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 작용

정신의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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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수연은 다시 한 번 고객과 눈을 마주쳤다. 저 흐릿한 눈빛이 과연 최종 허락을 뜻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물론 고객은 보다 명료한 정신이 있을 때 계약서를 낱낱이 읽고 서명했지만,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해서라면 반드시 정신이 명료할 때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하기 어려웠다.

더위 때문에 더욱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때는 가을이었지만 교실만한 크기의 방에 모여 있는 20명의 연구원과 벽에 묻힌 컴퓨터, 조명은 방을 후끈하게 달구었다. 난방기의 영향까지 더해져 산소도 습기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다들 장기 프로젝트가 곧 완성된다는 기대감으로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수연의 고민은 그렇게 깊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그럴 만한 에너지도, 책임도 없었다. 수연은 연경을 바라보았다. 연경은 그의 선임연구원이고 그에게 술을 잘 사주는 사람이며 그보다 몇 배는 더 뛰어난 공학자였다. 고개를 앞으로 내민 연경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혀 머리칼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수연은 연경의 모습이 섹시하다고 생각했다. 수연은 앞으로 내려오는 머리가 일에 방해된다고 생각하여 뒤로 묶는 편이었지만 연경은 머리모양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가장 일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연경이라고 해서 지금 고객이 계약을 이행하기를 원하는지 어떻게 알까? 연경도 방법이 없겠지만, 수연은 연경을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연경도 수연과 눈이 마주쳤으나 그 또한 고민하는 눈빛이었다.

“끄응”

그때 머리를 복잡한 기계에 연결한 채 의자에 누워있던 고객이 신음소리를 냈다. 마치 빨리 하라는 것 같았다. 업로드 시작 버튼을 누를 권한은 연구팀장인 연경에게만 있었다. 이번에는 연경이 고객과 수연의 눈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더 이상 미루기 어려운 순간이었다. 마침내 연경은 홀로그램 화면의 버튼을 눌렀다.

방 안에 있던 20명의 사람이 모두 숨죽이며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이미 수십번 연습하며 수정을 거듭한 프로그램이었기에 지금 사람이 할 일은 없었다. 조용한 가운데 디스크와 연산장치에서 내는 소리만이 높아져갔다. 화면에 뜬 업로드 현황 그래프의 숫자도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30%에 달해 있었다. 지금까지 해온 실험 중 가장 빠른 속도였다. 연경은 임종을 앞둔 회사 최초의 고객이 죽기 전에 모든 정신을 업로드하려 노력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연은 그래프가 올라가는 속도에 맞춰 방의 온도가 더욱 올라가는 것 같았다. 틀림없이 그래프가 99%에서 멈추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럼 우리의 고객은 허망하게도 여태까지 죽어간 다른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절대적 무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수연의 예감이 틀려야만 했다.

수연은 그래프가 99%에 달하는 순간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이 귀에 집중되었지만 컴퓨터의 작은 작동음밖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길었는지 짧았는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 떵하는 경고음이 떴다. 수연은 그것이 성공을 알리는 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정적을 깨고 연구원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메인 홀로그램에는 100%에 달한 그래프에 겹쳐 작업을 종료하는 중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일제히 올린 환호성은 이제 두서없는 축하와 격려, 감상과 회상의 왁자지껄한 소리로 변해갔다. 어떤 소심한 연구원들이 방에 숨겨놓고 있던 콜라를 마치 샴페인처럼 터뜨리고는 사장의 눈치를 보았지만, 사장은 어느 새 진짜 샴페인 병을 꺼내고 있었다. 곳곳에 연구관련 출력물과 종이컵, 과자가 섞여서 어질러지기 시작했다. 방수재질로 마감된 벽 안에 컴퓨터가 내장된 구조이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기계가 고장나거나 할 위험은 없었다. 물론 청소를 하는 관리 휴머노이드 A도 계속해서 분주히 활약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괴롭게 느껴지던 더위가 이제는 오히려 그들의 들뜬 기분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들 누워 있는 고객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었다.

고객의 가슴은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았다. 고객의 앞에는 수연이 서 있었다. 환호하는 동료들은 그 일을 해냈다고 믿는 것이 분명했지만, 수연은 정말로 자신들이 고객에게 영생을 선물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회사의 실험 결과를 검증한 수많은 심리학자, 정신과의사, 뇌공학자, AI공학자들이 디지털 세계에 업로드된 두뇌 시뮬레이션을 원 인격과 동일하게 봐도 좋다고 했지만, 수연은 그들을 믿지 못했다.

결국은 수연도 다른 연구원들에게 팔과 어깨를 붙잡혔다. 컴퓨터의 하드웨어 부분을 담당하는 막내 기술자 문호가 수연을 잡아끌고 있었다.

“실장님도 콜라 한 잔 같이 하시지요!”

사실 그 말이 맞았다. 화면에는 아직 작업을 종료중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지만 이는 업로드 완료된 자료를 색인하고 있다는 의미에 불과했다. 고객의 정신은 이미 온전하게 회사 컴퓨터로 옮겨진 것이다. 이미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던 연경도 막내 기술자에게 등을 떠밀려 잔을 들어올렸다. 다시 한 번 연구실이 조용해졌다.

“빤한 얘기는 싫어하지만, 오늘만큼은 여러분이 주신 권한과 의무에 따라 딱 한번만 모두가 이미 아는 얘기를 하겠습니다”

수연은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동료들처럼 연구의 성공을 믿은 건 아니었지만, 연경이 그것을 위풍당당하게 선언하는 모습을 보고 싶긴 했다.

“영생 프로젝트의 성공을 선언합니다!”

그때였다. 다시 환호하던 모두의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오류 경고음이 울렸다. 화면에는 여전히 100%를 채운 그래프와 함께, 작업을 종료하지 못했으니 재시도하겠느냐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순식간에 방이 조용해졌다. 잠시 후 조금씩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다시 그 소리도 잦아들며 연구원들의 시선은 연경에게로 모였다. 그들은 제발 업로드가 실패한 게 아니라고, 마무리과정의 단순한 오류라고 말해달라는 듯 한 눈빛이었다.

연경은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았지만 손에 땀이 나는 것과 반대로 입이 바싹 말라서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연경은 말없이 천천히, 다시 메인 컴퓨터의 조작대 앞으로 갔다. 운동화를 신은 발에서 발소리는 나지 않았다. 연경은 재시도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연구소의 모든 전원이 차단되었다.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났다.

D-981

오랜만에 맡아보는 진짜 에탄올의 냄새였다. 연경은 옛날 것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싼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에, 전통방식의 발효주는 평소에 그리 즐기지 않았다. 수연과 연경은 회사에서 드론 택시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와인바에 있었다. 대단히 비싼 것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싸구려 티도 나지 않는 작은 샹들리에, 촛대, 낡은 피아노 등이 구석구석을 차분하게 장식한 곳이었다. 주인장이 나름 취향이 있는 듯 했다.

음악이나 장식은 조용했지만 크지 않은 가게의 테이블이 모두 차 있어 분주한 분위기였다. 모두 젊은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체크무늬 셔츠나 티셔츠를 입고 있어 기술자로 보였다. 그 외에는 양복을 입은 4명의 남녀무리가 구석에 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20년 전 한국의 정치가들과 학자, 상당수의 시민들은 모두 출산율 저하와 인구 감소를 우려했다. 전체 인구와 젊은 인구 비율이 모두 줄어든다는 그들의 예상은 맞았지만 다행히도 그로 인한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청년 인구가 줄고 일자리도 줄었지만 사회 전체의 생산력은 계속 커졌다. 발달한 AI가 인간들의 일자리를 대신한 덕이었다. 편의점과 식당에서 기계가 처음 주문을 받기 시작하던 시절에는 인간 종업원을 상대하는 것보다 불편하다는 손님들의 불만이 잦았다. 그러나 주문 인터페이스가 인간의 외형을 띠고 충분한 대화 데이터베이스를 인공신경망으로 학습한 뒤 말로 하는 손님의 주문을 받게 되자, 대부분의 불만은 사라졌다. 오히려 주문을 잘못 받거나 누락시키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만족도가 예전보다 올라갔다는 것이 요식업체들의 설명이었다.

다른 업무영역도 마찬가지였다. AI가 사회 전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인공신경망으로 학습하게 된 데에는 회사 휴머노이드의 공이 컸다. 인간보다 빠르게 두 발로 걷고, 손가락으로 책장을 집어 넘기며, 버스와 지하철을 탈 수 있는 휴머노이드는 이제 엔지니어가 입력하는 것이나 사이버 세계의 범위를 벗어나 사회전반에 대한 데이터를 스스로 수집할 수 있었다.

회사는 인류학자와 사회학자, 언어학자, 철학자, 사학자의 컨설팅을 받아 100대의 휴머노이드를 세계 각계각층에 보냈다. 말 그대로 인류 전체의 생활패턴과 언어, 지식을 습득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학자들과 데이터 기술자들간의 회의 결과, 전세계에서 인간이 수행하고 있는 직업의 80% 이상을 AI가 80% 이상의 효율로 대체하려면, 적어도 1만 대의 휴머노이드가 5년 간 데이터를 수집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회사는 당시 비용으로 생산할 수 있는 대수만 생산하였고, 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100대의 휴머노이드가 수집한 자료로도 60%의 직업을 60% 이상의 효율로 대체할 수 있었다. 물론 AI가 특정 직업에 투입되고 나면 대부분 3개월 이내에 100% 이상이 효율을 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대표적인 직업은 AI 엔지니어였다. 물론 이제는 AI를 프로그래밍하는 효율에 있어서도 프로그래밍 AI가 인간을 뛰어넘었지만, 여전히 인간들은 그들을 감시하고 통제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수연과 연경처럼 인간의 뇌를 다루는 인간들도 계속 일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사람들의 불안감이 이유였다. 다른 모든 영역을 기계에게 넘기더라도 내 정신을 넘길 수는 없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연경은 과연 수연이 자기 직업의 희소성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기본소득이 보편화되고 10년 정도가 지나면서 사람들은 직업이 없는 삶에 적응하기는 했다. 일부 비관론자들의 예상처럼 무기력하고 게으른 삶은 아니었다. 무료함을 주된 원인으로 하는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AI 시대의 개막 전 빈곤 때문에 우울증을 앓은 사람들의 수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었다. 무직자들 중 나머지 대다수는 현실세계나 가상세계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거나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며 살았다. 현실의 휴머노이드와 가상세계의 AI 캐릭터는 각종 교수법을 우선순위로 습득했고, 원하는 사람에게 거의 모든 종류의 기술과 학문을 가르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제한 복제가 가능한 정보와는 달리, 물질적 자원을 모두가 원하는 만큼 가질 수는 없었다. 결국은 그것이 남들이 모두 노는 동안에 일을 하면서 기본소득 이상의 돈을 버는 유직자들이 엘리트 계층을 형성하게 된 이유였다. 연경은 스스로 엘리트라고 불리는 것은 싫어했지만 그와 동시에 일종의 계급적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연경이 볼 때 수연은 유직자 치고 너무 에너지가 없었다. 항상 연구소의 분위기를 처지게 하는 존재였다. 심지어 자기가 오자고 한 와인바조차도 별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실장님, 조심스럽지만 하나 물어볼게요”

“네?”

수연이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어쨌든 연경은 다소 옛날 사람일 수는 있어도 무례한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도 거의 조는 것처럼 보였던 수연에게 연경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우리 연구소에서 일하는 게 별로 재미없어요?”

“네? 아뇨! 아하하하”

물론 직장 선배로부터 저런 질문을 받고 바로 네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연경은 수연의 민망해하는 태도가 왠지 거짓되게 보이지는 않았다.

“실장님이 아니라면 아니겠지만, 이건 좀 더 조심스러운 말이긴 한데, 사실 실장님이 평소에 에너지가 별로 없어 보이거든요”

수연은 자기 쪽의 어려운 말씀을 드릴지 고민이 되었다. 아직 연경은 그의 친구가 아니었고, 그의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도 아니었다. 평상시 같으면 그 얘길 꺼낸다는 걸 상상도 안 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연경의 태도를 보아하니 자기가 일을 계속 하려면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할 모양이었다. 결국 수연은 쭈뼛거리면서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실은 제가, 약한 AI 우울증이 있습니다. 정말 약한 거라 일상생활에 별 지장은 없고요, 전 직장도 잘 다녔어요. 다만 적은 수의 사람들과 한 공간에 오래 같이 있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정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 죄송해요”

연경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인간의 외관을 띠거나 인간처럼 대화하는 AI가 일상에 보급되고 약 2년이 지났을 때 처음으로, AI와의 일상적이고 빈도높은 접촉이 우울증의 원인일 수 있다는 분석이 등장했다. 회사의 휴머노이드 100대가 세계 각지로 파견되고 5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사실 AI 우울증의 증상은 일반 우울증과 구분해서 정의내릴 만큼 특징적이지는 않았다. 다른 우울증에서는 피해망상이 나타날 때도 있고 안 나타날 때도 있는데 AI 우울증에서는 예외없이 나타난다는 것 정도가 증상 면에서의 유일한 특징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이 비교적 단순하게 파악되어, 병 치료를 위한 임상적 차원에서 미국 정신의학회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 제9판(DSM-Ⅸ)’에 AI 우울증을 위한 별도의 코드를 만들었다. 현재 AI 우울증의 발병원인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은 AI와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사람들이, AI와 인간의 구분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갖게 되는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회의라는 것이었다. 연경은 철학적 질문의 수준이 너무 낮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앞에서 그 원인으로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우습게 여길 수는 없었다.

“사실 이전 직장에서는 지금보다 증상이 더 심했어요. AI 연구소에 있었거든요. 솔직히 저는 정신과 의사들 말처럼 제 인간성에 대해서 회의한 적은 없지만, AI랑 얘기하다 기분이 이상하긴 합니다. 뭔가 위화감이 든달까… 진짜 사람과의 소통에 대한 욕구불만이랄까…”

마침 그때 그들 곁에 와인바의 휴머노이드 종업원이 다가왔다. 종업원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휴머노이드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 미의 기준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두 분 아까부터 빈 병을 쳐다보시던데 혹시 다른 와인을 한 병 추천해드릴까요?”

“괜찮아요, 필요하면 부를게요”

빈 병에 대한 두 사람의 시선을 굳이 언급한 것은 일종의 유머 작용인 것 같았지만 그리 재밌지는 않았다. 사실 연경은 음료서빙과 같은 단순 작업에 고도의 AI를 탑재하고 인간수준의 섬세한 동작이 가능한 휴머노이드를 투입하는 것은 사회적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휴머노이드를 판매하는 AI회사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어차피 모든 휴머노이드의 인공신경망은 소유주가 따로 차단하지 않는 한 무선네트워크로 회사에 연결되어 실시간으로 정보를 업데이트했다. 결국 AI는 얼마든지 복제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일 뿐이므로 한 대의 휴머노이드에 추가로 AI를 탑재하는 데 드는 비용은 0에 가까웠다.

휴머노이드 기체의 생산비용도 한 때는 1대당 도시근로자의 평생소득에 육박했지만, 생산 노하우 또한 AI로 축적되면서 현재는 3년간의 소득이면 충분했다. AI회사는 거기에 더 이상 개발비도 생산비도 들지 않는 AI를 탑재하는 대가로 2년치의 소득을 더 붙여 판매했다. 그 결과가 지금 같은 휴머노이드의 광범위한 보급이었다.

“그러니까 실장님 말은 일에 너무 파묻혀 진짜 사람을 만날 시간이 부족했다는 거예요?”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진짜 사람을 많이 만나도, 다시 AI와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사람이 그리워집니다. 정신에 나쁜 영향이 있어요”

“말하자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진짜 소통의 총량이 있는데, AI와 대화를 하면 그동안 쌓아둔 소통량을 갉아먹게 된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팀장님! 바로 그거예요”

어느새 수연은 상당히 많은 말을 술술 하고 있었다. 이렇게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은 연경이 가진 중요한 능력이었다.

“그런데 정신과 의사들은 그게 제 인간성에 대한 회의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자꾸 저 자신을 더 신뢰하라고 하는데 아무리 해도 증상이 안 나아져요. 그러다가 AI를 그만 보려고 우리 회사로 옮긴 겁니다. 물론 가정용 휴머노이드나 AI 생활인터도 안 쓰고요. 그래서 지금은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연경은 그럴 법 하다고 생각했다. 일부 급진적인 연구자들의 활동을 제외하면 AI 연구의 대세는 아직도 인간 두뇌의 신경망을 최대한 흉내내고 같은 패러다임 안에서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AI연구자들과 뇌공학자들은 교류가 활발하고 서로 간 이직도 흔한 편이었다. 이미 연경의 능력에 걸려든 수연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오히려 저 자신이나 인간 말고, AI에 대한 회의가 우울증의 원인 같습니다. 요새 학계에서는 인간 뇌 신경망은 이미 완벽하게 베꼈고 그 이상을 본다고 하는데, 저는 과연 AI가 인간을 따라잡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실험을 해보면 다 따라잡았다고 나오잖아요. 어차피 인간도 개체별로 같은 상황에서 모두 다른 반응을 보이니까, AI가 특정인과 동일한 자극을 받을 때 동일한 반응을 보일 순 없죠. 그래도 동일한 자극으로 다수의 표본을 대상으로 실험하면, 인간 집단이나 AI 집단이나 반응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어요”

“그 반응이란 게 모두 정량화 혹은 유형화됐다는게 문젭니다. 팀장님 말씀처럼 인간 개체의 반응은 다 다르죠. 그러니까 집단연구를 하려면 최소한의 유형화를 해야 되는데, 그러면 여러 요소가 잘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다못해 무서운 걸 만나 도망간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마음먹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도망가는 속도, 도망가는 방향이 다 다르잖아요. 그걸 도망이라고 유형화하면 많은 걸 놓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우리가 특정 인간이나 특정 AI를 보는 게 아니잖아요. 인간 일반하고 AI 일반을 비교하자면 당연히 유형화를 해야죠. 그리고 유형화 과정에서 놓치는 게 있다 해도 이미 연구가 충분히 많아서 그런 요소는 상쇄됐다고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연구를 많이 한다고 해서 유형화 때문에 놓치는 요소가 상쇄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많은 변인을 통제하고 또 최대한 많은 변수를 인식하는 거죠. 만약 모든 변인과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면 그건 무한대가 될 거고요. 결국 완전한 탐구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런데 AI가 인간을 따라잡았다고 확언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연경은 수연을 데리고 나올 때 이런 토론이 벌어질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연경이 사람의 말을 잘 끌어낸다고 하더라도 지금 수연이 말하는 속도로 봐서는 평소에 많이 고민해본 문제임이 틀림없었다.

“그럼 지금 AI연구가 다 헛된 거란 말이에요?”

“제 생각은 그 반댑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한계도 인정하면서 연구를 해야 된다고 봐요. AI가 인간을 따라잡았다는 환상에 빠지면 안되고, 계속 연구해서 나아가야죠. 계속 연구해서 저 우주로 나아가야죠”

“우주요?”

“네?”

“지금 우주로 간다고 했잖아요”

“우리 뇌라는 우주요. 아, 제가 뇌라는 말을 빼먹었나요, 하하”

지금까지 연경이 본 수연의 가장 밝은 표정이었다. 연경은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서 토로하다가 갑자기 우주를 운운하는 수연을 보며 위화감과 함께 그 정신 상태에 대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한 호기심이 연경이 지금까지 수연을 보면서 가진 감정이나 생각 중에 가장 호감에 가까운 것이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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