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씽 앤 고스트 2
지수는 녹차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컵을 내려놓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옥희 씨는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한참 후 지수가 입을 열었다.
“옥희 님이 말씀하신 운과 귀인, 그런 거 있잖아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제 옆에는 아무도 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요?”
“이런 일이 생긴 게 좀 되었는데요. 누군가 자꾸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요.”
“…누가?”
“잘 모르겠어요. 느낌이 이상해서 돌아보면 숨고, 이상한 문자를 보내고.”
“이상한 문자?”
“한번 보실래요?”
지수는 휴대전화를 꺼내 옥희 씨에게 보여주었다.
-넌 나와 영원히 함께 할 운명이야. 너는 너무 아름다워. 우리는 곧 만나게 될 거야.
이런 식의 비슷한 내용들이 지수의 손끝에서 위로 죽죽 올라갔다.
휴대전화 상단에 찍혀 있는 읽지 않은 메시지 99. 확인하지 않은 문자의 숫자가 이렇게 많다는 뜻일까? 옥희 씨는 인상을 찡그렸다.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고 답을 보냈어요. 번호 확인하라고, 문자 잘못 보내셨다고.
그런데 내 이름도 알고 학교도 알고 있어요.
그 후로는 무서워서 문자를 보지도 못했어요.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늘 밖에 있고 오빠는 군대에 갔고.”
“선생님에게 얘기해 봤어요?”
“아뇨. 선생님이 저를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꺼려져서요.”
“친구들은? 아까 그 아이들은 알고 있어요?”
“이런 얘길 친구들에게 하면 학교에 금방 퍼져요.
얘기할 때는 내 편인 것 같지만 돌아서면 놀림감이 되고 결국 왕따가 돼요.
그런 경우를 많이 봤어요.”
“…아버님이 아무리 바빠도 딸 얘기를 들어줄 시간은 있지 않을까?”
“저는 아버지가 무서워요. 엄마와 헤어진 게 전부 우리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오빠도 저도 어렸을 때 아버지한테 많이 맞았어요.
지금은 다른 여자를 만나는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아요.
오빠도 얼마 전에 입대를 해서 집에 저 혼자 있어요.
그래서 더 무서워요.”
“그 남자가 집에 찾아온 적 있어요?”
“아직은 없어요. 집을 알고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내 전화번호나 학교를 안다면 집을 찾아내는 건 시간문제 아닐까요.
너무 무서워요. 내 편이 없어요.
이런 얘기조차 할 사람이 없어요.”
“혹시 친엄마에겐 연락해 봤어요?”
“엄마는 재혼해서 멀리 살아요. 연락도 안 되고요.
엄마도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고 저번에 그랬거든요.
저는 어쩌면 좋을까요.”
결국 지수는 울음을 터트렸다. 17살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다.
옥희 씨는 크리넥스를 뽑아 지수에게 건네주었다.
“경찰에 같이 가볼래요? 신고를 하면 그 남자가 더 이상 지수에게 그런 짓 못할 지도 모르잖아요.”
“경찰이 해결해 줄까요?”
“경찰이잖아요.”
“같이 가줄 수 있으세요?”
“말 나온 김에 당장 가요. 근처에 파출소가 있어.”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을 닦으며 지수가 인사할 때 옥희 씨는 컵을 치우고 사무실 불을 끄고 가방을 챙겨 들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파출소로 걸어갔다.
오후의 붉은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
파출소에는 서너 명의 경찰이 있었고 그중 중년의 경찰이 옥희 씨와 지수의 이야기를 듣고 서류를 작성했다.
접수를 마친 경찰은 지수의 휴대전화 속 메시지를 확인하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동안 옥희 씨와 지수는 긴장 상태로 경찰의 두툼한 턱선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경찰입니다. 혹시 지수 학생 아시죠?
자꾸 이런 문자를 보내는 거 스토킹법에 걸립니다.
알고 있군요? 그런데 왜 자꾸 보냅니까?
음……. 네. 본인의 감정이 때로는 상대방을 난처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해 주세요.
그럼 그 말을 한번 믿어보죠. 네.”
전화를 끊은 경찰이 지수에게 휴대전화를 돌려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xx대학교 학생이랍니다. 장난으로 그랬다는데. 다신 안 그러겠다고 하네요.”
옥희 씨는 경찰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아 조금 화가 났다.
“형사님. 이 아이는 17살이에요. 혼자 이 상황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랍니다. 경찰이 더 도와주실 일은 없나요?”
“본인이 다신 안 그러겠다고 말했고 지금 당장은 물리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차후에 또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때는 고발을 해서 피의자로 부를 수 있지만 지금은 어렵습니다. 일단 신고접수만 받겠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어야지요.”
“그렇지요. 하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아, 실례지만 혹시 어제 뉴스에 나오신 분 아닙니까?”
“네?”
“인터넷으로 봤어요. 텔레비전에서는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서 얼굴을 못 보지만 인터넷에는 얼굴이 나오거든요.
한 달이나 못 찾은 실종자를 찾으신 분. 맞죠? 가까운 곳에 사는 분이셨군요.”
경찰이 신기한 듯 옥희 씨를 쳐다보았다.
옥희 씨는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럼 그 학생인지, 남자인지가 칼이라도 휘둘러야 처벌 할 수 있다는 건가요?”
옥희 씨의 날 선 질문에 경찰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지수가 나섰다.
“다신 안 그러겠다고 했으니 믿어야죠. 또 문자를 보내면 다시 올게요. 옥희 님, 그만 가요.”
두 사람은 파출소를 나왔다.
“남의 일이라고 천하태평이구나.”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조금 놓여요. 경찰이 주의를 줬으니까요.”
“한 게 없는데 마음이 놓이다니…정말 난감한 일이야. 도와줄 사람이 이렇게나 없다니.”
“옥희 님이 제게 큰 도움이 되었어요.
언제든 사무실에 놀러가도 되요?
오늘처럼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거든요.”
“물론이지. 언제든 놀러 와요. 빈말이 아니야.”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정류장에서 버스 타고 갈게요.”
“집이 멀어요?”
“여섯 정거장만 가면 돼요. 안녕히 가세요.”
지수는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고, 옥희 씨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칠십 평생 보았던 갖가지 나쁜 뉴스들이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이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데. 저 예쁘고 어린 여자애가 이 험한 세파를 어떻게 홀로 이겨낼꼬.’
집으로 돌아가는 옥희 씨의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무거웠다.
사무실을 지나 이층집으로 올라간 옥희 씨는 간단하게 저녁을 만들어 먹고 뜨개질을 했다. 얼마 전부터 남동생의 조끼를 뜨기 시작했다. 겨울 전에 마칠 계획이었다.
밤늦도록 뜨개질을 한 뒤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은 꿈꾸지 않기를…….’
그렇게 기원하며 눈을 감았지만 악몽은 자비 없이 옥희 씨의 새벽을 부숴버렸다.
*
은빛이 감도는 구슬 하나가 어둠 속에서 앞으로 굴러간다. 사방은 아무것도 없는 희미한 어둠뿐이어서 은빛의 구슬이 또렷하게 잘 보인다.
그 뒤를 옥희 씨가 따르고 있다.
그녀의 표정은 어리둥절하면서도 닥쳐올 무언가에 대한 공포로 물들어 있다.
구슬은 계속해서 어두운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간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슬은 어느새 풍선이 되어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더니 바람 따라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구슬 풍선은 옥희 씨가 잘 따라오는지 어쩌는지 보려는 듯 가다가 멈추고 멈추었다가 가기를 반복한다.
한참 후 은빛 풍선은 어느 지점에 멈추고서 옥희 씨가 다가오는 걸 기다린다. 마치 할 말이 있다는 듯한 느낌이다.
옥희 씨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진다. 주름살 사이사이 공포가 서리어 있다.
풍선 아래에 한 사람이 쭈그려 앉아 나뭇가지로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옥희 씨의 걸음이 느려진다. 그녀는 알고 있다는 듯 천천히 사람에게 다가간다.
흙바닥에 그림이 있다. 무얼 그리고 있는 걸까.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고개를 든다.
순간, 옥희 씨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진다.
고개를 든 사람은 지수다. 지수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고 입은 웃는지 우는지 모를 상태로 일그러져 있다. 얼굴은 붉고 검었으며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쳐 있다.
사방은 온통 어둠뿐이고 어느새 은빛 풍선은 사라졌다.
지수가 고개를 숙인다. 머리카락이 아래로 늘어져 얼굴을 가린다. 나뭇가지가 다시 움직인다.
옥희 씨는 지수를 향해 다가간다. 그러나 가까워지지 않는다.
무슨 그림을 그리는지 보고 싶지만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무리 다리에 힘을 주고 팔을 휘둘러도 제자리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한다.
옥희 씨가 지수를 부른다.
“얘야, 지수야!”
지수가 다시 고개를 든다. 옥희 씨를 향해 무어라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다.
고함을 치는 지수의 얼굴이 점점 흉측하게 커진다. 지수의 입이 어둠을 삼킬 듯이 어마어마한 크기로 늘어난다. 거대한 동굴 같은 입이다.
입속은 사방의 어둠보다 더 짙고 음울한 어둠이다. 그 어둠 속에서 검은, 칠흑보다 더 검은 혀가 뱀처럼 날름거린다.
옥희 씨가 놀라서 소리를 지른다.
“아악!”
꿈에서 깬 옥희 씨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창밖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옥희 씨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트렸다.
“제발 그만 하세요. 너무나 괴로워요.”
노쇠한 울음소리가 이층의 작은 집에 울려 퍼졌다.
*
“손님, 그 일은 축복받아야 할 일입니다. 비난할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이제 스무 살인걸요. 직장에 들어간 지 몇 달 되지도 않았어요.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해서 그런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덜컥 임신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다고 엄마가 딸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말 하면 안 되잖아요.”
“내가 조심하라고 늘 말했었는데, 갑자기 이런 큰일이 터지다니. 정말 돌아버리겠어요.”
“그렇더라도 엄마는 딸의 임신을 축하해야 해요. 딸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되었는데.”
“내 말이 그겁니다. 스무 살에 애를 가지면 직장은 어떻게 다닐 것이고 애는 누가 키워줍니까. 우리 집 형편도 좋지 못해서 걔를 도와줄 입장이 안 되는데 말입니다.”
“그렇더라도 비난보다는 축하가 먼저입니다. 아이가 있다면 아이 아버지도 있겠지요. 성인이니 둘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기다려 봐요.”
“정말 미치겠어요. 요즘 애들이란!”
“손님도 일찍 아이를 낳았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내가 더 억장이 무너집니다. 나처럼 살면 안 된다고 수없이 말했는데도 이런 일을 만들다니. 너무 미워요.”
“그럼 더 이해를 하셔야죠. 임신은 축복입니다. 우선 축하해주세요. 그 다음은 손님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슬기롭게 이 난관을 해결해 나가면 됩니다. 결과가 어떻든 말이죠.”
“하…정말.”
손님이 눈물을 글썽였다.
옥희 씨는 크리넥스를 뽑아 손님에게 주었다.
“손님이 뽑은 마지막 카드가 메이저 스타입니다.
그것은 긍정의 카드예요. 어쩌면 그 아이가 복덩이일지도 몰라요.
얼마나 예뻐요. 꼬물거리는 작은 손, 발, 입.”
거기까지 얘기하던 옥희 씨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새벽에 꾼 지수의 검은 입이 떠올랐던 것이다.
옥희 씨야말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제발 아무 일도 생기지 않기를 비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쩌면 어린 자녀의 임신 때문에 울고 있는 여자 손님도 옥희 씨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그저 원망스러운 것이다.
“딸에게 맡기세요. 엄마는 축하하면 됩니다. 딸은 마땅히 축하받아야 하고.”
그렇게 옥희 씨가 타일렀지만 손님은 한참을 더 넋두리와 하소연을 늘어놓은 뒤 사무실을 나갔다.
기운이 빠진 옥희 씨는 털썩, 패브릭 소파에 누웠다.
그녀는 가슴에 두 손을 포개어 올리고 눈을 감고서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꿈이 틀리기를. 제발 이번에는 틀리기를.
그러나 그녀의 꿈은 틀린 적이 없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