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노인

  • 장르: 판타지
  • 분량: 58매
  • 소개: 요양차 시골로 내려온 소년. 수명을 관장하는 신을 만나다. 더보기
작가

남극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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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병은 신이 준 것이라면서, 할머니는 나의 허약함을 이해하라고 했었다. 그러나 겨우 열두 살이었던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고는 삼십사 곱하기 칠은 이백삼십팔이란 고도의 사칙연산 정도가 전부였지 그런 심오한 말은 그저 헛소리에 불과했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의 병을 너그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럴 거라고 어릴 때의 나는 막연히 확신했다. 가족은 물론이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 모두를 벌레처럼 갉아먹는 병을, 반드시 한 사람 이상의 세상이 무너져내리고 마는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사람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

제아무리 삶에의 의지를 완전히 내려놨거나 악착같이 붙잡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것만은 어려운 거라고 그러기는 정말 불가능한 거라고 나는 고집스럽게 할머니의 말을 부정했었다.

외가댁이 있는 시골에 내려와 지내기로 한 건 그해 초부터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던 일이었다. 어른들끼리의 약속이었지만 어쨌든 그 약속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다음 해 여름 무렵으로 예상했던 나의 요양행은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자마자 병원에 실려 간 바람에 앞당겨졌고 그 때문에 2학기 교과서를 앞장만 펴보고 수성읍으로 내려와야만 했다. 언제나 그랬다. 나에게 학교생활은 고작 한 입 베어 먹었다가 바닥에 떨어트린 쿠키와 다름없었다.

고질적인 비염 치료와 면역력 증강이라는 목적으로 잠시 머무는 거라고 둘러댔으나, 조그만 산골 마을에서도 동정받는 일만은 피할 수 없었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는 마을 할머니들 대부분은 내 어깨를 토닥이거나 쓸데없이 웃어 주시곤 했다.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란 대개 선하다는 걸 알지만 그 당시의 나는 누군가의 친절이라든가 다정을 느낄 여유가 없어서 인상을 찡그리는 날이 많았다. 남들보다 빠르게 죽어가면서 웃을 수는 없었다. 웃고 싶지 않았다.

사계절 내내 열병을 달고 살았고 이틀 걸러 한 번씩 급체했으며 골밀도마저 또래 애들보다 저하돼 있어 툭하면 발목이나 손가락을 접질리곤 했다. 그러니 운동장에서 축구공을 차거나 친구들과 뜀박질하며 땀 흘리며 노는 건 당연히 할 수 없었다. 사는 게 전혀 재미있지 않은 소년에게는 다정도 병이었다.

“이번 주만 할머니랑 둘이 지내. 엄마 아빠 곧 내려올게.”

서울에서 맞벌이하는 부모님의 사정이야 어린 내가 일일이 알 수는 없었고 다만 여전히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외가댁의 스산한 풍경 속에 나 혼자 남겨진다는 게 슬퍼서 꼬박 하루를 울었다. 병보다 시골 냄새가 무서웠다. 차라리 번잡하되 익숙한 도시에서 지내는 편이 나았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거기 수성읍에만 머물 뿐 도시로 나오지 않았다.

왜 아픈 나를 여기에 둬. 할머니랑 있어도 나는 혼자인 것만 같은데. 부모님이 탄 청록색 소나타가 사라진 길목을 바라보며 나는 소리 내어 울었다.

마당 구석에 있는 닭장에서 수탉인지 암탉인지 하여튼 닭이 내 울음 사이로 간간이 목청을 높여 따라 울었고, 할머니는 그런 닭과 나를 달래기는커녕 “이해해야지 별 수 있냐, 신이 준 병이라니까.” 하면서 혀를 찼을 뿐이었다.

방 두 칸에 좁은 마루, 수차례 폭풍우를 이겨내느라 허물어지기 직전인 작은 한옥에서 할머니는 직접 아궁이에 불을 지펴 잡곡밥과 된장찌개 같은 한식을 차려줬다. 고추장과 물만 있어도 밥 한 그릇을 비우는 할머니와 다르게 입이 짧은 나는 몇 숟갈 뜨다 말곤 했다.

“떡볶이는 없어? 피자는?”

건강 관리 때문에 먹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한 번도 요리한 적 없을 메뉴를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여기에 피자는 없다고, 피자는 없지만 바로 따먹을 수 있는 방울토마토와 산딸기, 맵지 않은 오이고추가 있다고 말했다.

너무 짜거나 너무 싱거운 할머니의 극단적인 식단은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까다로운 식성 때문에 고생하는 나를 모르고, 아니 모른 척하며 오이나 호박잎을 굳이 내 손에 쥐어 주고서는 조금만 더 먹어, 먹고 이해해라 네가, 중얼거릴 때가 많았다.

도대체 뭘 더 이해해야 하는 걸까.

할머니의 염려하는 목소리 위로 매미 소리가 겹치기라도 하면 나는 그냥 죽어버리고 싶었다.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아픈데 더 살아서 뭐해, 짜증을 냈다.

내 성질을 견디지 못하고 대문 밖으로 뛰어나가고 나면 혼자 남은 할머니는 개다리소반 위로 젓가락을 집었다 내려 놓으며 괜히 아이구, 아이구 했을 것이다. 마당에 핀 잡풀이며 노랗거나 하얀 꽃은 그 구수한 한탄을 다 들었을 테다. 듣느라 잎사귀나 꽃잎이 좀 바르르 떨렸을 테다.

어쨌든 당시에 나는 어렸고, 유별나게 아팠으며 학업을 중단하면서까지 휴양하러 시골에 맡겨진 거였다. 함께 자라는 형제나 반려동물 없이, 집안의 유일한 약자여서 까탈스러운 정도가 심각했다. 장난감 사달라고 마트 바닥에 드러눕는 애들 따위는 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드러눕는 단계를 뛰어넘어 아예 엘리베이터까지 데굴데굴 굴러갈 정도였으니까.

몸은 허약한데 정신은 좀 고약한 구석이 있었다. 모든 이들에게서 과분한 보호와 양보를 받고, 그 누구도 내게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는 시절을 통과하며 자란 나를 당황케 한 건, 외딴 시골에서 만난 낯선 여자애였다.

할머니에게 괜히 투정을 부리고 집을 뛰쳐나온 날이었다. 길눈이 어두워 항상 집 주변만 돌아다니다가 그날따라 유독 커다랗게 치미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집 뒤로 이어지는 조그만 오솔길로 향했다. 몇 걸음 들어서자마자 온통 초록인 곳이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새 울음소리, 바람이 불 때마다 잎사귀 비벼지는 소리 같은 게 커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경운기 소리는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숲이 바깥의 소리를 모조리 집어삼켰다. 이놈의 숲이 나 또한 삼켜버리는 게 아닐까, 슬슬 걱정될 때였다.

“뭐야, 저건.”

한참 걷다 보니 사람이 오가는 산길은 경계가 희미해져 있고, 칠이 다 벗겨진 붉은 나무 기둥 두 개가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그 위에 지붕처럼 얹어진 세로살대에는 눈에 익은 태극문양이 있었다. 무릎 언저리까지 웃자란 잡풀이 빛바랜 홍살문 주위를 일직선으로 감싼 것처럼 자라 있었는데, 그 모습이 몹시 기묘해 보여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여기에 왜 저런 것이 세워져 있을까.

자세히 보니 두 개의 기둥 뒤로 샛길이 보였다. 저건 어디로 이어지는 건가, 잠시 생각하던 나는 완전히 다스리지 못한 화 때문에 씩씩대며 문 사이를 지났다. 바람이 머리 위의 나뭇가지를 천천히 흔들었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니 숨이 조금씩 가빠졌고 눈앞이 핑 도는 바람에 가까이 솟아 있는 납작한 바위에 주저앉은 순간이었다.

“이게 누구야.”

고개를 돌리자 웬 여자애가 방긋 웃고 있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