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의 이야기

  • 장르: SF, 로맨스 | 태그: #내남자의이야기 #아달 #1700년
  • 평점×30 | 분량: 63매
  • 소개: 나는 그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가 살아온 삶과 그가 사랑한 사랑에 대해. 다른 느낌으로 남자를 맞은 여자는 그의 전부가 궁금해지는 법이다. 내 이야기가 듣고 싶어? 아주... 더보기

내 남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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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이면 왜 그 날 그 시각 그곳에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철이 들면서 나는 알지 못하는 곳을 동경했고 학교를 졸업하고는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았으니까.

 

소녀의 호기심은 낙천적으로 성장했다. 마음 동하는 곳을 만나면 얼마 동안이고 ‘머물기’를 했고 낯선 풍경 속에서 새로운 이를 만나는 것은 일상이 됐다. 머리가 차면서는 그들의 모습을 글로 그리기 시작했는데, 여행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건 더 많은 소재와 여러 번의 방문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것을 위해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이 아그라 였으며 무썸만 부르즈에서 샤 자한의 사연을 듣고 시내로 들어오는 중에 그를 만난 것이다.

 

그와 나는 사람이 붐비는 시장통의 사리 천을 파는 노점 앞에서 서로를 발견했다. 줄에 널려 펄럭이는 원색의 사리 천 사이에서, 그는 나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굳은 채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눈은 감격에 겨운 듯했고, 그의 미소는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나 역시 얼이 빠져 그를 보기만 했다.

 

이런 이야기를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한다면 그녀들은 말할 것이다. “다 그런 거야, 처음 사랑에 빠지는 순간엔.”

 

그렇다. 내가 조금 더 어리고 열정에 휩쓸렸다면 이런 게 첫눈에 반하는 거야, 라고 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감정을 판단할 수 있는 나이였고 남자를 분별할 만큼의 경험도 있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그와의 첫 만남이, 보다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가무잡잡 다부진 몸에 회색으로 바랜 머리카락이 들풀처럼 흩날리는 그는 무국적인처럼 보였다. 마흔 즈음 아니면 더 들었을까. 우리는 펄럭이는 사리 천 사이에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고 함께 시장을 돌아다녔고 오후에는 갠지스 강가에서 공물을 바치는 이들을 구경했다.

 

그는 나에 대해 궁금해 했다. 나는 어린 시절 품었던 동경과 물 흐르듯 지나온 곳들과 자유를 추구하는 내 삶을 말했다. 그의 얼굴에 새겨진 세월의 잔주름과 경험의 무게가 느껴지는 눈에서, 나는 그 역시 많은 곳을 거쳐 왔음을 눈치챘다. 그는 특히 도시 역사를 읽는 식견이 남달랐는데, 내가 아들들에 의해 팔각 탑에 갇힌 샤 자한을 동정하자 그는 황제가 왕좌를 위해 친족을 몰살한 남자였음을 상기시켜주었다.

 

처음부터 그에게 호감을 느낀 나는 해가 진 뒤에도 달 바띠로 저녁을 때우고 페니를 마시면서 그와 함께 걸었다. 세상을 경험하고 만물에 감동하는 여성들이 그렇듯 나는 남자에게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와 그의 미소를 보면서 나는 내가 빠져들고 있음을 알았다.

 

그는 낯선 곳에서 만난 처음 보는 이였지만 친밀감을 주었고 나른한 안도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예상 못한 곳에서 익숙한 이라도 만난 듯 떠들었고 웃었으며 그리고 깔깔거렸다.

 

밤이 깊어 거리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갈 즈음, 캐슈 페니 향에 취한 나는 체크인해둔 호텔로 가 좀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해버렸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거처로 나를 초대했다. 우리는 코코넛 페니를 사들고 따즈 건즈의 낡은 발코니가 있는 아파트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사랑을 나누었다. 그는 간절한 몸짓으로 내 이름을 부르며 묻어둔 내 열정을 다시 깨워냈다. 나는 오래된 연인처럼 그를 들였고 그 안에서 익숙하지만 다른 뜨거움으로 젖어 들었다.

 

함께 절정을 맞은 후, 우리는 알몸인 채로 침대 위에서 코코넛 페니를 마셨다.

 

나는 그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 그가 살아온 삶에 대해. 그가 사랑한 사랑에 대해서. 

 

다른 느낌으로 남자를 들인 여자는 그의 전부가 궁금한 법이다.

 

“내 이야기가 듣고 싶어? 아주 긴 이야기인데.”

 

“괜찮아요, 내가 가진 건 시간뿐이니까.”

 

“시간뿐이라.”

 

그가 웃으며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그의 가슴에 가슴을 얹고 그의 눈을 보았다.

 

“내가 나에 대해 처음 기억하는 건 철갑옷이야.”

 

“철갑옷? 전쟁 때, 그러니까 옛날에 전쟁할 때 입는?”

 

그는 내 머리카락을 쓸며 끄덕였다.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방황해왔어. 내 삶은 대개 가물가물하지. 하지만 그날 본 철갑옷의 이미지는 너무 강렬해서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해… 그때가, 내가 열다섯 되는 해였어.”

 

“재미있겠다, 계속해봐요.”

 

내가 재촉하자 그는 그윽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리고는 기억을 되뇌는 것 같더니, 이윽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은 지척이며 비가 내리는 날이었어. 나는 기나긴 행렬 속에서 걷고 있었지. 지마이사금은 전해의 전투에서 패한 수모를 만회하길 원했고, 그를 위해 끌어모은 장정이 일만에 달했어. 대군이었지만 개중에는 성년이 되기 전 소년과 손자를 본 노인들도 부지기수였어.

 

나 역시 그런 소년병 중 하나였는데, 앞뒤로 행군하는 병사들의 거대함에 압도되어선 손에 들린 창 하나로 뭔가 큰일을 해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어.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나는 전쟁을 알지 못하는 철부지 소년일 뿐이었어.

 

정오가 되어 우리는 황산강 일대 평원에 들어섰어. 드디어 적과 대치했지. 그들은 소수정예의 기마전단(騎馬戰團)이었는데… 아, 그들을 처음 본 소년의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철갑을 두른 말 위에서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은 종장판단갑(縱長板短甲)과 목가리개, 그 빛나는 투구들이라니.

 

평원에 늘어선 기마전단은 지옥 불길을 뚫고 나와 우뚝 선 사자(死者)들 같았어. 잠시 그친 비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햇살이 증언이라도 하듯 철갑 위에서 반사됐지. 나는 그 위압감에 매료되어 적의 철갑을 만져보고 지옥의 차가움을 느끼고 싶었어.

 

그런 나와는 달리, 주위의 일만 오합지졸은 동요했어. 노인들은 소문으로 들은 가락국 기마전단의 용맹함과 잔인무도를 전하기에 바빴고 그럴수록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교전은 시작되지 않을 거라며 서로를 위로했어.

 

그러나 지마이사금은 적장을 향해 저주를 퍼붓고 명령을 내렸어. 우리는 겁먹은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나가야 했지. 적 진영 뒤에서 무수한 화살이 날아왔어. 병사들이 나가떨어지고 우왕좌왕 헤매기 시작하자, 기어이 지옥의 기마전단이 덮쳐왔어.

 

그것은 전투라기보다 차라리 살육이었어. 철갑을 두른 거대한 짐승들이 우리를 짓밟았고, 그 위에선 철갑옷 사자들이 창을 내리찍고 철검을 휘둘렀어. 병사들은 절망 속에 쓰러져 갔어. 처음 공포를 맛본 소년병과 이미 그것을 아는 노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바빴어. 그들은 정말 잔인무도했고 소년과 늙은이라고 봐주지 않았거든.

 

나는 창에 등을 관통당하고 진흙탕에 쓰러졌어. 그것은 태어나 처음 느껴본 뜨거운 고통이었어.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 큰 공포였고….

 

아아,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줘. 당신의 눈빛이 무얼 묻는지 알아.

 

하지만 들어줘, 그건 분명 내가 겪은 일이고 이제 시작일 뿐이니까. 그날 이후 나는 방황했고, 그 누구도 살지 못한 삶을 살아야 했으니까.

 

이야기를 계속할게. 내가 눈을 뜬 것은 새벽녘이었어. 

 

그것이 다음날인지 아니면 몇 날 며칠이 지났는지는 모르겠어. 양국 병사들은 철수한 뒤였고 내 주위엔 온통 시체들만 가득했지. 지마이사금이 다시 패퇴했다는 건 알 수 있었어. 평원을 뒤덮은 시체가 모두 우리 병사들이었으니까.

 

나는 상처의 고통을 그러안고 한참을 시체들 속에 누워 있었어.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두려웠기 때문이야. 시체들 위로 고개를 들었다간 어딘가에서 지켜보던 철갑옷 사자들이 살아남은 내 숨통을 마저 끊어놓을 것 같았거든. 상상할 수 있겠어? 사방을 메운 시체 속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떨던 소년의 공포를 말이야.

 

상처의 고통과 허기짐이 끝내 소년을 일으켜 세웠어.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들이 소년을 밖으로 밀어냈지. 나는 남쪽으로 걸었어. 그쪽에 산이 있어 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그리고는 칠흑 같은 어둠을 헤매었지. 살을 에는 추위와 고통으로 범벅된 어둠이었어.

 

전장에서 죽음의 고통을 맛보았던 나는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았어. 나약한 생명 하나가 서서히 꺼져가는, 산화되어 가던 죽음의 느낌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어….

 

하지만 지금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는 죽지 않았어 그때.

 

대신 어느 움집에서 눈을 떴지. 산속을 헤매다 바위틈 샘에 머리를 박고 쓰러진 나를 누군가가 발견한 거야. 가물가물 빈사 상태로 눈을 떴을 때, 그곳이 어디인지 몰랐지만 내가 가락국으로 들어왔다는 건 알 수 있었어. 문 옆 아궁이와 움집 내부가 내가 살던 곳과 다른 남방식이었거든.

 

몇 날 며칠을 앓았던 것 같아. 소년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매 순간 어느 쪽을 택할지 망설였고,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상처를 치료하는 노인과 나물죽을 입 안에 넣어주는 아낙을 볼 수 있었어. 소년은 결국 살아남기로 했지.

 

기력을 되찾은 후에는 그곳 사람들의 묵인하에 마을에 빌붙어 살 수 있었어. 나는 허드렛일을 돕고 남정들과 철광석을 캐며 그들 곁에 머물렀어. 비록 천대받는 사로국 아이였지만, 그 작은 마을에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거야.

 

그즈음 한 아기가 태어났어. 나는 생명 하나가 제 어미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첫울음을 터뜨리는 걸 보았지.

 

아기는 내가 몸을 의탁하던 집 딸이었는데, 이제는 너무 오래되어 이름도 기억할 수 없는 아기는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나를 제 오라비처럼 따랐어. 나 역시 아이가 마음에 들었어. 아이는 소년을 이방인으로 대하지 않았고, 사람들과 말 한마디 섞지 못하던 소년을 웃게 만들었거든. 

 

아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내가 그 아이에게 의지한다는 걸 깨달았어. 고향을 떠나 적국 마을에서 천대받던 소년은, 아마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것 같아.

 

시간이 흘러 어엿한 처자로 자란 아이가 여전한 애정으로 나를 따른다는 걸 확인했을 때,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했어. 그리고 부부의 연을 맺었지.

 

내 온 삶을 돌이켜 보건대,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야. 그녀는 내게 꿈결 같고 잠에서 깬 뒤에도 미소 짓게 하는 아련함이야. 낯선 곳을 헤매던 나는 한줄기 빛을 만난 듯 그녀에게 의지했고, 그녀는 처음에는 오라비로 다음에는 지어미로 이후에는 어미처럼 나를 지켜주었어.

 

“당신이 지켜보는 때에 이 생에 왔고, 당신이 지켜주는 가운데 이 생을 떠나요.” 

 

기력이 쇠한 그녀가 삶을 끝낼 때 했던 말이야. 

 

“나처럼 온 생을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한 이가 또 있을까.“

 

그랬었어. 나는 그녀가 태어나 자라면서 울고 웃던 모양을 보았고, 꽃처럼 젊음으로 만개한 후 황혼으로 성숙해지는 시간을 함께했고, 마침내 새벽녘 샛별로 사그라지는 순간을 지켜보았어. 

 

그리고 그녀가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지. 다시 의지할 곳 없는 이방인이 된 거야. 홀로 버려졌다는 무력감과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신을 놓은 채 세월을 흘려보냈어.

 

얼마나 허비했는지 몰라. 다시 정신을 차린 건 전쟁 때문이었어. 고구려가 오만 대군을 이끌고 곧장 가락국을 향해 남하한 거였는데, 당시 광개토왕의 위대한 소문은 남쪽 나라들에도 퍼져 있었어. 용맹한 철갑옷 사자들의 나라가 한순간에 사멸하는 걸 지켜보면서, 나는 다시 차가운 지옥의 열기에 눈을 떠야 했어. 나는 살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그녀의 기억만을 그러안은 채 전쟁을 피해 도망쳤어.

 

남쪽 나라를 떠나 사람들을 피해 북쪽으로 나아갔어. 반도를 나가 험준한 산을 넘고 계곡을 지나 드넓은 초원으로 들어갔어. 허기와 목마름으로 처음 만난 호수의 물을 마시려 엎어졌을 때, 나는 물에 비친 모습을 보고 말았어. 햇볕에 그을리고 겁먹은 두 눈을 부릅뜬 소년의 얼굴을….

 

그때서야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어. 

 

가락국으로 들어가 그녀를 만나 평생을 함께 하고, 늙어 죽어가는 이들을 지켜보고, 고구려의 침략을 목도한 시간이 얼마나 긴 세월이었는지를. 그동안 내 모습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그저 키가 자라고 근육이 붙었을 뿐이었어.

 

이제껏 의식 못한 모습에 놀란 나는, 비로소 나를 돌아봤어.

 

대체 어찌 된 걸까. 철갑옷 사자들의 창에 몸이 관통당했을 때, 나는 이미 죽었던 건지 몰라. 어쩌면 사경을 헤맬 적에 내 영혼이 어떤 악마와 흥정을 했던 건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어떤 질문으로도 내가 살아온 현실을 설명할 수 없었어. 결국 저주에 걸린 거라 짐작할 수밖에… 세월이 길 잃은 소년에게 장난삼아 내린 시간의 저주. 그것 외에는 괴이한 나를 설명할 수가 없었던 거야.

 

그날 이후 나는 부유하듯 떠다녔어. 유목민을 따라 계절을 좇고 대상들에 섞여 사막을 배회했어. 정지된 듯 영원했던 그때를 당신에게 다 묘사하진 않을 거야. 그 세월은 차라리 악몽이었으니까. 저주에서 벗어나려 허우적댈수록 점점 더 악몽으로 빠져들었으니까.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