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들)

  • 장르: 추리/스릴러 | 태그: #은둔자들 #전건우 #추리단편 #추리스릴러단편선
  • 평점×30 | 분량: 124매
  • 소개: 의뢰를 해결한 후 어느 재개발 단지의 아파트에 몸을 숨긴 킬러. 그러나 그곳은 은둔자가 되기엔 다소 시끄러운 곳이었다. 더보기

은둔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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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잠시 몸을 숨길 곳이 필요했다.

화성(和成) 아파트는 한 동짜리 5층 복도식 건물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다. 전기와 물도 들어오지 않는다.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돼 사람들이 모두 떠난 지 1년이 넘었다. 그 사이 시공업체가 두어 번 바뀌면서 장밋빛으로 가득했던 재개발 계획은 공중에 떠 버렸다.

제때 보상을 받지 못한 원주민 중 한 명이 분신자살을 했다. 현재 화성 아파트는 쇠락한 놀이공원의 유령의 집처럼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었다.

내가 아는 정보는 거기까지였다. K는 화성 아파트가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을 건네며 말했다.

“한 달분의 음식과 물을 채워 넣었어. 초도 준비했지. 약속했던 돈도 마련했고.”

“연락은 어떻게 하지?”

내가 물었다.

“우리 쪽에서 사람을 보낼 거야. 전화는 쓸 수 없어. 이해하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건 없어?”

“라디오와 한 달분의 건전지.”

K는 고개를 저었다.

“라디오와 한 달분의 건전지.”

K는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알았어. 내 선에서 어떻게 해 볼게. 보통은 안 되는 일이야.”

나는 미소를 지었다. K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별 인사를 해야겠군. 푹 쉰다는 생각으로 딱 한 달만 버텨. 아니, 어쩌면 그만큼도 안 걸릴 거야. 좀 잠잠해지고 여권만 마련되면 바로 연락하지. 하와이에서도 잘 살라고.”

고물 그랜저가 연기를 뿜으며 사라졌다. 내 손에는 회유어처럼 날렵하게 빠진 열쇠와 사진 한 장이 남았다. 해 질 무렵이었다. 한여름의 잘 익은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화성 아파트가 자리 잡은 곳은 잡초가 무성한 언덕배기였다. 고립된 섬 같았다. 들어가기도, 빠져나오기도 쉽지 않은 절해고도. 나는 은신처가 될 그곳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화성 아파트는 노인 전문 병원의 장기 입원 환자처럼 보였다. 외벽에는 자잘한 실금이 주름처럼 얽혀 있었다. 그 금을 따라 색 바랜 페인트가 사납게 들고 일어났다. 녹슨 철제 난간은 빨간 속살을 드러냈다. 낮인데도 내부는 어두웠다.

부서지고 깨진 가구들이 습지 식물 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삭고 묵은 악취가 그 위를 맴돌았다. 층계참 곳곳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버려져 있었다. 안에서 싸구려 오공본드 냄새가 났다. 벽에는 조악한 낙서가 가득했다.

내 은신처는 515호였다. 몇 안 되는 성한 집 중 하나였다. 바로 옆 514호는 현관문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창문이 깨지고 벽에 구멍이 뚫린 곳도 많았다. 붉은색 래커로 X자 문신이 새겨진 곳도.

나는 515호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 봐야 속옷 몇 벌과 정장 한 벌, 그리고 세면도구가 전부였다. 길어야 한 달, 은둔 생활의 끝에는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하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과 시원한 바람, 반짝이는 모래 해변과 늘씬한 비키니 아가씨들. 그곳에서 나는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몸을 맡긴 채 해먹에 누워 길고 달콤한 낮잠을 즐길 것이다. 촌스러운 색상의 하와이안 셔츠를 걸치고 큰 선글라스를 쓰고서.

515호는 내가 살아 본 집 중 가장 컸다. 거실 하나가 월세 60을 주고 지냈던 원룸 전체 크기만 했다. 화장실과 침대 사이가 채 2미터도 되지 않았던 그곳에 비하면 새로운 은신처는 대궐이었다.

K가 정리를 한 건지 집 안도 깨끗했다. 거실 벽에는 부모와 세 자녀가 붕어빵처럼 닮은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기에 사진을 떼 갈 여유도 없이 집을 비워야 했을까. 사진 속 가족들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싫어 그들의 눈을 도려냈다.

촛불은 하루에 한 번, 딱 한 시간만 켰다. 음식은 두 끼만 먹었다. 깡통 시장에서 파는 미제 전투식량이었다. 물은 2리터짜리 생수 한 병으로 이틀을 났다. 절반은 마시고 나머지는 씻는 데 썼다. 오줌은 하수구에 흘려보냈다. 똥은 되도록 참았다가 영역을 표시하는 들개처럼 빈 집을 돌아다니며 해결했다.

제일 고역은 더위와 모기였다. 낮 시간은 대부분 팬티 바람으로 보냈는데 땀으로 번들번들한 맨살은 모기떼의 좋은 표적이었다. 피할 방법이 없어 그냥 참기로 했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새 소식이 흘러나왔다. 소말리아 해적들이 또 한 번 배를 납치했고, 머리의 퓨즈가 나가 버린 남자는 버스 정류장으로 차를 몰았다. 더위는 촉망받는 육상 선수처럼 연일 기록을 경신했다. 전국 어딘가의 계곡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물놀이 사고가 일어났다.

항상 누군가가 죽어 나갔다. 좋은 소식은 별로 없었다. 싸구려 다방의 운세 상자처럼 라디오는 끊임없이 불행을 쏟아냈다.

내가 벌인 사건은 톱뉴스로 다뤄졌다. 살해당한 차기 대권 후보는 언론의 좋은 먹잇감인 모양이었다. 전대미문의, 끔찍한,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건 앞에는 요란한 수식어가 훈장처럼 따라 붙었다.

“정치 테러일까요, 단순한 강도일까요? 현직 국회의원이자 유력한 대권 후보가 대낮의 호텔 화장실에서 수십 차례 칼에 찔려 사망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들썩이고 있습니다.”

아나운서는 며칠이 지나도 격양된 음성으로 사건을 소개했다. 뉴스에서는 중요한 사실 몇 가지가 빠져 있었다. 수십 차례가 아니라 목에 두 번 배에 다섯 번 칼침을 놓았다는 사실, 유력한 대권 후보라는 양반이 대낮 호텔에서 불륜 상대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

감시 카메라를 피해 국회의원을 제거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단서를 남겨서도, 꼬리를 잡혀서도 안 됐다.

“감쪽같이 사라져야 해. 카퍼필드처럼.”

K가 말했다.

“왜 나지?”

“아무도 너라고 짐작하지 못할 테니까.”

“맞아. 아무도 모르겠지.”

“넌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그래. 아직 애송이지.”

“게다가 넌 입이 무겁잖아.”

“나에게 돌아오는 건 뭐지?”

“돈. 인생을 바꿀 만큼의.”

“난 사라지기만 하면 되는 건가, 카퍼필드처럼?”

“그래. 카퍼필드처럼.”

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인생을 바꿀 수만 있다면 비행기를 사라지게 만들 각오도 되어 있었다. 사기꾼 마술사처럼.

나는 하루에 한 번 돈 가방을 확인했다. 일종의 의식이었다. 대형 트렁크에 빼곡하게 들어찬 5만 원권 지폐들을 바라보면 잠시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돈에서는 늙은 작부의 사타구니에서나 풍길 법한 비릿한 냄새가 났다. 돈과 맞바꾼 국회의원의 비대한 몸뚱이는 부검 후 땅 속에 묻혔다. 꼭 범인을 잡겠다는 경찰청장의 인터뷰가 라디오에서 하루 종일 흘러나왔다.

2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공기가 습하고 후덥지근하다 했더니 어김없이 쏟아졌다. 늦은 장마였다. 국지성 호우를 동반했으니 비 피해에 각별히 조심하라고 아나운서가 말했다.

비가 오면서 화성 아파트는 앓는 소리를 냈다. 깨진 창문으로 날아든 빗줄기가 하수구로 흘러들었다. 묵은 빗물이 하수구를 돌며 아파트의 몸 구석구석을 짚어 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대신에 습기가 찾아왔다. 곰팡이가 피었다. 12라운드를 모두 뛰고 판정패한 늙은 복서처럼 515호 벽에는 푸르스름한 멍이 군데군데 자리 잡았다. 곰팡이는 날이 갈수록 영역을 넓혀갔다.

내가 벌인 사건은 여전히 톱뉴스였다. 하지만 3일 사이에 연이어 일어난 살인 사건도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목 잘린 시체가 발견되었다. 모두 세 구였다. 수법은 동일했다. 시체의 가슴에는 맨살을 뚫고 노란색 스마일 배지가 달려 있었다. 범인은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었다. 공평하다면 공평하고, 변태라면 지독한 놈일 확률이 컸다. 나는 그 뉴스가 궁금해 라디오를 켰지만 잡음만 들려왔다. 하루 종일 미친 듯이 몰아치는 비바람 때문인 듯했다.

연쇄 살인은 나에게 작업을 의뢰한 조직에서 일부러 저지른 일일지도 모른다. K는 사건의 빠른 수습을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할 거야. 가능한 한.”

“예를 들면?”

“나도 몰라, 아직은. 아무튼 이 조직은 그럴 힘이 있어.”

K 같은 브로커들은 사바나의 작고 예민한 초식동물처럼 위험을 쉽게 감지한다. 자신에게 불똥이 튈 일은 절대 만들지 않는다. K가 그럴 힘이 있는 조직이라 말한다면, 분명 그럴 힘이 있을 것이다. 더 크고 자극적인 뉴스를 터트리는 것도 가능하리라.

스마일 배지는 너무 작위적이다. 목을 자른다는 설정도. 화젯거리를 만들려고 일부러 작업한 티가 역력했다. 아마 며칠 후면 언론은 연쇄 살인 소식만 죽어라고 다룰 것이다.
간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방 안에 빗물이 차올라 모든 것들이 떠내려갔다. 죽은 정치인이 나타났다. 목에 난 상처가 벌어지고 그 속에서 천둥 같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에 구멍이 뻥 뚫린 화목한 가족들이 ‘자, 김치’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집요하고 성실하게. 나는 헤엄을 쳐 현관으로 갔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는 찰나,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칼을 꺼내들었다. 복도에서 누군가가 걷고 있었다. 빠르고, 가볍고, 그러면서도 신중한 발걸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귀만 열었다. 밤공기가 서늘했다.

칼자루를 세게 쥐었다. 마트에서 산 2만 원짜리 스테인리스 부엌칼이었다. 기술자용이 아닌 평범한 칼을 쓰고 현장에 버리자고 제안한 쪽은 K였다. 나도 그 편이 나아 보였다. 두 자루를 사서 하나는 정치인의 기름진 배때기에 박아 넣었다. 나머지 한 자루가 내 유일한 무기였다. 부엌칼은 살을 파고들 때마다 찌익 하는 거북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다시 듣지 않는 것, 병든 고양이처럼 조용히 은신하다가 하와이의 작열하는 태양 속으로 뛰어드는 것, 그것이 내 유일한 바람이었다.

소리는 사라졌다. 천천히, 사막의 신기루가 걷히듯. 빗소리만이 남았다. 한참 동안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살아남은 창문 몇 개가 바람이 불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발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비를 피해 숨어든 개였을까. 아니면 떠돌이 노숙자였을까. 어느 쪽이 되었든 성가신 존재임에는 틀림없었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잠은 쥐새끼처럼 달아나 버렸다. 불현듯 고기가 생각났다. 지글지글 불에 구운 돼지고기가 폭력적이라 할 만큼 갑작스레 떠올랐다.

“작업이 끝나면 꼭 돼지고기를 먹어야 해.”

이제는 죽어 버린, 내 옛 스승이 말했다.

“그래야 몸속의 독이 빠지거든.”

나는 매번 스승의 충고를 따랐다. 작업에 성공한 날이면 정육점에서 삼겹살 한 근을 사 와 불판에 올렸다. 이번에는 먹지 않았다. 급히 몸을 숨기느라 먹을 새가 없었다. 입술에 달라붙는 기름기와 혀를 자극하는 육즙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다시 일어나 전투식량 두 개를 해치웠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독한 장마도 계획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비가 내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무언가가 조금씩 어긋났는지도 모른다.
연쇄 살인범에게는 스마일맨이라는, 다소 촌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벌써 여섯을 죽였고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으며 시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다. 잡음 섞인 라디오에서 알아낸 소식은 그 정도였다.

“저는 이 사건을 접하면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을 느꼈습니다. 피해자의 목을 잘라 가는 잔혹함과 대낮에 범죄를 저지르는 대담함은 그 유래가 없을 정도입니다. 범인은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크며…….”

심리 분석관이라는 사람은 격양된 목소리로 떠들어 댔다. 하지만 툭툭 끊어지는 라디오 전파 때문에 어딘가 박자가 맞지 않는 랩처럼 들렸다. 랩의 내용으로 짐작하자면, 그리고 내 예상이 정확하다면 조직에서는 꽤 괜찮은 놈을 쓴 모양이었다. 며칠 만에 나보다도 더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그것도 세상의 이목을 끄는 엽기적인 방법으로.

나는 스마일맨이 희생자의 목을 자르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잘라서, 어떻게 들고 갔을까? 들고 가서, 어디에 전시했을까? 어쩌면 스마일맨이야말로 마술사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상대로 깜짝 놀랄 만한 재주를 선보이고 있으니.

나는 베란다로 향했다. 라디오에서는 귀에 익은 노래가 나왔다. 김현식이 부른 「쓸쓸한 오후」였다. 사포로 문지른 듯 거친 음색이 짙어지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내리는 비를 바라봤다. 치덕치덕 달라붙는 여자처럼, 끈질기게도 쏟아졌다. 세상은 모두 젖어 있었다. 아파트 옆에 쌓여 있던 어른 키 높이 정도의 흙이 모두 씻겨 내려갔고, 그 자리에는 물길이 생겨 누런 황토 물이 흐르고 있었다.

부연 물안개가 불길한 소식을 전하는 봉화처럼 피어올랐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았다. 새들은 빈집에 몸을 숨겼으리라. 화성 아파트에도 수백 마리의 비둘기가 살았다. 똥을 누러 다닐 때마다 비둘기와 마주쳤다. 그놈들은 아둔해 보이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불청객을 바라봤다. 비둘기가 ‘구구’ 소리를 내며 운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녀석들은 사람처럼 쿡쿡거렸다.

“요즘 사회는 초유의 암살 사건과 연쇄 살인으로 그야말로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두 사건의 범인이 빨리 잡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암살 사건의 경우 단서가 잡혔다고 하니 조금 더 지켜봐야겠습니다.”

시사 프로그램 진행자의 말을 마지막으로 라디오는 혼수(昏睡)와도 같은 긴 잡음의 세계로 다시 빠져들었다.

3

보름이 지났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여전히 비는 내렸다. 하늘은 늘 잿빛 구름에 덮여 있었다. 맑았던 날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빗발을 뚫고 간신히 비쳐드는 몇 줄기의 햇살도 오후가 되면 슬그머니 사라졌다. 꾹꾹 눌러 담긴 습기가 숨을 쉴 때마다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시퍼런 곰팡이는 벽에다가 기괴한 무늬를 그려 나갔다.

라디오는 치매 환자처럼 깜박깜박했다. 온종일 잡음을 중얼거리다가도 잠시 정신이 돌아올 때면 깜짝 놀랄 만큼 명징한 소리로 낯선 소식들을 토해 냈다.

홍수로 수백 명이 죽고 실종되었다. 집이 무너지고 도로가 끊겼다. 전국이 빗속에 갇혀 신음하고 있다는 뉴스 속에는 연쇄 살인도, 정치인의 살해 소식도 들어 있지 않았다. 마치 오랜 옛날인 것만 같았다. 내가 그 두툼한 목살에 칼을 찔러 넣었던 일이.

어쩌면 이 모든 것, 끈적끈적한 더위와 숨 막히는 장마가 죄다 꿈일 지도 모른다고, 깨어나면 하와이의 눈부신 모래 해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눈을 떠 봐도 현실은 언제나 그대로였다.

끈적끈적한 더위와 숨 막히는 장마, 그리고 진동하는 악취.
발소리가 또 들렸다. 지난 밤, 모처럼 멀쩡해진 라디오에서 청승맞은 노래 한 곡이 막 흘러나오려던 찰나였다.

515호 바로 앞이었다. 나는 라디오를 끄고 현관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차가운 감촉이 귀를 타고 발끝까지 펴져 나가는 동안, 소리는 지난번처럼 서서히 멀어졌다. 30분 정도 같은 자세로 귀를 기울이다가 문을 열었다. 단단히 조여 놓은 어둠뿐, 복도는 텅 빈 채였다.

하지만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누군가가 어둠 속에 옹송그리고 앉아 나를 지켜본다, 그런 느낌이 내리치는 빗발보다도 더 선명하게 머릿속을 적셨다.

날이 밝자마자 칼을 챙겨들고 515호를 나섰다. 문을 잠그려다가 현관문에 새겨진 낙서를 발견했다. 빨간색 매직으로 그린 동그라미 속에 곡선 몇 개가 들어 있었다. 그 누군가가 간밤에 남긴 작품이 분명했다.

여기저기 고인 물웅덩이를 피해 4층으로 내려갔다. 5층을 벗어나는 것은 화성 아파트에 온 이후 처음이었다. 5층은 똥을 누면서 매일 둘러본다. 누군가가 드나든다면, 그리고 숨어 있다면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나는 수색을 시작했다. 쓰레기 더미, 부서진 문, 깨진 창문, 내장처럼 터져 나온 집기들, 그리고 빌어먹을 습기와 곰팡이까지, 4층도 5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머리를 얼얼하게 만드는 악취도 마찬가지였다.

401호로 들어가 각 방과 화장실을 살폈다. 물에 젖은 커튼이 거실 창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원래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검은색이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저수지 속의 수초처럼 흐늘거렸다. 401호를 나와 402호로 들어갔다. 그런 식으로 410호까지 계속 둘러봤다. 모두 빈집이었고 지겨운 곰팡이와 새똥 외에는 생명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신라면 봉지를 발견한 것은 411호에서였다. 창문 바로 아래에 은색의 배를 뒤집고 찢어져 있었다. 잘게 부서진 면발과 덩어리진 스프도 함께였다. 봉지는 깨끗했다. 색이 변하지도 않았고, 물에 젖지도 않았다. 나는 누군가가 창문으로 바깥을 살피며 라면을 뜯는 모습을 상상했다. 면을 부순 후 스프를 뿌렸을까, 아니면 크게 자른 면을 스프에 찍어 먹었을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무슨 이유로 이곳까지 기어들었고,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봉지에 남은 스프를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봤다. 잊고 있었던 강렬하고 날카로운 미각이 살아났다.

“이 호래자식. 도둑질을 해?”

라면 한 봉지를 훔치다 주인에게 걸렸다. 열 살 때였다.

“누가 애비 없는 새끼 아니랄까 봐.”

운이 좋지 않았다. 엄마는 이틀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집에는 먹을 것이 떨어졌고, 나는 첫 도둑질이라 주변을 살필 정신이 없었고, 평소에도 미친놈이라 소문이 자자했던 슈퍼 주인은 푹푹 찌는 날씨에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거지새끼…….”

주인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나를 놓아주었다. 놓아주며, 적선하듯 라면을 던져 주었다. 내 얼굴에는 시뻘건 손자국이 가득했다. 나는 그 라면을 집으로 가져가 끓여 먹었다. 그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반지하 방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시큼한 햇빛도, 치밀어 오르던 분노도, 간신히 참아 넘긴 울음도…….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쉬어 빠진 과거에서 빠져나왔다. 다급한 발소리도 이어졌다. 복도로 뛰어나가 소리의 방향을 좇았다.

바로 아래, 3층이었다. 계단을 향해 달렸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놈은 독 안에 든 쥐였다. 죽여야 할까, 아니면 겁만 주고 보내야 할까.

3층으로 내려섰다. 소리는 사라졌지만 산산조각 난 정적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을 채우려는 듯 빗줄기가 거칠어졌다. 숨을 고르고, 칼을 고쳐 쥔 다음 301호부터 차례로 훑었다. 긴장으로 등이 팽팽해졌다. 옷은 이미 땀에 젖어 축축했다. 어둠 속 어딘가에서 쿡쿡 하는 비웃음이 들렸다. 비둘기들이었다.

305호에서 깨진 사기그릇을 발견했다. 주방 찬장도 열려 있었다. 누가 밥을 해 먹으려던 게 아닐까, 먼지 쌓인 그릇과 곰팡이 핀 싱크대가 아니라면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확은 그뿐이었다. 소리의 정체가 사기그릇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화성 아파트에서는 깨지지 않은 것이 드물었다.

허옇게 질린 채로 나를 바라보는 파편을 뒤로하고 306호로 이동했다. 새로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공기 중에, 아니 집 안 곳곳에 냄새가 달라붙어 있었다.

탄내. 지방질의 무언가가 불에 탄 냄새였다. 자기 몸에 불을 질러 자살했다는 사람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집안 곳곳에 화마의 흔적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거실 벽에는 그을음이 가득했다. 쩍쩍 달라붙는 바닥에도. 소파도 불에 탄 채였다. 썩어 문드러진 사체 같았다.

“돈은 없지, 집에서는 강제로 쫓겨날 판이지. 어쩌겠어? 그냥 확.”

K의 말이 떠올랐다. 탄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그것도 이토록 진하게.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아 서둘러 복도로 나왔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1층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비둘기와 쥐새끼들하고만 마주쳤을 뿐 발소리의 주인은 찾지 못했다. 나는 계단에 주저앉아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봤다.

마치 다른 세상인 듯, 물의 장막으로 꽁꽁 둘러싸겠다는 듯, 비는 이를 악물고 퍼부어 댔다. 눈 밑이 떨렸다. 머리가 아팠다. 달군 쇠꼬챙이가 안구를 지나 뒤통수까지 꿰뚫는 것 같았다. ‘이웃에게 미소를.’ 게시판에 적힌 식상한 문구 밑에 거울이 달려 있었다.

거미줄처럼 얼기설기 금이 간 그 속에서 낯선 남자가 나를 향해 히죽 웃었다.

끈적끈적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늪 속에 빠진 느낌이었다. 발버둥 칠수록 점점 더 가라앉는.

4

“나야.”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안 된다고 했잖아.”

“걱정 마. 밤이고, 공중전화야.”

“그래도.”

“언제쯤 해결되지?”

“아마, 곧, 조금만 기다리면.”

“확실히 말해 줘.”

“상황이 안 좋아.”

“여기도 상황이 안 좋아.”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누가 있어. 여기 화성 아파트에. 나 말고 누군가가. 혼자일 수도 있고 여럿일 수도 있어.”

“말도 안 돼. 거긴 우리가 이미…….”

“알잖아. 내가 허튼소리 하지 않는다는 걸.”

K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도 귀를 기울이고만 있었다.

“어떻게 해 주면 돼?”

K가 물었다.

“최대한 서둘러서 처리해 줘. 쓸데없는 일이 생기기 전에.”

“좋아. 3일만 기다려. 좀 골치 아프긴 해도 그때까지는 꼭 해결할 테니까.”

“뭐가 골치 아프지?”

“경찰이 냄새를 맡은 모양이야. 아직은 꼬리 부분을 더듬는 수준이지만 언제 머리까지 올지 알 수 없는 상태야. 그것 때문에 높은 분들 심기가 불편해.”

“어쨌든, 빨리 해결해 줘. 은둔자가 되기엔 이곳은 좀 시끄러워.”

“은둔자라. 멋진 말인데?”

K가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바로 옆 슈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자다가 일어난 중년 여자가 꺼끌꺼끌한 목소리로 맞이했다. 참치며 햄 같은 것들을 죄다 카운터로 가지고 갔다. 아직까지 식량은 충분했지만 나에게는 기름기가 필요했다.

“우산이 없으신가 봐요?”

여자가 내 몰골을 보고 물었다.

“이런 비에는 우산이 필요 없죠.”

“근처 사세요?”

“아니요. 일이 있어서 며칠 머물고 있어요.”

의심스럽다는 듯, 여자가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비에 고생이네요.”

“기자예요, 신문 기자. 잠복 취재 중이죠.”

나는 준비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아, 기자님이세요?”

“재개발의 문제점 같은 걸 취재하려고요.”

여자의 얼굴이 풀어졌다.

“말도 마세요. 그것 때문에 온 동네가 뒤집혔다니까요.”

“다른 분들도 그러더라고요. 힘들었다고.”

“형 동생 하던 사람들끼리 서로 고소하고 싸우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어요.”

“화성 아파트는, 거기도 시끄러웠죠?”

“소문 들으셨어요? 그 왜 있잖아요, 거기서 아저씨 한 명이 분신인가 뭔가 했잖아요. 그 후로 정말 귀신이 나온대요. 거기 철거가 늦어지는 것도 그래서라는데. 하여튼 흉흉해요, 흉흉해. 어서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럼, 다음에 또 들르겠습니다.”

나는 여자가 건네주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순간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참, 그런데 좀도둑도 늘었겠어요?”

내가 물었다.

“아, 네. 그렇죠.”

“라면 같은 것도 없어지고?”

“그렇긴 한데…….”

여자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바퀴벌레의 더듬이처럼 길게 뻗은 여자의 의문과 의심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왔다. 세찬 빗줄기가 다시 달려들었다. 무심한 척 고개를 숙인 가로등이 한 줌도 안 되는 빛을 토해 냈다.

화성 아파트가 자리 잡은 언덕배기를 바라봤다. 어둠보다 더 짙은 검은색 윤곽은 사막의 신기루 같아 보였다. 여행자를 유혹해 끝내 쓰러지게 만드는 악마의 손짓. 화성 아파트에 보름이 넘게 처박혀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기가 싫었다. 역병처럼 창궐한 곰팡이 속으로, 뇌가 얼얼해질 정도의 악취 속으로, 더위와 습기와 어둠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어쩌면 발을 돌렸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화성 아파트 5층 복도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지 않았더라면.

노르스름한 불빛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여기 있어. 어서 와서 나를 찾아 봐, 라고.

나는 화성 아파트를 향해 달렸다. 봉투 속에 든 통조림 캔이 자기들끼리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너는 누구냐?

봉투를 1층 현관 앞에 내려놓고 조용히 계단을 오르는 동안 계속 그 질문을 던졌다.

누구이기에 버려진 아파트를 맴돌고, 라면을 훔치고, 유령처럼 홀연히 사라지느냐. 몸에서 흘러내린 빗물이 내 발걸음 뒤로 긴 꼬리를 남겼다. 숨이 거칠어졌다. 칼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4층까지 거의 무호흡으로 올라갔다. 임계점을 돌파하기 직전의 심해 잠수부처럼 머릿속에서 폭죽이 펑펑 터졌다. 혈관을 타고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5층으로 올라가기 직전, 검은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칼을 휘둘렀다. 비둘기였다. 허공을 가른 칼날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벽을 때렸다.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더 이상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몇 계단을 한 번에 뛰어올라 5층 복도로 들어섰다. 불빛은 자취를 감춘 채였다. 겹겹이 덧칠한 어둠만이 나를 맞이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가 있었다. 라이터를 꺼냈다. 부싯돌이 젖었는지 몇 번이나 실패하고 나서야 간신히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빨리 나와.”

나는 소리쳤다. 비둘기들이 복도로 몰려나왔다.

“지금 나오면 살 수 있다.”

싸구려 부엌칼은 벽에 부딪친 뒤 두 동강이 나 버렸다.

“열을 세겠다.”

나올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천천히 숫자를 세며 복도 중앙으로 걸어갔다. 짚이는 곳이 있었다. 집집마다 다니며 뒤져 봐야 지난번처럼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유령 같은 놈은 다른 곳에 몸을 숨겼으리라.

“아홉.”

조용했다. 예상대로였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반 토막밖에 남지 않은 칼을 비스듬히 벼렸다. 찌르기보다 베는 데 적합하도록.

“열.”

소화전 문을 활짝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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