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여행입니다.

  • 장르: 일반
  • 분량: 64매
  • 소개: 스페인 산티아고길을 여행하던 주인공은,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여학생의 팔에서 헤어진 연인에게 선물하려 했던 팔찌와 똑같은 팔찌를 발견한다. 그 팔찌를 보고 주인공은 헤어진 연인...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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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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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산티아고를 걷기 시작한 지 셋째 날. 앞선 이틀이 워낙 뙤약볕이었던 터라, 각오를 단단히 하고 길을 나섰는데, 웬일인지 날씨가 흐렸다. 보통은 화창하고 맑은 날을 좋아하지만, 하루에 6시간에서 7시간을 걸어야 하는 강행군에는 이런 정도의 흐린 날씨가 오히려 반가웠다. 걷기 시작한 지 4시간쯤 되었을 것이다. 보통 새벽에 아침을 먹고 동이 트자마자 출발하기 때문에, 11시쯤 되면 체력이 고갈되기 시작한다. 이때 부터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으로 군가를 부르면서 걷게 된다. 높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하. 눈 내린 전선을 우리는 간다. 지금의 날씨와는 아무 상관이 없지만, 왜인지 모르게 계속 그 노래만 머릿속에 맴돈다.

 

눈앞에 오래된 성당이 하나 보였던 건, 그때쯤 이었을 것이다. 순례 길을 걸었다는 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하루에 두 개 이상의 스탬프를 받아야 하는데, 이 성당은 그러한 스탬프를 받을 수 있는 장소 중 하나였다. 성당 입구에서는 여학생 한 명이 도장을 찍어주고 있었다. 아마 봉사활동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도장을 찍으러 가니, 나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물었다. 나는 피곤한 목소리로 한국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 학생은 매우 반가워하며, 서툰 한국말로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어쩌면 최근에 한국에서 방영한, 산티아고 순례 길을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 덕분일 수도 있겠다. 그 이후에도 무언가 짧게 덧붙여 이야기했는데, 한국말처럼 들렸지만, 발음이 서툴러서 알아듣지는 못했다. 적당히 얼버무리며 웃어넘기고, 성당 앞 공터에 앉아 그녀가 순례자들에게 도장을 찍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담배를 한 대 물어 피웠다. 그때, 그녀의 팔에 걸린 팔찌를 발견했다. 성당 봉사활동을 하는 학생의 팔에 티파니라니.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어색했다. 내가 그 팔찌를 한눈에 알아본 것은 내가 몇 년 전 사귀었던 그녀에게 선물하려 했던 팔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

 

몇 년 전 6개월 정도를 그녀의 집에서 보낸 적이 있었다. 그녀를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나는 신림동 고시촌의 원룸에서 자취하며 강남으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집안 사정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본인 명의로 된 강남 근방의 투 룸 아파트에서 지냈다. 내가 다니던 회사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집에서 묵은 후 다음날 바로 출근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살던 원룸의 계약이 끝날 즈음이 되자, 그녀는 자신의 집으로 들어와서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다. 나는 낡은 가구와 가전제품, 주방용품들을 중고로 팔거나 버렸다. 내게 남은 것은 옷과 책, 카메라와 노트북 컴퓨터 한 대가 전부였다. 그렇게 승용차 한 대에 들어갈 만한 짐을 들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갔다. 한집에서 살았지만, 같은 방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안방에서 지내고 나는 작은방에서 지냈다. 동거라기보다는 하숙을 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하숙이라기보다는 얹혀사는 느낌이었다. 월세를 내겠다고 제안한 적도 있었지만, 그녀가 거절했다. 그래도 그런 느낌은 견딜 만했다. 의외로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함께 TV를 볼 때였다.

 

혼자 살았을 때는 방에 TV가 없었기 때문에, 결혼이 주제인 예능 프로그램이 그렇게까지 많은지 몰랐다. 하지만 그녀와 소파에 앉아서 TV를 틀어놓고 있으면, 거의 모든 채널에서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가상 결혼에 대한 쇼, 육아에 대한 쇼, 심지어 민박에 대한 프로그램에서도 주요한 주제는 민박을 운영하는 부부에 대한 쇼였다. 어떻게 모두가 그렇게 행복해 보이도록 잘 포장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결혼과 출산을 독려하기 위해서, 정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렇게 TV를 보다가 우리는 종종 말이 없어졌다. 우스운 장면이 나와도 입으로만 웃었다. 나는 그렇게 웃으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의 눈도 내 눈처럼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에는 내 무릎에 다리를 올려두고 비스듬히 누워서 TV를 보지만, 그럴 때는 다리를 내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는 차를 끓여와서 약간은 웅크린 듯한 자세로 앉아서 차를 마셨다. 이럴 때,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와서 유리잔에 따른다. 당분간 그녀가 내 무릎에 다리를 올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리를 꼬고 앉아 맥주를 마신다. 그리고는 채널을 돌리지 못한 채, 그 프로그램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그녀와는 처음 만나기로 결정하기부터 쉽지 않았다. 나는 우리의 경제적인 차이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언젠가는 이것이 문제가 되리라 생각했다. 지인의 소개로 만나서 3번 정도 데이트를 했을 때, 그녀는 머뭇거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만나는 게 꼭 결혼하려고 만나는 건 아니잖아요? 일단 사귀어 보고, 다음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해요.”

 

그녀는 그런 식이었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에 대한, 또는 맺고 있는 관계를 끝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나는 결혼 예능을 시청하는 우리의 태도에서, 그녀의 말처럼 다음 일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모아둔 돈과 신용카드 할부의 도움을 받아, 백화점에서 팔찌를 하나 샀다. 팔찌 중에는 가장 작은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디자인이었다. 성당 봉사 활동을 하던 소녀가 손목에 차고 있던, 바로 그 팔찌였다. 값을 지불하기 직전까지도 반지를 사는 것이 나을지 고민했지만, 결국엔 팔찌를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생일 선물로 줄 머리핀을 하나 샀다. 나는 그녀가 반지를 받아줄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 팔찌 역시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녀와 꼭 결혼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결혼 얘기를 피하고 있는 그 상황이 몹시 불편했고, 더는 피하지 말자는 제안을 하고 싶었다. 우리는 다음 일을 생각 해야 했다.

 

그녀의 생일, 우리는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외출했다.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주겠다고 했으나, 그녀는 속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녀는 몸이 좋지 않아 잠을 좀 더 자고 싶다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나는 혼자 거실에서 TV를 보았다. 평소처럼 결혼 예능이 나오고 있었다. 채널을 두어 차례 돌리자 이름도 알 수 없는 아이돌 걸그룹이 예쁜 척을 하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밝게 웃으면서 TV를 시청했다. 점심 즈음 그녀가 밖으로 나왔고, 나는 TV를 껐다. 그녀는 아직도 속이 별로 안 좋다며 점심도 먹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시켜서 먹었다. 그녀는 내가 짜장면을 먹는 동안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았다. 세시가 넘어서야 그녀는 외출 준비를 했다. 예약해 둔 식당에서 식사했고, 나는 머리핀을 선물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비싼 것을 샀느냐고 타박했다. 그녀가 느끼는 부담이, 가격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머리핀을 꽂아 주겠다고 하였고, 그녀는 직접 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머리에 핀을 꽂더니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어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웃음을 지으며 거울을 바라본 채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그 웃음을 알고 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지만, 눈은 그대로인 표정.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도 똑같이 웃었다. 밝게 웃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그녀도 나처럼 그랬을 것이다.

 

내가 집에 가자고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핀이 잘 어울렸다. 집에 오는 동안에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집까지 10분 정도 걸리는 길을 걸으면서, 서로 별로 관심 없는 일에 대한 의무적인 대화를 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는 그때 어떤 표정을 하고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머리핀을 계속 하고 있었을까. 그날, 그 길에서, 그녀의 손은 유난히 차가웠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샤워를 하고 싶다고 말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평소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머리를 말리고 난 후, 내게 맥주를 한잔 따라주었다. 나는 소파에 앉았고, 다리는 꼬지 않았다.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차를 끓였다. 물이 끓는 동안에도 그녀는 계속 전기 포트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우려낸 차를 감싸듯이 들고 와서, 소파에 앉아 입을 열었다. 그녀는 헤어지자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대로 그녀는 차를 마셨고, 나는 맥주를 마셨다. 맥주잔과 찻잔은 거의 동시에 비었고, 그녀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더 가져오더니 내 잔에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남아 있던 찻잎에 더운물을 한 번 더 부어서 우려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서 똑같은 자세로 앉았다. 나는 왜 헤어져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아까 저녁을 먹었던 식당이었다. 식당에 손거울과 휴대폰을 놓고 갔으니, 내일 찾으러 오라는 것이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휴대폰이 없었다. 통화를 마치고 그녀는 아까처럼 소파에 앉았고, 나는 일어났다.

 

작은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불을 끄고 누웠다. 잠이 들지 못했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두어 시간을 뒤척이다 불을 켜고, 포장지에 쌓인 채 가방 속에 들어있던 팔찌를 꺼냈다.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녀는 아직 거실에 있는 것 같았다. 물을 끓이는 소리가 들렸다. 차를 한잔 더 마시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물이 다 끓고 나자 전기 포트가 탁 소리를 내면서 꺼졌다. 나는 등을 문에 기대고 앉아서 눈을 감았다. 실감하지 못하였다. 내가 사랑했던 김하연이 낯설어졌다. 평소보다 차가웠던 그녀의 손이 낯설었다. 내 손은 평소처럼 따뜻했을까? 그녀는 내 손의 온기를 좋아했다. 한여름에도 내 손을 놓기 싫어했다. 그녀는 왜 이유를 말해 주지 않는 것일까. 이유라도 알아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고, 순간 화가 나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었다. 창밖으로 널찍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가 보였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닿았고,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 동네는 나에게 어울리는 동네가 아니었다. 서울 외곽의 원룸으로, 나에게 어울리는 동네로 돌아갈 시간이 된 것뿐이었다. 나는 그녀가 그 말을 직접 하는 것이 힘들 것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녀가 그 말을 직접 한다면, 내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아직 소파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그 상태로 잠시 서 있다가, 간단히 가방을 싸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가까운 모텔에서 묵을 셈이었다. 문을 나서면서 이사할 집을 구하고 나면 나머지 짐을 챙기러 오겠으니 불편하겠지만 조금만 참아달라고 말했다. 그녀는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집에서 자라고 말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도 두 번은 묻지 않았다. 다음날 퇴근 후, 휴대폰을 찾기 위해 식당에 들르니, 손거울은 그녀가 이미 찾아갔다고 했다. 나는 가장 빨리 입주할 수 있는 신림동 고시촌의 원룸을 계약하고, 일주일 후에 이사했다. 그녀의 집으로 짐을 가지러 갔을 때, 그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말없이 짐을 챙겼다. 새집에서 짐 정리를 마치고, 씻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의 욕실에 칫솔을 두고 온 것이 기억났다. 내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것은 칫솔이었다.

 

*

 

내가 그녀에게 주려고 했던 팔찌는 헐값에 중고로 팔았다. 저 학생이 무슨 팔찌를 차고 있던지, 이미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시 걸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꽁초를 바닥에 던지고 등산화로 비벼서 껐다. 무릎과 발목을 마사지하고, 정성껏 허리와 목을 스트레칭하고 나서, 가방을 메고 길을 나섰다. 학생이 밝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Buen Camino!” 그녀의 손목에는 묵주가 걸려있었다. 다시 보아도 묵주였다.

 

*

 

오후 6시 반, 강남역에서 신림역으로 향하는 퇴근길 지하철은 피로와 불쾌함이 기분 나쁘게 엉겨 붙어있다. 냄새와 온도, 촉감과 광경, 그 모든 것이 불쾌하다. 불쾌함이 통증으로 느껴질 만큼 타인으로 가득 차 있다. 손잡이를 생명줄처럼 부여잡고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눈을 감는다. 사당역에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가면, 손잡이를 있는 힘껏 붙잡고 휩쓸려 나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가끔은 다른 사람과 같은 손잡이를 붙잡는 경우도 있고, 그럴 땐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놓는다. 그리고는 상대가 서 있는 자리와 내가 서 있는 자리, 그의 성별과 연령, 체격 등을 고려한 후에, 다시 그 손잡이를 잡을지, 아니면 다른 손잡이를 찾을지 고민한다. 오늘 나와 손이 겹친 사람은 손목에 묵주를 걸고 있었다. 손이 겹친 직후 내가 손을 빼고 그녀의 눈치를 보는 동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손잡이를 그대로 잡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조금 불쾌했다. 불쾌함 때문인지 아니면 묵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지, 나는 한참 동안 그녀의 손목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렇게 가까이서 묵주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는 나의 눈길이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