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153번 버스가 크르릉, 요란한 소리를 내며 왔던 길을 되돌아갑니다. 인적 없는 종점의 공터를 찬바람이 휩쓸고 돕니다. 재실 기와지붕 너머 까치밥이 달린 감나무 가지가 흔들리고 구멍가게 앞에는 붉은 우체통과 녹슨 자판기가 서 있습니다. 세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90년대 어느 날이 박제된 풍경 같습니다.
여기는 대구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녹동리라는 곳입니다. 행정구역 경계에 어정쩡하게 끼여서 개발이 멈춘 전형적인 시골 마을입니다. 임진왜란 때 용맹을 떨쳤던 장군의 사당이 있다는데 나도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역사에 조금만 식견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장소라고 하니 꽤 유명한 곳인가 봅니다.
저 멀리 문정산 정상이 두터운 구름에 가려 있네요. 12월의 잿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골짜기에 큰 눈을 쏟아 부을 것 같습니다.
문득, 막막해집니다. 손목시계를 봤습니다. 4시 40분. 오늘밤 무슨 일이 있어도 동대구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야 합니다. 출장은 오늘까지고 내일 아침 중요한 약속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발길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큰 숨을 한번 들이켜고 외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깁니다.
3킬로미터 정도 이어진 산길 끝에는 지장사(地藏寺)라는 절이 있습니다. 작은 말사(末寺)인데다 교통마저 불편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 중엽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입니다. 조선시대 때 사명대사가 승병훈련장으로 사용한 기록이 남아 있답니다. 산신각을 지나, 부도전을 돌아, 밤나무 숲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무덤에 다다릅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잠들어 있습니다.
시간이 많이도 흘렀군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던 해이니 벌써 15년 전입니다. 기억하시나요? 그해 여름의 더위는 살인적이었습니다. 연일 37, 38도를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몸에서 땀이 비어져 나왔습니다.
그때 나는 다친 몸을 이끌고 두 달 예정으로 절에 들어왔습니다. 중앙 일간지의 2년차 기자였던 나는 교통사고로 급성 허리 디스크 수술을 했고 간까지 좋지 않아 요양이 필요했습니다. 연고도 없는 낯선 곳까지 오게 된 건 종교 전문기자 권 선배의 권유 때문입니다. 그는 주지스님의 먼 친척입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터라 낯선 지방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고, 정신없는 도시생활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기도 했고요.
가파르진 않아도 경사진 길이라 숨이 찹니다.
정상은 아직 저 멀리 있습니다. 위풍당당 늘어선 소나무 숲과 탁 트인 하늘, 순수한 바람이 그나마 위안을 줍니다.
절간에 시주하러 가는 차라도 한 대 만나면 좋으련만…….
평일인데다 폭설까지 예고된 상황이니 무리한 욕심이겠지요. 저기 앞에 평평한 바위가 하나 보입니다. 예전 모습 그대로군요. 녹동리 사람들이 다들 ‘거북바위’라고 불렀었지요.
바위에 걸터앉아 숨을 돌려도 심장이 계속 펄떡거립니다. 마흔 줄에 들어선 나이는 속일 수 없나 봅니다. 담배 맛도 쌉쌀합니다. 예전에는 기막히게 달콤했는데……. 아마도 지금 긴장감에 휩싸여서 그럴 겁니다. 아니면 추억을 미화하는 인간의 습성 때문이던지요.
슬픈 이야기지만 그녀는 가슴에 송곳을 꽂고 죽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아직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겁니다. 나는 그녀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던 그녀의 장례식. 진흙 바닥에 퍼져 앉아 통곡하던 노부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영감은 부검까지 끝낸 딸의 시신을 수습해 기어이 대웅전이 잘 내려다보이는 양지 바른 곳에 묻었습니다. 마지막 머물던 곳에 영원히 머물게 하고 싶다고 했었지요. 억울한 원혼을 한줌 가루로 날려 보내기 싫었던 걸까요. 아니면 언젠가 범인을 붙잡아 산소 앞에 꿇어앉히려는 오기의 발동이었을까요.
한 여름날 절집 생활은 호사스러웠습니다. 무욕의 땅 위로 구름과 바람이 한가로이 떠돌고, 상념을 비운 내면은 깨끗이 정화됩니다. 나무그늘 아래 평상에 누워 사십구제 지내고 남은 수박이라도 한입 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지요. TV와 신문 없이 눈귀를 막고 사니 세상이 평안하더군요. 재래식 화장실에 기겁하긴 했지만 사람은 익숙함의 동물 아니겠습니까. 군대 생활처럼 며칠 뒤 바로 적응이 됐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에코투어니 슬로푸드 운동이니 하는 것도 다 그런 것들의 연장이겠지요.
아침에 목탁 소리가 경내에 울리면 요사채 방방마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공양간으로 몰려듭니다. 밥상에 둘러앉아 밥과 나물과 묽은 된장국으로 소박한 공양을 합니다.
절집 식구라야 나까지 포함해 고작 일곱입니다.
주지스님과 공양주 보살. 그리고 고시생 장(張)과 몸이 불편한 공(孔) 처사. 지방 전문대학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황(黃) 교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년 강(姜)군. 인연인지 악연인지 우리는 그해 여름 그렇게 만났습니다.
주지스님 얼굴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삭발한 얼굴들은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지 않습니까. 게다가 내가 오고 닷새 뒤 본사(本寺) 조실스님을 모시고 티베트로 떠났으니까요. 두 달 이상 걸리는 긴 여행이라고 들었습니다. 말수가 적고 인상이 온화했습니다. 행자 하나 없이 꾸리는 살림이라 늘 부지런히 움직이셨고요. 가사에 밴 그윽한 향내가, 약지 한 마디가 잘려나간 왼손이 얼굴보다 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공양주 보살에 대해선 할 말이 많습니다. 얼핏 나이든 할머니가 연상됩니다만 실은 젊고 아름다운 분입니다. 절집 식사를 책임지고 있어서 다들 편히 그렇게 불렀지요. 성이 한(韓)씨고 나이는 서른 초반. 서울 말씨를 쓰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형 미인이었습니다.
왜 이런 촌구석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지 다들 궁금해 했습니다. 이혼을 했니, 외아들을 잃었니, 불치병을 앓고 있니, 추측이 무성했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뭔가 사연이 있겠지요.
그녀는 그해 봄부터 절집에 머물렀습니다. 요양 차 사나흘 묵었다가 이 도량이 마음에 들었는지 눌러앉았다고 하더군요. 때마침 녹동리에서 출퇴근하며 일봐주시던 칠순의 진짜 공양주 보살님이 갑자기 심장병으로 드러누운 터라 주지스님이 되레 감사해 했다고 합니다. 다 인연인가 했겠지요.
뿔테안경이 어울리는 장은 서른 살의 고시생입니다. 깡마른 체구와 매부리코가 신경질적으로 느껴지지만 대화를 해보면 박식하고 논리적입니다. 서울 신림동 학원가에서 공부하다가 여름만 보낼 요량으로 내려왔다고 했습니다. 나와 비슷한 연배라 친구처럼 지냈습니다. 가끔 홍대 바닥의 늘씬한 여자애들을 화제로 삼아 낄낄거렸습니다.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강군은 20대 중반의 휴학생입니다.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정서불안 환자처럼 눈알을 굴리며 매사에 경계심을 품었습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 살아서 식사 때 빼곤 잘 보지 못했습니다. 공 처사가 자네가 진정한 용맹정진 수행자네, 뼈 있는 농담을 해도 시큰둥했습니다.
공 처사는 몇 해 전 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대구 약전골목에 한약도매 가게를 가지고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내다볼 뿐 대부분 시간을 절에서 소일하며 살았습니다. 따서 말린 솔잎을 다른 한약재와 섞어 환으로 만들어서 가게에 가져가 팔기도 했습니다. 혈액순환에 좋다고 하더군요. 다혈질이라 사소한 일에 버럭 화를 잘 냈습니다. 본인 얘기로는 열이 많은 태양인 체질이라 그렇다는데 뭐 그런가보다 했지요.
마흔 중반의 황 교수는 허풍기가 농후한 사람이었습니다. 머릿기름을 바르고 콧수염을 가늘게 길러 얍삽한 느낌도 들고요. 밥상머리에선 공양주가 있든 말든 성적인 농담을 일삼았습니다. 절 구석구석을 뒤지며 열심히 카메라에 풍경을 담았습니다. 고찰을 테마로 한 작품전을 준비하고 있다나요. 기와에 낀 이끼를 근접 촬영한 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모두들 감탄했습니다. 고미술에 대한 지식도 상당했습니다. 대웅전 앞에 새로 삼층석탑이 서던 날, 내가 화강암이 너무 새것이라 고색의 주변과 조화가 안 된다고 불평하자 그러더군요.
“송진가루 쫙 발라 놓고 기다려봐. 1년도 안 가서 누르죽죽하게 변할 테니. 흘흘.”
그리고 이웃이 한 명 있습니다. 예전 암자가 있던 터에 슬레이트집을 짓고 홀로 사는 백(白) 노인. 베트남 참전용사라는데 늑대만 한 진돗개를 앞세우고 와서 쉬어가곤 했습니다. 벌어진 어깨와 거친 말투가 위압감을 줬습니다. 총상으로 왼쪽 다리를 절룩거렸습니다.
이따금 정적을 깨는 오토바이 굉음의 주인공은 집배원입니다. 우편물 더미를 요사채 툇마루에 휙 던지고 흙먼지를 날리며 사라졌습니다.
외로움에 사무칠 정도로 조용한 나날이었습니다. 주지가 출타중이라 법회마저 없다보니 사위는 절대고요. 길을 잘못 든 등산객들이 돌샘 앞에서 소란을 떨어도 반가울 정도였습니다.
나는 아침나절 울력으로 채소밭 일을 거들고 오후에는 책을 읽었습니다. 수술한 허리의 근육 강화를 위해 가끔 문정산에도 올랐습니다. 정상은 평평했는데 가을이면 억새 물결이 끝없이 펼쳐진다더군요. 반대편 고지에 보이는 공군 미사일 기지는 전직 대통령 아들이 복무해서 유명해진 곳입니다.
규칙적인 노동과 청빈한 음식 덕에 몸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한쪽 다리가 저릿하게 당기는 고질적인 통증이 사라졌습니다. 마음도 편했습니다. 내 인생에 다시 이런 시절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외길은 걸을수록 외롭습니다.
지금, 주위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숨을 죽이고 있나봅니다. 새 울음소리도 나뭇잎 바스락대는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북쪽에서 불어온 바람만 얼굴을 할퀴고 달아납니다. 적막감에 휩싸여 세상 끝에 사는 외톨이가 된 기분입니다.
휴대폰 벨소리가 정적을 깹니다. 나도 모르게 움찔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죄다 떠나 폐광촌 같은 마을에도 기지국 전파가 통하는군요. 액정에 신문사 전화번호가 찍혀 있습니다.
“윤 선배, 쉬는 날 죄송합니다. 현장에서 나온 지문이랑 일치하는 용의자가 없어요. 경찰도 곤혹스러운가 봐요. 공사판의 불법체류 외국인과 군부대까지 수사를 넓힌답니다. 기사 야마를 어떤 식으로 가야 할지 고민이네요. 진전된 내용 없으면 맹탕인데. 몇몇 공장은 벌써 취재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사회부 시경캡 정(鄭)입니다. 그는 지금 서울을 발칵 뒤집어 놓은 강간 살인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일입니다.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건설현장에서 여고생이 발가벗겨진 채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담뱃불로 젖꼭지와 성기를 잔인하게 지져 놓아 시민들이 경악했습니다. 다행히 현장에 버려진 소주병에서 지문을 몇 개 채취했고, 덩치가 산만 한 사내들을 멀리서 봤다는 목격자도 나와 사건은 쉽게 해결 될 듯이 보였습니다.
사고현장 주변은 군 병원과 중고등학교, 재개발되는 아파트 공사장이 몰려 있어 어수선합니다. 막노동하는 뜨내기들이 넘치고요. 경찰은 근처의 방범 CCTV를 샅샅이 뒤졌지만 결정적 단서를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믿었던 지문 대조작업마저 소득 없이 끝나면서 사건이 미궁에 빠지게 생겼습니다.
“일단 팩트만 담아서 가판 내보내. 변동 상황 있으면 다시 연락 주고.”
지시를 내리고 나니 좀 미안해집니다. 정은 체육부에 오래 있다가 지난주 사회부로 옮겨왔습니다. 현장 감각을 익힐 새도 없이 바로 민감한 사건이 터져버렸으니……. 관할서의 출입기자 마저 갓 수습 떨어진 신참이라 오줌 줄이 탈만도 합니다. 일이 꼬이려고 그랬는지 사회부장까지 조부상을 당해 자리를 비웠습니다. 중심을 잡아줘야 할 부데스크인 나는 그 상황을 알면서도 월차를 냈습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나에게 그만큼 중요한 날이니까요.
15년 전 여름, 그 사건이 나던 날은 날씨가 좀 이상했습니다. 폭염이 한풀 꺾이면서 종일 큰 비가 내렸습니다. 라디오 일기예보가 태풍 소식을 전했습니다. 중심부가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는 내일 새벽까지 많은 비를 뿌린답니다. 서너 시밖에 안 됐는데 밤처럼 어둑했습니다. 주변을 휘감아 도는 개울물이 불어 쏴아, 쏴아 우는 듯이 흘러가고 문정산이 검은 병풍처럼 절간을 에워쌌습니다. 목조건물 아래서 요괴라도 출몰할 듯 기운이 불길했습니다.
밤이 되자 기온이 뚝 떨어졌습니다. 저녁공양 후 사람들이 요사채 뒤뜰에 모여 군불을 넣었습니다. 보일러 놓은 절집도 많다는데 여기는 교구 지원을 받는 가난한 말사라 다 구식입니다.
내가 불씨를 계속 꺼트리자 공 처사가 껄껄 웃으며 법당에서 양초 조각을 가져와 아궁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이내 참나무 장작에 화르르 불길이 솟았습니다. 타닥타닥. 매캐한 연기가 콧구멍으로 스며들자 고향집 같은 푸근함에 젖어듭니다.
꾸물꾸물한 날씨 탓인지 다들 긴장이 풀렸나봅니다. 황 교수가 방에서 고급 양주를 한 병 꺼내왔습니다. 특유의 오크향이 번집니다. 비 오는 산사에서 군불 쬐며 마시는 술맛은 그 자체가 만찬이었습니다. 솔잎주가, 더덕주가 어디선가 계속 나왔습니다.
“나, 저거 한번 쳐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늘 삐딱한 강이 술 몇 잔에 취해 호기롭게 누각 아래 범종을 칩니다. 종소리는 어둠을 타고 아랫마을까지 퍼져나갑니다. 모두들 이빨을 다 드러내고 어린애처럼 깔깔 웃었습니다.
절집에서 무슨 술 파티냐고 타박하면서도, 공양주가 생두부와 김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들뜬 기분을 헤아려주는 아량이 고마웠습니다. 다들 잔을 주고받으며 사연 많았던 삶을, 혹은 잘나가던 시절 무용담을 늘어놓았고, 불콰한 얼굴로 각자의 방에 들었습니다.
비는 한밤에도 계속 내렸습니다. 데워진 구들장에 누워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노라니 행복하더군요. 옆방 황 교수의 코 고는 소리가 흙벽을 타고 전해왔습니다.
신문사 입사 전, 잠깐 사귀던 여자와 신촌의 극장에서 본 「지중해」란 영화가 기억났습니다. 2차 대전 때 외딴 섬에 고립된 여덟 명의 이탈리아 병사들. 그들의 낭만적 웃음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잠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의 기억은 거기에서 멈췄어야 했습니다. 나는 더 깊이 잠들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오랜 시간 번뇌에서 방황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잠결에 문득, 비명 소리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꿈인가 싶었습니다. 아닙니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 취기가 순식간에 달아났습니다.
승용차 한 대가 언덕에서 굴러 내려옵니다.
나는 길섶으로 비켜서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괜히 돌멩이라도 튀어서 다치면 피곤해지니까요. 두 달 전 대학병원 과잉진료 기사로 홍역을 치른 뒤 생긴 소심증인가 봅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에 엮이거나 언론중재위원회라도 다녀오면 이 땅에서 기자로 산다는 게 덧없이 느껴집니다.
검은 그랜저에는 중년의 대머리 남자와 선글라스를 낀 젊은 여자가 타고 있습니다. 지장사에 다니러 온 사람들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부부로 보기에는 나이 차가 있고요. 흐린 날의 선글라스라니……. 기자의 첫 번째 수칙, 추측 보도를 말라건만 대머리와 선글라스는 분명 으슥한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그 짓을 했을 겁니다.
차에서 비릿한 정액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곁눈질로 날 훔쳐보던 대머리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고개를 돌립니다. 사건이 나던 그날 밤, 나도 저 대머리처럼 외면했어야 했는데. 그것이 현명한 삶이거늘, 그놈의 호기심이 화근입니다.
날카로운 비명이 산사의 밤공기를 꿰뚫습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책상 위 백열등 스탠드를 켜고 자명종을 확인했습니다. 1시 30분. 우산을 펴고 소형 군용랜턴 불빛을 앞세워 밖으로 나섰습니다. 시커먼 하늘이 굵은 비를 뿌려댑니다. 바람까지 강해져 산신각 뒤 대숲 그림자가 일렁입니다. 멀리서 진돗개가 컹컹 짖어댑니다.
대웅전 기단 앞을 지나 강당 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목조 건물들이 삐걱삐걱 신음소리를 내고 처마 밑의 풍경이 요동을 칩니다.
강당 끝 공양주 처소에 형광등이 환합니다. 분명 무슨 일이 터졌구나.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돕니다. 걸음을 멈추고 주저했습니다. 가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때, 다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주변 공기가 심하게 흔들림을 느꼈습니다. 주저할 새도 없이, 득달같이 뛰어가 문고리를 잡아 당겼습니다.
하얀 얼굴보다 붉은 핏빛이 먼저 시야에 박힙니다. 여자가 가슴에 송곳을 꽂고 방 가운데 누워 있습니다. 먼저 찔린 듯한 상처에선 피가 역류하며 솟구칩니다. 예상대로 공양주였습니다.
어디선가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재빨리 강당으로 통하는 방 뒤쪽의 미닫이문을 열었습니다. 그림자 하나가 법당 마루를 달려 공양간 안으로 막 사라지려고 합니다. 걸음걸이가 한쪽으로 기우뚱거렸습니다.
“멈춰!”
랜턴을 비춰보지만 불빛은 짙은 어둠에 막혀 멀리 뻗지를 못합니다.
야밤에 대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공양주가 왜 죽었고 범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두서없이 몰려듭니다. 문득 공양주가 숨이 붙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칩니다. 생사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 같았습니다.
무릎을 꿇고 공양주 가슴에 박힌 송곳에 손을 가져가는 순간, 강렬한 불빛이 한지 문살 위에 일렁입니다.
왜 하필 그때였을까요. 전생에 무슨 악연이 있었던 걸까요. 조금만 늦게, 혹은 조금만 일찍 왔더라면 오해는 다 풀렸을 텐데…….
찬바람과 함께 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고시생 장과 공 처사. 장의 얼굴은 땀으로 번질거렸고 퀭한 얼굴의 공 처사는 나무 몽둥이를 들고 서 있습니다. 그들도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왔음이 분명합니다.
갑자기 몽둥이가 나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 성미 급한 공 처사가 나를 살인자로 오해 했습니다. 상황을 설명할 틈도, 손을 내저을 틈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찰나의 일이었습니다. 나의 몸이 본능대로 움직입니다. 머리를 숙여 피했습니다. 반대편으로 다시 몽둥이가 날아옵니다. 고개를 젖혀 가까스로 위기를 넘깁니다. 살기! 분명 엄포용이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정면에서 몽둥이가 날아옵니다. 나는 상체를 비틀면서 오른손에 잡히는 묵직한 뭔가로 공 처사의 머리를 후려쳤습니다. 그것이 청동불상이란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습니다.
일격에 공 처사가 고꾸라졌습니다. 허연 머리카락 사이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려 바닥으로 번집니다.
조금씩 변해가는 검붉은 피 무늬를 보자 아찔해집니다. 숨을 헐떡입니다. 사고야! 분명히! 그렇게 외치려 해도 입술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고시생 장이 대범하게 다가가서 공양주와 공 처사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고 호흡을 살핍니다. 그도 극도로 당황했는지 시뻘건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입니다.
살생을 금해야 할 수도처에 피 냄새가 습한 공기를 타고 번져 갑니다. 벽에 붙은 불화 속의 달마대사가 무섭게 노려보고 있습니다.
기어이 눈발이 날리는군요.
솜털 같은 가루가 사방에 뿌려집니다. 마음이 급합니다. 발걸음이 빨라집니다. 서두르지 않으면 막차를 놓칠 것 같습니다. 볼에 큰 화상이 있는 153번 기사는 버스를 돌리면서 당부하듯 말했었습니다.
“보소, 젊은 양반. 대구 가는 막차는 7시면 끊어져.”
콜택시가 있지만 오늘 같은 날 와줄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요즘은 시골도 집집마다 차가 있다 보니 대중교통이 더 불편해지는 모양입니다.
목을 젖혀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눈 알갱이 하나가 안경 위에 톡 떨어져 시야를 흐려놓습니다. 눈은 밤 늦게부터 온다고 했는데……. 확실히 앞날을 예측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그런 잔혹한 사고가 절간에서 터질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측이란 말에 한 가지 사실이 뇌리에 번쩍합니다. 예전 시사주간지에서 읽은, 미제 사건을 해결한 강력계 형사의 인터뷰 때문입니다. 혹시 여고생 강간살인 사건도 동일한 케이스?
급히 정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시경 기자실이라는데 주위가 소란스럽습니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갑니다.
“혹시 말이야, 목격자 진술 중에 덩치가 산만 한 사내들이란 표현, 그거 의심스럽지 않아? 거기에 너무 얽매여 있는 것 아니냐고! 어둠 속에서 말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의 생각을 들려주었습니다. 간단한 사고의 전환으로 의문 사건이 풀리는 걸 허다하게 봤습니다. 특히 사회부 기자는 끊임없는 의심이 필수입니다. 정은 반색을 하더니 직접 현장에 가보겠다고 했습니다.
끊임없는 의심을 그때는 왜 하지 못했을까요. 공양주의 의뭉한 속내를, 황 교수의 싸구려 언행을, 하필 주지가 없을 때 사고가 터졌음을. 백 노인은 진짜 베트남 참전 용사일까.
왜 그때는 몰랐을까요. 편함과 낯섦에 빠져서 긴장의 끈을 놓아버렸을까요. 절은 곧 경외의 공간이라는 통념에 갇혀서 상황을 복잡하게만 봤을까요. 죄는 절이 아닌 사람의 짓임을 몰랐을까요. 병 치료를 위해서, 고시공부를 위해서, 작품 활동을 위해서, 그들은 각자의 목적이 있어서 머무르는 사람들임을 왜 잊었을까요.
두 사람이 죽었습니다. 쉽게 주워 담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새벽이 오지 않기를 기도해야 할 처지입니다. 저당 잡힌 인생을 살아야 하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아도 압니다.
시체 앞에 눈을 감고 서 있자니 오감을 상실한 인간처럼 멍했습니다. 한참 후에야 쏟아지는 빗소리가, 진돗개 울음소리가 다시 들렸습니다. 검은 하늘을 두 쪽으로 갈라놓는 번개가 이 끔찍한 상황이 현실의 일임을 명확히 일깨워 주었습니다.
고시생 장은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위기 상황임에도 침착했습니다.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서 그렇겠지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분명 상황을 뒤집을 흔적이 있을 것이라고 위로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사건 전모를 알아야 어떻게든 대책을 세울 수 있습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차근히 방부터 살폈습니다. 수습기자 시절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실 견학이 도움 됐습니다. 드러누운 두 구의 시체가 특별히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혼란스런 감정들이 조금씩 진정돼 갔습니다.
공양주의 짐은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달랐습니다. 벽장 속에는 전기포트와 함께 초콜릿, 컵라면, 커피믹스 같은 인스턴트 식품이 가득했습니다. 확실히 생의 단념보다 생의 집착 쪽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이혼을 당했니, 자살기도를 했니, 따위의 소문은 헛소리가 분명합니다. 어스름한 새벽에 백팔배를 올리고 표표하게 대웅전을 나서던 모습이 위선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지난 넉 달간 대체 왜 여기 머무른 걸까요.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체크문양이 그려진 갈색 가죽가방을 뒤졌습니다. 구찌 선글라스와 진홍색 립스틱이 보입니다. 지갑 속에서 주민등록증이 나왔습니다. 본명이 한지숙. 서울 사람이고 나이가 서른하나입니다. 증명사진은 20대 때 찍은 것인지 지금보다 더 미인입니다. 짙은 눈썹과 오뚝 솟은 코, 앙다문 입술에서 색기와 고집이 함께 묻어납니다.
놀랍게도 가스총이 발견됐습니다. 총구를 보는 것만으로 아찔합니다. 빅사이즈 여행용 트렁크에선 흙 묻은 비닐 작업복, 플래시, 플로라이드 카메라와 여러 종류의 철제공구가 쏟아졌습니다. 이게 다 뭐란 말입니까.
“이걸 좀 봐요!”
좌식책상을 뒤지던 장이 맨 아래 서랍과 바닥 사이의 틈에서 낡은 책자를 찾았습니다. 불교 경전인가, 생각 없이 휘리릭 넘기는데 묵직한 한지가 툭 떨어졌습니다. 한지는 네 번 접혀 있었고 그걸 다 펼치자 A2용지만 한 지도로 변했습니다.
놀랍게도 그건 지장사의 가람 배치도였습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왼쪽의 강당과 공양간, 오른쪽엔 여덟 칸으로 나뉜 요사채, 정면의 누각. 대웅전 뒤편의 산신각. 해우소 위치는 지금과 다릅니다. 지도 윗부분 제목자리가 찢겨져 나갔지만 한눈에 봐도 지장사가 분명합니다. 건물의 삐뚤어진 각도와 우물자리까지 표시될 정도로 정교합니다. 오래된 것임은 분명하나 출처나 연대까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암호 같은 글자가 군데군데 보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일본어입니다. 그건 처음 제작할 때 쓴 것이 아니라 다른 필기구로 덧썼습니다. 눈길을 끄는 건 대웅전과 강당 사이의 굵은 점선입니다.
나의 눈빛이 장과 동시에 마주쳤습니다. 그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입니다. 비밀통로! 왠지 공양주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확인해 봐야 합니다. 시간 절약을 위해 장은 대웅전 쪽에서, 나는 강당 쪽을 맡아 중간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