假稱: 가멋

  • 장르: SF, 호러
  • 평점×62 | 분량: 94매 | 성향:
  • 소개: 한국 사상 최악의 대학교 살상 사건의 진상 더보기

假稱: 가멋

미리보기

#1. 사건 당일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다섯 마리…

나는 대학 인문대 건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만 해도 다섯 마리나 있었다. 전철도 겨우 견디면서 왔건만, 여기까지 와서도 그것들과 함께 엘리베이터라는 좁은 공간 안에 같이 있을 생각을 하니 속이 메스꺼워져서, 그 옆에 있는 문을 박차고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죽이고 싶었다.

죽여야 했다. 죽여야 했다. 죽여야 했다. 죽여야 했다. 죽여야 했다.

나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안 될 짓이었다. 지금 나 한 명이 나서봤자, 그것들 전부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해야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알리고 난 후여야 했다. 모두가 이 세상의 진상을 알게 된다면, 너도 나도 가릴 것 없이 박멸에 동참해줄 터였다.

죽일 것이다. 죽일 것이다. 죽일 것이다. 죽일 것이다. 죽일 것이다.

하지만 두려웠다. 내가 인터넷에 올리게 될 글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너무 뻔하게 예상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두려웠다. 그건 전쟁의 발발이자, 지금 알고 있는 세상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내가 감히 그래도 되는 것일까? 그 뒤의 아수라장을 감내할 수 있을까? 만약에 전쟁이 우리의 패배로 끝나버린다면? 그러면 끝장이었다.

나는 가쁜 숨을 고르며 계단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강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강의 시작 3분 전. 앞문을 통해 들어가니 학생들이 여기 저기 많이 앉아 있었다. 학생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였지만. 나는 또 다시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모두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조용히 노트와 필통을 꺼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모여있는 무리를 곁눈질하며 속으로 머릿수를 세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야, 왔냐?”

나는 그 목소리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걸 같은 학과의 친한 동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아니라는 것을 더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결국 나는 참을 수가 없어졌다. 혐오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내 등을 장난스럽게 툭 치는 순간, 나는 망설임 없이 필통에서 가위를 꺼내 그 목을 찔렀다.

#2. 사건 8일 전

학생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대뜸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 언어에 의한 차이는 실재하는 차이인가요, 아니면 환상인가요?”

나는 그때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했을까? 그 학생이 추후 벌일 끔찍한 사건에 내 대답이 어떤 기폭제가, 아니, 어떤 정당성이라도 마련해준 건 아니었을까? 나는 후회한다. 이 학생이 강의실에 있던 학생 5명을 살해하고, 6명을 중상에 이르게 하고, 끝내 본인도 사망하게 된 것에, 내 기여가 분명히 있었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구조주의 얘긴가요? 소쉬르?”

나는 그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학문 얘기, 설익은 학부생의 천진난만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학문에 순수한 건 없었다. 학문은 어떻게든 현실과 엮이기 마련이었다. 학문은 현실에 기반하고, 또 현실을 해체하고, 더 나아가 현실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었으니까.

그날, 그 학생이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 세상의 얇디 얇은 평화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깔려있는 대학살의 균열이었다. 언젠가는 발견되었을, 하지만 숨겨야만 했던, 끔찍한 세상의 단면.

“네, 이 세상의 구조에 관한 겁니다, 교수님.”

#3. 사건 발생 보름 후

교수는 친절했지만 초조해보였다. 지금껏 수많은 범죄자들을 상대해오면서, 그것도 틈만 나면 상대를 통제하려 들고 거짓말을 숨쉬듯이 내뱉는 뻔뻔한 자들을 상대해오면서 날카롭게 단련된 육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교수는 속이 훤히 들어다보이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한 마디로, 정직한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참고인으로 불러야 하나 얘기가 나오고 있던 참이었습니다만, 먼저 이렇게 연락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나는 교수가 건네주는 커피잔을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연락이 빨리 오지 않더라고요.”

“저희 쪽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세상엔 홀대 받을수록 좋은 곳이 두 군데가 있는데, 하나는 응급실이고, 또 하나는 형사 사건이다.’ 연락이 안 간다는 건 보통 해당 사건과의 연관성이 낮다고 여겨지는 것이니, 좋게 받아들이셔도 됩니다.”

“그러게요. 그러니 조사실이 아니라, 이렇게 따로 부탁드려서 이야기할 기회도 생기고요.”

교수가 식탁 맞은편에 조심스럽게 앉으며 말했다. 머리는 조금 희끗희끗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스테레오타입의 교수 이미지와 비교해보면 꽤 젊은 축에 속했다. 외모는 멀끔하니 얼핏 보기에도 사람이 예리하고 날카로워보여, 꽤나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엔 감정이 고스란히 다 담겨 나왔다. 그는 지금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 망설임과 결단, 그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이걸 말씀드려야 하나, 아니면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고 가야하나,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학생과의 면담 내용 말씀이시죠?”

내가 말하자, 교수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봤다. 교수는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중요한 걸 말하고자 자발적으로 연락해온 사람이니, 지나치게 위협하거나 대답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마음을 완전히 정하지 못 하고 있다는 게 보인 이상, 조금은 이쪽에서 주도권을 끌고 갈 필요가 있어 보였다.

“죄송하지만, 오기 전에 조금 조사를 해왔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게 직업병이라고 할까, 직업적인 습관 같은 거라, 누구를 만날 때 아무 정보도 없이 오는 걸 견디질 못 하는 편입니다. 교수님께서도 그런 게 하나쯤은 있으시겠죠?”

“아, 면담 기록… 네, 학생이 면담 요청을 해오면, 그 기록을 의무적으로 남겨둬야죠. 그걸 보셨군요.”

“네, 하지만 면담의 자세한 내용까지는 기록이 안 되어 있더군요. ‘진로 상담’, ‘강의 내용 질문’, 뭐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적혀 있어서… 무튼, 오늘 말씀하시려는 게 그게 맞을까요? 그… 사건 여드레 전에 말이죠.”

교수는 그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 한 구석이 조금 불편해졌다. 총 사상자 11명의 한국 사상 최악의 대학교 살상 사건. 하지만 가해자가 현장에서 자포자기한 끝의 자살인지 진압과정에서의 사고인지 자기 흉기에 찔려 사망해버리는 바람에, 범행의 동기나 사건의 전말을 직접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어져 버렸다. 당연한 수순으로 가해자의 SNS 기록 및 자택까지 살펴봤지만, 이상할 정도로 관련 있어 보이는 것이 나오지 않아 모두 반쯤 미쳐가던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한 줄기 빛 마냥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교수가 직접 전할 말이 있다고 따로 연락을 해왔건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이건 꼭…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보았을 때, 이런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으레 저런 말을 입에 담기 일쑤였다. 지금 교수의 모습은 본의 아니게 일에 휘말린 공범과도 같은 태도였다. 뭔가를 알고 있는 제보자가 아니라, 잘못된 판단으로 범행에 손을 담가버린 범인의 모습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심해야 했다. 단순 제보자가 아니라면, 갑자기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상황을 회피해버릴 우려가 컸다. 내가 자신을 체포할 위협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건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협력자라는 인식을 주어야 했다.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땐 이게 그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지고나서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그때의 면담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그 학생이 그런 짓을 저지른 이유를. 아니, 그런 일을 저지르고 말 것이라는 걸 그때 진작에 깨달았어야 했다는 것을. 사망자들을 보고서 더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범행과 관련된… 범행 계획이나 전조 증상을 내보였군요?”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중 상당수가 사건이 벌어지고나서야 사건의 암시였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경우가 많아, 정작 그 주변 인물들은 당시엔 잘 눈치 채지 못 하고 지나쳐버리곤 했다. 미국의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 범행 전에 총기 관련 이미지를 SNS에 이따금씩 올리거나 도서관에서 관련 서적이나 신문 스크랩을 열람하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그 많은 것들이 수많은 평범한 일상 속 ‘약간의 별난 행동’이나 ‘소소한 일탈’ 정도로 인식되어 추후 일어날 사건에 대한 예지까지 이어지지 못 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런 암시를 목격했던 이들은 자신이 사건을 막지 못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교수도 그런 종류인 걸까?

“이게 저 하나가 숨긴다고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것이었으면, 그렇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더군요.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건 숨길 수 있는 게 아닌 겁니다. 언젠간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고 밝혀질 게 뻔합니다. 파시즘의 부활이 두려워 파시즘을 역사 속에 마냥 묻어두기만 한다면, 그 후 미래 세대에는 파시즘이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될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역사에 한 번 등장했던 건, 이후에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애초에 파시즘은 그 전에 파시즘이 없었던 시대에, 전례가 없던 상황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건 마냥 무지(無知)에 묻어둘 게 아니라,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관리를 해야 한다고 말이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저, 교수님,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갑자기 파시즘이 어쩌구 하는 엉뚱한 소리가 나와 당황스러웠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느낌이 약간 들어서 살짝 불안해지기도 했다. 잘못하면 감정적 넋두리만 듣고 본래의 목적은 소실되어버릴 우려도 있었다. 이런 잔혹하고 큰 사건에 얽힌 사람들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다들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곤 했으니 말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좀… 옆길로 샜네요.”

교수가 한숨을 푹 내쉬며 사과의 말을 뱉었다. 나는 다 식은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괜찮다는 듯이 한쪽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흔들었다.

“아닙니다. 뭐부터 얘기해야 할지 혼란하신 듯한데, 그럼 이것부터 여쭤보겠습니다. 그 학생이 면담을 왜 요청했습니까? 처음에 뭐라고 하던가요?”

교수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언어에 의해 인지되는 차이는 환상인지, 아니면 실재하는 차이인지, 그걸 묻고 싶어 했습니다.”

— 본 작품은 유료입니다. —
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