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妖狐)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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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천년을 살며 아홉 꼬리를 얻고, 재물이 산천 가득 흘러넘쳐 살아감에 조금도 아쉬움이 없었거늘. 아, 한탄하도다. 안개 자욱한 산자락을 거닐다 그대와 마주치지 않았더라면 내 꼴이 이 지경으로 우스워지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이하여 그대는 내 눈앞에서 목을 매달려 하였단 말인가.

그래. 누구를 탓하겠느냐. 모두 내 선택이고 내 책임인 것을. 내가 밧줄을 끊어 그대의 목숨을 구했다. 연신 기침을 해대는 그대가 안쓰러워 차가운 시냇물도 떠다 주었다. 금방까지 생을 끊으려 했던 그대는 우습게도 그 물을 단 꿀처럼 벌컥 들이켰었지. 아아, 기억이 한낮의 햇살처럼 쨍하여 만지면 손을 베일 듯 하구나.

내 그대에게 묻기를,

“그대, 어찌 목숨을 놓으려 하는가?”

하자, 그대는 이리 답했었지.

“가문의 재화를 모두 잃고 벼슬길에 오르지도 못하여 부끄러워 그러오.”

그대가 설명하기를, 집안의 독자로 태어난 그대는 아비를 일찍 여의고, 기울어가는 가세를 일으키려 십수년간 과거에 매진하였더랬다. 손위의 누이가 혼례도 미루고 그대의 급제를 위해 집안의 모든 재화를 쏟았으나, 안타깝게도 그대는 향촌의 작은 관직조차 오르지 못하고 번번이 낙방하였다.

그대의 노력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사서삼경 어디에도 벼슬을 돈으로 사는 법이 쓰여있지 않았던 탓이다. 지나친 순수함이 되레 짙게 눈을 가리고 있었으니, 동기들이 관직에 나아가는 동안에도 그대는 그 비결을 눈치채지 못했다. 한참 후에 그대를 딱히 여긴 자가 조용히 진실을 귀띔해 주었으나 때가 늦은 뒤였다. 재산이 이미 바닥을 드러내 감투 값을 치를 돈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연을 들은 나는 기가 막혀 그대를 질타하였다.

“배부른 소리 말거라. 인간으로 태어나지 못해 부끄러운 짐승이 산천에 가득한데, 그깟 벼슬이 무어라고 귀중한 인간의 삶을 쉬이 내버린단 말인가. 광명한 햇살을 스스로 꺼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허나 그대도 기세 좋게 맞섰지.

“인두겁을 뒤집어썼다 하여 모두 인간인 것은 아니오. 서른이 되도록 학업도 완수치 못하고 누이가 벌어다 준 밥만 축내는 자가 어찌 사람이겠소. 이대로 부끄러움을 잊은 짐승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심히 두려워 그 전에 삶을 끊고자 했던 것이오.”

측은한 일이다. 천년을 살은 나도 산천을 누비는 소소한 재미에 만족하며 살아왔거늘, 그대는 한갓 인간 주제에 어찌 그리 고고하게 군단 말인가. 무엇이 그대의 혼백을 옥죄어 두 눈을 청아한 부끄러움으로 가득 채웠단 말인가.

그대의 눈빛에 혹해 이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따라오너라. 나의 집에 초대하마.”

산속 깊은 곳 커다란 솟을대문 앞까지 너를 데려왔을 때, 쑥스럽지만 나는 조금 의기양양해 있었다. 한껏 휘둥그레진 그대의 눈을 잊을 수가 없구나.

“놀랐느냐?”

“한양에서도 이런 집은 보지 못했소.”

“너희 임금이 산다는 궁궐도 아마 이보다는 작을 것이다.”

그러자 그대는 분노했다.

“어찌 조선 하늘 아래서 임금보다 사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대의 순진함에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구나. 태조가 나라를 세우는 데 쓰인 수만금의 재화가 모두 내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거늘, 너희 사대부가 어찌 나를 비난한단 말인가.”

“나라에는 정해진 법도가 있소. 한갓 금은보화로 하늘의 이치를 넘볼 수는 없는 법이오.”

“땅을 기는 짐승에게 하늘의 이치 따위 알게 무어란 말이냐.”

그제야 그대는 나의 정체를 꿰어보았다.

“지리산 깊은 곳에 매구가 한 마리 산다더니 그게 바로 너로구나.”

흥이 깨진 나는 손을 휘저어 환상을 지워버렸다. 대궐이며 비단이 모두 사라지고 어두운 굴만 남게 되니 그대는 더욱 확신하며 나를 몰아세웠다.

“역시 여우가 맞구나. 나를 여기로 데려온 저의가 무엇이냐?”

“너의 모습이 딱해 돈이나 좀 쥐어줄까 했지.”

“필요 없다.”

수만 냥을 비단처럼 팔에 걸고 유혹해 보았으나 그대는 단호했었지. 그대의 눈빛을 보아 고고한 의지를 꺾을 수 없음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더랬다. 잠깐의 유흥으로 시험해 본 것뿐이었으니, 다만 잠시라도 그대가 죽음을 잊게 하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내 너에게 이르기를,

“돌아가는 길을 알려줄 터이니, 다시는 이 산에서 목숨을 끊어 그대의 피로 산천을 더럽힐 생각은 말지어다.”

하자, 그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반드시 지키겠소.”

그대의 표정을 보아하니 당장 죽을상 같지는 않아 보였다. 나는 아랫마을로 돌아가는 가장 빠른 길을 그대에게 알려주었다. 허나 신경 쓰이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더구나.

“내 이 산을 두고 팔백 년 묵은 너구리와 다투는 도중이나, 그대를 차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그대가 원한다면 산자락 아래까지 안내하도록 하마.”

“그럴 필요 없소.”

그날, 그대는 차가웠도다. 그렇게 우리의 야속한 연이 끝을 맺었다면 좋았을 것을. 어찌 어리석게도 늙은 너구리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