뿐이었다. 이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냥 그곳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싫었다. 공기도 싫었다. 나는 막연히 13층과 10층의 공기와 달라서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부른 배를 쓰다듬던 중에 어둠이 찾아와 창문에 달라붙었다. 엄마는 드라마를 보다 움찔하더니 계란 사오는 것을 잊었다고 말했다.

나는 엄마의 풍만한 허리에서 떨어져 나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엄한 눈초리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엄마는 내게 천 원짜리 두개를 건네더니 텔레비전의 볼륨을 올렸다. 나는 뒤돌아 울상을 지으며 복도로 나왔다.

철컥. 등 뒤에서 현관문이 닫혔다. 농도 짙은 어둠이 난간 위로 넘어오려는 것 같았고 복도의 노란 등은 겨우 자신의 존재만 밝힐 정도로 미약했다. 세 개의 현관을 지나는 동안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아줌마가 엘리베이터 안에 있으면 어떡하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상상의 공간을 헤집어 들어오는 무언가를 나는 막지 못했다. 그곳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아줌마가 있었고, 조각난 상우가 웃고 있었다. 고무 타는 냄새도 새어 들어왔다.

복도의 어둠을 헤치며 애써 좋은 기억을 떠올렸다. 상우 집에 놀러 가면 아줌마는 어김없이 과일을 잘라왔고 치와와 같은 눈으로 방긋 웃으며 내 볼을 살짝 당겼다. 내가 상우의 G.I. 유격대를 부러운 듯 바라보자, 아줌마는 그중 하나를 내게 건넸다.

“상우가 주는 거니까, 둘이 친하게 지내. 알았지?”

아직도 그 장난감은 내 책장 한 편에 자세를 잡고 서 있다.

주황색 불빛이 엘리베이터 앞에 떨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18층에 머물러 있는 모양이었다. 걸어 내려갈까? 계단 쪽을 슬쩍 바라보다 용기를 내어 버튼을 눌렀다. 기다란 복도에 인기척은 없었고 난간 밖으로 비치는 하늘은 먹물을 먹은 듯 까맸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에 힘을 주었다. 나는 주근깨 많은 상우보다 키도 한 뼘 정도 더 컸고 몸무게는 5킬로나 더 무거웠다. 팔씨름도 더 잘했고 밥도 더 많이 먹었다.

“14층, 13층…….”

숫자를 따라 중얼거리던 나는 양쪽 허벅지살을 번갈아 주무르다 나도 모르게 계단으로 달려가 숨었다. 발소리가 삼킨 공기가 섬뜩한 찬기를 뱉어냈다.

10층과 11층 사이의 어둠 속에 소화전의 빨간 전구가 희미하게 빛났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바닥의 차가운 기운이 무릎을 타고 올라오는 사이 땡 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비스듬히 열리는 문을 보는데 오줌이 마려워졌다. 설마, 설마 하면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문이 완전히 열리고 덩어리 같은 침묵이 찾아온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노란 불빛이 새어나왔을 뿐, 인기척은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순간 크게 웃을 뻔했다.

계단 한쪽에 숨어 있는 꼴이라니.

문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버튼을 누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문 사이로 뻗어 나온 손가락이 내 생각을 가로막았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미끄러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아줌마였다.

아줌마는 고장난 등대처럼 멈춰 서서 시선을 돌렸다. 복도 끝에서 계단까지. 나는 내밀었던 얼굴을 빼내고 몸을 움츠렸다가 슬며시 엉덩이를 끌어 반대편 벽에 붙었다. 소화전의 빨간 불빛과 마주친 나는 눈을 꽉 감고 무릎을 잡아당겨 안았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계단 위로 퍼져 올라왔다. 엉덩이로 계단의 한기가 스며들었지만 나는 꼼짝하지 않고 들려오는 발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바닥 긁히는 소리는 불규칙한 간격으로 들려왔지만 거리감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숨소리를 숨기려는데, 심장이 말을 듣지 않고 뒤통수를 울려댔다. 설마 이쪽으로 오진 않을 거야. 아줌마의 얼굴이 떡하니 놓여 있을 것 같은 상상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등줄기로 후끈한 열기가 땀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둠 속으로 밀려드는 상상들을 뿌리치기 위해 눈을 떴다. 여전히 어두웠고 빨간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경적 소리가 울리더니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지익 발 끄는 소리가 이어졌다. 다가오는 건가? 아니, 멀어지는 건가? 금방이라도 핏기가 올라 터져버릴 듯한 아줌마의 눈동자가 상상의 공간을 찌르고 들어왔다.

땡,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가 들렸고 문 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신발을 끄는 소리, 그리고 문 닫히는 소리. 나는 슬며시 복도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주황색 불빛이 꿈틀거리는 복도엔 진득한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어두운 부분까지 살피던 나는 냅다 계단 아래로 뛰기 시작했다. 숨통이 터질 것 같았고 허벅지가 불이 오르는 듯 뜨거웠다. 내 발소리가 메아리쳐 울렸다. 아줌마가 쫓아오는 발소리가 아닐까.

1층에 닿은 후에도 멈추지 않고 쫓기는 사람처럼 뛰었다. 슈퍼마켓의 불빛 아래서 한참이나 숨을 골랐다. 돌아올 때도 계단을 이용했다. 10층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아줌마 옆에 서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다리가 후들거리며 집에 돌아온 나는 거의 녹초가 되어 침대에 쓰러졌다. 두통과 몸살은 밤새도록 내 몸을 쥐어짰고 결국 학교에 가지 못했다. 내가 하루를 쉬는 동안 학교에선 안 좋은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억지로 엄마의 손을 끌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다. 어른들이 몇몇 타고 있었지만 아줌마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바보 같은 걸까. 아줌마를 하루에 세 번 마주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왜 자꾸 벌서는 기분이 드는 걸까.

좁은 골목의 양 담벼락이 조여들고 내 몸뚱이가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쓰레기를 뒤지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노려보더니 담벼락으로 뛰어올라 사라졌다. 늘 상우와 함께 걷던 골목길인데도 처음 지나는 듯 낯설게 느껴졌다. 나는 가방 끈을 쥐어 잡고 학교로 내달렸다.

교실엔 낮은 웅성거림이 깔려 있었다. 친구들의 눈초리가 왠지 심상치 않았다. 그냥 느낌 탓이라 생각했다. 아줌마의 송장 같은 얼굴과 거기에 박힌 검은 구슬 같은 눈이 아롱거려 오전 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입맛이 없어 처음으로 밥을 남겼다. 계란 프라이가 반쯤 뜯긴 도시락을 덮고 멍하니 소란스런 운동장을 바라보는데, 산만하기로 유명한 동희라는 놈이 옆으로 다가왔다.

“네가 밀었다며?”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