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푸른 공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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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정말 비밀을 지켜 줄 수 있어?”

진료 시간이 끝난 지는 이미 오래 전이었지만, 윤호의 거듭된 물음에 나는 두꺼운 뿔테 안경 뒤로 보이는 그의 핏발 선 두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거의 십 년 만에 처음 만난 옛 친구에게 갑자기 들이닥쳐 잘 있었냐는 인사 대신 다짜고짜 이런 질문부터 던지는 걸 보면, 최소한 대인관계술에 관한 한 녀석은 학창시절 이후로 전혀 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친구야. 일단 앉아봐!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그러나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약속해! 절대 비밀을 지키겠다고!”

“그, 그래. 알았어.”

나는 그의 갑작스런 고함 소리에 놀라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윤호는 내가 고개를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야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그의 씨근덕거림이 가라앉는 동안, 나는 찬찬히 내 앞에 앉아 있는 대학 동기의 초췌한 행색을 뜯어보았다.

헝클어진 머리, 아무렇게나 맨 넥타이, 커피 얼룩이 묻은 셔츠에 주름이 쪼글쪼글한 바지. 그러나 더 엉망인 것은 옷차림보다도 그의 얼굴이었다.

허옇게 뜬 피부에 최소한 일주일은 깎지 않아 더부룩한 수염,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신 초조하게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벌건 눈. 이건 도저히 내가 기억하고 있던 날카로운 천재의 모습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엇이 녀석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몹시 궁금했지만, 직업상 몸에 밴 습관대로 직접적인 질문은 피했다.

“너, 요즘 잠이 좀 부족한 것 같다.”

내 말에 그는 벽에 걸린 거울을 한 번 흘깃 돌아보고는 씁쓸히 웃었다.

“대단한 추리력이군.”

*

나는 윤호의 지친 미소를 마주 받으면서 그가 말을 계속하기를 기다렸다. 불쌍한 녀석, 스트레스를 쌓아 놓다가 완전히 타버렸군. 불면증? 아니면 경한 신경증 정도? 최소한 아티반(신경안정제의 일종)으로 치료가 안 될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가 불면의 이유를 털어놓고, 내가 그의 환기(환자의 억눌린 감정을 말로 토해 내게 하는 정신과 치료의 한 방법)를 도와주는 정도로 녀석의 급한 문제는 해결이 되겠지.

“너는 신을 믿니?”

내 기대와 달리 윤호가 던져온 엉뚱한 질문에, 나는 머릿속에서 구상하고 있던 간단한 치료 계획에 일단 제동을 걸었다. 녀석, 혹시 자살 동기가 있는 거 아냐? 우울증인지 아닌지도 감별해야 했다.

*

“글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윤호는 나의 반문에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야, 임마! 내가 네 환자냐? 내가 여기 온 이유는 꼭 이야기해야 할 일이 있어서야. 난 그래도 네가 다른 사람보다는 좀 더 날 이해해 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리고 나랑은 별로 친하지 않기 때문에 널 고른 거야. 난 정신과적인 문제는 없어.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날 환자 취급하지는 마라.”

나는 약간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쏘아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 환자들, 다시 말해 병식이 없는 환자들이야말로 정말 대하기 힘든 부류이다.

병식을 갖는 자체가 치료의 기본이니만큼 이런 환자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부터 인정하게 해야 한다. 예정에 없던 옛 친구의 방문은 생각보다 길어질 듯했다.

*

“아, 그런가? 미안, 미안. 그럼 뭐, 우리 편하게 사는 얘기나 좀 하지. 그래도 상황 봐서 진료비는 청구할지도 몰라.”

내가 씩 웃으면서 의자에 몸을 기대자, 윤호도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우리의 호프이신 천재 과학자님.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 장가는 갔어?”

내 물음에 그는 눈을 감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깊은 주름이 그의 입 주위를 파고 들었다. 단지 그가 아직도 열렬한 독신주의자이기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힘겹게 다시 숨을 들이마시던 그는 이미 충분히 느슨한 넥타이도 갑갑하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겼고, 덕분에 학부 시절 화학 약품 사고로 인해 생긴 화상의 일그러진 흉터가 셔츠 컬러 위로 언뜻 모습을 드러냈다.

학생 때는 그 흉터를 가리기 위해 한 여름에도 와이셔츠 맨 윗단추까지 꼭꼭 채우고 다니더니, 지금은 상관도 하지 않는 듯했다.

잠시 후 반쯤 눈을 뜬 그가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

“죽을 맛이야. 죽을 맛. 주위의 어느 누구도 날 이해해 주질 않아. 그리고 어디 가서 달리 털어 놓을 데도 없고. 사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는 쉽지 않아. 어디서든 미친 놈 취급 받기 딱 좋은 얘기니까.

하지만 이런 얘기를 들어주는 게 네 일이잖아. 너라면 내 얘길 심각하게 들어줄 테니까. 그래서 오늘 널 찾아온 거야. 참, 너 정말 비밀은 지켜야 해. 누구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이 얘기를 해선 안 돼.”

윤호는 거듭 나의 다짐을 받고서도,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며 한참을 주저하다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나는 그가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메모를 해 가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글쎄,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너도 알다시피 난 대단한 놈이야. 졸업 후 우리 연구소에서 날 특채해 간 건 그만한 가치가 있어서라고. 물론 나두 의사라는 직업이 싫었던 건 아냐. 하지만 연구소에서는 웬만한 봉급쟁이 의사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액수를 제시했지.

아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돈 때문만은 아니었어.

사실 의사란 게 그렇잖아. 고장난 데 고치는 것뿐이지, 창조란 게 없잖아. 난 그런 삶을 살기가 싫었어. 임상의학을 포기한 데는 돈보단 그런 이유가 더 컸어.

그 후론 너도 알 거야. 우리 연구소가 나한테 뿌린 돈의 대가는 충분히 보상받았지. 너도 봤지? 신문에 심심치 않게 내 이름 오르내리는 거.

지난 10년간 내가 찾아낸 유전자만 해도 사, 오십은 될 거야. 우리 연구소는 그걸 상품화해서 엄청난 이득을 봤어. 나도 이젠 노벨상 후보에 이름이 거론되는 명사가 되었고.

그런데 이놈의 유전자들이란 게 정말 끝도 없더란 말이야. 아무리 찾아도 아직 못 찾은 게 남아 있어. 서로의 관계도 얽히고 설켜서, 뭐가 뭘 촉진하고 뭐가 뭘 억제하는지 도저히 모를 것들 투성이고.

어느 날은 퍼뜩 그런 생각까지 들더란 말야. 이거 내 인생도 신이란 미치광이가 만들어 놓은 작품을 뜯어보고 구경하느라고 다 보내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어쨌건 한 1년 전쯤의 일이야. 난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하던 중 우연히 괴상한 염기 서열을 발견했어. 무슨 기능을 하는 놈인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그게 영 쉽지 않더라고.

단백을 코딩하는 기존의 유전자와는 구성 염기 자체가 다른 녀석이었지. 난 모든 걸 팽개치고 거기에 매달렸어. 거기에는 무언가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거든. 그땐 마치 무슨 열병에 걸린 것 같았지.

난 역시 대단한 녀석이야. 단지 6개월 만에 그 염기 서열의 시퀀스를 다 밝혀냈고, 그 기능까지도 알아냈네. 그게 뭐였는지 아나?

후후, 보채지 말게. 다 얘기해 줄 테니까.

너도 알겠지만 인간이란 하나의 세포에서 출발하지. 정자와 난자라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두 세포가 만나서 하나가 되고, 그게 분열에 분열을 거듭해서 하나의 인간이 되는 것 아닌가.

물론 그 과정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무수한 제어가 필요해. 어떤 효소가 언제 출현하여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어떤 세포가 어떤 장기로 분화되어 나가야 하는지, 어느 단계에서 어느 호르몬이 분비되고 어느 조직에 작용을 해야 하는지, 이 모든 것에 대한 조절이 완벽하게 이루어질 때에야 하나의 제대로 된 인간이 만들어진단 말이야.

줄기세포에 몰빵했던 연구소들 다 말아먹은 것도 바로 이 문제였던 거 기억하지? 환자에 이식한 줄기세포들이 제어를 상실하고 암으로 분화해서 환자들 죽고 난리 났던 거……

그리고 그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안 됐어. 부분적인 장기 분화의 제어조차도 그렇게 간단치 않으니, 하나의 세포에서 하나의 인간 개체가 탄생할 때까지의 제어란 것이 얼마나 복잡한 난제인지 상상이 가니?

그게 상상이 간다면 내가 그 염기 서열의 비밀을 알고 나서 처음 느꼈던 감동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건 경이 그 자체였지. 그 서열은 단순한 유전자가 아니었어.

거기엔 한 인간의 수정에서 각 조직의 분화와 성장, 그리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에 필요한 제어 정보가 순차적으로 기록되어 있었던 거야! 인간의 일생에서 필요한 모든 유전자들이 언제 어떻게 움직여 줘야 하는지가 순서대로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단 말이야!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한 인간의 ‘운명’을 유전자상에서 직접 눈으로 보는 감격을 넌 이해할 수 있겠니? 나는 인간에게 지금까지 금지 구역이었던 신의 도서관에 들어가 그의 비밀을 훔쳐보고 있었던 거야!

후후, 물론 이해하기 힘들겠지. 그건 기존 유전학의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는 발견이었지. 아마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신과 나밖에는 없을 테니까. 그래, 난 오만했지. 그리고 그 오만함이 지금의 문제를 일으켜 놓은 셈이야. 젠장.

난 그 염기 서열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 내 속에 잠들어 있던 창조 욕구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단 말이야.

그래. 이제 나는 신의 비밀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이제는 그가 만들어 놓은 작품을 감상하고 찬미하는 데 그치지 말고 나의 아담을 창조해 보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단 말야.

그런 실험이 당연히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난 알았지. 그래서 연구소에서 기자재와 시약을 빼돌려 집 지하실에 따로 실험실을 차렸어. 그러고는 내 피에서 분리해 낸 백혈구 세포를 이용하여 체세포 배양을 시작했지.

하지만 간이 실험실에서 적절한 배양 조건을 맞추기는 쉽지 않았어. 난 빈혈 증상으로 비틀거릴 때까지 내 피를 뽑은 다음에야 배양에 겨우 성공할 수 있었네.

배양된 체세포의 게놈을 이용해 초기 배아세포를 만든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어. 염기 서열에 기록된 ‘운명’의 순서대로 개체분화만 제어해 주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 후로 나는 내 집 지하에 만들어 놓은 인공 자궁에서 내 세포 하나가 하나의 태아로 커가는 걸 지켜보았지. 아이를 밴 어머니의 심정이 이런 거구나 하는 게 이해가 가더라고.

직장은 아예 휴직원을 내고 하루 종일 그 옆에서 내 아기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돋아나는 걸 지켜보았어. 그의 눈과 코가 모양을 갖추고, 그 조그만 입이 인공 양수 속에서 뻐끔거리는 걸 보고 있는 즐거움은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하지만 녀석의 성장은 너무나 더뎠고, 조바심을 견디다 못한 나는 그의 성장속도를 빠르게 조절해 버렸네.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