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e ya

  • 장르: 로맨스
  • 태그: #첫사랑 #재회 #추억 #만남
  • 분량: 95매
  • 소개: 8년 만에 다시 만난 Q,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어쩌면 변한 것은 Q가 아닌 나인지도 모른다. 첫사랑과의 재회는 열어보면 안되는 상자를 열어보는 일일 것이다. 그 안에 무... 더보기

See 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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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마지막으로 Q를 만났는지 모르겠다. 8년? 아니면 9년 전일까? 군대를 가기 전이었으니, 아마도 8년 전이지 싶다.

 

‘너 혹시 우리 대학 다닐 때 Q기억 나냐? 한 학번 밑이었잖아. 얼굴 동글동글하고 귀엽게 생긴 애. 3학년 되기 전에 호주로 어학연수 가더니 아예 거기서 자리 잡았다고 하던데.’

 

김이 오이를 한 입 베어물고는 우물거렸다. 그의 입에서 Q의 이름이 나왔을 때 나는 조금 당황했다. Q가 누구였지? 기억을 더듬는 대신, 3D입체 영화를 보듯 그녀의 모습이 눈앞으로 선명하게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까맣게 잊은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그녀를 흙빛 천막으로 덧씌워놓았던 모양이었다. 휘장을 거둬내자 단 번에 Q가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Q? 생각날 것도 같고? 누구였더라?’

 

연기파 배우 S를 좋아하다보니 자연스레 능청스런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때 너희 둘 뭐지? 그래 요즘말로 썸 좀 탔나?’

 

Some이라는 말이 없었을 땐, 뭐라 했을까? 그렇고 그런 관계? 그래 우리는 마주 앉아 학식을 먹었고, 교양수업을 들었으며 도서관에서 공부를 했다. 하지만 공식적인CC도, 연인 관계도 아니었다. Q와 학식을 먹고 교양수업을 들으며,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 사람은 비단 나 혼자만은 아니었으니까.

 

‘하긴 그녀석이 여러 사람들하고 참 잘 어울렸지.’

 

김이 소주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김과는 대학 졸업 후 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한 달에 한두 번 가볍게 만나 서로의 고민을 들어주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각자의 푸념을 늘어놓았다. 김은 대학 졸업 후 일식집 부주방장이 되었는데, 경영을 전공한 녀석에 웬 일식요리사일까? 궁금했지만, 아버지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일식집의 요리사란 사실을 듣고 아하! 무릎을 내리쳤다.  아버지의 대를 이을 아들이 왜 생뚱맞은 경영을 전공했을까 두번째 의문이 들었는데, 얘길 들어보니 전혀 관계없는 것 같진 않았다. 대기업이든, 작은 일식집이든, 어차피 고객만족과 이윤창출이란 경영의 기본 틀은 크게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

 

김과는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졸업 후, 선배들의 결혼식장에서, 돌잔치에서 더러 얼굴을 보며 가까워진 케이스였다. 김은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소탈했고, 너그러웠으며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었다. 왜 학교 다닐 때는 몰랐을까? 아마 김을 알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Q 여전하더라.’

 

김의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확 고개를 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녀석이 씩 한쪽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래서 사람들이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그리고 연기는 연기자에게. 말하는 모양이다.

김이 느긋한 표정으로 소주잔을 비웠다.

 

‘너 혹시 지난주에.’

 

왜 아니겠냐는 표정으로 김이 어깨를 들썩였다.

 

‘나도 진짜 설마 했다. 거기서 걔를 볼 줄 누가 알았겠냐? 야라리버 앞에 노천카페가 줄지어 있거든, 거기서 커피 한잔 하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동양여자가 앉아 있는 거야. 혹시나 싶어서……야, 그런데 Q는 전혀 변한 게 없더라. 세월이 그 녀석만 비켜간 것 같다니까.’

 

김의 누나가 시드니에 살고 있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덕분에 녀석은 일 년에 한 두 차례 시드니를 방문했는데, 누나의 거주지가 멜번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지나가는 말로 얼핏 들은 듯 했다.

 

‘Q 멜번에서 스쿨 에이전트 한다고 하더라.’

 

‘에이전트?’

 

‘유학원 인마.’

 

그날은 조금 급하게 술을 마셨다. 쪼르르 채워지는 술잔가득 오래전 추억이 넘쳐흘렀다. 한 잔 술에 기억이, 두 잔 술에 추억이 나를 조금씩 취하게 만들었다.

 

노릿한 삼겹살 냄새가 사라지고, 불판위에 고기들도 까맣게 타버렸다.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걔 아예 한국에 들어올 모양이더라. 하긴 요즘 유학생들도 확 줄었지.’

 

김의 한마디에 지금껏 마신 술이 모두 물처럼 느껴졌다. 나른했던 머릿속이 팽팽하게 날을 세웠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날 저녁, 시티에서 만나서 맥주 한 잔 했거든? 어쩌다보니 옛날 얘기 나오고, 네 얘기도 했지. 너 아직 결혼 안했다고 했다. 유명한 S물산 자재부 대리님이란 소리도 했지요. Q도 너 똑똑하게 기억하더라. 너 군대 갔을 때? 직접 편지도 보냈다면서.’

 

내 방 어딘가를 뒤져보면, 아직 편지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편지는 내가 Q에게서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였으니까.

 

나 곧 호주로 떠나, 오빠도 군 생활 잘하고 몸 건강히……어쩌고저쩌고 하던 편지였다. 위문편지도, 그렇다고 연애편지도, 또 그렇다고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도 아니었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또 지극히 거리를 두는 담백한 내용이었다. Q의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나의 감정은 묽은 카레 속 양파와 당근처럼 아무렇게나 뒤섞이곤 했다.

 

그런 기억까지 생생한 걸 보니, 아무래도 나는 Q를 특별하게 여겼는지도 몰랐다.

 

한 잔술에는 기억이, 두 잔 술에는 추억이, 그리고 세 잔 술에는 사랑이 아닐까 생각하며 술잔을 털어 넣는데, 김이 툭 한마디 내뱉었다.

 

‘다음 달 초에, Q 한국에 한 번 나온다더라. 그래서 네 연락처 줬다.’

 

그 순간 쿨럭 마시던 술을 내뿜은 건, 혹여 버리지 못한 미련이었을까? 그날 나는 꽤나 오랫동안 콜록거렸고, 오랫동안 눈물을 뽑았으며 또 오랫동안 Q를 떠올렸다.

 

 

 

한 달 초가 며칠일까? 나름 심각하게 고민했다. 1일부터 5일? 아니면 10일까지? 적어도 10일 이후면 아무도 초라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달이 바뀌고 10일이 될 무렵까지 화면에 뜬 낯선 번호에 긴장했다.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거나, 일부러 벨이 몇 번 더 울릴 때 까지 여유있게 기다렸다. 그리고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정중하고 신뢰 깊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큼큼.

 

‘여보세요.’

 

‘네 한주 택뱁니다. 댁에 계시나요?’

 

‘흠~경비실에 맡겨 주세요.’

 

 

 

큼큼.

 

‘여보세요.’

 

‘야! 나야, 형님 번호 바꿨다. 다른 애들한테는 문자했는데 너한테만 특별히 전화하는 거야.’

 

‘야 이 새끼야. 나도 문자로 해. 바빠 끊어.’

 

 

 

큼큼.

 

‘여보세요.’

 

‘네 고객님 안녕하세요. 삼정화재 최 지영입니다. 잘 지내시죠? 언제 한 번 만나 뵙고 싶은데. 이번에 새로 나온 상품 중에 정말 고객님께 딱 맞는…….’

 

‘후~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바빠서 나중에 연락드리죠.’

 

 

 

큼큼.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성산에 쵭니다. 지난번에 메일 보내드린 거 아직 확인 전이신 것 같아서. 수량에 따라 납품단가는 조절할 수 있거든요. 수량 차에 따른 단가 정리해서 보내드렸는데.’

 

‘아! 예 죄송합니다. 제가 메일 체크 해 본다는 걸. 지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수많은 큼큼이 있었지만, 정작 큼큼이 필요했던 전화는 단 한통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이제 더 이상 초라고 말할 수 없는 15일이 지나버렸다.

 

그 날도 핸드폰에는 낯선 번호가 찍혔는데, 순간 머릿속으로 며칠 전 쇼핑몰에서 주문한, 6개들이 한 세트 남성용 드로즈 팬티가 스쳐 지났다. 나는 과장에게 올릴 보고서를 작성하며 빠르게 핸드폰에 화면을 그었다.

 

‘네.’

 

‘…….’

 

‘여보세요.’

 

탁하게 갈라지는 음성 속에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 나왔다.

 

‘저기 한 재민 씨 핸드폰 아닌가요?’

 

‘네 맞는데 누구…….’

 

나는 왼쪽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낀 채, 그대로 정지 상태가 돼버렸다. 큼큼도 안했는데, 여보세요 한 마디조차 탁하게 갈라져 나왔데, 월초는 이미 한참을 지났는데, 지금쯤 택배 기사의 전화가 왔어야 했는데, 왜 하필…….

 

‘기억하실까 모르겠는데. 저Q예요. 지난달에 호주에서 김 선배 만났거든요 그때…….’

 

갑자기 뒷목이 뻐근해지는 건 어깨와 귀를 너무 바싹 붙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어깨와 귀 사이에 핸드폰을 깬 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어……어……Q. 생각……생각나는 것 같네……요.’

 

어색하게 허허 웃음을 터트리자, 직원들이 하나 둘 파티션 너머로 흘낏거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맥주와 간단한 안줏거리를 샀다. 김의 말처럼 Q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발랄하고 쾌활했으며 조금 짓궂게도 들렸다.

 

‘오빠 안경 바꿨네? 전에 안경도 괜찮은 것 같은데, 이것도 나쁘지 않다. 아주 잘 어울려.’

 

배시시 웃던 그녀였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쇼윈도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안경을 벗은 지 3년이 지났다. 수술 후 마이너스였던 시력은 일점 영까지 회복되었다. 혹여 안경을 벗은 모습을 어색해하지 않을까? 나도 모르게 슬쩍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친놈.’

 

한심한 나를 비웃듯 비닐봉지 속 캔 맥주가 카랑카랑 부딪혔다.

 

‘김 선배가 대략 내 얘기 했죠? 들어온 지 며칠 됐는데 좀 바빠서. 뭐 오빠도 바쁠 것 같고, 톡이나 문자먼저 보낼까 하다 직접 전화 한 거예요. 요즘 하도 아는 사람을 사칭한 톡이나 문자가 많다고 해서. 아니요. 바쁜 건 얼추 끝났어요. 그래요 그럼 토요일 저녁 괜찮아요. 그럼 그때 봐요 See ya 아! 미안 습관이 되어서.’

 

그날은 보고서가 왜 이 모양이냐는 과장의 핀잔도 들리지 않았다. 신입의 똑같은 실수로 귀엽게만 느껴졌다. 툭하면 염소처럼 종이를 씹어 삼키는 복사기도 그럭저럭 봐줄만 했다.

 

‘토요일 저녁 괜찮아요.’

 

나도 모르게 자꾸만 입 꼬리가 올라갔다. 퇴근시간이 다가오고, 그만 들어가자는 부장의 한마디에 사원들이 하나 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수고하셨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신입에게 나는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응 그래 수고. See ya.’

 

놀란 미어캣처럼 파티션 이곳저곳에서 불쑥 불쑥 고개들이 올라왔다.

 

 

 

나는 비닐봉지를 손에 쥔 채 벌컥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옷들과 싱크대 속 말라비틀어진 컵라면, 책상 위 찌그러진 맥주 캔들이 숙취를 이기지 못한 주정뱅이처럼 굴러다녔다. 아무리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해도 공중화장실 보다 더러운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냉장고에 캔 맥주를 집어넣고 서둘러 청소를 시작했다. 빈 맥주 캔과 반쯤 먹은 땅콩과 과자, 발밑에 부스럭거리는 라면봉지를 주섬주섬 쓰레기봉투에 집어넣었다. 침대 위 옷들도 세탁기속에 던져 넣고, 책상위에 쌓아올린 책들도 차곡차곡 책꽂이에 정리했다. 나는 돌아서 회색과 검은색으로 뒤덮인 침대를 내려다보았다. 때가 덜 탈것 같아 선택한 침구류인데 갑자기 너무 우중충하게 느껴졌다.

 

‘남자 혼자 사는 집 아니랄까봐 진짜 엉망이다.’

 

혼자 중얼거리다. 또다시 피식 피식 헛웃음이 터졌다.

 

‘미친놈. 김치를 냉장고 째 씹어 먹는 소리하고 있다.’

 

나는 얼추 집안 정리를 끝내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까지 끝냈다.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캔 맥주를 마셨다. 피로와 알 수 없는 흥분과 기분 좋은 긴장감 속에서 온 몸이 나른하게 이완되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핸드폰을 꺼내 Q에게서 온 번호를 확인했다. 단 숨에 비워낸 맥주가 온몸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고, 빈속에 찌르르 울리는 알코올기운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평소보다 너무 기분이 좋아 나는 미친놈처럼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Q는 눈에 확 띄는 외모는 아니었다. 절로 고개가 돌아갈 만큼 늘씬한 몸매도 아니었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가는 모습이었다. 김이 썸이다 뭐다 말했지만, 사실 나는 한 번도 Q와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깊은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대부분 동기와 선후배들끼리 함께 어울렸고, 공적이라 말할 수 있는 자리에서만 Q를 만났다. 테이블에 술병이 쌓일 때쯤, 내가 Q의 자리로 가거나 화장실에 다녀온 그녀가 풀썩 내 옆자리에 주저앉은 적이 있었다. Q는 호탕했고 거침이 없었으며, 제 감정에 솔직한 여자였다.

 

‘쳇! 요즘 어느 학과가 시험 끝났다고 선후배 죄다 우르르 몰려와서 술 마셔요?’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Q가 말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캠퍼스의 낭만이나 젊음 따위는, 함무라비 법전보다도 무려 3세기 전에 만들어진, 우르남무 법전에나 찾아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공공연하게 통하던 시절이었다.

 

‘그럼 오지 말지. 과대 형이 오고 싶은 사람만 오라고 했잖아.’

 

나는 테이블에 턱을 괴고 비스듬히 몸을 기울였다. 뇌의 주름사이사이까지 알코올이 스며든 상태인지라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쏟아져 나왔다.

 

‘오기 싫었죠. 그런데 일부러 왔어요.’

 

‘…….’

 

‘오빠 보려고.’

 

Q는 농담이라며 팡팡 내 어깨를 때렸다. 갑자기 술기운이 확 올랐다. 어쩌면 술이 확 깨는 지도 몰랐다.

 

그 뒤로도 Q는 내 곁에서 한참을 종알종알 이야기했다. 그녀는 나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정치나 경제에 대한 의견도 명확했다. 나는 연거푸 Q의 잔에 술을 채웠고, 고개를 끄덕였으며, 찰랑거리는 술잔을 비웠다.

 

‘그래서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나라 확 뜨고 싶어.’

 

그 뒤로도 나는 가끔 그녀와 함께 밥을 먹었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자판기 커피를 뽑아 마시거나 학교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해바라기를 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굳이 Q가 아니라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Q보다 허물없이 지내는 여자 후배들도 많았다. 그래 문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정작 그녀에게 절대 허물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빠 나 오늘 술 한 잔 사줄래요?’

 

2학기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날이었다. 종이컵을 잘근거리던 Q가 불쑥 한 마디 내뱉었다. 다섯 시도 되지 않는 시각, 하늘에는 여전히 붉은 해가 걸려 있었다. Q가 고개를 들고 안 되느냐는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혹여 내가 곧 군대 간다는 소식을 들었던 걸까? 그날따라 유독 Q의 눈빛이 슬퍼 보인 건 분명 나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대답대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우리는 나란히 호프집에 들어섰다. 맥주에 소주까지 주문한 Q가 글라스에 두 술을 섞어 마시고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해도 떨어지기 전에 무슨 일일까. 혹시나 싶은 기대감에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비어져 나왔다. 나는 연거푸 바지춤에 땀을 닦아내며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런 것뿐이었다.

 

‘내 진짜 아무한테도 말 안하려고 했는데.’

 

Q가 반쯤 비운 맥주잔을 탁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오빠는 다른 사람이랑 좀 다르잖아요.’

 

입안에 맥주를 삼키자 꿀꺽 소리가 텅 빈 홀을 울렸다.

 

‘내……내가 뭐……뭐가 다른데.’

 

아무리 침착하려 해도 바보처럼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나머지 반잔까지 말끔하게 비운Q가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가리켰다. 그 순간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온 건, 아마도 내 심장이 새끼발가락까지 추락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

 

‘이……입?’

 

아주 찰나의 순간, 나는 그녀의 입술과 맞닿는 상상을 했다. 그저 상상뿐인데 내 몸 어딘가가 뻐근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티셔츠를 끌어내리고는 슬쩍 다리를 꼬아 앉았다. 아니 꼬아 앉으려고 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손이 아닌 다른 곳에 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오빠는 입. 바로 저 입이 무겁잖아요.’

 

Q가 까르르 소리 내어 웃었다. 아 그 입? 나도 바보처럼 후후 따라 웃었다. 아 그럼 내가 입이 참 무겁지. 얼마나 무거우면 이때껏 먼저 밥을 먹자는 소리도, 술 한 잔 하자는 소리도 못했을까? Q가 한 입에 술을 털어 넣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번 박 교수님이 내준 레포트요. 존경하는 기업인의 경영철학과 그에 따른 기업성장에 관해 분석해 오라고 하셨거든요. 기말시험에 30% 반영한다고. 내가 진짜 그 레포트 쓰느라고 자서전부터 인터뷰 기사에 사보까지 구해다가 읽었다고요. 자산분석은 물론이요. 창업 초 어려움까지 다 조사했는데. 밤새 분석하고, CEO에 관한 책들 섭렵해서 읽고, 한 마디로 내 영혼을 죄다 갈아 넣었단 말예요. 그런데 와 나 참 기가 막혀서. 우리 과에서 박 교수님 레포트 최고점 누가 받았는지 알아요?’

 

나는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레포트 최고점을 받은 학생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뜻 보다는, 일종의 자포자기란 의미였다.

 

‘자기 동네 만두가게 사장님에 관한 레포트 쓴 애가 받았어요. 그래요 주방직원 홀 직원 배달까지 종업원을 12명이나 데리고 있으니 나름 경영인이라고 봐야겠죠. 와! 아무리 그래도. 진짜 그건 아니지 않아요? 그렇게 따지면 우리 동네도 2대째 칼국수만 파는 식당도 있는데, 직원들도 많고. 나도 그 집 인터뷰해서 레포트 쓸 걸 그랬죠? 그럼 진즉에 CEO의 범위를 좀 넓게 잡아주던가? 존경하는 경영인 하면 다들 전문 경영인을 생각하지 안 그래요? 생각할수록 열 받네? 진짜 이런 게 어디 있냐고요? 왜 이렇게 다들 제멋대로인지.’

 

‘존경하는 경영인이 꼭 큰 기업의 전문 CEO는 아니잖아.’

 

내 말이 서운한 듯 Q의 얼굴에 금세 그늘이 졌다.

 

‘하지만 나 같아도 그런 주제 받으면 제일먼저 우리나라 10대 기업이나 외국CEO를 생각했을 거야. 동네 만두가게는 정말…….’

 

그래서 더욱 기발했다는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 뒤로도 Q는 계속해서 박 교수의 부당함을 토로했다. 한국대학의 문제점을 호소했으며, 호프집 생맥주는 너무 밍밍하다는 불평까지 토해냈다. 나는 여전히 무거운 입으로 홀짝홀짝 맥주잔만 기울였다. 그래도 Q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나에게 고민을 이야기 해준 것이 어쩐지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에 간직된 Q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 사회 비판의식과 뜨거운 삶의 욕망, 그에 따른 에너지도 많았다. 귀염성 있는 외모에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다가갔다. 함께 있으면 기분 좋아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Q는 나에게 뭔가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적어도 내가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그녀가 훌쩍 호주 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 후로 시간은 끊임없이, 사람들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외치면, 저 멀리 있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어느새 30대가 되었다. 때로는 무궁화 꽃을 외치기도 전에 시간이 등 뒤로 바싹 따라붙고는 했다.

 

Q는 과연 얼마나 변했을까? 귀염성 있는 얼굴은 그대로 일까? 사회비판적인 시각과 야무지고 당찬 매력까지 전과 변함없을까?

 

‘오기 싫었죠? 그런데 왔어요. 오빠 보려고.’

 

혹여 Q가 갑자기 한국에 나온 이유가…….

 

“미친 놈. 네 뱃속에 김치냉장고 벌써 소화 다 됐다.”

 

나는 또 다시 혼자서 키득거리고는 널브러진 빈 맥주 캔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 이렇게 다 마셨지? 비치근한 알코올 냄새와 함께, 내 시선이 책상 위 달력에 닿았다. 토요일까지 시간이 너무 더디게만 흘러갔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나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히죽 히죽 웃음을 토해냈다.

 

 

 

한 잔 하자는 과장의 제안에도 과감히 도리질 쳤다. 나는 퇴근과 동시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몇 번이나 화장품 가게를 기웃거리다, 멋쩍은 얼굴로 그냥 뒤돌아섰다. 평소 관심 없던 팩이나 에센스 따위 이제와 뒤늦게 해본들…….

 

습관처럼 들리던 편의점도 말없이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