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람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혜지는 속이 메슥거렸다. 많이 먹어야 한다고 등을 떠미는 시어머니 때문에 급하게 먹은 궁중 갈비가 소화 장애를 일으킨 것이다. 명치부위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마주 앉아 있던 금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아가, 속이 안 좋니?”
“괜찮아지겠죠. 걱정 마세요.”
“나도 주책이지. 그냥 나 혼자 탈걸. 그 양반은 무슨 날만 되면 여길 와서 이걸 타자고 했다니까. 그 양반만 아니면 내가 이 딴 걸 타겠니? 내리자마자 집에 가자꾸나.”
관람차를 탈 때마다 늘 하는 소리였지만 혜지는 네, 하고 다소곳이 대답했다. 금옥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혜지는 손가락으로 승기의 허벅지를 꾹 찔렀다.
‘시간 없어. 빨리 말해.’
혜지와 승기가 빠듯한 시간을 쪼개 서울에서 부산까지 내려온 데는 금옥의 생일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부동산 중개업자인 승기는 부동산침체가 장기화 되면서 넉 달째 사무실 임대료도 못 낼 정도로 생활고를 겪고 있었다. 인건비와 지출을 줄이고 아파트부터 중형차까지, 팔만 한 것은 모두 팔아치웠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김해와 창원에 상가 여러 채를 소유한 금옥에게 돈을 융통하는 것뿐이었다.
딸만 셋을 뒀던 금옥은 서른다섯에 승기를 낳았고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던 아들을 끔찍이도 아꼈다. 아들의 부탁이라면 상가 한 채쯤이야 손에 넣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승기였다. 승기는 어머니의 지독한 관심에서 벗어나고 싶어 결혼까지 서두른 남자였다.
단칸방에서 삼시세끼를 라면으로 때우는 한이 있어도 어머니의 도움을 절대 받지 않겠다고 신혼 초부터 못 박았다. 그러나 혜지의 설득과 지독한 생활고 앞에서는 승기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눈치만 살피던 승기는 금옥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엄마.”
“왜, 아들?”
“엄마, 나중에 나랑 단 둘이서 해운대 달맞이나 갈까?”
한가하던 해변이 시끌벅적해졌다. 혜지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해변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다니면서 비명을 질러댔다. 뭔가에 쫓기는 건지, 쫓아가는 건지 사람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창밖에 시선을 둔 채로 승기를 불렀다.
“승기 씨, 영화 촬영 중인 거 같은데 좀 이상해.”
밖을 내다본 승기도 낯선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금옥이 두 사람 틈을 부비고 들어왔다.
“뭔데? 영화 찍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틈에서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혜지의 눈에 들어왔다. 이십대 커플 두 명이 겅정겅정 다가왔고 양쪽으로 아이의 팔을 하나씩 붙잡았다. 혜지는 사내아이의 부모겠거니 생각했지만 두 사람은 아이를 서로 차지하려는 듯 팔을 쭉 끌어당겨 비틀었다. 아이의 몸뚱이가 휘청거리다가 이내 팽팽해졌다. 승기에게 저걸 보라고 말하려는 순간, 아이의 양팔이 몸통에서 후드득 떨어져나갔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뜯겨진 팔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질근질근 씹어 삼켰다.
“아이를 먹고 있어!”
혜지는 저도 모르게 목청을 높였다. 그 순간, 어깨너머로 “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관람차 출입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죽이 반쯤 뜯겨진 여자가 시커먼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유리창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살빛은 하얗다 못해 파랬고 두 눈은 반질반질한 자갈돌을 박아 넣은 것처럼 크고 까맸다.
관람차가 상승하자 여자의 얼굴이 창문에서 사라졌다. 세 사람은 꽁꽁 얼어붙은 채 핏자국만 남은 유리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혜지는 119에 연락을 취했다. 통화량이 많아 연결이 되지 않았다. 경찰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에 있는 막내 동생에게 현재 상황을 문자로 알려 도움을 요청했다. 곧바로 연락이 왔다.
“언니, 어디야? 서울은 지금 난리가 났어.”
“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람들이 좀비처럼 미쳐 날뛰고 있어.”
“좀비?”
“집에 꼼짝하지 말고 있어. 집 밖으로 절대……”
“혜정아, 여기 광안리 관람차 안이야.”
“뭐? 왜 거기 있어?”
“그렇게 됐어. 119, 112에 연락해도 계속 연결이 안 되니까 대신……”
뚜뚜뚜―
전화가 끊겼다. 대화를 엿듣고 있던 승기가 얼빠진 얼굴로 물었다.
“좀비? 영화에 나오는 그 좀비?”
“서울도 난리가 났데. 도대체 이게 무슨……”
혜지는 말을 하다말고 부리나케 DMB를 켰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니만큼 외출과 외부인의 접촉을 피하십시오. 보건당국에 의하면 바이러스에 노출됐을 경우 12시간 안에 어지럼증과 구토 증세를 보이다 24시간 안에 사망에 이르고 사후, 시신이 되살아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니 주변에 이 같은 증세가 나타나면 꼭 격리조치 하십시오. 시체와도 절대 접촉을 해서는 안 됩니다.”
쿵쿵쿵탕탕
관람차가 지상에 닿을 때마다 시체들은 관람차 문에 들러붙었다.
“승기 씨, 저러다 문이 열리겠어. 어떻게 좀 해봐.”
혜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덜컹거리던 출입문이 거짓말처럼 발칵 열렸다. 악취를 풍기는 몸뚱이 하나가 관람차 안으로 쑥 기어들어왔다. 간신히 상체만 걸친 놈이 안으로 기어들어오려고 두 팔을 휘저었다. 혜지와 승기는 반대쪽 창문으로 몸을 밀착시켰지만 금옥은 너무 놀란 나머지 옴짝달싹 못했다.
“엄마!”
승기가 손을 내밀었다. 금옥은 아들의 손을 잡으려고 손을 쭉 뻗었다. 그러나 놈이 더 빨랐다. 놈은 금옥의 오른쪽 발목을 낚아채 끌어당겼고 금옥은 바닥에 엎드린 채 살려달라고 악을 썼다. 승기가 구둣발로 놈의 아래턱을 걷어찼다. 혜지가 소리쳤다.
“팔을 밟아!”
승기는 놈의 팔을 끊어놓을 작정으로, 사정없이 짓밟아대기 시작했다. 창백한 살갗이 으스러지고 뼈가 우지끈 부서졌다. 놈은 금옥의 발목을 잡은 손을 남겨놓고 나가떨어졌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금옥은 30분 만에 깨어났다.
“무울. 물 ……”
금옥은 반이나 남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땅이 꺼질 듯 푸하고 숨을 내뱉었다.
“정신이 좀 드세요?”
혜지가 물었다.
“그래, 이제야, 정신이, 좀, 든다.”
금옥은 춤이라도 추듯 어깨를 들썩거렸다. 그러고는 어서 여기서 나가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지금 못 나가. 구조될 때까지 기다려야 돼. 조금만 참아.”
“못 나간다고?”
혜지는 현재의 상황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금옥은 밖을 나가는 즉시 놀이공원 측을 상대로 고소를 할 거라는 둥, 놈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협상을 해보라는 둥, 속을 뒤집는 소리만 해댔다.
관람차가 오르락내리락 거리기를 한 시간, 거대한 바퀴가 쇳소리를 내며 천천히 멈춘 것은 오후 세 시쯤이었다.
혜지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길게 숨을 토해냈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꼬챙이로 머리통을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은 사라졌지만 13호차가 2시 방향에 멈춰선 건 지독한 불운이었다. 두 남학생이 탑승한 12호차로 눈길을 돌렸다. 계집아이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남학생이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서는 13호차로 눈을 돌렸다. 혜지와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고 혜지도 손을 들어 답례를 했다.
“넌 어딜 보고 손을 흔드니?”
금옥이 물었다.
“옆 차 학생한테요.”
“시어미가 죽다 살아났는데 너는 손 흔들 정신이 있니?”
“애들이라……”
“아들.”
금옥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혜지의 말을 딱 자르고 승기에게 생수병을 건넸다.
“땀을 많이 흘렸네. 물 좀 마셔.”
혜지는 몇 모금 남지 않은 물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구조가 늦어질 걸 대비해 마실 물을 아껴야 했다. 생수병을 빼앗아 가방에 집어넣었다.
“혹시 모르니 아껴야 돼.”
금옥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서방이 물 좀 마시겠다는데 넌 그게 뭐니?”
“어머니, 오늘 안에 구조가 안 될 수도 있어요.”
“먹어야 힘이 나지.”
“지금 힘 내봐야 소용없어요.”
금옥은 말끝마다 토를 다는 며느리를 삐딱하게 쳐다보았다.
오후 9시가 넘어설 무렵,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로부터 10분이 지났을 때였다.
“저는 21호차에 탑승한 사람입니다. 제 말이 들리면 바닥을 한번 치세요.”
여기저기서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저는 지금 아들놈이랑 같이 있는데 아들놈이 골육종 환자입니다. 약을 차안에 두고 와서 초등학교 앞에 세워둔 사다리차로 가야 합니다. 만약에 제게 무슨 일이 생겨 못 돌아오면 21호차에 어린이 환자가 있다고 구조대가 오면 꼭 말해주세요. 제가 무사히 사다리차를 가지고 돌아오면 여러분을 꼭 돕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용기와 배짱이 묻어나던 굵은 목소리는 마지막 한마디에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승기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고작 몇 시간 지났다고 탈출이야? 약을 하루 거른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내일 당장 구조된다고 믿어?”
혜지가 말했다.
“설마 여기 평생 갇혀 있겠어? 구조될 때까지 기다리지 위험천만한 짓을 왜 해? 물이나 줘.”
“입술만 축여.”
승기는 혜지의 눈치를 살피며 물 한 모금을 홀짝거렸다. 아쉬운 듯 젖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생수병을 도로 건넸다. 혜지가 생수병을 받아드는 순간, 금옥이 냉큼 낚아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머니!”
혜지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생수병을 빼앗았지만 물은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거야. 알겠냐, 아가?”
그날 밤 혜지는 의자에 모로 누운 채 자정이 되길 기다렸다. 21호차 남자의 탈출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승기의 말대로 위험천만한 짓이지만 희망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놈들은 주택가나 아파트 단지로 이동한 듯 해안도로와 놀이공원 주변은 한산했고 뛰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초등학교에 무사히 도착한다면 사다리차를 몰고 놀이공원으로 돌아오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뉴스보도에 따르면 좀비들의 후각과 청각은 인간에 비해 서너 배나 뛰어나지만 시각은 떨어지고 망막의 손상으로 색깔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가능성을 언급했다. 좀비들과 거리를 두고 줄곧 앞만 보고 달린다면 승산이 있었다.
관람차는 최고 높이에 도달했을 때 지상에서 70여 미터, 혜지의 13호차는 최고 높이에 가까운 2시 방향, 21호차는 4시 방향에 멈춰져 있다. 자전거 바퀴를 연상케 하는 대관람차는 회전축에서 각각의 관람차까지 수직과 원형철골로 이어져 있어 구조물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가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문제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다는 것이다.
21호차 남자의 움직임이 포착된 건 오전 12시 03분. 그는 관람차끼리 연결된 원형철골에 팔다리를 걸어 밧줄타기 자세로 내려가고 있었다. 시체들은 대낮보다 확실히 줄었지만 관람차 매표소와 대기구역을 어슬렁거리는 놈들이 서넛 있었다.
한 놈은 빨간 티셔츠에 호루라기를 목에 건 놀이공원 직원이었고 다른 한 놈은 양복을 입은 작달막한 체구의 대머리였다. 대머리는 새끼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빨간 티셔츠만 따라다녔다. 21호차 남자가 지상과 가까운 27호차 지붕에 착지했을 때 매표소 근처를 맴돌던 빨간 티셔츠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땀 냄새를 맡은 것이다. 놈이 관람차 쪽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저기 괴물이었어요! 저기, 저……”
탈출하는 남자를 돕는답시고 한 아이가 목청껏 소리 질렀다. 누군가 아이의 입을 틀어막긴 했지만 빨간 셔츠는 소리가 난 쪽을 정확하게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몸을 숨긴 27호차 바로 위 26호차였다. 혜지는 탈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지만 남자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놈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려고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를 벗어 관람차 저편으로 힘껏 던졌다. 효과가 있었다. 놈은 코를 킁킁대면서 셔츠가 떨어진 저편으로 어기적어기적 걸어갔다. 21호차 남자는 재빨리 철골에 매달려 3미터를 미끄러져 내려와 28호차 관람차 지붕에 착지했다. 곧장 바닥으로 뛰어내려 해안도로로 빠지는 길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의 몸놀림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노련했다.
안심하기에는 일렀다. 혜지와 승기는 해안도로가 보이는 반대편 창문으로 자리를 옮겨 놀이공원을 막 빠져나간 남자를 눈으로 좇았다. 그는 해안도로를 따라 필사적으로 달렸다. 해변을 어슬렁거리던 놈들은 남자의 뒤로 하나, 둘 따라붙었고 카페골목을 빠져나와 길을 가로막는 놈들도 있었다. 남자는 공을 손에 넣은 미식축구선수처럼 날렵하게 놈들을 피했다. 순조로운 듯 보였다.
그러나 40미터 전방, 한 무리의 시체가 카페골목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남자는 당황한 듯 달리기를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보이는 거라곤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시체들뿐이었다. 빠져나갈 길은 없어보였다.
“저러다 붙잡히겠어.”
승기는 혜지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어차피 안 되는 거였어. 남자가 탈출해도 달라질 건 없어.”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승기는 귀찮다는 듯이 손사래를 치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 의자에 누워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던 금옥이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앉았다.
“아가, 물 남은 거 없냐?”
“어머니가 다 마셨잖아요.”
혜지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넌 사람이 셋인데 생수를 달랑 한 병만 챙겼니?”
“놀이공원 오는데 물을 머릿수대로 챙겨야 돼요?”
“얘가 어디서 또박또박 말대꾸야? 버르장머리 없이.”
승기는 두 사람의 실랑이에 울컥 짜증이 치솟았다.
“엄마! 아까 엄마가 다 마셨잖아. 안 그래도 답답해 죽겠는데 서로 힘 빼지 맙시다.”
금옥은 아들마저 며느리 편을 들자 부아가 치밀었다.
승기는 어머니를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씨 착한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는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혜지를 아내로 받아들이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고운 마음씨 때문이라고 했다. 금옥은 가난하고 붙임성 없는 운동선수 출신의 며느리가 성에 안 찼지만 아들의 말만 믿고 덜컥 결혼을 허락했다.
일생일대 최악의 실수임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분한 마음에 아들 내외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친 며느리가 이때다, 하고 말을 꺼냈다.
“어머니, 뒤꿈치가 왜 그래요?”
혜지는 무의식적으로 오른발 뒤꿈치를 긁어대는 금옥을 한 시간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가려움이 심해지는 듯 긁는 횟수가 잦아, 몇 번이나 물어보려던 차였다.
“혹시……”
혜지가 입을 열자 승기가 슬그머니 몸을 낮춰 금옥의 발뒤꿈치를 관찰했다.
“상처는 없는데.”
혜지는 승기를 밀어내고 가방에서 스마트 폰을 꺼내 불을 밝혔다.
“어머니, 발 주세요. 확인해야 돼요.”
“싫다.”
금옥은 얼굴을 꼬기작꼬기작 구기며 오른발을 치마 아래로 쏙 감췄다.
“확인만 하는 거예요.”
“싫어.”
승기가 금옥을 달랬다.
“엄마, 확인해야 돼. 상처 있으면 큰일 난단……”
금옥이 소리를 꽥 질렀다.
“무슨 큰일? 그깟 발목 좀 부었다고 내가 죽기라도 한단 말이야?”
보다 못한 혜지가 금옥의 발목을 억지로 잡아당겼다.
“어머니만 죽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죽어요!”
상처는 발뒤꿈치 바로 아래 발바닥에 있었다. 1센티 길이의 긁힌 상처에는 불그스름한 진물이 배어 있었다. 혜지는 상처가 몸에 닿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앉았다.
“어쩔 거야?”
승기는 한차례 길게 숨을 몰아 쉰 뒤 덤덤하게 말했다.
“감염됐으면 벌써 변하지 않았을까?”
“틀림없이 놈에게 긁힌 거라고. 감염 증세는 12시간 안에 나타나고 24시간 안에 사망한 다음, 놈들처럼 변한다고 했어. 벌써 12시간이 지났어.”
금옥은 혜지를 꼬나보며 말했다.
“이깟 상처 때문에 내가 저것들처럼 변하기라도 한단 말이냐?”
“엄마, 걱정하지 마. 아직은 모르니까.”
승기는 금옥을 안심시켰다.
“모르긴 뭘 몰라?”
혜지는 눈을 흘기며 따져 물었다.
“지금은 멀쩡하잖아.”
“지금 멀쩡하다고 가만히 있을 거야? 언제 변할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저대로 놔둘 거야?”
“그럼?”
“재갈을 물리고 손발이라도 묶어놔야 할 거 아냐?”
금옥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나를 어쩌고 저째? 전신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시체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동안 며느리는 아들을 방패삼아 뒤에 숨어 있었다. 아들을 도와 놈을 짓밟았더라면 금세 위기를 모면했을 것이고 상처 따위도 생길 리 없었으며 자신을 앞에 두고 재갈을 물리고 결박하자는 끔찍한 소리 따위를 입에 담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호텔 뷔페에서 화장실을 들락거리느라 시간을 끈 것도 며느리였다. 조금만 일찍 나왔더라면 코딱지만 한 관람차에 갇히는 일은 없었다. 며느리는 이 모든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장본인이었다.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혜지가 미웠다.
금옥은 억한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그래, 좋아. 네 말대로 내가 저 놈들처럼 된다고 치자, 젊은 너희가 이 늙은이 하나 감당 못하겠냐?
혜지가 서둘러 대답했다.
“살짝만 긁혀도 전염이 돼요. 어머니는 지금 상상도 못할 정도로 무서운 바이러스에 감염됐단 말이에요.”
잠자코 있던 승기가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치 않으니까 교대로 지켜보자. 증세가 나타나면 그때……”
혜지가 승기의 말을 잘랐다.
“저것들이 얼마나 무서운 놈들인지 눈으로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그렇다고 멀쩡한 엄마를 묶어놔? 장모님이었다면 넌 그렇게 했겠어?”
승기가 버럭 성질을 냈다.
“우리 엄마였어도 마찬가지야. 아니, 우리 엄마였다면 자식들 생각해서 스스로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을 거야.”
“그렇게 자식을 생각하는 양반이 빚을 칠천씩이나 떠맡기고 가냐?”
혜지는 할 말을 잃고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터질 것 같은 눈물을 참으려고 두 눈을 끔뻑거렸다. 승기는 얼떨결에 내뱉은 말을 곧 후회했지만 노골적으로 금옥을 비난한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생사가 달린 문제였기에 더욱 그랬다.
뜨악한 분위기 속에 금옥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들, 네 처, 뜻대로 하자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