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남자는 멜빵끈을 탁탁 튕겨 댔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범인이 있다는 건 이해하겠지요?”
서른 쌍의 시선이 어지러이 교차할 뿐 실내는 고요했다.
“어디 보자. 급식비라 액수가 좀 될 줄 알았더니 우유 급식비란 말이지. 급식비 봉투가 없어진 건 체육시간이고, 주번은 갑자기 코피가 나는 바람에 양호실에 다녀왔고…….”
4분단 그늘진 곳에서 살짝 움츠러드는 아이가 있었다. 주번이었다.
“반장, 보통 주번은 두 명 아니니?”
“예. 그런데 다른 애는 어제 결석해서요.”
반장은 굳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대답했다.
“아, 그래.”
생각에 잠긴 남자는 단상 위를 이리저리 거닐었다.
“저기…….”
반장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일어선 채였다.
“응? 뭐 할 말 있니?”
“아저씨는 누구세요?”
그제야 남자는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흠흠! 그는 마른기침을 두어 번 했다.
“나는 탐정입니다. 여러분 담임선생님과는 중학교 때부터 친구 사이지요. 그렇다고는 해도 무료로 사건을 해결해 줄 만큼 돈독한 사이는 아니에요. 그저 아쉬울 때만 연락하는, 뭐, 적당히 이해관계로 얽힌 사이라고 해 두지요. 아, 이해관계라는 말은 너희들한테 너무 어렵니? 쉽게 말하자면 여러분 선생님과 내가 뭔가를 주고받기로 했다는 거야. 아저씨는 없어진 급식비를 찾아 주고, 그 대신 선생님은 아저씨한테…… 어흠. 아무튼 듣자 하니 어제 담임선생님이 여러분을 책상 위에다 무릎 꿇리고 눈도 감기고 아주 그냥 청춘 드라마를 찍었다면서요? 그런 걸로 자백할 녀석이라면 애초에 돈 욕심을 내지도 않았겠죠. 그래요, 여러분 담임선생님은 중학교 때부터 물렁했답니다. 여자애가 저래 물렁해서야 커서 어찌 사누 했는데 초등학교를 다시 다니고 있더군요. 하지만 이 아저씨는 선생님이랑은 다를 거예요. 가져간 게 누구든 후회해도 늦었다고 미리 밝혀 두지요.”
범인은 말할 것도 없이, 무고한 학생들마저도 침을 꿀꺽 삼켰다. 아이들로선 어제 찍은 건 청춘극이 아니라 혹독한 인질극이었던 것이다.
“엄마가 오늘도 학원 빠지면 안 된다고 했는데…….”
3분단 첫째 줄에 앉은 여자아이는 숫제 울상이 되었다. 남자는 안심시키듯 손바닥을 활짝 폈다.
“아, 아, 염려 마세요. 금방 끝날 거예요. 아저씨도 바쁜 사람이에요. 몇 푼 되지도 않는 급식비 같은 걸로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얘기예요. 이거 말고도 사건이 밀려 있거든. 그래서 말인데 아저씨는 여기 선생님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요.”
좌중이 낮게 술렁였다. 남자는 다시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이 반에서 가장, 음, 영향력이 있는 아이가 누구니?”
그러자 반장이 엉거주춤 일어서려 했다. 남자가 황급히 제지했다.
“아니, 내 말은…… 짱 말이야. 누가 이 반에서 짱이니?”
1분단 맨 뒷줄에서 의자를 까딱대며 내내 창밖을 응시하던 아이가 움찔 고개를 돌렸다.
“그래, 알겠다. 척 보기에도 네가 범인이구나.”
“뭐라고요?”
덮어놓고 범인으로 몰린 아이가 분통을 터뜨렸다. 남자는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생각해 보렴. 물러터진 담임선생님을 너희가 얼마나 얕보고 있는지는 안 봐도 뻔하잖냐. 정말로 결백하다면 수업 끝나고 놀 시간을 빼앗은 선생님한테 볼멘소리라도 하지 않았겠니? 내가 보기에 너는 전형적인 반항아 타입이거든. 그런데 얌전히 있었단 말이지. 이건 이상하지 않니? 아마 네가 급식비를 가져갔기 때문에 돌출 행동을 삼가려 한 게 아닐까?”
“멀쩡한 사람을 왜 의심하고 그래요? 증거 있어요? 나는 체육시간에 축구하고 있었다고요!”
흐음, 남자는 아이를 빤히 쳐다봤다.
“아저씨는 범인을 찾아 달라는 부탁만 받았어. 어떻게 훔쳤는지는 하나도 궁금하지가 않아요. 그러니 증거야 아무렴 어떠냐. 나는 너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밖에 없구나. 억울하면 네가 진범을 찾아보렴. 5분 말미를 주마.”
남자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무심결에 주머니의 담배를 뒤지다가 금연 건물임을 깨닫고 혼자 머쓱해졌다. 그가 자리를 비운 교실에서 쿵 하고 책상 내리치는 소리와 분기를 머금은 고함 소리가 들렸고 이따금 ‘밟아 버리겠다’라든가 ‘죽을 줄 알아’라든가 하는 내용의 거친 음성도 들렸다. 남자가 10분간의 넉넉한 배회를 마치고 교실에 들어서자 한 녀석이 앞에 나와 울먹이고 있었다. 몇 대 쥐어 박혔는지 비슬비슬하며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아니, 천만에.”
탐정은 아이의 어깨에 무심히 손을 얹고는, 나직이 충고했다.
“너처럼 시침 뚝 떼는 사람들 덕분에 아저씨가 먹고 사는 거란다.”
2. 거래
남자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여기서 이러시는 겁니까?”
맥주 캔을 막 딴 참이었다. 야구 또한 공수 교대를 막 끝내고 중계가 재개되려던 참이었다. 그때 현관 너머로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일군의 중년 여성들이 쇄도했던 것이다. 흘러내리는 맥주 거품을 어찌해 볼 겨를도 없이 그들은 신속히 거실 바닥에 자리를 틀었다. 아비규환 속에서, 보름 내내 빌라 1층 유리문에 붙어 있던 종이가 남자의 뇌리를 스쳤다.
‘다음 반상회 : 301호’
아뿔싸.
301호 거주자 신분으로서 오늘만큼은 멀리 피신해야 했으나 야구 중계에 정신이 팔려 그만 잊고 말았으니 누굴 탓하랴.
“8월 첫째 주 반상회를 시작하겠습니다.”
반상회장을 겸하는 부녀회장의 선언 이래로 남자는 줄곧 우거지상이었다. 비좁은 틈새로 남자는 조용히 생강 과자를 씹어 댔다.
“오늘의 안건은…… 이게 정말 큰일입니다. 빌라 앞 전봇대에다 쓰레기를 무단으로 투기하는 인물이 있어요. 아주 상습범이에요. 분리수거는커녕 종량 봉투에 넣지도 않아서 여간 골치가 아냐. 마구잡이로 버려 대고 있거든. 이걸 적발해서 벌금을 왕창 물려야겠지만서도 도무지 꼬리를 밟을 수가 없어요.”
“혹시 우리 중에 범인이……?”
“아니, 아니에요.”
부녀회장이 검지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녀는 상황을 완전히 주도하고 있었다.
“그럴 이유가 없지. 우리끼리는 주차장 구석에다 버리니깐. 문 열면 바로 주차장이 나오는데 뭐 하러 멀리 전봇대까지 가겠수? 내 생각엔 아마 맞은편 연립에 사는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거기선 우리 전봇대가 더 가깝거든.”
“CCTV를 설치하면 어때요?”
“그렇잖아도 알아봤는데 그게 비용이 만만치가 않더라고.”
“범인 잡으면 그 사람더러 CCTV 설치비까지 물게 하면 어때요?”
“그거 좋겠네.”
까르르 웃음소리가 거실을 한바탕 휩쓸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거실에는 영양가 없는 수다와 폭소가 넘실거렸다. 남자는 야구 중계에 집중하고자 시선을 돌렸으나 화면은 드라마 채널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결국 그는 견디다 못해 한 마디 거들고 나섰다.
“아까 무단 투기 말씀인데…… 혹시 쓰레기를 뒤지면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요?”
부녀회장이 말했다.
“그렇잖아도 분리수거 때문에 번번이 풀어헤치고 있는데, 이렇게 용의주도할 데가 없더구만요. 짐작할 빌미를 남겨 두질 않아.”
휴, 아마추어들이란.
“그래도 샴푸통이라든가 하는 건 보통 쓰던 걸 쓰니까 냄새로 걸러 낼 수도 있겠고, 과자 봉지랄지 냉동식품이랄지가 유달리 많다면 애를 키우는 집으로 추릴 수도 있겠고, 하다못해 터럭 한 올에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글쎄 그럴 건덕지가 아예 없었다니깐……. 하루는 비니루 뭉치가 잔뜩 들어 있질 않나, 하루는 뭔 놈의 빨대 나부랭이만 들어 있질 않나.”
“그럼 순번을 정해서 밤새 감시해야죠, 뭐.”
“옴마, 이 총각. 빠릿빠릿한 게 형사인갑네.”
사투리의 주인공은 아까부터 구석에서 주전부리에 탐닉하던 50대 추정 여성이었다. 계단에서 마주칠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의 위아래를 훑어보았었다.
“형사 맞제?”
“아, 아닙니다.”
“그럼 뭐시냐, 검찰일랑가?”
“아닙니다. 그런 건 아니고,”
남자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자신의 직업에 늘 자부심을 갖고 살았지만 막상 이런 자리에서 공개하려니 어색함을 떨칠 수 없었다.
“타, 탐정입니다…….”
잠깐의 적막 후에 야릇한 환호가 진동했다. 예상한 것과 다른 반응이 나오자 남자는 당황했다. 이런 환대를 받은 적이 있던가. 급기야 박수 소리까지 터져나왔고, 남자는 진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구세주 강림하셨네 찬송가라도 부를 기세였다.
“잘 됐네. 범인 좀 잡아 줘요.”
이상하게 고양된 기대감과 더불어 빈틈을 놓치지 않는 부녀회장의 관록 있는 책임 전가에 남자는 휘청거렸다.
“저는 이걸로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거저 해 드릴 순 없어요.”
“같은 빌라 주민으로서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녜요?”
부녀회장이 언짢아했다. 언짢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좋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묘안이 떠올랐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같은 빌라 주민끼리 금전 거래를 할 수는 없죠. 근데 도의상 거저 해 드리는 것도 모양새가 안 좋고……. 아! 이런 건 어떻겠습니까? 범인을 잡으면 앞으로 모든 반상회에서 저를 제외해 주세요. 301호에서 반상회를 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요. 이런 거라면 서로 부담도 없겠네요.”
거의 공짜에 다름 아닌 달콤한 제안에 부녀회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이야말로 한 마디 더 보탤 타이밍.
“반상회라고는 해도 어차피 부녀회 야간반이나 마찬가지인데, 남자 하나 덜렁 껴 있으면 좀 그렇잖아요?”
부녀회장은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아, 거의 넘어 왔어. 그러나 그녀에게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참신하다 못해 황당하기까지 한 그녀의 제안.
“이런 건 어떻수? 범인이 잡힐 때까지 앞으로 모든 반상회는 301호에서 할 거예요. 그게 싫으면 알아서 하시든가.”
그렇게 된 일이다.
모두 해산한 후 남자는 조용히 베란다로 나갔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전봇대를 쏘아봤다.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거릴 뿐 골목은 고요했다. 그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남자는 지금 상황이 정말로,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3. 숙명
남자가 잠복을 한 지 벌써 몇 시간이 지났다. 쓰레기 무단 투기범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맡은 일은 제대로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인지라 남자는 구시렁대면서도 눈을 번득였다.
깨죽거림이 과한 탓이었을까, 남자는 문득 허기를 느꼈다. 아까 먹다 남은 생강 과자가…… 없었다. 아무리 뒤져 봐도 먹을 게 없었다. 컴컴한 거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윗집 아랫집의 하이에나들이 정리를 해 준답시고 주전부리를 모조리 회수해 간 것이었다. 그렇다고 굶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잠복에 간식은 필수였다.
전봇대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남자는 전화기를 가져왔다. 자정이 훌쩍 지난 만큼 선택의 폭은 넓지 않았다. 그는 야식집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새싹빌라 301호로 새우 볶음밥 하나만 빨리 갖다 주세요.”
그 후로 30분이 흘렀다.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음식도 여전히 오지 않고 있었다. 착실히 오고 있는 것은 새벽뿐이었다. 도대체가 되는 일이 없군, 남자는 중얼거렸다. 그는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러나 30분이 더 지나고도 변동 사항이 없자 그는 재다이얼을 눌렀다. 심드렁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뽀미네 야식집입니다.”
“새싹빌라 볶음밥 안 갖다 줘요? 배고파 죽겠는데.”
“출발했는디요.”
“언제요?”
“조금만 기다려 보서요.”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뽀미든 뽀미 엄마든 간에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남자는 말없이 바깥을 응시했다. 언젠가부터 그는 범인보다 배달원을 더 애타게 기다렸다. 째깍째깍. 심야의 밀도는 낮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두어 모금 남아 있던 미지근한 맥주를 홀짝거리며 15분을 더 버티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새싹빌라! 볶음밥!”
“이상허네. 배달 나간 지 30분 넘었거들랑요. 근데 아까부텀 전화도 안 받고……. 좀만 더 기다려 주서요.”
“아니, 거기서 여기까지 얼마나 된다고 30분이나 걸려요!”
“긍께 이상허지…… 사고라도 난 거 아닌가 몰러요. 착실한 청년이라 어디 딴 데 새진 않았을 건데……. 미안해요, 늦었으니까 돈은 안 받을게.”
이번엔 남자가 먼저 끊었다. 어느새 3시가 거의 다 되었다. 마침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새삼 범인이 나타날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는 베란다에서 일어섰다. 무릇 프로라면 미련을 버릴 지점도 알아야 하노니, 잠복은 이것으로 끝이다.
미련은 버렸으되 식욕은 버릴 수 없었다. 잠복은 끝냈으되 공복은 끝낼 수 없었다.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것을 괜한 호사를 누리려다가 근심만 늘었다. 고양이 피하려다가 담벼락이라도 들이받은 게 아닐까? 기절한 배달원과 그 옆에 덩그러니 굴러다니는 볶음밥 그릇이 자꾸 어른거렸다. 사뿐히 다가와 코끝을 씰룩거리며 칵테일 새우에 관심을 보이는 고양이……. 돈도 안 되는 일을 하면서 라면을 축낼 순 없지. 무엇보다 공짜 볶음밥을 한갓 축생에게 빼앗기기 싫었다. 그는 초조하게 거실을 서성이다가 코트를 걸쳤다. 배달원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사람은 의외의 순간에 적극적이 된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트렌치코트 사이로 파고들었다. 남자는 우산을 들지 않은 손을 주머니에 쿡 찔러 넣은 채로 빌라 앞 전봇대를 지나쳤다. 모르긴 몰라도 빌라에서 야식집을 잇는 최단 코스 어딘가에 배달원이 자빠져 있으렷다. 이는 즉 걷다 보면 볶음밥과 조우하게 된다는 얘기였다. 감격의 상봉에 앞서 남자는 삼거리 편의점에 잠시 들렀다. 대단한 용무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담배 생각이 간절했을 뿐. 계산대 앞에서 양담배를 주문한 남자는 알뜰하게도 점원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요 앞에서 오토바이 사고 나지 않았어요? 소리가 들렸다거나.”
만성피로가 의심되는 파리한 용모의 점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어디 사고 났나요? 라디오에 정신 팔려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안 듣느니만 못한 대답이었다. 사고가 안 났다는 건지, 났는데 못 들었다는 건지, 이래서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하지만 길거리 탐문은 대개 이런 식이었기에 남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일인 것이다. 계산을 치르려던 남자는 용건이 하나 더 생각났다.
“참. 로또 5000원어치도.”
“자동으로 드릴까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점원이 버튼을 누르자 기계는 숫자를 조합한 종이 쪼가리를 요란스레 뱉어 냈다. 그다지 진심으로 들리지 않는 덕담과 함께 점원은 남자에게 복권을 건넸다. 그가 산 복권의 가치는 며칠 후에 결정될 것이다.
“그럼 혹시 근방에서 쓰레기를 함부로 투기한다는 사람은 들어 본 적…… 없죠?”
“그것도 잘…….”
내 그럴 줄 알았지. 남자는 순순히 값을 치르고 나왔다. 점원은 도움이 못 되어 송구스러운 듯 난감한 표정을 지었으나 남자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남자의 질문 공세가 점원의 거스름돈 계산에 착오를 야기했고, 그 착오는 남자에게 로또를 거저 준 셈이 됐기 때문이었다. 담뱃값만 치르고 나온 남자는 뒤에서 부를세라 걸음을 서둘렀지만 복권 기금 착복은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다. 이제 당첨만 된다면 그야말로 불로소득이도다. 남자는 이미 인생역전이라도 된 양 히죽거렸다.
희열은 오래지 않았다. 밤비 내리는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으며 남자는 차츰 이성을 되찾았고, 급기야 자신이 무척 처량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 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
흘러간 유행가를 읊조리던 남자는 어느 모퉁이에서 우뚝 멈췄다. 길게 끌린 타이어 자국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코트가 땅에 닿지 않도록 추어올린 뒤 조심히 쭈그려 앉았다. 자국이 선명한 것으로 미루어 갓 생긴 듯했다. 이에 따라 일련의 장면이 연상되었으니, 한밤의 과속, 갑작스런 우회전, 기울어지는 오토바이, 땅에 끌리는 뒷바퀴, 배달통 안에서 출렁이는 콩나물국이 그것이었다.
이것만으로는 억측임을 남자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남자가 병원으로 발길을 향한 데에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었다. 현장에 이른바 다잉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 빗물에 젖은 채 땅에 눌어붙어 있는 그것은 명함 크기의 야식집 전단. 오호라, 확실히 여기가 참극이 벌어진 곳이로군.
그렇다면 사람은?
병원에 있겠지.
그렇다면 볶음밥은?
역시 병원에 있겠지.
한달음에 달려간 성모병원에는 그러나 응급 환자가 없었다. 아니, 있긴 했다. 간호사는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분만실로 가 보세요.”
손톱을 손질하느라 건성으로 대답한 게 아니라면 응급 환자는 응급실 대신 곧장 분만실로 입장했다는 얘기였다. 그 말에 남자는 눈앞이 캄캄했다. 분만실은 금남의 구역 아니던가. 근처에 종합병원은 여기뿐이니 이 시간에 달리 갈 데도 없다. 잠깐, 그렇다면 혹시 영안실에……? 그때 누군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저기, 혹시 산모 찾아오신 분이세요?”
“아닙니다.”
돌아보니 웬 청년이 서 있었다. 대학생? ……아니, 어깨에 힘이 들어간 걸 보니 갓 전역한 휴학생쯤 되겠군. 청년도 눈길을 피하지 않았으므로 둘은 한동안 서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뽀미네?”
기습적인 질문에 청년은 움찔 놀랐다.
“엇, 그걸 어떻게……?”
“볶음밥은?”
“네?”
“새싹빌라 301호 볶음밥.”
“아, 새싹빌라! 근데 왜 여기서…….”
“얼른 주쇼. 일단 먹고 얘기합시다.”
“잠깐만요. 그거 새로 배달 안 갔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남자는 재차 허기를 누르고 자초지종을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