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길: 내리막길

  • 장르: 호러, 일반
  • 평점×5명 | 분량: 98매
  • 소개: 누군가의 어떤 한 시기에 대한 이야기 ※<두 갈래길>의 수정증보판입니다. 더보기

두 갈래길: 내리막길

— 본 작품은 무료이지만, 로그인해야 읽을 수 있습니다. —
미리보기

나의 스무 살은 괴로운 나이였다.

 

수없이 들어왔던, 소위 성인이 된 후의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어쩌면 속아 넘어가는 체 하면서도 조금은 기대를 걸었던 탓일지 모른다. 낯선 환경에 또다시 적응하고, 낯선 사람들 틈에서 과제에 시달리고, 낯선 캠퍼스를 어정거리며 시간을 죽이다보면 하루가 사라졌다. 술자리와 새로운 만남을 떠들며 파도처럼 밀려왔다 몰려가는 사람들의 발에 채여 둥둥 떠다니는 건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짓눌려 있었다.

 

이건 그 시기의 이야기이다.

 

 

 

 

 

 

 
* * *
 

 

 

 

 

 

 

“어디?”

 

“자연관 말이야. 지하 1층 화장실에서 뭐가 나온대.”

 

“자연관에서 나온다니 웃겨죽겠네. 왜 하필 자연관이야?”

 

“아니, 귀신이 과학의 힘으로 성불되는 것도 아니고. 문과 이과를 가리진 않을 거 아냐!”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A가 툴툴거렸다.

 

우리는 동아리방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둘 뿐이라 눈치 줄 사람이 없어서 배달받은 돈까스를 느긋이 찍어 먹는데, 불쑥 튀어나온 화제가 저것이다. 이상할 건 없었다. 애당초 우리가 소속된 동아리는 미스터리와 호러를 애호하는 집단이다.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추리소설을 수집’하는 곳이었지만 점점 범위를 넓혀 지금에 이른 듯했다.

 

“선배는 뭐라는데?”

 

“몰라. 아직 안 만났는걸.”

 

동아리의 존재를 알게 된 건 A와의 우연한 재회 덕분이었다. 개강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맛없는 학식에 항복한 내가 빌빌거리며 아무 식당에 들어갔을 때, 안에 A가 있었다. 3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지만 우리는 어제 헤어진 것처럼 수다를 떨었다. 연락이 없던 것에 대한 진심이 반쯤 담긴 사과부터, 대학 생활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동아리 역시 화두에 올랐는데 A가 봐둔 곳이 있다, 하고 운을 떼었다.

 

고등학교 때 알았던 사람이 있다. 친하진 않고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원래라면 아무런 접점도 없었을 테지만, 어쩌다 서로 무서운 이야기에 관심이 있는 걸 알아서 가끔 대화한 정도.

 

관심을 넘어서 유별났지. A가 덧붙였다.

 

여하튼 그 사람이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보지 못했는데 대학에 들어와 보니 같은 과 3학년 선배더라는 것이다. 검정고시를 치른 뒤 일찍 대학에 들어온 듯했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짧게 안부를 묻고, 예전처럼 괴담을 좋아하느냐, 이런 동아리가 있는데…등등.

 

딱히 회원 모집에 열의가 있던 게 아니라 형식에 가까운 권유였으나 A는 단번에 승낙했다. 이왕이면 아는 사람이 있는 편이 낫다.

 

막상 어울려 보니 나쁘지 않았어. 재밌는 사람도 많고 평범한 친구들 간에 못할 얘기도 나눌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A는 나를 꼬드겼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누군가 살갑게 구는 것이 반가워서 나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가는 지금 그 때를 돌이키며 종종 포만감을 느꼈다. 아무도 채워주지 못하던 만족감이다.

 

“무슨 이야기?”

 

“꺅!”

 

A가 지른 비명에 놀라 움찔했다. 입구를 등지고 있는 그녀는 보지 못했지만 나는 빠금히 열린 문으로 선배가 들어오는 걸 보았기에 호랑이가 납셨네,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쪽에 집중한 탓에 오히려 A에 놀라 버렸다.

 

“자연관 귀신 이야기예요.” 민망함을 지우려 말을 꺼냈다.

 

“자연관?”

 

“아, 정말. 소리 좀 내고 다니라니까요. …자연관 지하 1층에, 쓸데없이 넓은 화장실 말이에요. 에타에 누가 익명 글을 올렸었어요. 한 학생이 거길 사용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더래요. 어째 주변이 뿌옇게 흐려진 것 같고. 기분이 나빠서 얼른 손을 씻고 돌아섰더니.”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 밧줄도 없이 허공에 매달려서 목이 기이하게 꺾인 사람과.

 

“손 씻을 때만 해도 거울엔 자기 밖에 안 비쳤대.”

 

“그게 언젠데?”

 

“4월 말. 귀신 얘기 자체는 그때 처음 나왔는데 그 사람 말고 아무도 못 봐서 묻혔다나 봐. 그런데 그저께 두 번째 목격자가 도망치다가 계단에서 굴렀어. 덕분에 소문이 쫙 퍼졌지.”

 

다행히 다친 사람은 가볍게 발목을 접질린 정도란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울면서 계단을 기어 올라오니 소란이 인 모양이라고.

 

“그래서, 아는 거 있어요?”

 

A가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선배에게 물었다. 괴담에 ‘유별난’ 관심이 있는 선배라면 캐낼 거리가 더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 이제야. 정작 당사자는 시큰둥했다.

 

“네?”

 

“신경 쓸 거 없어. 별 거 아니니까.”

 

“가보셨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내가 끼어들었다.

 

“가봤지. 대단치는 않았어. 그러니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으려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눈을 깜박였다. 그러곤 나를 보며 엷은 미소를 그렸다.

 

뭐, 정 가보고 싶다면야. 그것도 좋겠지.

 

나는 빈 그릇을 치우고 일어났다.

 

 

 

 

 

 

 
* * *
 

 

 

 

 

 

 

선배는 냉담한 인간이었다. 꼭 흐린 베일을 온 몸에 걸치고 사는 것 같았다. 너무 흐린 탓에 바닥에 흩어진 천의 어디를 끌어올려야 하는지 가늠도 안 되는.

 

그러나 일단 베일 안에 들어서면, 선배는 그를 찬찬히 살피더니 도로 내쫓거나 내버려 두었다. 후자의 경우는 제법 어울려 주기도 했다.

 

요컨대 어디까지나 그녀가 베푸는 관계이다.

 

우리는 정기모임 겸 신입 환영회에서 처음 만났다. 소설이나 만화, 드라마에서 시끌벅적하게 묘사되던 풍경과는 딴판이라 나는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으론 은은한 친밀감과 적당히 산만한 분위기가 좋아서 발을 붙이리라 마음먹고 있는데 A가 구석에서 손짓했다.

 

‘전에 말했던 선배야. 이쪽은 제 친구예요.’

 

‘안녕하세요.’

 

예전부터 안면이 있는 A와 달리 나에겐 타 과의 2년 선배라는 거리감만 들었다. 하긴 같은 과 동기도 서먹한 마당에 처음 보는 사이니 당연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상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런데 돌아온 건 어딘가 어정쩡한 인사였다.

 

‘새로 들어오셨나 보네요.’

 

말에는 감정이 묻어있다. 감정을 감추어도 분위기가 잔향처럼 남는다. 그녀의 말은 얼핏 듣기에 무난했다. 관심 밖의 대면을 대강 모면할 만큼의, 딱 그 만큼의 무난함이었다.

 

나는 갈증을 핑계로 자리를 떠났다. 테이블에 놓인 음료수를 들이켠 후에야 정말 목이 말랐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잦아들고, 동아리방에 조곤조곤한 담소만이 감돌 즈음. 나는 어떤 소리를 들었다.

 

‘저…. 무슨 소리 안 들리세요? 고양이가 우는 거 같은데.’

 

‘고양이?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엄청 사납게 울고, …….’

 

말을 하다가 이상함을 느끼고 멈췄다.

 

소리가 너무 가깝다. 꼭 문 바로 너머에서 우는 듯한 울음이다.

 

‘아, 아니. 잘못 들었나 보네요.’

 

‘우리 학교에 고양이가 있긴 해요. 건물 안에도 들어오는지 문 열어놓지 말라고 종이가 붙기도 하고.’

 

동아리 사람은 사진을 찍어놓은 게 없다며 아쉬워했다. 그렇군요. 나는 어색하게 대답했다. 옆에 있어서 물었을 뿐인데 대뜸 사진까지 보여주려 하다니 어지간히 사교성이 좋구나. 또는 어지간히 고양이를 좋아하던지.

 

나는 문가를 흘깃 보았다.

 

‘잠깐 화장실 좀.’

 

양해를 구하고 나선 밖은 불이 꺼져 있었다. 멀리 밝은 중앙 베이스가 보였다. 그 빛이 여기까지 닿지 않아 이곳이 한층 어둠에 잠겨 있는 듯했다.

 

울음소리는 더 안쪽에서 들려온다.

 

4월답지 않게 서늘한 공기가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운동화를 신었는데도 복도에 딱딱거리는 소리가 울린다.

 

나는 복도의 끝에 다다랐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손잡이를 당겨 닫자 미약하게 흐르던 바람이 끊어졌다. 나를 주시하는 푸른빛 눈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고양이’가 울음을 뚝 그쳤다.

 

안녕. 찾았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나온 말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착각한 게 아닌지, 이 고양이가 방금 들은 그 학교 고양이가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음을 진작 떠올렸어야 했는데. 괜히 신경을 써서 일거리를 늘렸나 싶다.

 

‘그건 다른 고양이야.’

 

나는 파드득 뒤를 돌아봤다. 언제부터였는지 A가 소개해준 선배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아까와 다르게 그녀는 무미건조한 미소조차 띠고 있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복도의 한가운데 오래된 그림인 양 머물러 있다. 이상하게도 나는 저 무정물 같은 모양이야말로 훨씬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일순 걷혔던 적막이 다시 내려앉고, 그제야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인지한 나는 아차 했다. 불 꺼진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갑자기 인사를 던진 내가 어떻게 비쳤을지 아찔했다. 입 안에 당혹감과 질문들이 차올라 숨이 막혔다. 나는 입만 벙긋거리다 겨우 짧은 문장을 내뱉었다. 나름의 회피였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녀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 뭘 묻느냐는 얼굴이다.

 

‘M이 아끼는 고양이 아니라고. 혹시나 저것이 그 고양이일까 봐 나온 거잖아.’

 

정확히 ‘고양이’가 있는 곳을 가리킨 그녀는 그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혔다. 굳은 듯 가만한 고양이와 위에서 내려다보는 사람은 상당히 기이한 각도를 이뤘다.

 

‘이건 작년에 졸업생이 버리고 간 고양이야. 자취방을 빼면서 데리고 갈 수 없어졌지. 그래서 유기하고 도망쳤어. 다른 길고양이들에게 밀려서 쫓겨난 뒤로 한동안 눈에 띄지 않는다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어슬렁거리다니.’

 

‘…그러니까…. 보이시는군요.’

 

그녀가 웃었다. 날이 선 웃음이었다.

 

‘아직도 그 얘기 중이었어?’

 

나는 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찌르며 중얼거렸다. 한 번도…‘보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어서요.

 

‘사람의 눈은 수많은 정보를 왜곡한다던데. 어쩌면 우리 둘 다 ‘초록빛을 띤 파란 눈에 얼룩덜룩한 갈색 무늬 고양이’의 허상을 전달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네. 어떻게 생각해. 이러면 네 마음이 편하니?’

 

방금 전까지 관심 있는 듯 들여다보던 ‘고양이’를 일별도 않고 그녀는 휙 돌아섰다. 나는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다가 말했다. 궁금한 거 물어봐도 될까요?

 

‘해.’

 

‘이 고양이, 도울 방법이 없나요?’

 

‘너 무속인이니?’

 

‘…네?’

 

‘그쪽 방면으로 할 줄 아는 게 있다던가.’

 

‘아뇨…….’

 

‘전문인도 아니고. 아니면 뭐라도 아는 건?’

 

‘…….’

 

‘없으면 무시해. 이건 그냥 아지랑이 같은 현상일 뿐이야. 피곤하게 사는구나, 너.’

 

나는 입을 닫았다. …선배. 다시 가버리려는 선배를 불렀다.

 

‘왜 이 ‘고양이’에 신경을 쓰셨나요?’

 

선배의 주변을 온통 어둠이 둘러싸고 있다. 그럼에도 옆얼굴의 흰 빛은 완연했다.

 

‘저를 버린 주인에게 돌아가길 기대했거든. 고양이 귀신은 여러 가지로 공포물에 많이 쓰이는 소재니까.’

 

복도에는 곧 나 혼자 남겨졌다. 나는 ‘고양이’가 웅크려 있던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것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 *
 

 

 

 

 

 

 

지하층에서는 쾨쾨한 냄새가 난다.

 

가끔 대형마트나 백화점의 지하 주차장에 가면 부러 숨을 크게 들이쉬곤 했다. 답답한 공기를 참기 어려워하는 나로서는 참 모순이지만, 주차장의 고인 공기 내음을 좋아한다. 후텁지근한 온도, 눅눅한 그 냄새는 안온함마저 들게 했다. 지하라는 공간에 희미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왠지 긴장이 풀리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자연관의 지하는 그런 주차장과 정반대 같았다.

 

슬슬 더워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한기가 돈다. 형광등도 드문드문 있어 지상만큼 밝지 않았다. 한쪽 구석에는 문이 뜯긴 청소도구함이 어질러진 속을 드러냈고, 옆의 철문엔 변색된 관계자 외 출입금지 스티커가 붙어있다. 주위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대충 무리를 이뤘다. 인기척 없는 회색 바닥과 벽은 파묻힌 것처럼 조용했다. 돌연 소름이 올라 나는 팔을 쓸었다.

 

목적지는 청소도구함과 조금 떨어져 있었다. 불투명한 유리문은 닫힌 채였고, 위쪽에 달린 표지는 덜렁거리지 않을 뿐 매우 낡아 보였다. 문을 밀자 그극 하고 긁히는 소리가 났다.

 

화장실 내부는 일반 강의실의 삼분의 일 남짓했다. 학생들이 내려올 일이 없어 거의 사용되지 않는 걸 감안하면 과연 A의 말마따나 쓸데없이 크다.

 

나는 잠시 입구 근처에 멀뚱히 서 있었다. 화장실 안이 축축하고도 불쾌한 냄새로 가득 찬 까닭만은 아니었다. 보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 나타나질 않았기 때문이다.

 

뭐라고 했었지. 손을 씻고 돌아섰더니 보였댔나. 나는 세 개의 세면대 중 첫 번째에 다가갔다. 화장실 중앙의 빈 공간과 일직선에 놓인 위치였다. 수도꼭지를 틀자 하얀 기포를 일으키며 물이 내려간다.

 

나는 물줄기를 바라보다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거울에 비치는 상은 변함이 없다.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것이 저기에 있다.

 

목으로 온 몸을 감당하며 공중에 못 박힌 듯한 형체였다. 디딜 곳 없이 뜬 발이 언뜻언뜻 흔들린다. 오른쪽으로 꺾인 머리는 몸통과 직각을 이루고 정면을 향해있다. 얼굴로 쏟아진 머리카락 사이의 부르튼 입술과, 망가진 코와, 창백한 뺨과.

 

눈이 마주쳤다.

 

뒤로 손을 더듬어 수도를 잠갔다. 물소리가 뚝 그쳤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기말 시험 주간 막바지의 학교는 반쯤 무인지역이 된다. 그런 연유로 지금 캠퍼스에 남아있는 인원은 몇 안 될 것이다. 비단 종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노을이 하늘을 주홍빛으로 태우는 시간이기도 하여 교내는 더욱 한산했다.

 

학생복지관도 마찬가지로 텅텅 비어있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동아리방의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일인용 소파에 선배가 앉아 있었다. 선배는 조금 의외라는 낯으로 나를 슥 쳐다보았다.

 

“자연관에 갔다 왔어요.”

 

나는 방 안에 어질러진 물건들을 정리하며 짐을 챙겼다. 다음 학기까지 올 일이 없어서 내 것은 죄다 가지고 갈 참이었다.

 

“선배 말대로 대단하진 않더라고요. 지독하기야 했지만.”

 

“그래.”

 

“궁금한 게 있어서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오던 도중에 재미있는 걸 들었죠.”

 

엿들은 거지만. 나는 가방을 책장에 기대어 두고 선배의 맞은편에 앉았다.

 

“종강한 강의가 많아서 다 일찍 놀러갔는지 카페에 자리가 많더라고요. 평소엔 음료 하나 주문하기도 어려운데. 생각을 정리할 겸 좀 앉아있다 왔어요.

 

저는 창가의 높은 의자에 앉았어요. 뒤쪽 측면에는 원형 테이블이 있고. 제가 자리 잡기 전엔 비어 있었는데, 10분 쯤 지나니까 4명이 와서 채우더군요. 사람도 적고 그들도 별로 숨기는 기색은 아니라 대화가 다 귀에 들어왔죠. 본의 아니게 말이에요.

 

처음은 시험에 대한 얘기였어요. 뭐, 나온 말이야 뻔하죠. 어려웠다던가 재수강해야 한다던가. 같은 말이 돌고 돌 무렵 화제가 바뀌더군요.”

 

그러고 보니 걔, 시험 치러 오긴 했데?

 

“4월 말 자연관 지하 화장실에서 ‘그것’을 첫 목격한 사람을 가리키는 거였어요. 공교롭게도 같은 과더라고요. 하마터면 웃을 뻔 했지만. 어쨌거나.

 

험담이 엄청나던데요. 싸가지가 없다, 저 혼자 점수를 다 가지려고 애쓴다, 말을 걸어도 무시하니까 짜증난다, 그래서 장난을 좀 쳤는데 중간 시험을 망쳤다…라고.”

 

선배는 의뭉스런 웃음을 지으며 단지 시선을 보낸다. 나는 말을 이었다. 우선 하나.

 

“이상하죠. A는 첫 번째 목격자가 ‘어째 주변이 뿌옇게 느껴진 것 같다’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아까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거든요. 거울이 더러운 탓에 착각했다는 제 가설이 빗나간 거죠. 지하에 내려가 청소도구함과 출입제한 스티커가 붙은 문을 보자마자 깨달았지만. 아마 그 화장실은 청소하시는 분들이 주로 사용하실 거예요. 그러니 수시로 닦일 거울은 깨끗할 테고.

 

4월 말은 중간 시험이 한창이고, 사건의 당사자는 특정 인물들에게 꽤나 미움 받고 있는 사람. 자연관은 자연과학대 학생이 하루 종일 이용하는 건물이죠. 잠깐 동안 연기 같은 걸 만들어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일 거예요. 저야 과학은 문외한이니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이 ‘장난’을 칠 만큼 능력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점수를 잘 받는다는 대목에서 가장 화를 냈거든요. 공부를 못하는 이들이 시샘을 하는 게 아니라, ‘잘난 자신들을 감히’ 이기다니. 그런 어감이었어요.”

 

좋은 머리를 경쟁자 괴롭힘 따위에 쓰다니. 나는 혀를 찼다.

 

“기껏해야 연기나 소음으로 놀래려고 했는데 첫 번째 목격자가 ‘그것’을 봄으로써 기대 이상의 효과가 나 버렸죠. 시험을 망쳤다니까. 듣자하니 그 강의 전체를 말아먹었다나 봐요. 자신을 달갑잖게 여기는 이들이 있음을 알았거나, 어쩌면 목격자가 또 나타나자 정말 무서워졌을지도. …물론 전부 제 추측이지만요.”

 

나는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 훌륭한 짜 맞추기였어. 선배가 다분히 성의 없는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다음은?

 

“두 번째는 거리예요.”

 

소파에 등을 기댔던 선배의 상체가 앞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기다렸던 본론임을 눈치 챘다.

 

“A는 ‘몇 발짝 떨어진’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본 ‘그것’은.”

 

몇 발자국 정도가 아니었다.

 

“세면대에서 3미터는 떨어져 있었어요. 보통 몇 미터씩이나 되는 거리를 몇 발짝이라고 하진 않죠.”

 

“그랬겠지.” 그녀가 키득거렸다.

 

“…네?”

 

“첫 번째 목격은 따돌림 당한 사람이 아냐. 내가 ‘그것’을 본 게 2월이거든.”

 

“…….”

 

“근처에 쭉 자취하고 있어. 방학 때 심심하면 학교 안을 돌아다녀. 특히 평소에 수업이 없는 건물은 구경할 만해. 자연관이 그렇지. 특히 지하 같은 덴 거기서 살다시피 하는 학생들도 잘 안 갈 걸. 강의실이 없으니까.”

 

“한가하시군요.”

 

“어쨌든 계단을 내려가서 맞닥뜨렸지. 시체라도 발견한 줄 알았어.”

 

선배는 처음 ‘그것’이 화장실 바깥에 있었다고 했다. 한 달간 관찰한 결과 무언가에 당겨지듯 점점 뒤로 이동할 뿐이라 관심을 끊었더란다.

 

“그러니까 대단치는 않은 거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네 덕분에 내 예상이 더 확실해졌다며 휴대폰을 꺼내든 선배는 흥미를 완전히 버린 모습이었다.

 

동아리방에 일방적인 침묵이 들어찼다.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으나 나는 그런 그녀를 건너다보다, 조금 표정을 무너뜨렸다가, 불쑥 속엣것을 토로하고 말았다.

 

“…진짜일까요?”

 

우리가 보는 게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걸까요?

 

그들은 단지 현상에 불과할 뿐인가요?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구하지 못할 의문이다. 이런 때마다 그녀에게 말을 꺼냈지만 하릴없이 묻힌 화제이기도 했다.

 

“진짜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랬잖아. 사로잡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선배는 불 꺼진 휴대폰 액정을 톡톡 두드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러다 나를 보았다. 그녀가 이지러진 웃음을 지었다.

 

“방학 때 시간 되니?”

 

바야흐로 긴 여름의 시작이었다.

 

 

 

 

 

 

 
* * *
 

 

 

 

 

 

 

여름은 생장하는 시기다.

 

봄에 고개를 내밀었던 연약한 이파리가 두꺼워진다. 듬성듬성 공간을 남기고 자라난 연둣빛 나뭇잎이 짙은 녹색으로 변한다. 그 무게에 가지가 늘어지고, 땅 위엔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녹음이 우거져 나무가 무리지은 곳에 그늘이 검게 깊어지는 때. 그 안에 무엇이 자리하는지 모를 시기. 그것이 여름이다.

 

“그래서 저는 여름이 끔찍하게 싫어요.”

 

내가 말했다. 선배는 무시했다.

 

우리는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을버스 안에 늘어져 있었다. 암만 산이 널린 시골구석이라도 여름은 여름, 감사하게도 버스에는 에어컨이 돌아갔다. 포장이 허술한 도로를 달리느라 엉덩이며 등이 아팠지만 더위가 멀어진 것만 해도 어디인가.

 

“여름만 되면 뭐가 너무 많이 보여서….”

 

“귀신도 제 말하면 온다고, 날씨만 더우면 인간들이 하도 무서운 얘기를 해대서 그래.”

 

“…선배, 제 말 제대로 듣고 있는 거 맞아요?”

 

“…….”

 

“…….”

 

나는 뒤로 젖히고 있던 고개를 오른쪽으로 굴렸다. 선배는 멀미도 안 나는지 2인 좌석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 책을 읽고 있었다. 버스가 거의 비어있기에 가능한 짓이다. 타박해봐야 듣지도 않겠지. 목구멍까지 올라온 잔소리를 삼켰다.

 

나는 뭘 그리 열심히 보나 확인했다. 밋밋한 검정 장정에 ‘폭풍의 언덕’이 멋스런 금박으로 박혀 있다.

 

“서양 고전 좋아하세요?”

 

“적당히 우울한 게 많으니까.”

 

폭풍의 언덕이 적당히 우울한 정도였던가. 비극이 아니었나. 유령도 등장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만화로 읽었을 뿐이라 작중 등장하는 유령이 진짜인지, 주인공의 환상인지, 그냥 만화적 장치인지 혼란스러웠던 기억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