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 체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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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호쾌한 스윙과 함께 배트 정중앙에 맞은 공이 그대로 쭉쭉 뻗어 나가 관중석에 꽂혔다. 그랜드슬램! 9회에 터진 이 만루 홈런으로 점수는 더 벌어져 이제 13대0. 이미 승부가 기운 상황에 위너스는 크레인스의 관뚜껑에 못까지 박았다. 이미 결정 난 승패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꼴사납게 기적만을 기도하던 아재들도, 하나둘 허망하거나 혹은 골난 표정으로 복권방을 떠났다.

아재들……. 내 위험하다 그렇게 말려도.

최근 3년 연속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전통의 강호 위너스. 만년 꼴찌이자 자타공인 동네북 크레인스.

두 팀이 맞붙는다고 하면 위너스의 압도적인 우위를 예상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번 게임을 앞두고는 달랐다. 4연패 중인 위너스에 반해, 크레인스는 무려 5연승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 경기에는 크레인스의 에이스가 선발로 등판할 예정이었던지라 많은 도박꾼이 이번만큼은 크레인스의 승리에 돈을 걸었고 결국은 이 사달이 났다.

보통의 호구들이 게임의 승패를 예측할 때 ‘스스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본인의 그 촉’을 믿는다. 그나마 조금 머리를 굴리는 호구들은 대상 팀의 분위기나 현재 전력, 양 팀의 전술 등을 분석 하지만 결국 호구는 호구. 왕창 돈을 걸고 쫄딱 망한다.

나는 그런 비과학적이고 얕은 분석에 내 피 같은 돈을 덥석 던지는 멍청이가 아니다. 나는 프로 베터다. 어디까지나 통계를 이용한 과학적 분석만을 근거로 하여 베팅한다.

똑같은 도박꾼 아니냐고? 분명 다르다. 그들은 신을 믿고, 나는 과학을 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 당신의 눈은 활짝, 귀는 쫑긋하겠지. 이거 꽤 귀한 영업 비밀인데 내가 오늘 부처의 마음으로 내 베팅 비법 하나를 깐다.

오늘 경기로 예를 들면 이렇다.

호구들이 ‘5연승’과 ‘에이스’라는 말에 현혹되어 크레인스에 베팅할 때, 나는 야구 기록실을 뒤져 그 팀의 역대 기록을 살펴본다. 그 결과 크레인스가 최근 4년간 6연승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어 프로야구가 생긴 이후로 ‘5연승의 하위권 팀’이 ‘4연패의 상위권 팀’을 만났을 때 냈던 통산 성적을 찾아보았다. 통산 4승 5패. 오히려 열세. 다음으로, 크레인스의 ‘에이스’가 ‘돔구장’에서 ‘토요일 낮 경기’에 ‘선발 투수’로 뛰었던 통산 성적을 확인했다. 조건에 들어맞는 경기가 총 열여섯 번이 있었고, 그중 승리를 거둔 적은 고작 여섯 번.

마지막으로, 맛집의 레시피 같은 것이라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만든 경기 예측 알고리즘에 이 경기의 모든 데이터를 대입해 보니 크레인스에 돈을 걸지 말아야 할 결과 값이 나왔다.

여기까지가 내가 30여 년간 크레인스의 골수팬이면서도 이 경기에 베팅하지 않은 이유다. 결국 내 예상대로 그 팀의 에이스는 흠씬 두들겨 맞아 3회에 강판당했고, 공격은 유난히 그들다운 물방망이를 보여 주면서 이렇게 완패를 앞두고 있다. 이야기하는 중에 홈런 한 방을 더 얻어맞았다.

이 판에서 살아남으려면 과학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막연한 감으로 일확천금을 바라다가 호구 꼴 면치 못하고 쫄딱 망한 인간들 여럿 보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과거를 살펴 미래를 예측한다. 과거는 현재의 미래다.

아직은 시행착오 구간이라 수익은 없지만, 몇 가지 변수가 될 문항들을 좀 더 수집해 내 알고리즘에 추가하면 더욱 오차 없는 결과 값이 나올 것이고, 그때가 되면 아파트는 물론이고 건물주도 헛된 꿈은 아니지. 안다. 허풍으로 들린다는 거. 나도 결국 할 말은 하나밖에 없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헛된 꿈을 꾸던 호구들의 싸구려 흥분으로 득시글거리던 복권방은 경기가 끝나고 그들이 퇴장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단골인 나는 주인의 부탁으로 잠시 대신 가게를 맡았다. 복권방에 홀로 남은 나는 매대 안 의자에 눌러앉아 내일 있을 대상 경기의 승패를 분석했다. 내가 분석하던 경기는 한국과 일본의 친선 축구 경기였다. 여러 가지 데이터들을 대입해 보며 경기의 승패를 도출하고 있을 때.

그때, 그녀가 처음 내 앞에 나타났다.

전단이 덕지덕지 붙은 유리문을 슬며시 밀고 들어온 그녀는 맨발에 새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잠옷 같기도 하다. 나이는 이십 대 초중반쯤 됐을까 어디서 본 듯 만듯한 평범한 얼굴에 가냘픈 체형의 그녀는 가게로 들어와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그때부터 넋이 나갔던 것 같다. 비현실적인 그녀의 옷차림과 꿈꾸는 듯한 분위기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한동안 우리는 서로 바라만 보았다. 분명 짧은 시간이었을 텐데도 그 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복권이라도 사러 왔냐며 주인 행세를 하려 했을 때, 그녀가 날 향해 힘차게 걸어왔다. 그 모습이 또 묘해 나는 말문이 막혔다. 빠르게 L자형 매대 안쪽으로 들어온 그녀는 피할 새도 없이 내 귓가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보드레한 비누 향이 내 코를 감쌌을 때 그녀가 내 귀에 은근히 속삭였다.

“한국 사람이면 제발 대한민국 갑시다.”

귓속말을 마친 그녀는 넋이 나간 나를 보며 그대로 서서히 뒷걸음질 치더니 가게 문을 열고 나갔다. 어안이 벙벙한 나는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나 참, 별……

#

“미친년 다 보겠네.”

자신이 내뱉은 말에 아차 싶었는지, 동철이 내 딸아이에게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했다.

“말 예쁘게 하라고 몇 번을 말하냐. 혜윤아. 아저씨 말 예쁘게 해야지?”

내가 쏘아붙이자 동철이 원망 가득한 표정을 하며 따졌다.

“형은 지금 그럼 그 미…… 그 뭐야, 그, 그 귀신 말 듣고 나한테 한국에 돈 걸라고 한 거야? 알고리즘 어쩌구 하시는 분이?”

“나도 걸었어, 인마.”

“나는 월급의 반을 걸었어, 형!”

“그래서 얼마? 팔십? 야, 그거 있으나 마나 네 인생이 달라지냐? 아주 누가 보면 팔천쯤 건 줄 알겠네.”

“형! 구십이야!”

“아, 그래? 내가 한참 잘못 알고 있었네. 동철이 돈 많이 버네.”

나는 더 비아냥대지 못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TV 속 일본선수가 보란 듯이 한 골을 더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이제 스코어는 2대0. 지고 있는 상대 팀은 한국이었다.

한국 사람이면 제발 대한민국 갑시다.

그러니까 그 미친 귀신이 했던 그 말은 스포츠 도박을 하는 사람들끼리 쓰는 은어 같은 것이다. 한국 팀이 다른 나라 팀과 경기할 때, 망설이거나 따지지 말고,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에 돈을 걸자는 것을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전문 용어로 이런 것을 ‘애국 베팅’이라고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그런 비과학적인 이유로 베팅하는 행위를 누구보다 경멸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 왜인지 그 말이 계속 내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다른 경기를 분석하려 해도 그 귀신이 남긴 말이 환청처럼 들려왔다.

한국 사람이면 제발 대한민국 가요가요가요!

결국 나는 홀린 듯 한국에 돈을 걸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한 동생이자, 주말마다 같이 스포츠 도박을 하는 동철은 내가 해 준 추천으로 제 말마따나 월급의 반이나 걸었다.

점수 차가 더 벌어지자 동철은 완전히 포기한 듯 올해 여섯 살 된 내 딸아이 앞에 주저앉았다.

“똑똑.”

“들어오세요.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네. 의사 선생님, 제가 다리를 다쳐서요. 아아, 너무 아파요.”

“이런, 다리를 다치셨군요. 우선 여기 누우세요. 이런이런…… 앞으로 못 걷겠어요. 쫄딱 망했어요.”

딸아이의 입에서 ‘쫄딱 망했다’는 표현이 튀어나오자 동철과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은 늘 많은 돈을 베팅하는 동철이에게 내가 조심하라며 자주 하던 말이다. 딸애도 우릴 따라 깔깔 웃었다.

“말조심은 형이 해야겠어. 혜윤이가 아빠 말 다 따라 하네.”

불구가 되었다는 딸애의 말에 동철이는 낮잠이라도 자려는 듯아예 자리를 잡고 누웠고, 나 역시 소파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다음 베팅할 경기를 찾았지만, 얼마 안 가 우리는 다시 TV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렵사리 만회 골을 터트린 한국이 연이어 동점 골을 터트리며 승부를 알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양 팀은 종료 10여 분을 남겨 두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을 펼쳤다. 우리는 마치 TV에 빠져들 것처럼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집중했고 기어코 한국 팀은 불구가 된 동철이도 벌떡 일어나게 하는 기적을 만들었다. 종료 직전, 한국 선수 하나가 대포알 같은 중거리 슛을 터트리며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둔 것이다.

한국 관중들은 경기장이 떠나갈 듯 열광했고, 흥분한 아나운서는 ‘대한민국 만세’까지 외쳤다. 우리 셋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방 뛰며 한국의 승을, 아니 돈을 딴 것을 기뻐했다. 짜릿했다. 이런 순간순간이 바로 스포츠 도박의 진미다.

우리가 그렇게 축제를 즐길 때, 밖에서 누군가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급히 TV를 끄고 동철이에게 눈치를 주며 소파에 앉았다. 막 집으로 들어온 아내가 내 옆에 앉아 어색한 표정으로 웃는 동철이를 향해 말했다.

“동철 씨 왔네. 왜 자꾸 오빠랑 같이 놀아요 날씨도 좋은데 밖에서 연애해야지.”

“형수님! 저는 여자보다 석원이 형이 더 좋네요. 계속 좋아해도 돼요?”

동철의 농에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려던 아내가 뒤늦게서야 무언가 떠오른 듯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제 발이 저린 나는 항변했다.

“선애야. 내가 뭐 집 팔아 해? 땅 팔아 해? 주말마다 푼돈 조금 거는데 그럴래? 숨 막히게.”

아내는 한동안 날 노려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방안에 들어갔다. 그녀가 방으로 들어가자 우리는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며 승리를 만끽했다. 방방 뛰면서 좋아하는 딸애의 모습을 보며 나는 머릿속에서 하얀 잠옷 귀신을 떠올렸다.

#

나는 좀비였다. 해가 뜨면 흐리멍덩한 눈으로 회사를 가고, 해가 지면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고. 도무지 왜 그렇게 무기력한지 몰랐다. 몸이 고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딱히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푹 자고 일어나면 활기가 넘쳐 출근할 법도 하고, 일이 끝나면 그것대로 홀가분해 신이 날 법도 한데 둘 다 아니었다.

자극 없는 좀비처럼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잠이 들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잠이 들고……. 이대로는 싫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 늘 생각했지만 늘 생각뿐이었다.

그날도 그저 시시껄렁한 회식 자리였다. 서로가 재미없는 이야기를 더욱 재미없게 하고 있었다. 그때 한 직원의 수상한 행동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한껏 허풍을 늘어놓고 있는 박 부장 앞에 앉은 그는 초조한 표정으로 자꾸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를 확인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가게가 떠나갈 듯 환호성을 내질렀다. 외국의 한 축구 경기에 돈을 걸었는데 그가 돈을 걸었던 팀이 승리하면서, 베팅했던 백만 원이 방금 천만 원으로 변한 것이다. 당시 천만 원은 나의 여섯 달 치 연봉이었다. 그걸 그는 고작 축구 한 경기의 승패로 가져갔다.

나중에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오랜만에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것이다. 이것이 내 의미 없는 현재를, 뻔한 미래를 바꿀 유일한 방법이다. 한번 가진 자가 아니면 영원히 가진 자가 되기 힘든 현실에서 이 세계는 나를 가진 자로 바꿔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게다가 나는 야구를 비롯해 공으로 하는 스포츠라면 뭐든 좋아했다. 그건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세계 같았다.

초심자의 행운이었을까? 처음에는 쉬웠다. 금방이라도 부자가 될 것 같았지만,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포츠 도박이라는 게 하면 할수록 만만하지 않았다. 강팀이라고 매번 이기는 것도,약팀이라고 매번 지는 것도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야 강팀에 돈을 계속 걸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승리 확률이 높은 만큼 배당도 낮다. 계속 그런 식으로 베팅한다면 아홉번 따도 한 번 잃으면 손해인 것이 이 도박의 룰이다. 약팀에 돈을 걸어 높은 배당을 노리는 것은 그것대로 또 그게 언제일지 예측하기 힘들다. 내가 처음 목격한 열 배의 돈을 한 번에 따는 일은 보기보다 꽤 어려운 일이었다.

딸 때보다 잃을 때가 많았지만 나는 이미 이 세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어느새 돈을 걸지 않고 스포츠를 보는 일이 면발 없는 국수를 먹는 것처럼 무의미해졌다.

당신이 TV에서 어떤 재미없는 경기를 볼 때, 한 번쯤은 관중석에서 열광적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기는 것도 아닌데 저게 뭐라고 저렇게 열심일까’ 하고 생각하며 이해 못 한 적이 있는가? 내가 이해를 시켜 주겠다. 그 사람들 중 둘에 하나는 만 원이라도 걸었다. 그리고 당신이 돈을 건다면 이제 당신이 그 나머지 하나다.

나는 그다음 주 토요일에도 복권방에 출근했다. 주인 아저씨는 날 보자마자 마치 내가 교대 근무자라도 되는 것처럼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고, 나는 또 그러려니 하며 매대 안으로 들어가 내 가게처럼 눌러앉았다. 해가 저물고 오후의 대상 경기들이 모두 끝나자, 복권방 호구들이 하나둘씩 돈을 잃고 가게 밖으로 내버려졌다.

그렇게 가게에 나 홀로 남았을 때 또 그녀가 나타났다. 심지어 이번에는 기척까지 느꼈다.

그녀가 나타나기 직전, 무언가 이상한 기운에 끌린 나는 가게 문을 향해 서서히 시선을 돌렸다. 가게 문은 왜인지 긴장감 넘치게 닫혀 있었다. 열릴 것 같다. 열릴 것 같다. 왠지 열릴 것 같다. 그때 문이 안으로 열리며 그녀가 들어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옷차림부터 확인했다. 똑같은 흰색 원피스. 아무리 봐도 잠옷이었다.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나에게 힘차게 돌진했고 이번에도 나는 입도 뻥긋할 수 없었다. 내게 얼굴을 들이민 그녀가 또 능숙하게 속삭였다.

“세이커스에 베팅 안 한 호구 있나요”

처음과 달리 날 보고 해죽 웃기까지 한 그녀는 또 재빠르게 뒷걸음질 치며 가게를 빠져나갔다. 한번 겪어 본 상황이라 조금 익숙해질 법했는데도 나는 처음과 같이 넋을 놓고 그녀가 사라진 방향만 바라보았다. 다만, 세이커스라는 이름만큼은 잊을세라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