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남자사람친구에게 고백 받았다.
“나, 자살할지도 몰라.”
화내지 않았으면 한다. 이것도 엄연한 고백 맞거든? 그것도 내용이 상당히 심각한.
“진정해. 기껏해야 모의고사라고. 본방인 수능에서 잘해야지.”
“무슨 뜬금포야. 그깟 입시 가지고 죽고 싶겠냐. 하여간 쪼잔한 여자. 생각하는 거 하고는.”
방금 이 녀석은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인생을 부정했다. 그래도 난 당신이 화내지 않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내가 먼저 화를 내야 하니까!
“하지만 난 지금 네 도움이 필요해. 속 좁고 이것저것 따지는 것 많은 데다 그런 주제에 은근히 손은 많이 가고 더 심각하게 자기가 엄청 똑똑한 줄 아는 너지만, 그런 네가 없으면 난 미쳐 버리고 말 거야!”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마주 보는 사이코패스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와줘. 제발.”
이 철면피가 운다면 그건 코 안으로 CS 가스탄이 들어갈 때 정도일 거라고, 그러니까 난 평생 이놈의 눈물을 볼 일 따위 없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래서 내 손을 꼭 잡고 어깨를 부들부들 떠는 내 전생의 업보가 도대체 뭔 사연을 안고 왔는지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민아한테 좋아하는 남자가 있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 이야기였다. 한동안 이 이야기로 학년 전체가 떠들썩했으니까 말이다. 학년 불문 성별 불문 전교생의 아이돌이자 여신 권민아.(그래도 소올직히 내가 더 예쁘다.) 그녀한테 썸을 타는 남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들려온 건 개학하고 난 직후였다.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월드컵 우승이나 북한의 핵탄두만큼 충격적인 소식이라 학교가 온통 들썩거렸다. 이 소문의 여파가 가장 크게 미친 건 교사와 학부모들이었는데 자칭 타칭 면학 고교의 모의고사 성적이 아무 전조 없이 급락했기 때문이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게 내가 아니라면, 난 진짜 절망해서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
“그래서,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뭔데?”
“일생일대의 부탁 하나만 할게. 민아가 좋아하는 새ㄲ…… 아니 남자가 누군지 알아봐 줘!”
아, 그러니까 일면식도 없는 여자애가 누굴 좋아하는지 맞춰라. 대단하네. 수능 배점으로 치면 한 400점 정도 줘도 되는 문제야.
“직접 물어봐. 그게 제일 빠르지.”
“이 바보야. 네가 걔라면 대답해 줄 것 같냐! 그리고 벌건 대낮에 얘들이 다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걸 어떻게 물어봐! 꼭 내가 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잖아!”
“…….”
“부탁이야. 그것만 알면 나, 진짜 열심히 살게. 민아가 좋아하는 게 누구인지만 알아내면 다른 데 관심 딱 끊고 공부만 죽어라 할게. 게임도 SNS도 수능 볼 때까지 안 할게. 내 불알에 걸고 맹세한다. 진짜!”
너 방금 전에 권민아가 너 말고 다른 애 좋아하면 자살한다 그러지 않았냐.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거짓말을 반복하는 것이었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유일한 남자사람친구 놈이 사이코 소시오패스여서가 아니라, 내가 이번에도 이 자식의 부탁을 들어줄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고마워! 진짜 너 없으면 어떻게 사냐!”
“고맙긴, 뭘.”
불알 떼어낼 준비나 하셔. 이렇게 ‘권민아의 썸남 수사’가 시작되었다. 수사본부는 우리 반의 볕이 잘 드는 창가 쪽 책상, 수사 총 책임자는 학년 1위의 수재 서지아(그러니까 나.), 현장 지휘관도 서지아, 사이버 수사 담당도 서지아, 여론 통제도 서지아, 프로파일러도 서지아, 서지아, 서지아, 나, 나, 나. 아.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피곤하다. 부모자식형제가 부탁해도 꺼지라고 했을 일을 왜 덥석 받아들였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그놈 자식한테 어렸을 때부터 오냐오냐 해 주다 보니 버릇이 됐나 보다. 그래도 일단 착수한 일이니 소홀하게 한다는 건 나 스스로가 용납 못한다. 일단 사이버 수사부터 시작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