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묻지 마 – 1 (제2회 ZA 문학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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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죽은 자리 옆에 구덩이가 파헤쳐 있었다. 구덩이 안에는 소주병과 농약병이 들어 있었고, 그의 입 안에는 흙이 한 움큼 차 있었다. 나는 그 흙을 빼내지 않은 채 숨을 거둔 그대로 시신을 묻었다. 아버지의 더러운 손도 닦지 않았다. 내가 아버지에게 정이 없다거나 장례식 비용을 아끼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마당을 파헤쳤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1. 쉬이이!

후텁지근한 천막 안에서 바깥 상황을 엿보았다. 한뜰마당에 죽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초여름 햇살에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에 개성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 특유의 표정은 모두들 갖고 있었다. 어금니가 드러날 정도로 헤벌쭉 웃고 있었다. 입 모양은 웃고 있었지만 다른 부분은 굳어 있었다.

석고를 발라 굳힌 것처럼 눈동자에는 핏기도 눈빛도 없이 회색이었다. 공통점이자 차이점 하나 추가. 그들은 각기 다른 형태로 썩어문드러져 있었다. 얼굴에서 뭉쳐 있던 부엽토가 부스러지듯 살점이 떨어졌다. 그 무리 중에 본능적으로 눈에 띄는 모습이 있었다. 입에 흙을 문 남자와 팔 한 쪽이 없는 여자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계속 오고 있어.”

뒤로 고개를 돌려 통기타를 튜닝 하는 형에게 말했다. 내가 듣기에 이만하면 충분한 것 같다고 말해도 형은 고집스럽게 기타를 만지작거렸다. 몇 번이나 크게 숨을 몰아쉬었는지 몰랐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 몇 방울이 흘렀다. 손에도 땀이 많이 나겠지.

“땀 좀 닦아. 손 미끄러지겠어.”

형은 고개를 숙인 채 기타줄을 튕길 뿐이었다.

“걱정 마. 난 지금까지 무대 위에서 실수 한 적이 한 번도 없어. 뭐, 실수해도 애드리브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야.”

그렇게 말하자 천막 안에서 실소가 살짝 터져 나왔다. 얼마 안 남은 바람이라도 내보내 조금이라도 날고자 애쓰는 풍선이 떠올랐다.

“말이야 쉽지, 그런 핑계가 통할 상대들이 아니잖아.”

꽹과리를 쉼 없이 매만지던 호석이 형의 손이 멈췄다. 그나마 나던 한숨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해버렸다. 천막 안에서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이는 놀이꾼들에게 어떤 관객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상기시킬 필요는 없었다. 밖에서 매미 소리가 정적처럼 천막 안으로 스며들었다.

스키오스키오스키오그르르르 스키오스키오스키오그르르르 스키오스키딩디리딩딩디디딩.

갑자기 매미 소리 끝에 이어지는 기타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형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낙 낙 낙킹 온 헤븐스 또얼, 낙 나악 낙킹 온 헤븐스 뜨으얼.”

형이 천막에 들어오고 나서 긴장감 없이 웃는 모습을 처음 봤다. 에릭 클랩튼이 아버지가 되었을 때 아마 그는 저런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른다.

“문 밖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것보다 알고 들어가는 게 더 맘 편하잖아?”

특별할 것도 없는 말을 특별한 상황에 내뱉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군. 형은 애써 태연한 척 보이려는 티가 났지만 애교로 봐주기로 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선장수 철연이가 장구 끈을 어깨에 들쳐 메고 채편을 두드렸다.

“아, 낙크할 거 있나? 그냥 가는 겨어!”

그래 그냥 가자 한뜰 마당패 기타소리 띠리딩딩 꽹과리는 깽알깽알 장구 채가 덩기덕 북소리 올린다 덩둥덩 징하니 징징거리는 소리도 뺄 수 없지 아이구야 자기 까먹었다고 귀청 떨구는 태평소 보소 그냥 가자 그래 우린 한뜰 마당패 한뜰가서 한 판 신나게 놀아보자 심심하다 패대기 당해도 놀아보자 불어보자 놀아 불어보자 한뜰 마당패 (작사: 최동민 최동진, 작곡: 최동진 최동민, 연주: 한뜰 마당패 a.k.a. 생선가게 철연이, 피자배달 호석이, 엘리트 이장 동민이, 다기능 엔터테이너 동진이, 이기자 지현이, 인간소리꾼 김만우 옹, 대장장이 심철주 아저씨, 글로벌 프린세스 심 란 아잉 a.k.a. 심난영)

2. 갑과 을

아버지가 죽고 난 뒤 나에게 두 가지 별다른 일이 생겼다.

하나는 장례식이 끝나고 내가 한뜰리 이장이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이장이 된 이유도 있지만, 이 마을에서 이장을 맡을 만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사람들이 추천한 게 컸다. 얼핏 보면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나이 어린 청춘은 구판장 주인이 기르는 여자아이였다. 그 아이는 구판장 주인의 아들 내외가 잠시 맡기고 간, 다시 말해 구판장 주인의 손녀였다. 아기는 걸핏 하면 울어대어 내일 모레면 칠순을 보는 할머니를 애먹게 만들었다.

“그래도 집안이 좀 살어서 성가시진 않어.”

하지만 바로 옆집에서 사는 나로선 상당히 고달픈 일이었다. 한 번은 컴퓨터로 음악을 듣다 그 애가 빽빽거리는 울부짖음을 못 참고 구판장으로 찾아갔다. 가게 안에 살림살이가 같이 있는 집이었다. 난 라면 몇 봉지를 사면서 주인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애가 엄마가 많이 보고 싶은가 봐요. 저러다 상사병 걸리겠네.”

주인은 DMB 폰으로 뉴스를 보던 중이었다. 한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허만군에 있는 아연공장에 화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었다. 슬쩍 화면으로 현장을 보니 쉽게 가라앉을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애기가 뭘 알겠어. 배고파서 우는 게지. 근데 이장님은 여전히 약주 많이 드시구?”

“뭐 그렇죠. 고물장수 아저씨가 그동안 모아둔 빈 병들 가져가면서 감탄했다니까요. 자기가 평생 마실 술을 한 달도 안 돼서 해치웠다고.”

“거 형이란 노무자식이 코빼기도 안 비치니까 섭섭해서 그려. 자네가 좀 잘해 드려.”

마을 사람들은 늘 이런 식으로 우리 집안 얘기를 꺼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겠다고 대꾸했다. 그러나 속으로 그렇게 말을 꺼내는 사람들을 욕했다. 인삼 잔뿌리만도 못한 작은 마을에서 누리는 재미라고는 남의 집 흉보기 정도인 사람들이니까. 아니, 그 정도로 그치면 가볍게 웃어줄 수 있지.

“그런데 할머니 며늘님은 이번 추석 때 오나요? 그 때라도 애를 봐줘야 지 엄마 얼굴 안 까먹지.”

주인은 파리채로 과자 위를 맴도는 파리를 휘휘 내쫓았다. 뉴스에서는 올해 실시하는 재보궐 선거와 관련한 내용을 보도했다. 한뜰 군수가 관할 도지사에게 허리를 숙여 악수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오기는 뭘, 뭘 또 와. 그냥 용돈이나 부쳐주는 게 속 편햐. 저들 살림 편해질 때 꺼정 내가 키운다고 했지. 그러잖아도 애 엄마 사진 꼬박 꼬박 보여주고 그려.”

주인이 서랍을 뒤적이다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크고 맑은 아기 눈이 엄마를 닮았구나. 나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가게를 나왔다. 라면 값을 지불하고 알아낸 정보는 ‘니 애비 술값 밀린 거 갚으라고 좀 해라. 니 형은 뭐 얼마나 성공한다고 어딜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거냐. 행여나 너까지 도망갈 생각은 마라. 마지막으로 네가 원하는 답을 듣는 건 포기해라’ 이다. 니, 니, 너, 너.

그 한 마디 한 마디 안에는 니나 너라고 부르는 ‘나’가 있었다. 건방진 노인네 같으니. 당신이 사는 구판장을 비집고 다니는 쥐새끼나 신경 쓸 것이지. 쥐가 그 집 서까래를 갉아 먹으면 남이 자기 욕하는 소린 줄 알겠지. 어쨌든 구판장 주인의 손녀딸은 여전히 울어댔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횟수가 줄어들었다.

개월 수가 지날수록 ‘아 우리 옆집에는 잘생긴 오빠가 음악감상을 하니까 조용히 있자’고 깨달은 게 아닐까. 아마, 띵똥.

“동민이 자네가 올해 나이가 서른 좀 넘었지?”

초상을 치르고 얼마 안 있어 마을회관에 오라는 통보를 받아 찾아갔다. 회의실 안에는 이미 마을 어른들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넓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이 정도였나 싶을 정도로 적은 수였지만 만만히 볼 수 없었다. 나를 부른 이는 한뜰리에서 땅을 가장 많이 가진 살구나무 노인이었다. 그의 집 앞마당에는 아름드리 살구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봄이면 온 마을에 꽃잎이 날릴 정도로 컸다.

살구나무가 있는 마당이 대문 밖에 있어서 지나갈 때마다 살구나무 밑에 떨어진 살구를 몰래 주워 먹은 적이 있었다. 때로는 그 집 옆에 노인이 관리하는 과수원에서 형과 배서리를 하기도 했다. 어설프게 낮은 포복을 하다 걸려서 된통 혼난 적이 많았다.

내가 꾸지람을 받은 게 서러워서 울면 노인이 반쯤 곪아 터진 배를 주었다. 우리는 그것도 좋아라하며 받아서 맛있게 먹었다. 그랬던 꼬맹이가 벌써 서른하고도 넷, 그 꼬맹이를 혼냈던 노인네가 자네라고 부를 정도로 나이를 먹은 것이다.

“네, 어르신.”

“그 누구냐…… 구판장 집 손녀딸 알지? 자네가 걔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거 알겨.”

난 그 사실을 몰랐지만 알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몰랐다고 말해 봐야 대화는 한 방향으로 흘러갈 게 빤하니까.

“자네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암만 적게 잡아봐야 마흔다슷이나 쉰 정도고 그나마 몇 명 되지도 않어. 그 머시냐 이제 모내기철 되고 하면 일손 깨나 딸리고 말여. 성만이 이 친구는 요즘 구제역이다 뭐다해서 상심이 크고. 그래니까 동민이 자네가 마을 이장 좀 해야 쓰겄어.”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이장 일을 하며 겪은 고충을 보아 온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어르신,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죄송스럽게도 이장 일을 못 할 것 같습니다만…….”

마음 같아서는 단칼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이 안에 내 편이 없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응하기로 했다.

“아니 왜, 무슨 일로 그러는겨?”

노인이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사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해서 이 마을에 더 있을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자꾸 부모님 생각이 나서 견딜 수 없습니다.”

이앙기는 폼으로 갖고 있냐고 묻는 대신 감상에 젖은 말을 했다.

“그럼 어디서 뭐 하려는겨?”

“서울에 가서 공무원시험 준비나 하려고요.”

“집은 놔두고?”

“팔려고 내놓자니 살 사람이나 있을지 모르겠어서. 형이 언제 올지도 모르고.”

형 얘기가 나오자 구판장 주인이 끼어들었다.

“너나 느 형이나 갈 거면 아예 갈 것이지 뿌리만 남겨놓고 가겠다는 건 뭐하겠다는 심보여.”

이어서 담뱃잎 농사를 짓는 양씨가 재빨리 나섰다.

“그려, 차라리 그 집을 마을에 기증하는 건 어뗘?”

그는 아버지의 친구였다. 이런 인삼 잔털에 묻은 흙먼지만도 못한. 살구나무 노인이 좌중을 둘러보며 조용하라는 눈빛을 돌렸다. 그리고 내 어깨 위에 손을 얹고 협상을 재개했다.

“자네도 알겄지만 이전 이장, 그러니까 자네 부친이 하려던 사업이 있잖여. (그러자 누군가 ‘아 구럼, 숙원사업이제’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아직 마무리가 안 된 걸 아들이 이어서 해 보는 건 어떤가 싶구먼.”

노인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가며 그의 삐뚤빼뚤한 치열이 눈에 띄었다. 이 사이는 갈색 때가 진득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건 저보다 어르신들이 더 잘 해결 하실 텐데요.”

“세상 물정 모르는 촌사람이 뭘 아나. 그래도 동민이 자네는 대학도 나오고 말여, 먼젓번 이장님이 동민이 칭찬을 얼마나 했는디.”

그가 입을 열자 이와 이 사이에 있던 갈색 때가 잇몸을 덮고 혀끝에까지 퍼졌다. 노인의 목구멍 깊은 곳에서 습한 먼지가 낙하산을 타고 내 콧구멍에 들어왔다. 단순히 입에 발린 소리를 해대는 게 아니었다. 아버지가 이장이었던 것을 상기시키며 미미하게나마 나와 ‘이장’ 역할을 연관 지으려는 의도였다. 그 때문인지 더 이상 노인과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망상에 빠진 틈을 타 살구나무 노인이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가 이장하면, 내가 ‘그 땅’ 줄게.”

멀끔한 사기꾼은 사기를 칠 때 사투리보다 서울말을 자주 쓴다. 사투리 쓰는 피해자가 ‘을’이라면 서울말 굴리는 가해자는 ‘갑’인 셈이다. 이 촌구석 사람들도 ‘갑’의 위치에 있고 싶을 때는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 비록 내가 속으로 ‘뻐꾸기가 종달새 둥지에서 기지개 켜는 소리 하고 있네.’라고 비아냥거릴지라도 그 순간 내 위치는 ‘을’이었다.

“그게 참말이에유?”

그 날 실시한 ‘한뜰리 이장 선거’는 개표하지도 않고 바로 결과를 발표했다. 나는 결국 이장이 되는 대가로, 예전에 잃어버렸던 아버지의 땅을 남에게 하사받았다.

챙에 한뜰군청 마크(사람처럼 생긴 인삼 두 개가 각각 H, D 형태로 그려져 있다.)가 수놓인 ‘이장표 모자’를 쓴 지 한 달쯤 지났을 때, 형이 돌아왔다. 별 다른 두 번째 일.

3. 노릇노릇하고 야릇야릇한

“야, 기억 나냐? 13일의 금요일에 나오는 제이슨이 살아 있는 건지 아니면 죽은 채 돌아다니는 건지 따졌던 거.”

“그게 궁금한 상황이야 지금? 최소한 저 앞에 보이는 일에 대해서는 따질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저거 말고 그거 말야, 그 때. 초등학생 적에 토요명화에서 여름특집이라고 13일의 금요일 틀어줬을 때를 말하는 거라고.”

형과 내가 한 방에서 생활하면서 밤에 같이 TV를 보던 시절을 회상해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십 년도 더 전이었으니까.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있다면 그 때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와 형 넷이 한 집에서 살았던 모습 정도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이 있다. 형은 사태 파악을 잘 못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때, 나는 두 손에 든 밧줄로 어느 순간이고 상대를 포박할 준비가 되어있을 때 형이 그런 소릴 지껄였겠지. 심지어 형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삽을 바닥에 내려놓기까지 했다. 내가 그에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소곤거렸지만 형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면서 앞의 광경을 감상했다. 그 얼굴을 보니 문득 뭔가가 떠올랐다.

중학생 시절이던 형과 내가 부모님 방에서 몰래 장롱을 뒤지다가 야릇한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한 일이 있었다. 우리는 한 편으로 마음 졸이면서 다른 편으로 그 영화로 마음을 태우면서 TV 브라운관을 응시했다. 수많은 서양 여자들이 무대 위로 나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옷을 벗는 단순한 레퍼토리였다.

그녀들은 내가 꿈꾸어 왔던 그 이상의 모든 코스튬을 선보였다. 흑인 여자가 백인 여자를 채찍으로 섹슈얼하게 본디지하는 라이브 쇼는 내 안에 잠자고 있던 SM 기질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아, 또, 아, 또, 아, 더, 아, 나, 더, I wanna the show. 살짝 화면에 비치는 넋 나간 우리 표정이 그 영화의 수위를 말해 주었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그 제목,

「HOT! 칙한 채찍, 그리고 당근」 90년대 초반, 적화통일의 기세가 어떻게 십 대 청소년의 깊숙하고 깊숙한 생활 속으로 침투했는지 엿볼 수 있는 발칙한 제목이었다. 형과 나는 한 번에 그 영화를 다 보지 못했다. 언제 부모님이 귀가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야금야금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치밀했다. 영화를 (영화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없는 영상이었지만) 보고 나면 테이프 필름이 반대편으로 감긴다는 걸 알고, 상영을 마칠 때마다 일일이 테이프를 되감았다. 다시 영화를 볼 때는 마찬가지로 일일이 빨리 감기를 눌러서 이전에 봤던 장면을 찾아야 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함께 두 번을 (아마 형도 나와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따로 보기도 했을 것이다.) 완주했다. 세 번 째 완주를 시작하려고 장롱을 뒤졌을 때, 아버지의 필적이 고스란히 담긴 쪽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테잎 반납했다. 너희 때문에 연체됐으니까 이번 주 용돈 없는 줄 알아라.

빅 브라더,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형과 나는 정말 그 주 용돈을 받지 못했지만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비누 거품 여신들 덕분에 잘도 히죽거렸다.

그 때 한창 나의 심볼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 때도, 형과 내가 같은 방에서 한 밤에 TV를 보며 수다를 떨곤 했다. 그래서 형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겨우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근데 요즘처럼 ‘내이웃’에서 검색할 수도 없었고 해서 끝까지 우겨댔지. 너는 제이슨이 죽은 몸을 이끌고 복수를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그 반대 입장이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엉터리 이유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안 죽으니까 이미 죽었다는 이유였지.”

내가 대꾸하자 그제야 형이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맞아. 하지만 나는 비교적 세련된 이유였어. 그의 복수심이 엄청 강력한 힘을 부여해서 쉽게 죽지 않는 거라고.”

“피차일반이야. 자꾸 서로 의견이 어긋나니까 아버지한테 물어보기로 했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왠지 아버지는 알 것 같았어.”

그 날 자정이 넘은 시각에 우리는 안방으로 향했다. 그 나이 때는 집에서 노크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무심코 방문을 열었다. 사랑보다 우정에 더 큰 비중을 두던 열한 살, 열세 살 소년의 눈이 낯선 행위를 포착했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우리보다 더 당황했을 부모님의 표정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형이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우리 방으로 돌아와 이불을 덮고 누웠다. 뭘 본 거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내 나이 때 하는 일은 아니라는 감이 왔다. 잠시 후 아버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불을 켜지 않았고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놀라지들 마라. 나중에 크면 다 알게 되고 하게 될 테니까. 너희들보다 엄마가 더 부끄러워하신다. 그러니까 그냥 부부 사이의 뭐 그런 거려니 하고 넘어가고 자라. 그리고 인마, 이불 그렇게 덮으면 숨 막혀.”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안방으로 돌아갔다. 나와 형은 이불을 덮은 채 최대한 소리를 낮춰 킥킥거렸다.

“그 후로도 종종 아버지랑 어머니랑 사랑을 나누시던 모습을 회상해 봤거든. 내심 뿌듯해지는 거야. 우리를 낳고 기르면서도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시는구나 싶어서. 그래서 이번에는 못 하겠어.”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형이 그런 감상에 빠질 때가 있다니. 몹시 놀랐지만 나는 냉정을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지금 못 잡으면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생길지 몰라. 봐, 무방비상태잖아.”

땅에 놓인 삽을 들어 그의 손에 쥐어주려 하자 형이 정색을 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얌마, 넌 저거 보고 느끼는 거 없어? 아무리 시체라고 해도 저 둘이 품고 있는 사랑이 여전하다는 게 안 느껴지냐고! 네가 보기엔 씨발, 그냥 욕구불만을 해소하는 두 남녀로 보여? 골목길에서 짝짓기 하는 개새끼들한테도 물을 끼얹을지언정 삽날로 내려치진 않아 이 개새끼야! 하물며 저기 있는 사람들은…….”

쉴 틈 없이 말한 탓인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씨익씨익하는 바람 소리가 앞니사이로 새어나왔다. 형이 처음으로 음악을 하겠다고 선포할 때 스쳤던 결연한 의지가 비쳤다. 멍청이. 아무리 투철한 의지가 있다고 해도 운이 안 따라주면 소용없는 거야.

난 속으로 형이 얼마나 어리석은 결단을 하고 있는 건지 탓했다. 그렇지만 이번만 받아주기로 했다. 형 노릇할 자격조차 없는 형의 호소를 들어주기로 했다.

“좋아, 만약 늦둥이가 태어나기라도 하면 형이 처리하는 거야, 알았지? 나는 썩은 시체덩어리 동생을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 삽으로 흔적도 안 남게 다져버린다고 약속해. 그럼 오늘은 물러갈게.”

“……그래, 그럴게.”

“마지못해 약속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고!”

“씨발, 알았어, 알았다고. 혹시나 엿 같은 경우가 생기면 내가 자근자근 다져버릴게, 됐지?”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