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 장르: 호러
  • 분량: 155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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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황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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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다섯 살.

서안중학교 2학년.

170cm. 이제 키를 따라 잡힐 것 같다. 발은 나보다 크다.

하루 종일 기타를 끌어안고 산다.

좋아하는 것: 기타, 친구들이 들려 준 록 음악.

장래 희망: 배우, 가수, 댄서(하지만 춤에는 소질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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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색깔이 눈에 띈 건 10월의 출근길 아침이었다.

그날은 팀장의 외근 때문에 급하게 나서야 했다. 촉박한 일정이 생겼다며, 오전 9시에 회의를 잡아 버린 것이다. 이러면 8시까지는 도착해 준비를 마쳐야 한다. 전날 밤 문자를 받고 미리 알람을 맞춰 두었던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깨우지 않으려 아침부터 조용히 부산을 떨었다.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는 40분가량 걸린다. 크게 붐비는 시간이 아니라 평소 출근길보다 사람이 적었다. 그래서 그 색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지하철 맞은편에 앉아 있는 고등학생. 또래들보다 마르고 남자애처럼 짧은 머리에 예고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푸른색의 춘추복 치마를 입고 자기 덩치만 한 첼로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일찍 가는 것도 힘들 텐데 악기를 들고 다녀야 하다니,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며 시선을 돌리려 할 때였다. 그 학생의 짧은 머리에 꽂혀 있는 머리핀이 눈에 들어왔다.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새카만 머리에 일자로 꽂혀 있는 그 색이 지나치게 밝고 강해서, 나도 모르게 그 머리핀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자 내 시선을 느꼈는지 학생이 수상쩍은 얼굴을 했다.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보는 척했다.

형편없는 어른이군. 누가 봐도 이상한 아저씨로 보일 터였다. 하지만 왠지 신경이 쓰여, 지하철에서 내릴 때도 은근슬쩍 그 학생을 쳐다보았다. 짧은 머리 위의 머리핀은 여전히 불타는 듯 선명한 주황색이었다. 여자아이의 취향에 대해서는 몰라서 초등학생인 여덟 살 딸아이의 액세서리 하나도 사 준 적이 없었지만, 저렇게 선명한 색의 머리핀은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머리핀을 만든 회사에서 눈에 띄는 안료를 섞어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을지 모른다. 나는 급한 일로 출근을 앞당겼다는 사실도 잊은 채 회사로 가는 내내 머리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은 회사에서도 계속되었다.

바로 아래 직급인 윤 대리에게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건네받을 때였다. 자료에는 중요한 내용이 색색의 형광펜으로 표시돼 있었다. 노란색, 연두색, 파란색, 그리고 주황색. 이상할 정도로 주황색 밑줄이 눈에 띄었다. 그 색이 너무 선명해 다른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윤 대리에게 물어보았다.

“여기 형광펜 말이야. 너무 진한 것 같지 않아?”

내 말을 들은 윤 대리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이 형광펜은 세트로 구입한 것이고, 그동안 계속 써 온 물건인 모양이었다. 결국 따로 복사물을 뽑아 다른 형광펜으로 발표 자료를 다시 정리하는 나를 동료들은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 현상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건 그날 저녁이었다.

둘째 아이인 주원이에게 밥을 먹일 때였다. 다섯 살배기 주원이는 채소를 먹기 싫어해서, 매 끼니마다 전쟁을 벌이곤 한다. 당근 볶음을 떠먹이려던 나는 젓가락을 멈췄다. 당근 색깔이 지나치게 진한 주황색이었다.

“당근이 왜 이래?”

“무슨 소리야?”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아내는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마트에서 항상 사 오던 당근이라고 했다. 퇴근할 때 내가 직접 장을 볼 때도 많아서, 어떤 코너에 어떤 채소가 있는지는 나도 알고 있다. 물론 그동안 당근의 색을 눈여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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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른두 살.

민국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 기타 전공.

인디밴드 ‘애프터 눈’ 기타리스트였으나 최근 팀 해체.

밴드 앨범 2장 발매.

5살 연하의 여자친구와 교제 중(의심스러움).

주 3회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 기타, 베이스 입시 과외.

연습실 이용료를 내가 대신 내 주고 있음.

그리고 사이드미러 수리비, 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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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에 글자를 끄적이는 내 앞에 동생 선우가 털썩 앉았다.

“뭐해? 또 내 얼굴 그려?”

갈색의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선우는 고개를 들었다. 살짝 처진 눈매가 어린 시절과 똑같이 닮았다.

“왜 맨날 이런 거 적어. 혹시 나 스토킹 해?”

나는 펜을 탁 내려놓았다.

“주선우, 너 지난달에 알바비 얼마 받았어?”

“그게, 한 백이십?”

“네가 저번에 깬 사이드미러 수리비가 삼십만 원이고, 월세 밀린 게 백만 원이야. 나머지 돈은 어떻게 할 거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수첩을 내밀었다.

“하도 대책 없이 사니까, 내가 너 대신 가계부라도 적어 주는 거잖아.”

“잔소리 안 하기로 했으면서 왜 이래.”

선우는 눈썹을 살짝 움직이고선 고개를 휙 돌렸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다 자란 자녀들을 왜 어린애 취급하는지, 다섯 살 아래 동생인 선우를 보면 알 것 같다. 서른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자리 잡지 못하고, 음악을 한다며 아르바이트나 하고 있으니 더 그렇다.

“문신은 새로 한 거야?”

나는 주황색 공룡 문신이 선명한 선우의 팔을 가리켰다. 선우는 팔을 살짝 문지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는 거야. 계속 지워지고 있어서 어떡해야 하나 고민 중인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선우의 팔에 있는 문신은 이미 5년이 넘은 거였다. 문신 색깔을 진하게 하는 리터칭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형아, 지금 좀 이상한데? 숨기는 거 있지?”

선우는 내 눈을 쳐다보았다. 내가 선우의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듯이, 선우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나의 증상을 털어놓기로 했다.

“저기 말이야.”

머리핀, 형광펜, 당근, 문신. 며칠 전부터 주위에 있는 오만가지 주황색이 점점 선명하게 보인다는 말을 하며 나는 선우의 눈치를 살폈다. 먼저 어른이 된 나는, 십 대 때 방황하는 선우에게 이런저런 상담을 여러 번 해 주었다. 하지만 내가 고민을 털어놓는 경우는 흔치 않다. 선우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굉장히 이상한 얘기네. 이번에 가사로 써야겠어.”

“농담하는 거 아니거든?”

내가 정색하자, 선우는 혹시 최근에 이상한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았다. 그리고 제법 진지한 얼굴로 심리학자라도 된 것처럼 어설픈 해석을 시도했다.

“사람이 어떤 색 하나에 꽂히면 계속 유난스럽게 보일 수 있어. 노란 우산을 산 날에는 왠지 노란 색 물건들이 더 눈에 띄는 거지.”

일종의 주관 강화 현상으로, 어떤 색깔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실제보다 더 두드러지게 보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나도 모르게 주황색과 관련된 사건이 벌어졌을지 모른다는 말과 함께 선우는 십여 분 동안 집요하게 근래에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주원이가 당근 안 먹잖아. 그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기막혀하는 나를 보며 선우는 눈을 번득였다.

“매일 당근 먹이려고 애랑 싸우다가, 머릿속에 인이 박여서 주황색만 보면 경계하게 된 거지.”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와중에도 테이블 위의 주황색 나초 소스가 점점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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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열두 살.

갑자기 키가 쑥 컸음.

반장이 아니라 부반장이 되고 싶어 하는데,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음.

자꾸 TV에 나오는 아이돌 가수들을 따라 함.

매일 30분씩 춤을 연습함.

내 옷을 훔쳐 입기 시작. PC방 사장이 되고 싶어 함.

학교에서 유리창을 두 번 깨서, 엄마가 학교에 불려 가고 결국 아빠한테 혼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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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은 나날이 심해졌다.

냉장고 문을 열면 오렌지 주스가 제일 먼저 들어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주황색 버튼만 눈에 띄었다. 회의실 벽면에서는 주황색 포스트잇이 다른 색보다 두 배쯤 커다랗게 보였다.

대형마트를 가면 주황색 물건들이 정렬된 군대처럼 나를 맞았다. 감귤, 당근, 둥그런 감자칩 봉지, 오렌지 향 세제. 모든 주황색 물건들이 한 줄로 배열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아이들을 차에 태우고 운전할 때면 도로 가운데의 주황색 유도봉 수십 개가 차선보다 먼저 시선에 걸렸다. 차창 유리에 남은 주황색 잔상이 사라지지 않고 눈 속에 남았다. 휴대폰 케이스, 가방, 신발, 구급대원의 옷, 가로등 불빛. 오토바이의 배달통 로고. 길가의 안전 표지판. 모든 주황색 물건들이 내 눈에 가장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안과를 찾았다.

의사는 내 눈에 손전등을 비추었다. 눈동자가 빛을 잘 따라가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시력 테스트나 시야 검사도 했다. 간호사는 원형 점들로 이루어진 그림책을 보여 주며 숫자와 모양을 물었다.

진단 결과는 정상이었다.

“시력도 좋고, 색각 검사도 문제없어요. 망막이나 시신경 쪽도 깨끗합니다.”

의사는 선우가 했던 얘기와 비슷한 말을 했다. 특정 색이 더 진하게 느껴지는 건 피로나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의사의 설명을 듣는 도중에도, 내 눈은 진료실 책꽂이에 꽂힌 바인더의 주황색 인덱스를 향하고 있었다.

“정신과에 가 봐야 되는 거 아니야?”

연습실에서 기타 줄을 튜닝하며 선우가 말했다.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긴 했다. 안과보다 정신과 쪽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그건 싫었다. 싫다기보다는, 그 상황은 내가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였다. 나는 서른일곱 살이다. 이미 위험한 시기를 지나왔다. 아니, 지나왔다고 믿고 있다.

그런 종류의 문제는 대개 청년기에 조짐을 보인다. 10대 중후반에 싹이 트고, 20대 초반에 조금씩 증상이 생기고, 나이가 들수록 나빠져 서른이 넘어가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환자의 대다수가 젊다. 중년 이후에 시작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유전적인 요인이 없으면 좀처럼 시작되지 않는다. 즉, 부모 중 한 사람이 병을 앓고 있으면 자녀가 증상을 물려받을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

이건 20대 초중반에 나를 두렵게 한 부분 중 하나였다.

내 어머니는 20년 넘게 병원에 있다. 대학 시절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고,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증상이 악화되어,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와 누나, 선우까지 우리 세 남매는 친척 집을 전전하며 자랐다. 이후로 병원 이외의 장소에서 어머니를 본 적은 없다.

어머니의 증세는 우리에게 유전될지 모른다. 항상 그 생각을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다행히 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헛것이 보이는 일도, 환청이 들리는 일도 없었다. 누나 역시 괜찮았다. 내가 가장 신경 썼던 건 동생인 선우였다. 선우에게도 그런 증상은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무사히 청년기를 보내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발병이 시작된다면? 통계에는 예외가 있다. 주황색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건 어쩌면 증상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나는 정신과는 더욱 가고 싶지 않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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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물일곱 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학비만 날리는 중.

제대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졸업을 못 함.

여자 친구한테는 또 차임. 비전이 없어 보인다고 함. 반박을 못 함.

이별 노래를 만들었다고 보내 줬는데, 가사가 너무 찌질함.

여자랑 헤어진 것만으로 창작의 동력이 생기는 건 아니라는 걸 언제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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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에 며칠 뒤부터, 주황색을 극복하는 훈련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같은 면적을 가진 색이다. 단순한 시각 파장일 뿐이다. 주황색 음료수 병이 두드러져 보이더라도 그 옆에 있는 생수, 콜라, 사이다 병과 같은 크기라고 생각하면 불안감을 줄일 수 있다. 카레 속에 유독 커 보이는 당근은, 그 옆의 네모난 감자나 브로콜리와 같은 칼질로 썰어 놓은 것이다.

나는 멋대로 이 증상을 ‘오렌지 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했다.

며칠간 여러 가지 색깔과 크기의 포스트잇을 집 안 책상에 붙여 놓고, 언제 주황색이 두드러지는지 실험하기로 했다.

가장 심할 때는 어두운 방에서 작은 주황색 물건을 볼 때였다. 피로가 덜하고, 물건의 크기가 클수록 오히려 주황색이 덜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밤중에 커튼을 친 방에서 휴대폰 화면을 켜 놓았을 때가 제일 심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여고생의 머리핀을 선명하게 보았던 건, 멍한 상태에 흐릿한 조명이 겹쳤기 때문이다.

무기력하고 불안할 때 주황색을 강하게 느낀다는 것도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를테면 피오나 애플의 음악을 들으면 우울해져서, 주황색이 선명해진다. 레이첼 플래튼의 음악을 들으면 강제로 기분이 전환되어 선명했던 주황색이 조금씩 흐려진다.

운전할 때 도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유도봉은 높이 70센티미터의 플라스틱일 뿐이다. 지하철에서 맞은편 자리 승객의 주황색 모자가 두드러져 보일 땐 고개를 돌려 다른 모자를 찾으면 된다. 나는 주황색이 강하게 느껴질 때마다 3초 안에 다른 색 세 개를 찾는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피하면 더 커진다. 하지만 계속해서 바라보면 이겨 낼 수 있다.

주말에 둘째 주원이와 함께 놀이터에서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끊임없이 주원이의 몸과 머리, 발 위치만 신경 썼다. 주원이가 내려오는 주황색 미끄럼틀은 너무나도 크고 밝아 보였지만, 미끄럼틀에서 내려오는 아이를 받아 올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실제로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주황색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지만 열흘쯤 지나자,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수요일 저녁에 있는 선우의 밴드 공연에서도 이 방법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공연장은 직장이나 집, 출퇴근길 지하철과는 다르다. 익숙한 공간은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자주 가지 않는 곳, 변수가 많은 환경은 대처하기 어렵다. 그건 내가 꼭 공연장에 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선우가 하는 음악에 관심이 없어서, 중요한 날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수요일 공연에 가겠다며 전화를 하자 선우는 놀라는 눈치였다.

“관심도 없으면서 왜 와?”

“가야 될 일이 있어. 너는 알 거 없어.”

하지만 클럽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조금씩 가슴이 뛰었다. 이날은 세 팀이 공연을 한다. 선우의 밴드는 첫 번째로 선다. 정해진 좌석이 없어서, 나는 일부러 30분쯤 먼저 입장했다. 앞자리에서 간단한 음료가 제공되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빔 프로젝터의 불빛이 내 눈을 때렸다. 흰색, 붉은색, 노란색, 그리고 주황색이 섞여 있는 조명이었다. 그 빛들은 밴드 멤버들의 자리보다도 더 앞서 있었다.

오늘은 펑크 뮤지션들이 공연하는 날이다. 베이스는 가슴으로 들린다. 드럼 킥은 심장 박동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인다. 그 박자가 빨라질수록 주황색 조명이 강해지는 것만 같았다. 맥주, 금속, 전기 타는 냄새가 주황색에 섞여 나를 어지럽게 했다. 어떤 노래인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지난 며칠간의 훈련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무대가 아닌 색깔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뛰쳐나가고 싶은 생각을 꾹 참고 스스로에게 외쳤다. 눈을 떼지 마. 숨 쉬어. 집중해.

공연장을 헤매던 내 눈은 기타를 연주하는 선우의 손에 멈췄다. 조명이 더욱 반짝이고, 사람들의 환호 속에 주황색이 다시 밀려오던 순간이었다. 하늘색 기타 위에 움직이는 선우의 하얀 손. 그 손의 움직임만이 규칙적이었다.

나는 주위의 모든 것을 무시하고 선우의 손을 보려 애썼다. 선우가 휴대폰 신호음으로 설정해 두어서, 들어 본 적이 있는 곡이었다. 이 곡의 흐름을 나는 예상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심장 박동이 가라앉았다. 눈을 때리던 주황색 조명도 사그라들었다.

그 곡이 끝나자마자 나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클럽의 주황색 조명은 어느새 줄어들어 다른 색들과 비슷해져 있었다.

무대가 모두 끝나고, 나는 한 시간쯤 클럽의 여흥을 즐겼다. 주황색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탁자 아래 조그마한 등으로, 맥주의 병뚜껑으로, 옆자리 여자의 민소매 티셔츠 무늬로 여전히 주황색은 눈에 띄게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주황색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갈수록 머리가 맑아져 갔다.

뿌연 조명 사이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야기를 나누는 선우의 모습이 보였다.

“어때? 괜찮았어?”

선우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계속 들어 봤던 노래들이니까 뭐…… 나쁘지 않았어.”

“다행이다. 오늘 정신없었지?”

선우의 취한 얼굴이 아직도 낯설다. 나이 든 어른들이 다 큰 성인 자녀를 아이처럼 대하는 건, 그들의 가장 어리고 취약하던 시절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응. 손이 되게 안정적이더라.”

선우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천진하게 웃었다.

“오늘 컨디션 좋긴 했어. 연주도 안 틀리고.”

그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 주황색을 피하면서 선우의 손을 보았으니까.

“참, 오늘은 괜찮아? 며칠간 안 좋았잖아. 병원 다녀왔다며.”

나는 잔을 들어 반쯤 남아 있는 맥주를 몇 모금 들이켰다.

“많이 좋아져서, 일부러 와 본 거야. 이렇게 시끄러운 데 있으면 어떤가 해서.”

“그래? 그러면 성공한 거네?”

나는 시선을 돌렸다. 선우의 반팔 티셔츠 안쪽의 주황색 공룡 문신이 조금 흐릿해져 있었다.

“성공까지는 아닌 것 같고, 지나간 거지.”

와 줘서 고맙다는 선우의 말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밑에서 울리는 스피커 소리 사이로,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사방의 주황색이 나를 따라왔다. 그 징그러운 색이 나를 붙잡기 전에 슬며시 손을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을 때, 눈앞으로 주황색 택시가 지나갔다. 내 눈은 택시를 좆지 않았다. 며칠 만에 맞는, 색깔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밤이었다.

택시를 부르지 않고 집 방향으로 무작정 걸었다.

그때 휴대폰 알람 소리가 울렸다.

누나의 문자였다.

[다음 주에 엄마 생일인 거 안 잊었지? 엄마 만나러 가자.]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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